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베스트-내글내생각]뒤집어 보는 역사 1 - 삼별초는 진정 민족항쟁의 주역이었나?  
상병 윤현상   2009-01-27 17:13:04, 조회: 340, 추천:2 

뒤집어 보는 역사 1 - 삼별초는 진정 민족항쟁의 주역이었나?

불과 얼마 전, 모 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저자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수정되었다. 여의도에서 비싼 녹을 드시고 계신 상당수의 분들은, 그들의 교과서가 ‘편향적’이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었다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그 출판사의 교과서로 고등학교 역사를 배웠고, 대학에 와서도 역사를 전공하는 입장으로써 그날은 나에게 무척이나 슬픈 날이었다. 그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역사의 참모습을 발견하는데 필수 요소인 ‘다양성’이 침해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와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이상, 그 이전에 국민공통과정으로써 역사를 배우고 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맹점은, 역사가 ‘해석’이 아닌 ‘사실’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기실 역사란 ‘해석’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같은 사료를 보고도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서술의 방향과 문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서술하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정설’은 언제든지 새로운 해석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통해서만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교과서의 단정적이고 확고한 문체’ 덕택에, 또 가르치는 교사들이 오로지 교과서에 의존한 시점만 가르치는 덕분에, 교과서에 나온 ‘해석’이 마치 변하지 않는 ‘진실’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몇 번쯤 여기저기서 시도해 본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설’에 물음표란 이름의 돌멩이를 던져보려고 한다. 첫 번째 돌멩이의 희생자는 고려시기 대몽항쟁의 주역, 삼별초이다.

우선, 교과서에서 삼별초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자.
“고려 정보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 ㆍ 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이처럼 삼별초의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등학교 국사)

우리가 흔히 아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사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내용의 전부다. 고등학교때 국사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던 사람이라면,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권력기반이었다는 것까지 알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이렇게 열심히 대몽항쟁을 실천했던 삼별초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그러니까 언제 왜 설립됐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보자.

삼별초는 몽고침입 직전이던 1230년(고종 17년) 최우가 야별초를 설치하면서 만들어졌다. 야별초는 도시의 치안유지와 공권력강화를 도모하며 만들어 진 일종의 무장경찰집단이다. 몽고 침입후 그 숫자를 늘려 좌 ㆍ 우별초로 분리되었으며, 거기에 몽고에서 도망온 사람들을 모아 만든 신의군을 더해 삼별초라 불렀다. 

고려사에는 그 창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최우는 나라안의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를 모아 순찰하여 횡포를 막게하고, 이를 야별초라 불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를 나누어 보내 체포하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도적’이란 누구일까? 당시 고려의 실정으로 보면, 무신정권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살 곳을 잃고 떠돌던 유랑민, 혹은 향촌사회에서 무신정권에 저항하던 저항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삼별초의 출발은 분명히 무신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이런 태생적 특징상 삼별초는 권력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도시의 치안유지와 공권력강화’라는 설립 취지가 무색할 정도였다. 고려사 원종 11년 5월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권신들이 권세를 잡음에 삼별초를 하수인으로 삼아 그 봉록을 두터이 하고, 사사로이 은혜를 배풀었다. 또 죄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이들에게 주니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김준이 최의를 죽이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이는 데에 모두 그 힘을 빌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들이란 도둑과 같은 잡범이 아니라, 권력경쟁에서 패배한 무신 세력을 뜻한다. 김준이 삼별초를 사용하여 최의를 죽이고 난 뒤 최의의 재산을 분할하여 삼별초에게 나누어 주었음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패배한 무신 세력을 ‘죄인’이라 통칭한 것이다.

자, 이정도면 삼별초가 성립된 이후로 무슨짓을 하고 다녔는지 대충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자고로 이런 집단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인데, 삼별초가 권력에 봉사한 것이 꼭 삼별초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그들을 지휘하던 장수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내부의 권력투쟁사와는 별개로 몽고와는 열심히 싸우지 않았을까?

교과서에서 가장 주목하는, 삼별초가 진도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몽항쟁이 시작되는 것은 1270년이다. 이해를 위해서 약간 이른 1268년부터 삼별초의 행적을 훑어보겠다.

