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개]유물론과 젊은 낭만에 대하여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05 09:37:07, 조회: 217, 추천:0 

0. 얼개를 위하여

  이 글은 하나의 예고이자 어떤 사유에의 예감이다. 나는 이것을 보다 정기적으로 결단력 있게 쓰기 위해서, 이 공간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나는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유물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쓰고자 한다. 

  나는 일전에, 요새의 (책마을을 비롯한) 담론공간에 만연한 어떤 '젊은' 사고방식을 문제삼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이 글은 또한 일전의 약속에 대한 나 자신의 응답이기도 하다. 유물론적 사고방식은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젊은'과 무관한 유물로서, 철저히 망각되고, 잊혀져 왔으며, 심지어 곡해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거기에 잊혀진 어떤 '젊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문제의식은 바로 이 망각된 젊음을 퍼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보다 철저한 깨어짐과 패배와 각성을 경유해야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몇 개의 글로 나누어서 연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유물론'이라는, 옛 고색창연한 용어를 잊음으로써 얻은, 알바비에도 미치지 못한 그 자그마한 대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포스트'한 감각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예컨대 강막수와 블라블라 레닝를 망각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그마한 '시급'은, 그람시와, 아도르노와, 안토니오 네그리와,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랑시에르와 기타 등등이다. 나는 그들이 그 자체로 '88만원어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망각의 지평에서 떠오를 때 그들은 그만한 시급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알튀셰가 'XX를 위하여'라는 글을 썼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와 같은 시도들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 'XX'라는 항에 유물론을 대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조차도 헛된 기대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무언가를 위해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공부하고 말한다는 절실함이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오늘의 젊은이들이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들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한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무언가를 읽고 깨어지고, 그 텍스트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고난을 겪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내가 보았을 때 우리 중에서 공부를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의 '공부'이다. 유물론을 다룬 저자와 텍스트들은 바로 그러한 진정한 공부의 대상이기도 하다. 사실상 우리는 무언가를 읽고 쓰고 사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유와 독해와 글쓰기의 '대상'을 (마치 알튀세르처럼) '위한' 충실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러한 책마을과 같은 자율적인 커뮤니티-공간 안에서) 고상하고 쓰고 읽고 사유하는 대상은, 사실상 우리에게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젊음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며, 강점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젊음'에 대한,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에 대한 단호한 투쟁의 선언일 것이다.   

나는 칼럼을 통해, 내가 서투르게 쓰고 생각하고 읽는 것들이 몇몇 동반자들을 '꼬실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몇몇 사도들과 그의 인생을 걸고 사역의 긴 여정을 떠난 성 바울과 같이 말이다.... 

1. 유물론을 위하여

철학 입문서들을 통해 유포된 유물론에 대한 통념들은, 그것의 엄밀한 철학적 맥락에서조차 흔히 오해되곤 한다. 레닌이 이야기하듯, 철학을 양분하는 것은 언제나 관념론과 유물론 간의 반복된 대립이었다는 테제가 지나치게 단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무려 질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한국현실에서조차 이 기본적인 철학적 포지션-좌표에 대한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유물론'이라는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단선적 사고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세태와 반대로, 오히려 우리는 가장 레닌적인 의미에서 그 거칠고 조잡한 유물론으로 돌아가가야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은 다시말해, '사적' 내지는 '변증법적'이라는 수식어구를 통해 '유물론'을 구출하려는 세련된 시도들이 단순히 말해 '동어반복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물론'이라는 날것의 용어를 꺼내들자마자 우리의 세련된 모든 논의들이 봉쇄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달리, 유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한 논의들을 일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물적요소들 내지는 물적 요소들의 관계망이라는 생각만이 유물론의 전부는 아니다.(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유용한 출발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가령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혹은 루크레티우스나 에피쿠로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흔히 근대의 여명에 정립된, 돌턴의 원자론에 대한 애매한 형이상학적 예감 정도로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실제 경험적 실험에 의해 실증되기 전에 단순한 사변으로만 머물렀던 자연철학적 사고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후일 빛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물론적 포지션의 정수를 이해하기 위해선느 고대의 원자론이 근대의 그것과 '무관함'을 단호히 밝히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근대수학의 집합론에 더 가깝다. 그의 철학적 '악센트'는 '원자'가 존재의 기본구성 원리라는 주장에 있다기보다는, 사실 원자야말로 순수한 무규정적 공백Void의 다발Bundle로서 출현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 불안정한 선존재론적 Void를, 생성과 소멸의 동양철학적 '무위'의 도로 이해하기도 하고, 혹은 단순한 질료적 혼돈이나, 일종의 진공상태로만 생각한다. 우리의 철학적 관건은, 이 모든 모티프들이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기원적으로 사유된 엄격한 '유물론적' 공백에서 떼어놓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에서 이야기하는 '공백'은 훨씬 더 엄격한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45:09 

