[re] 예수 유감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03 19:35:40, 조회: 221, 추천:0 

글쎄요, 일단 접해본 김규항의 몇몇 단편들만을 접하면, 예수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계열에 놓는 수 많은 진부한 시도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가령, '원수에게 왼뺨만이 아니라 오른뺨마저 내어라'라는 것에 어떤 심오한 사회경제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해석들.

정말로 이렇게 본다면 예수여도 좋고, 부처여도 좋고, 마호메트여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예수라는 인물의 압도적인 '단독성'이 이런 가르침들로 해소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가령 부처 자신은 훌륭한 불교도였지만, 예수 자신은 전혀 훌륭한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그의 가르침 중에는 모순되고 허황된 게 많았다는 사실은 간과되곤 하지요. 해서, 중요한 건 그의 심오한 정신적 세계나, 가르침이 아니라, 신으로서 인간으로 죽었다 부활한 그의 '현존' 그 자체인 것이지요.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 공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건 우습지만, 다소 '이단적' 성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요.

진보성향의 자유주의-해방신학은 항상 예수를 어떤 혁명전사나 관용적인 자유주의적 정신적 스승으로 채색하는 경향과 함께,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사도-바울을 근본주의적인 왜곡으로 폄하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령 강막수 씨를 위대한 참여적 휴머니스트 사상가로 찬양하는 동시에, 정말로 막수적인 개입을 행한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는 위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한국 기성 교단을 지배하고 있는, '불관용적이고' '보수적인'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신앙에 예기치 못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한 상황의 비극은, 한국의 기독교 담론에서 이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아무런 대가 없이 사도 바울의 전복적인 가르침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저들에게 넘겨주고요.

사도 바울에게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의 가르침의 해석학적 함의들, 그가 실천하고 가르쳤던 역사적-사회적 맥락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말하자면 예수의 행적에 관한 '후일담 문학'에 탐닉했던 예수의 제자들과 그 주변인물과도 변별되는 점이지요. 그는 이것을 가지고서, 한 괴팍한 인물의 기행을 하나의 단절적인 '사건'으로 제시하며, 거기에서 구체적인 실천 강령들을 끌어내고, 보편 종교의 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해서, 결국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결정적인 갈등을 일으키지요. 이럴 때, 정말 어떤 방향으로 기독교와 예수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게 더 결정적일지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9:40 

 

상병 김예찬 
  바디우주의자답군요. 크크. 2009-06-04
07:48:48
 

 

상병 진수유 
  원익님께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 담론에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로부터 이끌어 낸 가르침에 대해 비판할 여지, 혹은 비판적인 입장이 있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해하면 되는 건지요. 그러한 맥락이 마지막 문장의 답으로 이어지면 제가 맞게 이해한 건지, 궁금합니다. 2009-06-04
08:22:28
  

 

상병 박원익 
  아, 원래 소위 말하는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 무오류설을 믿고, 전도행위에 강한 중점을 두며, 각자의 내밀한 성령체험을 중요시하는, 한국 주류 교단의 경향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근거를 두는 주요 텍스트들을 보면 사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많이 참조하지요. 가령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라는 비타협주의적 자세들 같이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비판할 대상이 아니지요. 이게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인데,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신으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언급되고, 거기에서 죄와 구원의 변증법을 끌어내는 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사도 바울에게 '종교적 계시자'나 '스승'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그의 삶과 죽음 자체가 진리를 계시하는 '사건'Skandalon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은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종교를 비타협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격으로 변모시킵니다. 가령 부처를 깨달음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불교에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나 참선의 방법론이 나올 여지가 있지만, 바울은 예수를 비인격화시킴으로써 완전히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지요. 이것이 앞으로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에 혁명가가 있었다면,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겠지요. 2009-06-04
15:43:46
  

 

