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e^tre,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  
일병 홍명교   2009-03-11 11:40:58, 조회: 146, 추천:0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로브그리예는 누보 로망을 주창한 프랑스 작가입니다. 저도 실은 '누보 로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처음 '누보 로망'이라는 말을 접한건 학교에서 선배가 기초워크샵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제목을 통해서였습니다. 제목은 <누보 로망을 위하여>였지요. 로브그리예가 쓴 동명의 책의 제목을 따서 찍은 영화였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였는데, 영화과 2학년생이 찍었다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퀄리티와 작품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그 선배는 독립영화계에선 꽤 구르고 구른 베테랑이긴 했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접한 로브그리예를 작년 가을에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누보 로망 특별전'에서 로브그리예의 영화 <에덴 동산 그후>를 본것이었습니다. 1972년작이었던 것 같은데, 그 영화 역시 정말 정말 독특했습니다. 기존에 서사가 지니고 있는 모든 틀을 아예 깡그리 부순 것은 물론, 색깔과 인물의 배치를 통해 스타일 안에 서사성을 부여하는 시도를 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왠만하면 졸 수 밖에 없는 영화인데, 너무 특이해서 뚫어져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대사가 거의 제거되었으며, 기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건은 인과관계가 없죠. 아마도 이런 방식의 예술적 시도들에 대해 들어보셨을겁니다. 로브그리예는 그것을 소설을 통해 가장 처음 시도한 농업연구자이자 소설가, 시인, 시나리오작가, 희곡작가, 영화감독입니다. 그리고 <질투>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인데, 저는 군대에서 1년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세계문학여행'의 종반부에서 실존주의 소설들과 함께 누보 로망 소설, 그 중 대표작인 <질투>를 읽었습니다. (지난 3월 3일부터 5일까지)

<질투>에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플롯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1인칭 시점의 화자가 주절주절 끊임없이 자신이 본 모든 것들, 풍경, 인물의 말들, 관찰대상의 사물들에 대해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들은 하나하나의 연결망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죠. 사건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무수한 '관찰'내지는 '관조', '관망' 속에서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서사가 철저한 1대1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플롯의 연결과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갈등의 장이었다면, 이 소설은 오직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하나의 유령과도 같은 '시선'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란 절대 존재하지 않고, 화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본 것들을 쏟아낼 뿐입니다. 

이처럼 <질투>는 일종의 시선의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그냥 제 표현입니다.) 화자가 ‘말’하는 사물과 공간, 인물의 행위에 대한 사소한 묘사들은 일종의 일관된 정서를 형성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정서 라인이 소설의 주제를 일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건, ‘질투’내지 ‘권태’입니다. 프랑스 현대문학의 일관된 정서 ‘권태’라는 감정이 시선에 의해서 투사되는 괴리된 관계망을 ‘질투’로 수렴시킨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런 느낌입니다. 워낙 모호하게 시작되어서 모호하게 전개되다가 모호하게 끝나는 소설이라서 뭐라고 명확하게 제 느낌을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요컨대, 이 소설은 모호한게 매력이고 그 모호함으로 그려내는 세계가 사물과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투사시킵니다. 마치 관조자가 커튼 밖의 어렴풋한 빛을 통해 바라보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풍경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책 읽고 머리를 쾅하고 때리는 듯한 쇼크를 받았습니다. 로브그리예는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었죠? (맞나요?) 그 영화가 로브그리예의 스타일을 영화적으로 잘 드러낸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에덴 동산 이후>는 도리어 그보다 더 나아간 것 같네요. 아무튼 저는 <질투>로 겉핥기만 하려던 애초 계획을 <누보로망을 위하여>과 다른 누보 로망 작가들의 작품도 읽는 것으로 확장했습니다.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 알랭 로브그리예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35:47 

 

병장 이우중 
  흐음. 잘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목의 e^tre는 영어의 be에 해당하려나요? 2009-03-11
12:18:13
  

 

상병 김예찬 
  나태와 의지박약으로 이 책, 저 책을 겉핥기로 뒤지는 처지의 저로서는 명교님의 '세계문학여행' 프로젝트를 정말 본받고 싶네요. 남은 1년, 제대로 독서 계획을 세워야할 것 같습니다.. 