1268년 12월 임연은 삼별초를 이용하여 김준을 죽이고 집권에 성공한다. 집권 직후 임연은 몽고의 힘을 빌려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환도해 왕정을 복고하려던 원종을 폐위시킨다. 
개경 환도(출륙)과 왕정복고는 당시에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국토의 대부분이 몽고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 가운데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에의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간 강화도에서 끈질기게 저항했던 무신정권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무신정권의 타파와 왕권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이 시점에서 몽고에의 항복은 = 개경 환도 = 왕정복고 를 뜻하는 것이었고, 몽고에의 저항 = 강화도 정부 유지 = 무신정권 유지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전에의 굳센 의지에도 불구하고‘ 폐위 1년만인 1269년 11월에 원종은 몽고를 등에 업어 복위에 성공한다. 원종은 몽고에서 왕위 임명을 받은 후 강화도로 돌아오지 않고 개경에서 멈춰 선다. 일종의 개경환도를 위한 시위였던 셈이다.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는 그해 병사한 임연의 아들, 임유무였다.

임유무가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원종의 편에 서 있던 장수, 송송례는 야밤에 삼별초를 찾아간다. 여기서 이들이 임유무의 권력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어떤 말로 설득시켰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설파했다고도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에 부정적이다. 어쨌든, 송송례는 삼별초의 설득에 성공하고 병사를 이끌어 임유무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임유무를 죽이는 데 성공한 송송례는 곧장 강화도를 나가 원종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원종은 크게 고무되어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개경환도 결정에 삼별초는 크게 반발한다. 삼별초는 즉시 강화도 내의 곳간들을 털어 그 재산을 나누었고, 이에 당황한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삼별초의 명부를 취하여 가기에 이르자 삼별초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에 있던 물자를 배에 나누어 싣고 진도를 향해 떠나가게 되며, 이때부터 교과서에 실린 본격적인 항전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길게 위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삼별초는 대몽항쟁을 주장하던 임유무를 죽였다가, 곧바로 개경환도에 반대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여준다. 이들이 과연 ‘대몽항쟁이라는 의식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들법한 행동인 것이다. 또한 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듣는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식 군사집단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삼별초는 김준, 임유무 등 그들이 모셨던 최고 지휘관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삼별초가 그들 내에 자체적인 우두머리를 가지고, 그들의 판단에 의해 움직였음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되면 삼별초를 보는데 있어 사적 이익군사집단의 성격이 더 강해져 보인다.

또 삼별초가 무신정권에 봉사하면서 몽고와 열심히 싸웠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신정권의 정권찬탈에 자주 이용되었던 데서 보듯이 삼별초는 육지에서 몽고군과 싸우기 보다는 강화도에 머물면서 무신정권을 호위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무신정권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권력기반인 삼별초를 밖으로 내돌리는 것은 그렇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별초는 때때로 육지로 나가 세금을 징수하거나, 몽고군의 정황을 염탐하고 오기는 했지만, 몽고군과 전면적인 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삼별초에 대해서 흔히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면을 한번 살펴보았다. 어떻게, 삼별초가 좀 다르게 보이시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위에서 길게 말한 이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민족사’라는 것에 큰 의의를 두는 사람이라면, 1270년 이후(삼별초가 진도로 옮겨간 이후)의 삼별초의 행적은 분명 의미있는 사료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에 있어서 ‘확실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도, 어떤 서술도 ‘사실에 근접할 가능성이 있는 것’일 뿐이지 완전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는 듯한 실수라고 표현하지만,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 사람도 코끼리를 앞에서 보느냐, 옆에서 보느냐, 뒤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묘사나 서술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이 모두 다르더라도, 그것은 ‘코끼리’라는 하나의 사물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 또한 그와 같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같은 본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뒤쪽에서 코끼리의 엉덩이만 바라본 것을 코끼리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기는 힘든 것과는 마찬가지로, 역사에도 ‘보다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정설’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사람들이 호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백조는 모두 하얗다고 생각한 오류와 마찬가지로, ‘정설’ 또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사료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역사를 배우고 연구함에 있어서 ‘다양성’은 중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상처 입은 한국 역사교육에 애도를 표하며 이만 줄인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2-12 10:1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19:39 

