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독서후기]황석영, <바리데기>와 분단상황의 문제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17 16:11:49, 조회: 124, 추천:0 

  휴게실에 그의 책이 오랜만에 들어와서, 손에 들게 되었다. <바리데기>라는 책은, 신 내림을 받은 한 탈북자 소녀가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겪는 고난과 깨달음을, 바리 이야기라는 설화라는 형태를 차용하여 형상화한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강신무를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스토리로 구성된, 전작 <손님>과, 비슷한 설화적 요소를 차용한 <심청>과도 비견될 수 있는 부분이다. 황석영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그의 소설들의 미덕은 무엇보다 억지로 설파하려 드는 태도 없이 설득력 있는 서정적 언어로 지금-여기의 지평을 언어화하는 데 있다. 그의 소설은 비록 역사소설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더 역사성을 짙게 담아내는 측면이 있다. 이번의 소설 역시 황석영 자신의, 분단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문학적 형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분단상황을 접근하는 방법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가령 진보-보수로 양분되는 한국 담론지형에서 탈북자 인권이라든지 하는 쟁점은 분명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진보진영에서 흔히 외면하거나 간과하는 정치적 소재로 여겨진다. 

  여기에 황석영 자신은 이런 담론적 상황에 일종의 뒤틀림을 부여한다. 그는 바로 그러한 탈북자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책 말미에 수록된 인터뷰에 분명히 수록되어 있듯, 북한의 비참한 인권실상과 탈북문제를 (월러스틴 류의)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분단상황을 강대국들이 '경영하는' 하나의 정치적 상황으로 규정한다. 이것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기에 분명히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암시한다. 

  그에게 북한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향해 재평성되어가는 세계 질서 속에서 희생된 주변부-국가이며, 난민들은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한 '디아스포라'라는 것이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어떤 주권에도 정체성에도 지역에도 귀속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이다. 여기에는 황석영 자신의 삶 역시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특히나 부유한 자본주의적 중심 도시들에 모여 빈민촌을 형성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을 '벌거벗은 삶' 혹은 '삶-정치Bio-Politics'의 대상으로 이론화하는 시도들이 오늘날 학계의 가장 세련된 담론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 난민을 포획하고 축출하고 수용하는 '정치'들이 일반적인 대의 민주주의적 주권 정치 '이전'의 가장 난폭하고 날것의 정치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리데기>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이들을 다루는 가장 선진화된 문명국가들이 자행하는 행위들이 어느 후진국 못지 않은 야만성으로 자행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문명 주변부를 형성하는 벌거벗은 난민의 '삶'들은 그래서 체제의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황석영 자신이 말했듯, 소설 상에서 바리가 중국에서 빚 때문에 팔려 간 곳을 '런던'으로 설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런던에는 여전히 옛 제국주의적 원죄가 여실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의 이번 소설은 소설이기 이전에 일종의 정치적인 선택인 것이다.

  물론 1차적으로 그의 책의 정치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의 이런 새로운 '변화'가 그의 매우 능란하며 능숙하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 그는 결코 옛날의 민족주의 좌파의 담론으로 분단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장 세련된 고급담론(디아스포라, 세계체제, 삶정치 기타 등등....)을 통해 과거의 프레임을 재전유하는 '변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매우 황석영다운 능란함이라 볼 수 있다. 이 능란함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능란함을 예찬하고 띠워주는 마케팅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황석영은 오늘날 모든 젊은 포스트 담론들(포스트민족주의 포스트모던 포스트문학)에 대한 의고주의적 반대자들의 중심 참조점이기도 하다. '민족이 죽었다고? 분단상황은 오늘날의 근본모순이 아니라고? 황석영을 봐라! 그는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옛날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지 않은가?"라는 식이다. 나는 여기에 성찰이 결여되어 있음을 본다. 

  물론 나는 황석영에게 여전히 배울 점이 있고, 특히나, 우리의 상황을 규정하는 역사성에 대한 그의 진지한 접근들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바라고 생각한다.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가장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도 흔히 거부되는 것인데, 오히려, 단순히 민족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의 연속선 상에서, 혹은 어떤 다국적 프레임에 의한 분단경영의 문제(가령 탈북자들은 다국적 자본의 입장에서, 손쉽게 쓰다 버릴 수 있는 노동력이기도 하다)를 다각도로 생각해 봐야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 간에는 어떤 긴장이 있고,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시차'적인 간극들이 존재한다. 분단상황과 같은 역사적 상황들은 여러 프레임들을 통해 고찰될 수 있지만, 이러한 프레임들이 모두 다 한꺼번에 양립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탈북자들을 디아스포라(난민)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그들을 '바리공주'와 같은 민족적 원형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혹은 '민족'이라는 근대국가적 틀(좌우 모두 공유되는)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담론적 '기회비용'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이런 고급담론들을 재해석해서 변용시키고 소설화시키고 상품화시키는 것에서, 황석영의 '능수능란함'이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선택'의 문제는 흔히 간과되고, 여전히 어떤 담론적 헤게모니(분단문제의 권위자로서 황석영과 같은 진보 문단의 큰 어른)의 이런 저런 옷차림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이론들이 쓰다 내버려지는 것이다. 오늘날 요란하게 선전되는 녹X성장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이 젊은이들의 문제라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흔히 개탄되었다는 것을 보아왔지만, 실은 기성담론에 의해 패러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그들이 역사성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역사성이란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없느냐에 대한, 기회비용에 대한, '선택'을 강제하는 비판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가령 디아스포라가 진정 하나의 역사적 문제라면, 그들의 존재는 오늘날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틀 내부에서 아무리 전복적이고 요란한 담론들을 생산해 내더라도,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용하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그런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의 담론지형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그런데 황석영 자신은 여전히 분단상황은 강대국들 간에 합의된 어떤 음모라는 구좌파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이는 세계체제론이라든지 디아스포라라든지 삶-정치의 이璲 틀들이 '버릴 것'을 요구하는 관점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일단 그 '틀'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전복은 없다. 말하자면 황석영과 이를 위시한 <창작과 비평> 그리고 백낙청 같은 민족주의적 진보문단의 헤게모니는 그 물음에 여전히 답하지 않고서, 구태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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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43 

 

상병 김예찬 
48.9.2.115   바리 이야기를 '민족-여자-어머니-구원'의 단순한 이야기로 승화시킨 것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서경식 선생의 글들과 비교해 볼 때 황석영의 '디아스포라'가 얼마나 고민 없는 손쉬운 선택인지 확연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009-04-17
17:12:15
 

 

상병 박원익 
54.1.19.46   김예찬/시종일관 오타로 일관했군요. 수정하겠습니다. 다이스포라->디아스포라(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