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베스트-독서후기]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  
병장 김무준   2009-03-05 22:27:27, 조회: 382, 추천:0 

1.
끝내주게 심심했다. 심심할 때는 뭘 해야 할까. 뭐라도 해야 하는데 때마침 성남시 도서관에서 새 책이 대여되었다. 인사담당부서에 찾아가 후배직원을 닦달해 잠긴 서고의 문을 열었다. 단골손님에게는 문을 개방할 수밖에. 일체의 협박 따위는 없었고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서고를 열었다. 아멜리 노통브. 무라카미 류. 얘들은 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호기심에 책을 챙겼고 <문화산업의 이해>를 챙겼다. 한 권만 더 빼갈까. 음? 박민규? 박민규라……. 이게 작가 이름이든가 먹는 거던가. 일단 챙겼다.

사무실 서랍에 고이 꽂아두고 심심할 때마다 보기로 마음먹었다. 늘 그런 식이니까. 그리고 다이어리를 열었다. 이곳에 들어오게 되면서 무엇이라도 남겨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재작년 시월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꼬박 삼년 째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뭐든 하다보면 룰이 생긴다.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법을 깨달았다. 다이어리는 잡기장으로 변신했고 패션디자인 이론이나 독후감, 상념의 조각, 잡지 스크랩, 술에 대한 정보들, 사진 등이 들어갔다. 그래도 분류는 나뉘어져있고 부분마다 색깔 테이프로 표시를 해뒀다. 말 그대로 정리를 해야 하니까. 그래야 읽기 편하다. 기록이 모든 삶을 기술할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기록된 삶을 통해 흘러간 시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흘러간 삶이 뒤죽박죽이 되어서는 곤란하니까. 정리한다.

손에 글씨가 번졌다. 비누로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질 않는다. 일단은 내버려 둘 밖에.

2.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었다.

맹세컨대 이제까지 박민규나 김애란 따위의 소설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무슨 소설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본 적이 없으니까. 삶은 유통기한이 지난 카스테라처럼 퍽퍽했고, 때로는 뜻하지 않게 냉장고에 들어간 코끼리마냥 난폭하게 날뛰었다. 밟히지 않으려면 튀어야했다. 밟히면 죽는 거니까. 살아야 했다구. 제-인-장. 박민규가 뭐지? 먹는 건가? 살아야했다. 돈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영화 도쿄의 메르드가 일문국화를 씹어 먹듯 돈을 씹어 먹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었고, 돈을 벌었고, 또 돈을 벌었다. 박민규가 뭐든 간에 밥 먹여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관심이 없을 수밖에.

책을 읽다말고 주변을 둘러보니 엉망이 된 책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상에 틀다 만 비디오와 디브이디와 다이어리와 달력과 마시고 난 우유팩과 윗옷과 카메라와 전선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어리를 쓰며 터득한 정리의 기술은 그대로 삶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을 정리하는 습관이 들었고 습관은 조금씩 병적인 수준으로 번지고 있다. 뭐 어때. 그래도 깔끔한 게 좋잖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웬만해선 하질 않으니 자연스레 습관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리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내버려 두면 후배들이 해야 하니까.

정리는 끝났고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다시 읽었다. 손에 번진 글씨는 아직도 지워지질 않았다.

3.
아니 그러니까, 표지에 박민규 소설 <카스테라> 면 당연히 장편이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책을 펴고 차례를 보니 딱 필이 온다. 이건 소설집이다. 설마 소설집인데 소설이라고 구라를 쳤겠어. 이건 분명히 장편일 거야. 심심했고, 그 대단하다는 박민규가 진짜 대단한 건지 궁금했고, 문학의 희망이니 어쩌니 저쩌니가 진짜인지 알고 싶어서 읽었다. 더군다나 표지에는 무려 이외수 선생님의 서평이 실려 있었으니까!