 

병장 김민규 
  얼마전에 스리슬쩍 소리없이 원익님의 네이놈 블로그에 찾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토커는 아니고, 책마을 회원정보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메인의 깔깔이 사진에서 웃음이 터져나온 것으로부터, 치열한 사유의 흔적들로부터 흔치않은 떨림을 경험했던 기억이 납니다. 

굳이 그러한 전거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이 얼개만으로 원익님의 칼럼은 너무도 기대가 되어, 열흘 후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애석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정한 배움 없는 시대에서 '공부'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뒤쳐지고 동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져버리는데, 

어쩌면 과욕,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러한 배움으로부터 멀게만 살아온 사람이기에, 함께 이야기하며 깨우쳐나갈 기회를 이렇게 잠시 구경만 하고 떠나가는 것인지도요. 부디 몇몇 동반자들을 꼬셔내고, 또 무수한 도전자들을 소환할 힘있는 칼럼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또다시 조우할 날도 있겠지요. 그날을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래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블로그를 염탐하는 것으로 이 경험을 바깥에서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04-05
10:08:25
  

 

상병 김유현 
  데모크리토스의 재조명!? 자못 기대가 됩니다. 조금 더 친절한 부연을 바라마지 않습니다만, 공짜로 얻어먹지는 않으려는 제 마음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공부하겠습니다악. 2009-04-05
17:19:18
  

 

병장 김형태 
  어려워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군요. 
데모크리소트의 원자론이 무엇인지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잊어버린 것이 사실이지만, 원익님의 글을 통해 다시금 철학을 접하게 되겠군요. 

앞으로 대할 '유물론과 젊은 낭만'이 어렵지 많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섭거든요 
아무쪼록 좋은 글 부탁드려요 2009-04-06
11:08:35
  

 

병장 고승철 
  무엇에 관한 공부가 연결되지 못할 곳은 없을 것 같네요...... 
순수과학이 인문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궁금해지고 있었는데.... 굉장히 기대되네요.. 제가 속으로 꿈꾸는 쪽으로 칼럼이 쫘악 펼쳐지면 좋겠네요...안펼쳐 지면 뭐................직접쓰는 하하하...그건 노력좀...(순수과학도 인문학도 접해본적이 거의 없어서...) 

당신의 글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젊음을 느낄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2009-04-06
12:57:55
  

 

상병 김예찬 
  언제나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원익님 글은 참으로 '선언'적이군요. 이런저런 개론에 오염된 제 '개념들'에 대한 추상적 인식을 깨부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09-04-06
15:12:46
 

 

상병 박원익 
  김민규/한동안 사이트가 맛이 가서, 뭔가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아마 벌서 퇴사하시지 않았나 싶네요.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습니다. 
김유현,김형태/제가 잘 소화했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고승철/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예찬/'선언적'인 글 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은 또한 약점인 것 같습니다. '개념들'에 대한, 제 인식 역시 지극히 피상적인 것이지만, 제 나름 이해한 것을 공유한다는 마음에서 쓰고 싶습니다. 2009-04-16
19:47:27
  



 [칼럼]1.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칸토르의 집합론까지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08 23:17:11, 조회: 138, 추천:0 