상병 진수유 
  으음, 답변 감사합니다. 몇 가지 토를 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는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예수가 승천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 지상 명령으로 알고 있는 바입니다(마태28:16-20,마가16:15,누가24:47-48,요한20:21). 사도행전(Acts) 첫머리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의 승천 이후 폭발적으로 진행되는 복음 사역을 뒷받침하는 연결고리로써 그것이 작용하기 때문에 바울이 언급한 것 같구요(행1:8). 그것이 비타협주의적 자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비타협주의적 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약간 다를 수 있겠군요. 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저는 반대로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엄청나게 타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좀 더 과감히 말한다면 바울은 예수가 말한 '복음'evangel을 '타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싶네요. 작년 12월부터 이번 4월까지 성경 66권을 다시 한 번 다 읽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던 것은 로마서 11장에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슨, 천국heaven이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 근본적이었던 유대신앙이 훨씬 더 타협적이고 느슨하게 비-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맞게 개혁된 것입니다. 바울에 의해서 말이죠. 구약시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동물은 아니고, 사람보다는 조금 못한'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제자 베드로의 소위 '부정한 음식을 싼 보자기 환상'을 통해 이루어진 로마 군인 고넬료의 영접부터 판도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행10). 시간순으로 보면, 행10장 이후에 바울이 베드로의 사역을 이어받는데 그의 중점은 이스라엘 밖이었습니다. 스스로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수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증거하는 내용('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은 꽤나 충격적입니다(행17:16-34). 또, 계속 이어지는 바울 서신들에서도 기존 폐쇄적인 유대신앙에 반대되는 언급을 그치지 않습니다. 

원익님의 논점을 제가 제대로 파악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종교를 문화라는 큰 틀에서 이성적으로 이해해본다면, 그것 또한 인간으로 이루어져서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또 개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개신교의 흐름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확실히 정체된 부분이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는 더 교리적이고 원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꼭대기에 세워 놓았다기 보다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신학적인 틀은 제시하되 과거 유대 신앙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형태로 예수를 제시했음에 어떤 희망이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예수 자체도 그러한 존재이자 사건이었음에 분명하구요. 

저는 오히려 문제시 해야할 부분을 한국 장로교라는 집단에서 찾기 보다는, 일련의 종교개혁 과정을 통해 과거 프로테스탄트적 선구자들이 이루어 낸 '텍스트의 개방' ㅡ 즉, 대중적인 번역으로 만인에게 유일신과 직접 소통하고 진리를 구가하도록 도와준 노력을 우리가 너무 가볍게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신자인지 비신자인지는 둘째이고, 유대교든 기독교든 개신교든, 관련된 문제의 발견과 해결이 기본적으로 텍스트에서부터 출발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9-06-05
09:33:02
  

 

상병 박원익 
  진수유 님이 논점을 제대로 파악했는지에 여부에 대해 망설이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표현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죠. 진수유 님은 '비타협적'이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여부를 종교의 포교 대상의 외연을 척도삼아 판단하셨는데, 이는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고, 제가 그러한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사도 바울이 '비타협적' 신앙을 대변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바로 그런 기독교의 '보편성'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진수유 님이 말씀하시는 보편성에 관한한, 로마제국을 능가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국가와 민족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들에게 저마다의 자치를 부여했고,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이것은 사실상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적 세계의 보편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세웠던 기독교의 보편성은 바로 그러한 제국의 보편성에 대해 적대적이었다고 해야할까요. 

사도 바울이 복음에 관한한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다 평등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코스모폴리탄적인 감수성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로마 제국에 만연했던 코스모폴리탄적 감수성에 불화를 일으키는 보편적 '적대'를 불러일으킨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진리'는 예수라는 인간이 동시에 신으로서 죽었다 부활했으며, 이것을 믿는 것만이 육신의 길에서 벗어나 영생의 길로 향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근본적인 선택 앞에서, 그러한 선택의 주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는 완전히 무관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용'은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관용'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으며, 그러한 '근본주의' 앞에서만 유효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관건입니다. 2009-06-07
14:54:04
  

 

상병 진수유 
  "'불관용적이고' '보수적인'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를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군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친절한 설명에 감사를 드립니다. 추측이지만 원익님께서는 최근 사도 바울에게 꽤 관심을 두시는 것 같습니다. 또 올리실테니, 기다려야겠군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