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자크 랑시에르, '해방적인' 콤플렉스에 대하여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5-30 14:19:56, 조회: 37, 추천:0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나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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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스러울 정도로 스피노자적인 색채를 띠닌 이 한 결정적인 구절은 겉보기보다 복잡한 일련의 질문들을 초래한다. 원리상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단순히 자신의 한 말의 내용과 맥락을 수신자가 오해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혹은 더 깊은 다른 뜻을 함축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대변이라는 직업을 수행하는 자들이 마치 저 수 많은 오해들에 대해 해명하면서 말하듯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선언하는 것인가? 어쩌면 단순히 경험ㅈ거인 의사소통의 실패의 사례들과 무관한 지점에서, 어떤 조직의 ‘대변인’들은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모종의 태도를 선험적으로 견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특정 정책의 취지나 유명인사의 발언을 해명하기 위해 연단에 선 이 땅의 ‘대변인’들이야말로, ‘원칙적으로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탈근대적 이론 한 복판에 놓여있는 저 ‘언어게임’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미 많은 실용적인 지식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연이어 제기되는 질문들을 놓아서는 안된다. 사실 진정 골치아픈 자들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대변인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들었다는 긍정적 제스처를 보내는 타인이야말로, 또한 자신의 말 역시 상대가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임을 당연하다는 듯 한 점 의혹 없이 기대하는 타인이야말로 가공할 상대는 아닌가? 타인이 자신의 말을 원리상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탈근대적 태도를 취하는 저 ‘대변인’적 존재들은 바로 저 ‘알아듣는 척 하는’ 자들에 대한 견제성 멘트는 아닌가. 그렇다면 이 문제적인 타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왜 대변인들의 역량을 약화시키는가?

  물론 독해를 지속하다보면 답은 뻔히 나오는 것 같다. 우선 랑시에르는 역으로 (대변인과 달리) 우리가 취해야할 어떤 해방적 태도에 대해 선언한다. 이것은 공식성명을 발표하는 대변인들을 가장 골치아프게 만드는 어떤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뒤이어, 그렇나 태도가 어떠한 효과를 일으키는지, 보다 심층적으로 왜 그런 효과가 초래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듯 행동하는 한에서, 우리는 해방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는 논쟁을 통해서 비로소 같은 세계에 속하는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중략)...공통감각/의미Common sense의 공간은 합의의 공간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단어의 이중의 의미에서 나눔의 공동체이다. 논쟁을 통해서만 서로 말할 수 있는 같은 세계에 속함, 그리고 싸움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결집, 공통감각/의미의 공준은 언제나 위반적이다.(115p)

  랑시에르는 누군가와 불화를 일으키는 적대적 언어는, 그것이 ‘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대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인 한에서만 유효하다고 한다. 이때 관건은 이 ‘알아들을 수 있음’이 어디까지나 랑시에르가 ‘감성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신자가 실제로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여부와 무관한 어떤 ‘수행적 믿음’과 연관된다. 말하자면 이 믿음은 실제 소통의 양상이 어떻든 간에 ‘원칙적’으로 견지되는 어떤 믿음이다. 어떤 믿음 속에서 마치 상대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으로써 해방의 고유한 절차가 시작되는데, 왜냐하면 기성질서란 정의상 배제된 자를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고유한 감성적 분할에 묶어둠으로써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일단, 상대를 꼼짝없이 ‘동일한 층위에서’ 논쟁 상대자로 자신을 인정하게 만드는 순간, 자신의 말이 그에게 들리는 동시에 그의 말이 자신에게 투명하게 들린다고 선언하는 순간,아무개였던 누군가 마치 어떤 공식성명을 발표하는 대변인들과도 동등한 존재인 양 보이는 순간, 그가 실제로 말하고 요구하는 내용과 무관하게 이미 기성질서에 대한 고유한 전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관건은 공통적인 감성적 차원에서 동등한 게임을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증명을 ‘발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싸움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결집’이다. 해방적 주체는 가장 적대적인 불화의 순간 속에서도 상대와 같은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해방된 자는 실제로 해방되어 보이는만큼 해방된다.