어라, 이건 뭐야. 왜 내가 평소에 텍스트를 생산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소설이 이어지는 거지. 대화는 따옴표 없이 처리되어 있었고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엔터가 두 번 들어갔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텍스트가 진행된다니. 이건 o미? 꼭 내가 박민규인가 뭔가 하는 양반의 텍스트를 읽고 그에게 홀딱 반해 비슷하게 텍스트를 생산한다고 착각할 시츄에이션이잖아.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텍스트와, 그 리얼리즘에 흥미를 느껴 그처럼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지 박민규라는 양반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요.

순문학에 대해서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이 있었고, 거부감이 있지만 장르문단의 발전을 위해 순수문예비평이론을 공부한 거지 아름다운 문학을 하자고 공부한 게 아니었다. 나는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았다. 왜 이 사람이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지? 글쎄다. 요즈음의 문학도 손대지 않는 통에 트렌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어쩌겠어. 궁금한 건 죽어도 알아야하고, 호기심이 생기면 잠을 잘 수 없는 게 내 성격이다. 잠은 자야하니까, <카스테라> 해체에 들어가려는 찰나 청소가 시작되었다. 에라이- 청소나 해야지.

아직도 손에 번진 글씨가 지워지지 않았나 싶어 쳐다보니 손끝에도 잉크 비슷한 것이 묻어있다. 쓰는 펜의 잉크가 번지는 모양이다. x.

4.
다시 책을 폈다. 그리고 다 읽었다. 이게 뭐야? 이게 요즘 촉망받는 현대문학의 흐름이자 문학의 희망이라고? 그래. 순문학이 예술위해 나아가며 문학이 제 기능을 위해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려 노력한다는 건 알겠어. 근데 이야기를 꼭 이렇게 배배 꼬아서 써야하는 거야? 그러니까 냉장고가 어쨌다구.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더럽다면 더럽다. 할배들과 대중은 이것을 보고 문학이요 예술이라 칭송하고 떠받들고 있는 건가? 왜? 뭣땀시?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문학이면 다 아름답고 비유적으로 치장되어야하나? 그런 건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그래도 호기심이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게 왜 아름다운가. 정독은 끝냈으니 텍스트의 해체를 위해 작업에 들어갔다. 이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습관. <카스테라>와 함께 고른 <문화산업의 이해>는 제목을 통해 추측한 내용이 아니라 영상과 미디어, 그리고 현재의 흐름에 대한 해석과 방향제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낚시라면 낚시다. 앗싸 월척이구나. 이건 떡밥인 줄 모르고 물어댄 인간의 잘못인가. 화가 나서라도 텍스트를 해체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난해하기는 마친가지. 그래서 뭐 냉장고고 세계고 카스테라가 뭐 어쨌다는 거야. 

짜증이 솟구쳐 담배를 피러 나갔다.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잉크가 손에 여기저기 번져있다. 이런 씨벌헐.

5.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텍스트의 내적 비평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말 그대로 텍스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비평하는 작업이다. 비평은 사물의 미추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것이 정의고, 그에 맞게 텍스트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게 요즈음 인정받는 소설인가? 뭐 그렇다 치자.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꼴은 갖추고 있는데다 여러 복선과 효과적 비유, 현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이 모든 것이 잘 버무러져 있으니 아름답고도 문학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겠다. 근데 이걸 꼭 이렇게 난해하게 꼬아서 제시해야해?

텍스트는 상당히 난해한 편이었고, 결국 외적 비평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박민규라는 인간이 어떻게 텍스트를 생산하게 되었는지 배경을 추적하고 그의 살아온 삶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해석에서도 말하듯 박민규는 단편집<카스테라>에서 첫 단편 <카스테라>를 통해 자신이 텍스트라는 냉장고에 자신의 세계를 집어넣고, 해석하려 노력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과정이 문학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평단과,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은 박민규를 높게 치켜세우는 거겠지.

