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베스트-내글내생각]체온(體溫)  
상병 이동열   2009-01-29 16:12:44, 조회: 325, 추천:0 

매서운 칼바람에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다. 차라리 주말이었으면 이 추위를 즐겼을지도 모르련만 평일의 출근길은 혹독하기만 하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출근길을 홀로 걸어간다. 나는 비정규직인데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아니 비정규직이니 이 고생을 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되뇐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공기만이 나를 맞이한다. 하지만 나의 추위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몸을 녹여보자고 차를 끓이기 시작한다. 따뜻한 녹차 한잔이면 몸을 좀 녹일 수 있을 거란 희망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녹차 한잔을 입에 물고서는 자연스럽게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부팅이 마치자마자 결재서류들을 확인한다. 그사이 컵 속의 녹차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컵 속의 녹차를 깨끗이 비웠는데도 좀처럼 몸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없다. 한잔 더 마실까하다 그것마저 지겨워져 컵을 문채로 기지개나 펴본다. 그 순간 사무실의 전화가 울린다. 유독 전화가 많이 오는 나의 업무상 전화는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다. 쏟아지는 전화 세례를 감당하기에는 나는 강하지가 못하다.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상대하다 진이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전화는 달랐다.

어이, L군 잘 지냈나? 내가 누군지 알겠나? 혹시, 전(前) 전(前) 차장님 아니십니까? 야, 벌써 내가 전(前) 전(前) 차장이나 되었냐? 어떻게 새로 온 차장이랑은 할 만하냐? 차마 말씀드리기가 민망합니다. 입사동기이신데 잘 모르십니까? 걔? 동기이기는 한데 잘 몰라. 본적도 없어. 그건 그렇고 새로운 지사에서 일하는 건 어떠십니까? 야, 말도 마라. 죽겠다 죽겠어. 에이, 왜 그러십니까? 능력 있으신 분이. 야, 과장이 할 일을 차장이 한다고 생각해봐. 할 만한가. 그래도 안 어울리시게 약한 말씀이십니까? 해봐. 경험도 부족하고 그러니 힘들어.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잘 지내냐? 뭐,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튼 잘 지내고 다음에 연락이나 해라. 예, 다음에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오냐. 뚜뚜뚜……

B차장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B차장의 전화가 오다니. 내가 이 회사에 처음 입사할 때 우리부서의 차장이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불같았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일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라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밤늦게까지 담배 하나 물고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물론 주위에서는 그의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일에 있어서 트집잡힐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강인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하다니. 그것도 전화를 하면서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다니, 나로서는 어리둥절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며칠 전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여보세요. I군이니? 아닙니다. 저는 L군입니다. 죄송한데 누구십니까? 야, 나는 네 이름 헷갈려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A주임이야. 아, 주임님. 죄송합니다. 목소리도 몰라 뵙고.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지.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어떻게 잘 지내고 있어? 예,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왜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저희 지사 인력 조정한다고 팀원들이 많이 흩어졌습니다. 그래? 예상하기는 했는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에이, 주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죄송스럽습니다. 새로운 지사에서 일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음, 힘들구나. 여기 무진장 추워. 사무실에 있어도 추워. 여기 애들 진짜 고생한다. 주임님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쉬엄쉬엄하시지요. 그나저나 뭐 일 있으셔서 전화하신 것 아니셨습니까? 아니, 그냥 전화 해본거야. 섭섭하게 왜 그래. 아니 그러면 다른 사람들 목소리라도 듣게 통화해보시지요? 안 돼, 그러면 더 보고 싶잖아. 그럼 제가 나중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아마, 네가 오는 것보다 내가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아무튼 한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건강하고 잘 지내. 뚜뚜뚜……