  그러나 사태가 정말 그렇게 단순한가? ‘원리상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례들을 단순히 어떤 믿음을 통해서만, 감성적 질서의 변화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가? 랑시에르에게 여전히 ‘탈근대적인’ 어조로 항의하며, 그가 ‘소통의 실패의 순간’을 혹은 보다 더 진부한 단어로 ‘타자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랑시에르의 발언이 바로 그러한 수진하고 부적절한 탈근대적 반문에 언제나 소급적으로 미리 던져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도 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적 사례는 다른 의미에서, ‘소통의 실패’의 궁극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스크린 속 극악무도한 악당은 자신의 숭고한 범죄적 준칙을 아무런 제약 없이 적용한다. <배트맨-다크나이트>의 죠커처럼 가장 숭고한 악당은 자신만의 준칙을 가지고서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죠커>와도 다른 독특한 부분은, 자신의 준칙을 ‘원리상 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의 가공할만한 극단적 생명경시적 준칙을 강제해야만 하는 내적 이유들을 희생자에게 차근차근 논증한다. 혹은 차라리 그런 논증을 ‘발명’한다. 그의 영리한 두뇌를 보건대, 어쩌면 그는 ‘보편적 지성’을 믿으며 랑시에르를 읽는 고급독자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는 짓을 보건대 분명히 그는 <양들의 침묵>을 보았을 것이다. 랑시에르를 읽었다면, 그는 여느 숭고한 악당처럼 범죄적 준칙에 따라 행동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가, 형언할 수 없는 자신의 범죄적 ‘실재reel'에 대한 나르시즘적 도착에 빠졌음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렉터 박사는 ’타인이 원칙적으로 자신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약화시켰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충실한 랑시에르주의자로서, 악당은 그가 내뱉는 도착적인 범죄적 담론을 전율하는 희생자들에게 일관되게 관철시키며 다음과 같은 점을 납득시킨다: 희생자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논증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로써 문제의 살인자를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저항하는 희생자들은 이 극단적 범죄자와 자신이 동일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꼼짝없이 보게 되며, 매우 이상한 덫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살인자와 희생자 사이에서 전적으로 위반적인 ’공통감각‘이 성립한다.

  이 스크린 상의 우화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알아듣지 못함’이라고 말한 실패의 소통의 경험들이, 고유한 반성적 차원에서 ‘공유’되고, 상징적 우주 속에서 순환하는 어떤 마법적 경험으로 반전되는 랑시에르적 지점을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사례에서처럼, ‘알아듣지 못함’(죽는 순간까지 희생자들은 결코 살인자의 내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통읫 실패 속에서 그들은 범죄자와 자신의 삶이 한 지체라는 점을 깨닫고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이라는 소통의 실패가 성공적으로 ‘공유’되고 의미심장하게 소통되는 어떤 역설적인 경험의 가능성에 대해 랑시에르도 줄곧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불가능한 경험, 즉 실패하는 한에서 성공하는 경험의 가능성이다. 그는 이러한 ‘경험’이 단연코 가능함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이 경험이 가능하다는 어떤 공유된 ‘믿음’ 자체가 이러한 감성적 혁명의 가능성 자체를 수행적으로 재생산하며, 소통의 당사자 모두를 동일한 의제에 사로잡는다는 점을 탁월하게 논증한다. 도달해야할 진정한 ‘공통감각’은 다음과 같다: 소통이 실패한 것은 누군가 우리와 다른 부적절한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와 동일한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아직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이 역설적인 공통감각의 해방적 가능성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느냐이다. 이것은 언뜻 보이는 것처럼 무한소급의 패러독스로 향하는 질문만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랑시에르는 이 가능성이, 누군가의 ‘역량’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랑시에르는 당사자들의 해방적 ‘역량’에 이 모든 가능성이 달려있단느 것처럼 이야기한다. 마치 누군가 탁월하게 말하는 역량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이 달려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 ‘역량’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이것은 단연코 또 하나의 스피노자주의이다. 

  이것이 왜 도 하나의 스피노자주의인가. 소통의 실패 자체가 실패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려되는 순간에, 그들이 고유한 상징적 우주 속에 반성-등록되는 순간에 기적적으로 생성되는 어떤 역설적인 ‘일치’가, 언뜻 보기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자동적’인 과정처럼 사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치르는 대가는 앞서 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악당의 희극적 형상이다. 사실은 이 악당 역시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역량’을 진지하게 측정하고 사고하는 ‘스피노지언Spinozian’인데, 영화 말미에 그는 최후의 희생자에게 궁극적인 굴욕을 당한다. 영화의 사례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자. 요지는, 소통의 실패 자체가 어떠한 역설적인 일치로 수렴되기 위해서 물론 어떤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의 상징적 우주에 입장하기 위해 치러야하는 그러한 대가를 정신분석에서는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연코 발화주체의 ‘역량’과는 무관한 어떤 것이며, 도리어 주체의 역량 자체가 이 ‘콤플렉스’의 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콤플렉스의 가능성이 저들 가운데 전적으로 공유되지 않는 순간, 말하자면 소통의 실패 자체가 공통된 의제로 진지하게 간주될 여지가 우리의 상징적 우주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러한 후-오이디푸스적 좌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해방적 역량을 측정하고 사고할 지평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34:35 

 

상병 진수유 
  어렵지만 굉장히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