그러나 문학을 싫어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문예비평이론을 통해 아름다운 문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문학의 예술성이 어떠한 것들을 통해 발현되며,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지, 감성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식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는 있네. 그렇고 그런 요즘 문학보다는 적당히 특별하고 신선하니까. 그래도 순문학을 하고 싶은 건 아냐. <구회 말 투아웃>의 출판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다른 곳에 스트레스 받을 여유가 없다구.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하며 미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웁스.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보니 모니터에 비친 얼굴에 잉크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건 다 어디서 온 거야.

6.
손가락을 놀리다 손가락이 이상해진 것을 발견했다. 손이 종이가 되어있다. 이게 뭐시깽?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경악했다. 눈이 삔 건가. 헛것이 다 보이네. 거울 앞에 서니, 머리에는 길고 긴 끈이 하나 붙어있고 몸은 마치 종이처럼 얇아져 인간이 아닌 종이인형이 되고 말았다. 셧 더 뻑. 설상가상으로 등에는 두꺼운 무언가가 장판처럼 덮였다. 이건 그러니까,

마치 책과 같았다.

종이로 변한 몸 구석구석에는 갖가지 문장이 넘쳐났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서는 이영도와 전민희와 홍정훈과 어슐러 르 귄과 제이 케이 롤랑과 제이 알 알 톨킨과 알랭 드 보통과 귀욤 뮈소와 오쿠다 히데오와 황석영과 원재훈과 우석훈과 히로코 무토와 오치아이 마사카츠와 장광효와 김지민과 허원영과 황민우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뒤죽박죽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거기다 이마에는 주제 사라마구라고 떡하니 박혀있다.

거울 뒤에서 박민규가 씩 웃는다.

나는 책이 되어 있었다.

0.
그러니까 이따위 것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다구. 나도 이런 류의 텍스트를 쓸 수 있단 말이야. 누구는 할 줄 몰라서 하질 않는 게 아니라구. 근데 문학이라는 게 꼭 스크류바처럼 삑 삑 꼬아서 써야하는 거야? 이래서 내가 문학이 싫다는 거지. 뭐가 아름다운 건데? 문학이 예술이라면 예술을 하느니 나는 차라리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겠어.

그렇게 오늘도 <구회 말 투아웃>을 쓴다.





뱀발. 박민규를 사상 처음으로 접했음에도, 
그의 텍스트가 약간의 재미는 있지만 
대체 왜 인정받는지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음.
뱀발 둘. 그래, 심심했다 이겁니다.
뱀발 셋. 뭐 그래도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깽깽이가 
박민규씨보다 텍스트를 잘 쓴다고 생각지는 않음.
뱀발 넷. 으어어 목표로 한 1차 데드라인까지 열흘 밖에 안 남았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4-21 10:4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6:02 

 

병장 정문환 
  난해한 글입니다. 저로써는 생각 할 수 없는... 2009-03-05
23:58:15
  

 

상병 김요셉 
  카스테라의 인기비결이요. 음. 
<카스테라>때의 박민규는, 뭐랄까. 독자가 텍스트를 해체하기 이전에 이미 텍스트가 해체되어 있다랄까- 그런 맛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기린과 동일시하고 세계를 냉장고 속에 집어 넣기 위해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사와 언어를 해체해 새로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그게 (지나치게) 과하지도 않았던데다가,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박민규가 이미 보여 준 바 있는 그 탁월한 서사능력 덕분에 대중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대중들은 박민규가 개인적으로 느껴 글에 담았을 현실적 페이소스를 별다른 수용의 과정 없이 그대로 공감- 할 수도 있었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2009-03-06
08:04:22
  

 

상병 정근영 
  클클, 역시 적당히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한 글이군요. 
저도 책마을에서 박민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꽤 됐는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손이 잘 안 가더라구요. 독서후기에 박민규에 관한 글이 올라온건 오랜만인걸요. 동석씨가 있었으면 재밌었을텐데. 
그런데 읽다보니까 무준씨의 '텍스트해체'에 관해 좀 흥미가 가는데, 위에 언급하신 부분을 제외하고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저는 문예비평이니 뭐시기 하는 것 따위 하나도 몰라서, 독서후기 쓸때면 뭔가 즉흥적인 느낌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필이 안 오면 글이 써지지가 않아서 문제더라구요, 으음. 기왕이면 칼럼으로 한 편 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흐흐 2009-03-06
08:10:50
  