그래, 며칠 전에도 반가운 전화가 왔었다. A주임의 전화였다. 그는 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인 우리를 이해해주었던 인물이었다. 비정규직인 만큼 여러모로 불리함이 많았던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백방으로 뛰어주었다. 우리들의 업무도 있는데 다른 일에도 치일까봐 자신이 먼저 손수 삽을 쥐기까지 했었다. 비정규직을 거쳐 정규직이 되어 우리를 생각해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떠나 그는 정말 우리를 이해해주었다. 내가 월차를 내었을 때 회사와 집이 너무 멀어 휴가 일수가 부족하지않냐고 어떻게든 늘여보겠다고 알아봐주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정규직인 우리들이 그를 따를수록 그는 상부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때마침 찾아온 인력조정에 그는 다른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를 두고 우리들은 정적제거라고 수군거렸지만 우리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울면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은 후 얼마 뒤 그가 휴직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B차장의 전화를 받은 후 한동안 멍해졌다. 원래 마음이 따스했던 A주임의 전화는 둘째치더라도 강인했던 B차장의 전화까지 받고 나니 뭔가 견딜 수가 없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이들인데 갑자기 연달아 연락이 오니 당황스러워진 걸까? 사실 이들에게 무심했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일지도 모른다. 늘 연락해야지라고 되뇌다 정작 나 살기에 바빠 잊은 것이 한두 번인가. 하지만 이 상황은 단순히 나의 부끄러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전화는 하나같이 무엇인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답답해진 나는 사무실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매서운 바람이 쏟아 들어왔다. 그래. 춥구나. 차가운 바깥바람을 맞자 이 추위보다 더한 추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추위가 모두의 가슴을 얼려버렸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그들의 간절함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파고드는 것을 넘어 수많은 한파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경기침체라는 한파가, 그로인한 회사의 경영위기라는 한파가, 이를 틈탄 공격적인 합병이 있을 거란 소문이라는 한파가, 무관심하게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우성이라는 한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모르는 크고 작은 한파. 바로 이들 한파가 모인 추위가 우리의 가슴을 얼리고 있다. 강인했던 B차장도, 마음이 따뜻했던 A주임도 비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매서운 칼바람보다 무서운 것은 우리의 가슴으로 몰아치는 한파였다. 얼어붙은 몸을 녹차한잔으로 녹여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러지 못했던 것은 여기에 있었다. 얼어붙은 우리, 아니 우리 가슴을 녹일 수 있는 시작은 따뜻한 차 한 잔이 아닌 바로 서로의 체온(體溫)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살을 부대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서로의 목소리를 통해 작은 체온이라도 나누고 싶었음이라. 이 한통의 전화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을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체온으로 나의 얼어붙은 가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차례이다.

여보세요. 응, 난데……

N#2. 체온(體溫)
- 울리는 전화벨에 떠오른 단상-

蛇足 1월 어느 날의 일기들을 추려 각색(?)한 글입니다. 
       미력한 필력으로 쓸까말까 굉장히 고민하다 
       1월이 가기 전에 써야할 것 같은 의무감(?)에 써내려가 보았는데- 
       느낌을 살리는 게 쉽지가 않군요. 역시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울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2-12 10:2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0:03 

 

일병 송기화 
  따뜻합니다. 따뜻해요. 온기가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01-29
16:18:08
  

 

병장 김민규 
  어떤 느낌인지 대략 알 것도 같습니다. 이곳에서의 체온을 부정하며 글을 썼던 저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로 이루어진다) 잠시간 스쳐간 인연의 기억으로 아직도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건 그냥 일관성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고 합리화하고 싶네요. 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루라도 빨리 해고해주기를 바랍니다. 무슨 비정규직을 이렇게 오래 써먹어? 밖에서도 비정규직의 최대 계약기간은 1년인가 그렇다는데. 2009-01-29
16:27:55
  

 

상병 이동열 
  기화/ 기화님의 빠른 댓글이 더 따뜻한거 같은걸요?(웃음) 감사합니다 

민규/ 민규님의 이곳에서 잃어버린 체온을 되찾으시길 기원합니다(울음). 물론 이곳에서의 정규직분들로 인해 쓰기 시작한 글이기는 합니다만, 보다 일반적으로 바라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들도 사람이고 저희들도 사람이잖아요(웃음) 무엇보다도 정말 추운겨울이라는 건 민규님도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문단을 유심히 보시면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연(세)대이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담론을 이끌어가기에는 제 역량이 부족해서 말이죠(울음) 

그리고 저역시도 얼른 해고당했으면 합니다- 저는 민규님보다 한참 후에나...(울음) 2009-01-29
16:44:40
  

 

상병 이석재 
  이 세상에 취직보다 해고를 바라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것입니다. 딱 한곳 빼놓고 말이지요[웃음] 하아, 보고싶은 사람은 많은데 전화를 모두다 할 수 없으니 저도 막막하긴 하군요. 잠시 스쳐간 인연이라도 불교에서는 대단한 인연이라고 하지요. 2009-01-29
17:46:32
  

 

상병 이지훈 
  아, 저도 전화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이번 구정도 그냥 가족들에게만 전화하고 넘겨버렸네요. 허허 주위에서 체온을 나눠주시는 분들은 많은데...보답하기 참 어렵네요. 왜 이러지.... 

날씨처럼 훈훈한 글(?) 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