1.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원자들 자체는 돌턴의 원자들과 같은,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어쩌면 무한한 분할과정의 최후에 남는 불가분의 원자야말로 '실체'라는 돌턴의 사고야말로 더 '형이상학적'일지도 모른다. 사실 돌턴 이후의 근대과학은 데모크리토스의 편이다. 원자는 불가분하기는 커녕, 더 작은 단위로 쪼개질 수 있으며, 더 작게 쪼개질수록 우리가 얻는 것은 확실한 존재의 실체이기는커녕 더 불안정한 순수한 에너지의 파동의 형태(고대의 자연철학적 사변과 섬뜩할 정도로 유사한 형태)에 더 가까워진다. 원자 이하의 세계는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원자들은 사실은 공백의 다발이며, 공백을 '묶는'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안정화되는 존재론적 단위들에 불과하다는, 데모크리토스의 기본테제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사유야말로 돌턴에게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후일 양자역학적 사고에 의해 궁극적으로 전복된다. 데모크리토스가 사유한, 원자들의 현실적 운동을 가능케 하는 '공백'Void는 말 그대로 불확정성이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순수 분О 잠재성의 미분화된 지평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주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경험지평에 드러나는 것은 현실화된, 운동하는 '원자'들이다. 그것은 '셀 수 있는 단위'들이다. 오로지 '셀 수 있는 것'만이 온전히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마치 집합Set은 원소등l 셈과 더불어서만 존재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경험에 주어지지 않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 공백을 가정함으로서 다시금 선반성적인 자연철학적 사변(세계는 물로 이뤄졌다, 불로 이뤄졌다, 혹은 5원소로 이뤄졌다 기타 등등....)으로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단순히 임의적인 사고게임을 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사실 우리가 아무리 지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한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과 더불어 일종의 '사고게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은, 이성 한 가운데 있는 반성되지 않은 어떤 광기에 대한 근대철학적(데카르트의) 두려움과 더불어, 철학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두려움이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두려움을 온전히 승인함으로써 전도시키는 것(철학과 더불어 모든 인간의 지적 활동이란 원래 말장난 아니겠어? 기타 등등)으로 흔히 생각된다. 그러나 니체가 이야기하듯 이런 반동적 긍정이야말로 철저한 허무주의적 결핍감을 은폐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돌아가서 보이겠지만, 유물론은 바로 그런 두려움이 단순히, '근거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다. 유물론은 단연코 '사유'의 편이다.

2. 집합론

  다시 근대 수학의 집합론으로 돌아가 보자. 어떤 집합이든 단순히 임의적 '셈'에 의해서 임의적인 원소들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일정한 임의적 규칙들에 기반해 온갖 종류의 임의적 집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다(20세 이후에 총각 딱지를 뗀 상병들의 집합 기타 등등) 그런데,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다. 칸토르 이후의 현대집합론의 주요 공리 중 하나는, 집합은 단순한 임의적 셈에 기초하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정초된Founded'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공리는 단순히 모든 집합은 '공집합'을 자신의 부분집합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부분집합을 집합 자신의 원소로 일관되게 셀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학적 표현에 불과하다. 여기에 유물론의 모든 모티프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함축하는 아이러니는 분명 놓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집합은 자신이 헤아리는 원소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헤어지는 자기 자신이라는 텅-빈 집합(공집합)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자기지칭적 '공집합' 때문에, 가령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연수의 집합은 자연수 그 자체일 수 없는 것이다. 자기-정초적Self founded인, 있는 그대로의 사태에 투명하게 부합하는 집합 내지는 셈의 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연수의 계열 자체를 하나로 '묶는' 공백이 없으면 애초에 그러한 계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공백은 물론, 데모크리토스의 '공백'Void와 일맥상통한다. 이 공백을 묶는 작용, 내지는 셈에 의해서만, 일관되게 셀 수 있는 존재론적 질서가 출현하는 것이다. 유물론의 최중심에는 언제나 그러한 잠재적 공백과, 이를 현실화하고 실정적 질서로 번역하는 결단-작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직관적 사태에 커다란 추문Scandal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보고 느기고 셀 수 있는 당장의 현상들 이면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족적 실체가 있으며, 유한한 인식역량에 의해서만 그것에 점근선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물론은 이 분명한 그림에, 현상 너머(셀 수 있는 것 너머)에는 바로 그 현상을 '묶는' '자기자신'이라는 절대적인 공백-불안정성-혼돈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일관된 셈의 질서, 집합, 그리고 하나의 계열은 그것 안에 '셀 수 없는 역설적인 무언가'를 포함Include한다. 그것은 물론 '셈'을 행하는 '자기 자신'이다. 집합은 언제나 그런 '자기자신'의 결단에 의해서만 순수 다수성 속에서 출현한다. 말하자면 실선에서 자연수의 '점'들이 세어진다. 그래서 자연수의 집합은 언제나 자연수 그 자체보다 큰 것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45:24 

