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스타의 연인]에 대한 잡상  
상병 김예찬   2009-01-08 12:57:40, 조회: 312, 추천:0 

[베토벤 바이러스]의 종영 이후 마땅한 수목 드라마를 찾지 못하고 잠시동안 방송 삼사의 각 채널을 방황하던 저를 어느샌가 고정 시청자로 만들어버린 드라마가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스타의 연인]입니다. 드라마의 제목부터가 [노팅힐]을 연상시키는 이 드라마는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일 양국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최지우)와 그 여배우가 쓴 것으로 되어있는 기행문의 대필 작가(유지태)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최지우를 어린 시절 부터 좋아했던 남자(이기우)와 유지태의 옛 연인(차예련!)이 개입되면서 전형적인 사각 로맨스가 펼쳐지구요, 게다가 최지우가 소속된 기획사의 사장이 가진 야심과 자유를 찾고 싶어하는 최지우 사이의 갈등, 그리고 대필 의혹의 언론 보도 등의 스캔들이 연달아 이어지며 극의 내용은 흥미를 더해갑니다.

사실 [스타의 연인]은 크게 기대하지 않던 드라마였어요. 몇 달전 처음 제작 발표 소식이 들렸을 무렵부터 스포츠신문을 통해 공개된 드라마의 대략적 내용은 최지우라는 한류 스타를 이용한 그럭저럭의 로맨스물이겠거니, 하는 정도였죠. 전 이상하게도 최지우가 나왔던 드라마들은 모두 그리 상성이 맞지 않는 편이라 - 부모님이 닥본사하던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모두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 [스타의 연인]도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참 괜찮게 생각하는 배우인 유지태와 유망주로 일찍 부터 점찍어놓고 있었던 차예련(!)의 출연을 뒤늦게 알지 못했더라면 애초에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에요. 1,2화는 종합병원2에 밀려 본방도 보지 않았고, 우연히 주말에 재방송으로 1화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초반부터 드라마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솜씨가 제법인데다가 생각보다 예쁘고 무엇보다도 귀여운(!) 최지우의 모습이 마음에 들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극중 대필 작가인 김철수(유지태)의 설정이었습니다. 김철수는 '어린 시절 바람난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여동생과 함께 이모들에게 길러진 서울대 국문과 박사 과정 시간 강사'로 출연합니다. 극 초반에서는 대학원 등록금을 대지 못해서 부유한 옛 여자친구 최은영(차예련!)이 몰래 등록금을 내 주기도 하는 안타까운 인생이죠.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무너진 자존심에 은영에게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그러게 내가 법대나 상대 가랬지 누가 먹고 살기 힘든 국문과를 가랬냐"는 이모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습니다. 여배우 이마리(최지우)의 책을 대필하게 된 것도 은영에게 등록금을 갚기 위해서에요. 한마디로 이 시대의 가난한 인문학도를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죠. (물론 부잣집 딸(차예련!)과 한류 스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잡는다면 김철수는 평생 돈 걱정 안하고 공부할 수 있겠죠. 아, 부러워라)

김철수가 대필한 이마리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이마리는 토크쇼나 [책을 말하다]류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교양을 드러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교양과 상식이라고는 윤 모양 수준인(아테네는 왜 밤에 축구를 하는거죠?) 이마리는 유식한 김철수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청하구요. 김철수는 이마리가 TV프로그램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과외 선생으로 다시 한번 인연을 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마리가 보내는 문자메세지에 통신체와 이모티콘이 섞여있는 것에 대해 김철수가 항상 짜증을 내는 장면은 김철수의 인문학도적 성격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김철수의 방은 '박사 선생님'의 방 답게 수천권의 책이 쌓여있는 서재에 가깝습니다. 힐끗 힐끗 책들을 지나치는 카메라 화면에 등장하는 책 중에서는 낯익은 책들도 많이 등장하더군요. 그 두꺼움으로 눈에 확 뜨이는 [힐쉬베르거 서양 철학사]도 있고, 김수영의 시집들도 발견했구요, 저번 주인가에는 라캉의 [욕망이론]과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도 언뜻 보였던 것 같아요. 드라마 상에서도 [오만과 편견]이나 [폭풍의 언덕] 같은 영문학 고전들이 가벼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죠.