 

상병 김형태 
  '꼭 내가 박민규인가 뭔가 하는 양반의 텍스트를 읽고 그에게 홀딱 반해 비슷하게 텍스트를 생산한다고 착각할 시츄에이션이잖아.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텍스트와, 그 리얼리즘에 흥미를 느껴 그처럼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지 박민규라는 양반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요.' 제목을 좀 깊게 설명해주신건가요? 하하 

정말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에 공감 +100%입니다. 
저도 박민규에 빠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9-03-06
09:52:36
  

 

병장 이우중 
  이병주는 '제4막'에서 "굳이 변명을 해야만 소설로서 통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도리가 없다. 소설도 나 자신도 어쨌건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사라마구의 환상적 리얼리즘도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건 아닐 것이고, 박민규의 문체가 지금 볼 때 실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재미있는 것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스토리 외의 서술 방식이나 조금은 배배꼬였다고 느낄 수도 있는 메타포가 아닐까 싶어요. 2009-03-06
10:19:20
  

 

병장 이우중 
  그리고 물론 문학이라는 게 꼭 스크류바처럼 삑삑 꼬아서 써야 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문학이 싫다고 하시는 건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러면 무준님이 쓰신 '구회말 투아웃'은 문학이 아닌가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미술 작품인 것처럼 '올가의 초상(제목이 정확한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역시 미술 작품이지 않던가요. 2009-03-06
11:25:47
  

 

병장 김무준 
  위에서의 문학은 순문학입니다. 2009-03-06
12:15:31
  

 

병장 김무준 
  그리고 나는 내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입니다. 2009-03-06
12:16:11
  

 

상병 강정훈 
  개인적으로는 신들린듯이 온갖 알수 없는 인용과 미사여구를 동원한데다 사상자체도 '일부러 그렇게 써놓은듯한'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들을 증오합니다. 

저에게는 물론 어렵지만, 그런 의미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김무준씨의 생각에 찬성. 저도 만들수 있게 힘을 줘요. 2009-03-06
13:43:36
  

 

상병 강정훈 
  아, 그리고 저는 가지로를 외치겠습니다. 

<가지로> 2009-03-06
13:50:00
  

 

병장 이우중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러면 무준씨는 텍스트 중의 일부는 순문학이며 일부는 장르문학, 나머지는 그냥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대체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구회말 투아웃'은 텍스트일 뿐이라지만 굳이 끼워맞추자면 장르문학인가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경우는 순문학인가요 장르문학인가요 아니면 어디까지나 텍스트일 뿐인가요. 그보다 순문학-장르문학을 꼭 두부 자르듯이 나눠 놓고 요건 재밌고 저건 지루해. 요건 고상하고 저건 천박해. 라고 떠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보다 앞서 그런 방식의 분류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데, 앞서의 글들에서도 조금씩 느껴 왔던 바입니다만 무준씨가 하고자 하는 말이나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사실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뜻을 품고 발화되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으려나요. 2009-03-06
14:25:57
  

 

상병 김요셉 
  저 역시도 무준씨가 순문학, 장르문학, 텍스트. 를 구분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만. 답변해 줄 수 있으신가요. 2009-03-06
15:28:36
  

 

병장 이동열 
  본문도 본문이지만은 댓글들에 더 눈이 갑니다. 그런덕에 주시하고 있던 글이기도 했는데 적절하게 댓글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저 역시도 무준님의 기준이 궁금합니다. 무준님의 말씀만 보면 박민규는 '순문학'이고 김무준은 '텍스트'인데- 난감합니다. 특히나 요즘 뉴웨이브문학이라는 말까지 나와서 더욱 혼란스럽기 짝이 없군요. 아무튼 저로서는 어떤 글이든지 먼저 재미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유쾌함이든- 지적 희열이든- 2009-03-06
16:44:42
  