 

상병 김예찬 
  트랜스크리틱을 읽다가 접한 부분인데, 수학은 분석 판단이 아니라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이야기하는 칸트의 주장과 연결되는 것 같네요. 

'7+5=12'에서 주어는 '7과 5의 합'이고 술어는 '12'라고 했을 때, 수학을 분석판단이라고 한다면 '7+5'라는 주어 '속'에 이미 '12'라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5+7'이 12라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이는 우리가 12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린 아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봤을 때, 어린 아이에게 '5'와 '7'은 '모르는' 것이다. 선험적인 직관 능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숫자를 인식하고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 역시 경험적이고, 실체로서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들은 무無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원익님의 글에는 항상 치열한 텍스트 독해가 녹아있기 때문에 제가 이제까지 읽어온 책들을 되돌이키게 만듭니다. 최근 [역사와 반복]을 다시 읽으면서 문학의 종언에 관한 원익님의 글을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되더군요.. 2009-04-13
10:44:32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2009-04-13
16:13:08
  

 

상병 박원익 
  김예찬/예찬님의 독해에야말로 뭔가 무서울 정도로 적확해서 저를 놀라게 할 지경입니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끌고 나가기가 버거운 요즘입니다. 그 방편으로 바르트나 비트겐슈타인을 읽어야 하는데, 시간과 돈과 여건이 안 따라주는 것 같습니다. 2009-04-16
19:49:19
  

 

상병 김유현 
  감사합니다. 2009-04-18
14:31:16
  

[칼럼]2. 강막수의 유물론적 사유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19 05:24:29, 조회: 102, 추천:0 