누보 로망은 저에겐 생소한 스타일인데, 혹시 유사한 스타일의 한국 작가가 있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2009-03-11
13:07:10
 

 

일병 홍명교 
  우중 / 예, 그렇게 볼수있겠는데, 보통 불어 문법책을 보면 e^tre 동사를 영어에서 be동사격이라고 설명하는데, 문법적으로 그렇게 설명할 수 있으나 완전히 같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전자쪽에는 뭔가 철학적인 고찰이 부여되어있다고 할까요? 프랑스 철학의 전통과 유산이 그 언어에 그러한 것을 심어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인데요. 이 책 도입부에 '존재하다'와 '있다'의 차이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더군요. 2009-03-11
14:32:13
  

 

병장 이우중 
  명교님/ 
확실히 '있다' 보다는 '존재하다' 쪽이 조금 깊은 맛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그럼 사르트르의 저서에서 '존재하다'를 e^tre로 썼다면 '있다'는 어떤 단어를 썼을지 궁금해져요. 

그리고 누보로망은 영화계의 누벨바그와 비슷한 시기에 궤를 같이하는 문학적 움직임이라도 보아도 무방할는지요. 여긴 뭐 사전 하나 없네요. 허허허. 2009-03-11
15:16:08
  

 

상병 김예찬 
  사족이지만 "e^tre 동사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언어로는 철학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주워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하이데거가 한 말이었던가.. 분명히 불어 수업을 듣긴 했는데 이거 뭐 머리에 남은게 없군요.. 2009-03-11
15:24:00
 

 

일병 홍명교 
  우중님 /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두 단어를 구분함으로 인해서 철학적 고찰이 생긴다는 말하는게 더 맞는 설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컨대, 이건 번역상의 문제인데요, exister도 e^tre(e위에 ^ 달린거 아시죠? 특수문자엔 없네요.)와 같이 '있다'로, 또는 둘 모두 '존재하다'로 번역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이걸 분절적으로 구분할때 굳이 나누자면 exister는 '원래', '이미-존재하다'라는 쪽에 가깝고, e^tre는 그저, '있는'거죠. 즉자적 존재를 말하는거랄까요. 그리고 덧붙여서, 불어에서 e^tre동사는 영어의 be동사 쓰임과 비슷한 역할을 할 때가 많죠. 저도 뭐 불어 초보라서 이거 생각하는것도 막 벅차네요. 
<질투>가 e^tre라는 동사로 대표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이 소설의 화자가 관조하는 공간과 사물의 세계가 즉자적인 것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2009-03-11
17:04:55
  

 

일병 홍명교 
  이우중/ 
누벨바그는 누보로망과 시기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궤를 같이하진 않습니다. 누보로망 문학은 대략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여러 작품이 나오고 간간히 로브그리예 같은 대가들이 발표한 화제의 작품들이 그 맥을 잇지만 대중적이라 할만한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누벨바그는 1959년 <400번의 구타>와 <네 멋대로 해라>부터 시작해서 60년대 중반전후가 그 전성기죠. 68혁명 전후로 해서 그 전성기는 끝이 납니다. 

궤와 맥락으로 따지자면 간략하게 누벨바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기성영화들에 대한 격렬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0여년간 영화관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던 젊은 세대들이 신랄하게 기성영화를 까면서 등장했죠. 누벨바그의 힘은 '작가주의'에 있습니다. 그들은 영화를 예술로, 그리고 그것에 작가정책을 삽입함으로써 영화를 '제8의 예술'로 등극시키니까요. 그러니까 누벨바그는 미쟝센과 딥포커스, 전통서사의 혁신이라는 점에서 스타일의 혁신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적 전술이기도 합니다. 말만 드센줄 알았는데 영화도 무지 잘찍더라, 이거였죠. 

누보로망은 문학적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세계관과 '새로운 소설'(누보로망)을 이야기하며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전세계 문단에서 호평을 받으며 등장했지만 그후로 대중적 인기는 계속 시들었습니다. 누보로망 작가들은 영화로도 뛰어들었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택한 형식이 그때까지의 그 어떤 문학 양식들보다도 ‘시각적’이고 영화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의 누보로망 작가들로는 알랭 로브그리예를 비롯해서 알랭 레네, 뒤라스 등이 꼽히며 그 폭이 누벨바그만큼 넓진 않습니다. 주요 영화작품으로는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에덴 동산 이후>를 비롯해 많이 있는데, 제가 기억하고 있는게 이거 딱 두 작품이네요(웃음) 2009-03-11
19:02:12
  

 

일병 홍명교 
  누벨바그에 대해서는 이야기꺼리가 많은데 오늘은 여기까지(웃음) 2009-03-11
19:03:04
  

 

병장 이우중 
  오오.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누벨바그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실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허허허. 2009-03-11
20: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