 

병장 김무준 
  지극히 주관적인 답이라도 듣고 싶으신 모양인데 조만간 텍스트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2009-03-06
18:14:53
  

 

병장 김무준 
  답변은 달아 놓았습니다. 우석훈씨에게 다시 원고를 제출하려는 날짜가 일단 15일 이전이라 후딱 <구회 말 투아웃>을 써야하는데, 이거 영 키보드가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시놉시스 다 짜놓고 표현에 들어가질 못하다니. 에라이- 

인물들을 열명 넘게 집어넣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텍스트를 풀려니 각종 애로사항이 꽃핍니다. 아주 만개하는군요. 집중해야 하기에 추가되는 물음에 대해서는 답해 드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내글내생각] 물음에 대한 답변  
병장 김무준   2009-03-06 20:32:16, 조회: 115, 추천:0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으므로 친절하나 친절하지 않게 답변하겠습니다.







1.
깽깽이가 왜 스스로를 깽깽이라 부르는 지는 친절히 설명했으므로 패스.

깽깽이가 텍스트에서 말하는 ‘텍스트’란 있는 그대로의 단어와 문장, 문단의 조합을 일컬음. 이는 깽깽이가 생산한 모든 텍스트에 대해 개인적 주관은 들어갔을 지라도, 자기만족 이상의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전제로 함. 실제로도 텍스트를 생산할 시에 1차적 의도는 모두 스스로의 욕구충족에 있음. 이와는 별도로 깽깽이가 소설 및 다양한 문학을 말함에 있어 텍스트 텍스트 하는 건 문학을 할배들이 규정해놓은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에 접근하겠다는 의지 표현임.

깽깽이는 독자주의적 비평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지만, 텍스트가 문학이 되고 말고는 우선 생산자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함. 깽깽이에게 문학이라는 것은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이 아닌 ‘예술’임. 이 개인의 미학이라는 것은 분명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임. 때문에 깽깽이는 타인에게 깽깽이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를 강요할 마음도 없고,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정도로 한가하고 심심한 것도 아님. 또한 깽깽이의 텍스트를 통해 대중을 계몽한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마음도 없음. 우선 깽깽이가 텍스트를 생산하는 경우 이제껏 단 한 번도 자기만족이 아닌 다른 의도로 텍스트를 생산한 적은 없음.

텍스트를 수용하는 수용자는 텍스트 생산자의 의도와는 별도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자신의 주관을 포함시켜야만 함. 인간이 불완전하며 절대적 객관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월성 논쟁>을 참조했으면 함. 텍스트의 해석 과정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주관이 포함될 수밖에 없음. 깽깽이의 1차 의도와는 다르게, 과연 무엇이 옳은가? 라는 의문을 표출하는 것은 결코 깽깽이가 의도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함.

고로 깽깽이는 지극히 주관적 입장에서 텍스트를 대하고, 스스로를 위해 텍스트를 생산할 뿐이니 해석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질문에 답해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함. 텍스트를 생산하고 게시 하는 것은 깽깽이의 자유임. 당연히 깽깽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수용자의 자유이나, 자신의 물음을 타인에게 던지며 답을 내 놓으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음.

깽깽이는 타인의 텍스트를 읽으며 보통 해체의 과정을 거치지는 않음. 이 해체라는 것이 무엇이냐, 깽깽이가 학습을 통해 얻은 기존의 할배들이 정립해 둔 가치와 이론에 따라 ‘보편적으로 객관적이라 불리는 과정(이를테면 비평과 같은)’을 통해 텍스트에 접근하는 행위임.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함께 존재하는 복합적 짐승이기에 깽깽이도 이성으로는 이해하나 감성으로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 것임.