 

병장 김민규 
  오지선다로 "답"을 요구하는 지금대로라면, 우리의 교육은 역사의 그 어떤 해석의 여지도 살려두지 못할 겁니다. 역사를 수학문제로 간주해버리니 치사하게 연도가지고 장난치고 사람 이름 바꿔놓고 틀린거 고르라고 하지요. 고등학교 당시까지, 도대체 왜 그걸 배우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좀 유치한 상상을 해 봤는데, 삼별초가 무신들의 '어깨싸움의 장'이었다고 하면, 그러니까 서열대로 좍 형님, 하면서 모시는데 그러다 치고받아서 꺾으면 그게 변동되는 식이었다고 하면, 또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겠죠. 모를 일입니다. 언제 건달이 당위에 움직이는 법 있던가요?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또 다른 주제들을 던져주실 듯 한데, 기다리고 있을게요. 2009-01-27
17:19:58
  

 

상병 이지훈 
  엇, 현상님 배터리 하나 늘었군요. 축하드려요. 무준님 칼럼에 댓글 달으시던 때는 두칸이셨던 것 같은데 아, 제 기억이 맞다면요 긁적.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무엇이었다 라고 하는 것은 민족주의에 입각한-우리는 수많은 외침을 견뎌낸 민족이다 뭐 이런 류의- 조금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잘 읽었습니다 2009-01-27
17:48:56
  

 

병장 이동석 
  와 저 이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호, 결국엔 내공 부족으로 접었지만,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고로 현상님은 반드시 시즌 2를 오셔야 합니다. 흑 2009-01-27
17:50:00
  

 

병장 이동석 
  혹자는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설파했다고도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에 부정적이다. 어쨌든, 송송례는 삼별초의 설득에 성공하고 병사를 이끌어 임유무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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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하하,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설파했다-니 그건 해석이 아니라 거의 개그로군요. 2009-01-27
17:57:52
  

 

일병 홍새암 
  잘 보았습니다! 역사를 전공하고 싶은 소망을 아직도 가슴 한 켠에 간직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글들로 궁에서 조금씩이나마 갈증을 풀게 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2009-01-27
18:37:38
  

 

상병 이석재 
  잘 봤습니다. 사실 진실과 사실은 어긋나기 마련이라서 말이지요. 2009-01-28
14:02:53
  

 

병장 홍석기 
  삼별초는 일종의 용병단(?) 역할을 하고 있었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사료 해석의 문제도 그렇지만, 한 시대는 물론이고 한 사건만 보아도 관련된 사료가 엄청나게 쌓여있는 관계로, 사실 어떤 사료를 내보이고 어떤 사료를 내보이지 않느냐, 라는 선택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부터 역사는 '사실'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겠죠. <미국 민중사>의 저자인 하워드 진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자는 나에게 완벽하게 중립적인, 진실한 텍스트를 만들어 달라고들 한다. 역사사서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하지만 나는 그러한 텍스트를 쓰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저자의 편견이 작용할 수 밖에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었던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짧은 기억력에, 원서를 들고 있던 마당이라 정확도는 무지 낮음. 

저도 교(양)과(학)서 문제에 대해서 어림도 없는 글을 쓰고 있다가 하워드 진이 <미국민중사> 맺음말에 남긴 글을 보고 바로 접었습니다. 그래서 그 글을 옮겨 올까, 했는데 번역판은 구할수가 없고, 그렇다고 원서를 번역하자니 실력도 안 되고 무엇보다 귀찮아서 폐기 처분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니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는 군요. 다시 번역을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2009-01-28
17:02:11
  

 

상병 이석재 
  역사가의 중립적 가치에 대한 문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지요. 과연 역사가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니고 글을 써야하느냐, 아니면 가치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하느냐에 대한 것 말이지요. 예로부터 역사가 '승리자에 대한 역사'라고 가치폄하되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보자면 역사가 중립적인 가치에 의해 쓰여지기는 거의 힘들다고 봅니다. 고슴도치도 제 아들딸은 아낀다고, 자기의 유산을 더욱 아낄 수 밖에 없으니까요. 2009-01-28
20:21:05
  

 