이처럼 [스타의 연인]의 '박사' 김철수의 설정은 마찬가지로 인문학을 전공하는 저에게는 드라마의 주된 재미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나름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김철수에 비해 제가 아는 허름한 석박사 과정 형들을 생각하면서 낄낄거리기도 하구요. 앞서 얘기하기도 했던 "그러게 내가 법대나 상대 가랬지 누가 먹고살기 힘든 국문과를 가랬냐"는 대사는 뭐 저도 이제까지 한 두번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라 슬퍼지기도 했죠.

비슷한 재미를 느꼈던 영화 중에 [방문자]도 있어요. 영상이론을 가르치는 무력한 386세대의 무기력하고 짜증스러운 계몽주의자이자, 이혼한 시간 강사로 등장하는 주인공(갑자기 배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누구였더라..)이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이자 인간적인 대학생([영화는 영화다], [경성 스캔들]의 강지환)의 갑작스러운 전도 방문으로 인해 서로 서로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인간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며 감화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죠. 

김철수와 같은 지식인에 대한 클리셰가 로맨틱 코미디의 가벼운 터치로 다루어지는 [스타의 연인]과 달리 [방문자]의 '지식인'캐릭터 묘사는 많이 어둡긴 합니다. '지식인'은 유별난 사회 비판 의식을 가진(술만 마시면 부시 욕을 하는 그의 방에는 맑스와 엥겔스의 초상화가 붙어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잘나가는 중견 기업 간부가 된 동창들과 술을 마시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술자리를 뛰쳐 나가기도 하죠.) 일상 생활에서의 그는 방에 윤락 여성을 끌여들이고 노래방에서 여자를 부르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사회 변혁과 혁명과, 휴머니즘, 인문주의를 이야기하는 패배주의적 지식인이죠. [스타의 연인]과 [방문자]의 지식인 캐릭터에 대한 묘사의 분위기는 이처럼 매우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두 작품이 보여주는 시선은 동일합니다. '지식인', '공부하는 사람'은 세대에 뒤쳐진, 까탈스럽고 유별난 사람들이라는 거죠.

자신의 문자 메시지에 짜증을 내는 김철수에게 이마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 다 이렇게 보내요. 이상한 사람이네?" [방문자]에서 만난 동창들의 술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오갑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잖아? 시대가 바뀌었어" 책마을 회원 여러분도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누가 그런 책 읽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청춘의 종언'과 '20대의 위기'를 고민하는 것은 시대에 안맞는, 사치스러운 이야기일는지도 모르죠. 사실 [스타의 연인]이나 [방문자]에서 그 농도는 다르지만 부정적인 면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것만큼, 유별나고 까탈스러운 '지식인'들이 그렇게 과연 필요한 존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사실 자기 만족에 불과한 것이고, 그 길로 인생의 방향성을 설정한 것도 이제까지의 인생 행로를 수정하기 두렵기 때문에, 진리의 탐구와 사회의 진보 등의 이런 저런 핑계들을 갖다 붙혀 자기 위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서 글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스스로의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러나 [방문자]의 마무리를 봅시다. 무력하고 실패한, 쓰레기에 가까운 삶을 살던 지식인은 어느새 그의 마음을 열고 진정한 친구로 거듭난 '방문자'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앞서 말했듯,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입궁을 거부하고 법정에 서자 그의 재판을 보러 갑니다. 자신의 신념을 나지막하지만 조용 조용히 이야기하는 '방문자'를 보며 지식인의 표정은 이제까지의 짜증과 무기력이 아닌, 앎과 실천의 합일을 이룬 평안함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그가 큰 깨달음이나 무언가 실천적인 방향으로 삶을 개선해 나간다는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제까지 그에게 지긋지긋하고 조소를 날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현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이혼 후 묘한 긴장을 유지해왔던 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게 됩니다. 그 것은 그에게 실천적 방향의 휴머니즘 실천이겠죠.)