<구회 말 투아웃>을 소설로 쓰고자 했다면 문학적 미를 완성하려 피를 토했을 거임. 깽깽이는 텍스트를 생산함에 있어 보통 문학적 장르를 떠나 있는 그대로 ‘날것’의 느낌을 살리고자 함. [그보다 순문학-장르문학을 꼭 두부 자르듯이 나눠 놓고 요건 재밌고 저건 지루해. 요건 고상하고 저건 천박해. 라고 떠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보다 앞서 그런 방식의 분류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음. 깽깽이는 환상문학에 관한 논의에서 장르소설이고 순문학이고 나발이고 그딴 분류가 필요한가? 라고 질문했음. 떠들 생각도 없었고 두부 자르듯 나눌 의도도 없었음. 더 이상 손가락을 놀리려니 기존에 다 이야기를 했던 문제인지라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다고 여김. 끝.

2.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음. 박민규의 소설에 대한 감정적 의문은 기존 학계와 문단, 대중에 대한 것일 뿐임. 이번 텍스트에서는 그 발화가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통해 생성되었음. 아직 박민규 소설집을 완독하지 않았고, <카스테라>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은 정도임. 소설집의 제목과 단편의 제목이 동일하기에 약간의 오해가 생긴 듯함. 깽깽이는 타인의 의견과 주관이 틀렸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 여기는 생명체임. 따라서 타인의 가치관을 존중함. 깽깽이가 순문학이라 생각하는 것을 타인은 장르문학이라 볼 수도 있고, 깽깽이가 글이라고 보는 것을 타인은 그저 텍스트 나부랭이라 볼 수도 있는 문제임.

<구회 말 투아웃>은 텍스트에 불과함. 깽깽이가 2차 의도를 갖고 출판을 위해 소설의 형태를 띨 수 있도록 수정하려하는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출판에는 현실적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고 예전에도 설명했듯 <구회 말 투아웃>은 단편으로 끝내려 했던 텍스트임. 굳이 끼워 맞추려는 마음도 없고 처음부터 문학적 장르(소설, 시 따위와 같은)를 떠나서 쓰고자 노력했던 텍스트이므로 ‘이게 무어다’라고 답하지는 않겠음.

의도가 자기만족에 있고 자시고를 제쳐두고, 깽깽이는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독자주의 비평’론 적 접근을 자주 사용하고, 그를 지지하는 편임. 텍스트는 생산 후 생산자에 의해 1차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며, 타인을 통해 읽히는 과정에서 2차 의미가 생성됨. 그렇기에 생성된 1차 의미와 2차 의미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 타인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듯 텍스트 생산자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임. 거기다 대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 애쓰는 것은 지나친 흑백논리에서 출발한 무의미한 행위라 여김.

내글내생각이 아닌 독서후기로 텍스트를 게시한 이유가 여기 있음. 깽깽이는 박민규의 단편 <카스테라>를 읽고 지극히 감정적인 텍스트를 뱉어낸 것에 불과함. 이와 함께 타인에게 깽깽이의 사고와 가치를 제시한 것이지, 강요하려 했던 의도는 없음. 해석에서 오해가 발생한 점에는 분명 깽깽이의 텍스트가 해석 과정에서 다분히 오해의 소지를 제공할 만한 부분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함. 그러나 깽깽이의 의도 자체가 ‘박민규 이 똥덩어리 난 네가 싫어!’ 라든가 ‘닥치고 장르소설이 최고임’ 따위는 아니었음. 그런 언급도 없음. 귀찮으니 여기까지. 끝.

3.
피카소가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과, 데미안 허스트가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과, 신윤복이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이 모두 다르지만 사회는 이들 모두를 미술의 범주로 포함시키고 있음. 설치미술이냐 회화냐 동양화냐를 떠나 이 모든 예술가들의 행위가 색과 형태 등 시각적으로 의도를 표현하려 했으므로 관념은 이를 싸잡아 미술에 포함함.