상병 이지훈 
  이미 역사의 중립적 가치 문제는 인류가, 역사학이 해결해버린 문제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적어도 역사 서술에 있어서는 그렇게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E.H.카 이후 중립적인 가치를 중요시해왔던 역사 서술의 가치는 끝장이 났다고 생각해요. 서양의 역사학 개념에서 살펴볼 때 동양의 역사 서술이 객관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아예 역사 서술이 아니라 그냥 과거의 나열에 가까운-과거의 나열일 뿐인 것 같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도 사관의 가치관이 뚜렷이 박혀있고, 그를 편집한 춘추관 관리들의 가치, 왕이란 지배자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술이 있는 것을 보면 '중립적인'은 거의 환상일 뿐인 것이 아닌가 싶네요. 2009-01-28
21:15:40
  

 

상병 윤현상 
  지훈/ 앗, 눈치채셨군요- 아무도 모를줄 알았는데요(웃음). 역사서술의 중립성이 불가능 하다는건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학은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랑케의 실증사학이 주류였고, 현재도 원로사학자들에 의해서 그 영향력이 여전하기 때문에, 글 쓰는 방법에 있어서나, 강의하는 법에 있어서나 여전히 '중립적'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석기/ 앗, 번역 해주시는건가요? 미국 민중사는 저도 얘기로만 많이 들어봤지 한번도 제대로 읽어본적은 없었는데, 기대되네요. 부탁드릴게요. 

석재/ 지훈님이 잘 말씀해주셨지만, 저도 역사가 중립적일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역사가 흔히 말하듯이 '승리자에 대한 역사'라고 가치폄하 되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는, 당대의 사료가 '승리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까지 감안하기 때문이죠. 만약 승리자에 대한 역사만이 남아있다면, 지금까지 쓰러져 간 많은 나라들이나, 실패했던 수많은 운동/혁명들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하지는 않겠죠. 2009-01-30
15:42:02
  

 

상병 윤현상 
  민규/ 사실 역사를 오지선다형으로 정답을 고르라고 하는 그런 교육방식이 학생들을 역사에서 멀어지게 만들죠. 사극을 재미있게 보는 아이들이, 역사수업이라면 고개를 흔들흔들 젓는 현실이 슬프달까요. 재미있게 가르치자면 얼마든지 가능한 게 역사수업인데 말이죠. 

동석/ 저녁밥 드실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었죠? 맛있는 저녁식사가 되시길 바래요(웃음). 시즌 2는.. 아직 배터리가 꽉 찰려면 한참 남은 저에게는 그림의 떡이라서요. 2009-01-30
15:52:27
  

 

일병 김소망 
  예전에 과답사를 준비하면서 삼별초에 관한 에세이 한 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삼별초와 탐라민, 그리고 당시 탐라의 지배세력과의 관계에 관해 쓴 글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측면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삼별초의 항쟁이 한반도 남부해안 지역 및 제주도의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생각해봤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에도 의문이 들었지요. 진도에 위치한 용장산성을 보며 삼별초의 "반외세 항쟁"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용장산성을 쌓는데 동원되었을 진도 주민들에 대한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점, 삼별초가 제주도를 항쟁의 기지로 삼았을 때 삼별초의 군비유지에 동원되었을 법한 제주도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였었지요. 물론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할만한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세미나에서는 보기 좋~게 깨졌지만, 한 번쯤 눈을 돌려볼만도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09-01-31
01:31:26
  

 

상병 이지훈 
  현상/ 

역사, 역사학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꺼냈던 사람이라면 제 레이다망을 피할 순 없습니다. 흐 

소망/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정치사가 중심이 되는 서술도 좋지만, 사실 놓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을 통해 정치사 중심 서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지만, 역사학의 문제이니 역사학이 해결해야겠죠? 이왕 말씀 꺼내신 것 좋은 글로 닦아주심이...? 흐 2009-01-31
13:22:56
  

 

상병 윤현상 
  소망/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인 것 같네요.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접할수 있는 사료가 굉장히 제한된다는 점이겠죠. 특히 민중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한계는 더 분명한 것 같아요. 뭐 어쨋든, 나중에 한번 찾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생각인 것 같네요. 2009-02-09
17: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