강 막수의 사유는 유물론적 포지션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윤곽을 드러낸다. 물론 유물론적 사고에서, 어떤 상황이나 사물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이루는 물적 요소들의 관계망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런 사고가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거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저 유명한 강막수와 영길수의 상부구조-하부구조에 대한 시비로까지 이어진다.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이에 대한 시비는 특히나 새로운-오른쪽이라는 최근 대두된 학파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일명 <한국사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저서를 출판한 바 있다. 말하자면 유물론적 입장에서, 어떤 사회적 구성체를 설명하는 것은 모름지기 그것이 기반한 경제적 토대(생산양식과 생산력 그리고 생산관계)이지, 그것을 초월한 어떤 시대정신 내지는 그것을 담고 있다고 간주되는 제도 그리고 법규범 같은 인간 정신활동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이런 입장은 통상 '관념론'으로 격하되곤 한다. 그러나 중요한 요점은, 어떤 사회의 정신활동의 산물들은 그것이 기초한 하부구조를, 은폐하는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재적 꿈-사고가 필연적으로 전치와 응축이라는 꿈-작업을 통해서만 반영된다는 정신분석 테제와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이 '반영'이라는 용어가 엄밀한 독일 관념론적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용어의 요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반영한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의 세련된 포스트-감각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막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위해 준비된 많은 별명들이 있다. 환원주의적 사고방식, 여전히 본질주의에 구속된 편협한 태도, 단선적인 사유, 거대한 동일상에 사로잡힌 형이상학적 거대 서사 기타 등등.... 그런데 이런 비난들이 전적으로 어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강막수가 보여준 것이 진정한 유물론적 사유의 정수였다면, 우리는 강막수에 대한 온갖 근거 없는 비난들이야말로, 막수의 사유에 대한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답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하부구조에 대한 환원주의적 독해는 정작 막수의 적대자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환원주의적 독해들은 정작 왜 경제적 토대는 그 자체로 사회구성체를 곧바로 규정짓지 못하는지, 왜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부구조를 통해 이중화되어야 비로소 규정적 자질을 부여받는지에 대해, 왜 그 자체로 하부구조로 접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간단히 누락해 버린다. 유물론적 사유의 정수는 바로 이 '질문'에 응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어떤 '세계관'이 아니라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또한 방법론도 아닌데 그 이유는, 그것이 온전하게 완결된 세계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도리어 기독교적 신학에 섬뜩할만큼 가까워지는 지점을 표시한다(주1). 신을 믿는자가 유물론자가 되기 더 쉬운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운동하는 자들의 옛 가사 중에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구호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아직은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부르짖는 이 구호는, 저 바깥에 변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세계'와 '노동자'들이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반면 진정한 기독교적 믿음은, 바로 그 세계의 의미지평이 완전하지 못하며 언제나 붕괴에 가깝다는 위기감과 더불어 실존한다. 아직 기독교적이지 않은, 이 순박한 믿음은 동시에 운동과 거리가 먼 우리들의 믿음이기도 하다. 유물론이란 과거 기독교가 로마세계에 대해 그랬던만큼이나, 다름 아닌 이 믿음체계를 부수는 망치라고 하면 어떨까.

  유물론은 어떤 완결된 현실지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한층 더 견디기 어려운 명제를 견뎌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유물론은 바로 이런 현실적 곤궁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결국 그것의 경제적 토대이지만, 이러한 경제적 토대를 곧바로 한정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 이것은 동시에 자본주의가 하나의 온전하게 구성된 '현실'의 지평이기는커녕 정신분석의 대상인 꿈과도 같은 현실보다 더 섬뜩하게 리얼한 '비-현실'에 더 가까움을 암시한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욕망의 지평에 있기보다는, 죽음충동에 더 가까운 악순환을 내포한다는 통찰을 함축한다. 여기서 막수가 분명히 한 것은 일종의 정신분석적 지혜이다. 우리는 먼저 부르주아적 계약관계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권의 법적 개념과 이들을 지탱하는 자유주의 담론들을 독해해야만, 기저의 계급X쟁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사로잡은 동일한 곤궁이다. 꿈을 추동하는 것은 결국 무의식적인 욕망이지만 이런 욕망은 오로지 꿈의 텍스트의 전치와 응축의 작용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곤궁은 동시에 '인과관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화가 언제나 불가능하다는 철학사의 추문과 잇닿아 있지 않은가?

  나는 인과관계라는 철학적 쟁점을 우회해 다시, 막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45:38 

 

상병 이석재 
  강 막수가 누군가 했군요. 좀 꼭꼭 씹어서 텍스트를 읽어봐야 겠습니다. 2009-04-19
07:10:54
  

 

상병 김예찬 
  주석이 짤렸나요? 

잘 읽었습니다. 미완성의 완성을 향해 달려나가는 '근대성'이라는 믿음의 허망함을 보여주는군요. 

'자본주의의 죽음충동'은 저에게 '만물은 상품이 된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한(죽은) 것이다.'라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이해됩니다. 혹 다른 맥락의 뜻인지 궁금합니다. 2009-04-22
08:51:06
 

 

상병 박원익 
  예찬 님의 지적은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옵니다. 아직 추상적인 사고에 살을 붙이는.... 모든 것이 상품화될 수 있지만,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상품은 아니다, 팔리지 않는 상품조차도 아닌 상품이 있다.... 말하자면 상품세계도 '비전체'의 논리를 따르는데, 그게 자본주의에 한계를 가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