깽깽이의 텍스트 생산 방식은 이러한 기존의 가치관들에 대한 의문과 파괴를 반영하려는 발버둥임. 깽깽이의 조잡한 텍스트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한다.>가 시라고 보는지, 소설이라 보는지, 수필이라 보는지 답변해 줄 수 있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기 바람. 깽깽이는 도저히 모르겠음. 깽깽이도 기존에 확립된 이론을 통해 텍스트의 생산 법을 터득했고, 신이 아니기에 다분히 한 쪽으로 치우친 텍스트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임. 그러나 깽깽이는 이 모든 관념과 이론에서 자유롭기를 꿈꾸는 나부랭이고, 평소 그렇게 노력하기에 깽깽이도 이론으로 답하기 힘든 요상한 국적불명의 텍스트들이 탄생함. 그래서 뭐 어쩌라고. 깽깽이가 이 모든 생산된 텍스트에 너는 문학, 너는 장르소설, 너는 시 이따위 분류를 적용시켜야 함? 손가락이 닳도록 설명하지만 깽깽이는 다분히 자기만족을 위해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음. 생산된 텍스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인에게 주어지는 자유라고 믿음. 깽깽이는 ‘나’라는 주체의 다양한 사고와 사유를 표현하는 데 ‘문자’라는 도구가 가장 사용하기 편하고 또 익숙하므로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는 것임. 깽깽이가 공부를 잘 하지 않는 건 기존에 구축되어 제시된 객관적 가치와 이론 등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임. 

인간은 자신의 사고와 사유를 타인에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원론적 형태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노력하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 의意는 변질될 수 밖에 없음. 깽깽이는 문자라는 도구를 주로 사용하기에 단어 안에 생각 자체를 담으려하니 1차 변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타인에 의해 해석되는 과정에서 2차 변질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있음. 의도가 어찌되었건 이 변질의 과정 자체가 매우 슬프지만 깽깽이도 어쩔 수 없는 한계임. 이 한계에 최대한 다가서고, 또한 뛰어넘기 위하여 텍스트를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있는 것임. 제인장.

4.
그러나 사회와 관념은 텍스트를 수용하며 기존의 통념을 거치게 됨. 깽깽이도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임. 역사에 의해 텍스트는 문학이라는 것으로 정립되었고, 깽깽이의 이상이 어떻건 극복하기 힘든 과제임에는 틀림없음. 문학을 통해 개인이 최고로 치는 가치는 모두 다를 것이며, 깽깽이 역시 수많은 가치 중 하나를 품고 있을 뿐임.

그렇다고 타인이 깽깽이의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함. 주관을 늘어놓으며 논의를 하면 갭을 좁힐 수는 있으나 극복하기는 힘든 게 사실임. 이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최선을 다해 의意를 표하나, 행위를 통해 의는 변질되며 결과적으로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임.

깽깽이는 굉장히 게으른 생명체이며 또한 불친절한 생명체임. 무엇보다도 생명체이기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음. 모니터 너머에는 컴퓨터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앉아있는 것임. 인간은 완벽할 수 없음. 허나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 완벽에 가까운 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요구하기 마련임. 이해하는 부분이나, 이성과 감성을 함께 갖고 있는 생명체가 바로 깽깽이인지라 감성적으로는 화가 나는 것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함. 더 친절을 베풀지는 않겠음. 기분이 나쁘기에 완성형으로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았음. 깽깽이는 유치함. 또 소심함. 그러니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음.

한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이런 대사를 내뱉음. 

[님아 가드 올리셈]

깽깽이에게 가드를 올리도록 만들지 말아줬으면 좋겠음. 깽깽이는 소통을 좋아하고 사랑하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형식의 논의는 싫어함. 차라리 가급적 깔끔히 완성된 자신만의 텍스트로 예의를 갖춰 덤벼준다면 친절히 답변드릴 수 있음. 버뜨. 지금 충분히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있는 상태이므로 당분간 친절을 베풀지는 않겠음. 깽깽이는 까칠하니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4-21 10:4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6:17 

 

병장 김대운 
  아아-. 
어렵습니다. 두세번은 더 읽어 봐야 되나. 
까칠한 어투라서 더 어려운가? 2009-03-06
20:51:34
  

 

병장 김무준 
  단어 선택이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