[스타의 연인]은 지식인 클리셰를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남녀의 간극을 메워가는 로맨틱 코미디의 소재로 차용했을 뿐이라 김철수가 무언가 인상적인 변화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겠죠. 그러나 적어도 누구나에게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살아왔던 김철수가 이마리와의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라는 전개는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합니다. '관계'가 필요합니다. 까탈스럽고 유별난, 때로는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정녕 그들이 원하는 바의 앎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신하고, 그들이 조소하는 현실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 만남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것은 문을 걸어 닫고 방구석에서 책을 본다고 얻어지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찾는 진리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은 단지 세상의 축소판일 따름이지요. 연암 박지원은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에 있는 것만이 글자가 아니다. 푸른 나무와, 우짖는 새와, 붉게 피는 꽃. 이  세상 하나 하나의 모든 것이 다 글자인 것이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구 상에는 수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고, 수십억의 진리가 있습니다. 너와 내가 만나고,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가 만날 때야 말로 우리는 '진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관계를 맺고,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는 나의 빛'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정말로 나의 진리가 '진리'로 승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상식'이니 '교양'이니 '자유'니 '평등'이니를 언급했던 이제까지 저의 말들이 남들이나 저 스스로에게 자신만의 진리를 강요해 오지 않았나, 하고 다시 한번 반성해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38:24 

 

일병 조영준 
  그 이름 모를 남자의 이름은 이기우 가 아니었던가요..? 2009-01-08
13:03:48
  

 

상병 김예찬 
  맞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1-08
13:05:59
  

 

일병 권홍목 
  잘읽었습니다. 두 작품모두 접하지 않았어도 내용이해에 어려움이 없어 좋군요. 그런데- 


때 지난 연말결산 3편은 언제나와요?(웃음) 
기대하고있었는데(부담주기) 2009-01-08
13:26:10
  

 

상병 김예찬 
  제가 지금 사무실 사정으로 마이컴- 이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요즈음 기본적인 자료 조사에 필요한 사지방 이용이 힘들어서 3편은 좀 기다려봐야할 것 같네요. 근데 이러다간 올 해 연말에 쓰게될지도?! 2009-01-08
13:28:36
  

 

병장 이동석 
  파하하, 전 개인적으로 전형적인 최지우 캐릭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는 그 전형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유희적으로 살짝 비트는것만으로도 신선하더군요. 

하필 '서울대 국문과' 출신이라는 클리셰가 좀 거슬리긴 했는데, 뭐 티비에서 하는 트렌디 드라마니 너무 상투적인 포지션이라고 해서 나무랄건 없겠죠. 우리가 진부하게 생각하는 지식인상-은 딱 그정도의 모습일테니까. 

그런데, 윤은혜의 그 그리스는 왜 밤에 축구를 하냐-는 조금 왜곡이 있는게, 일종의 베이비복스 안티글이 만들어낸 연장선상이라더군요. 이를테면 간미연이 lose를 장미로 해석한달지 하는 등의. 

저도 대중매체에 대한 썰-을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본격적인건 아무래도 시즌2에서나 해야겠군요. 이젠 게으름 좀 버려야겠습니다. 

어쨌거나 사람입니다. 책마을이건 진리건, 방점은 책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왠 좋은 글 읽고 또 진리의지 타령인가) 2009-01-08
14:35:14
 

 

상병 김예찬 
  [스타의 연인]에서도 바로 그 lose 나 밤 축구를 패러디한 장면이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역시 인터넷의 뜬소문이었던가요. 아무튼 전 윤은혜를 참 좋아합니다(?) 2009-01-08
14:39:00
  

 

병장 김민규 
  느낌이 왠지 S본부 드라마인 것 같은데, 맞나요? 아직 한 번도 보지를 못했네요. 

대중 교양의 깊이없음을 탓하는 니체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 깊은 고독으로부터 갑자기 들려 나와 꺼내진 느낌입니다. 낙타라도 되고 싶었는데, 그냥 어린애처럼 뛰어다니면 된다고 하네요. 가치에의 지향은 하나의 투쟁이라고 믿어왔는데, 주변을 살피고 조화되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고 하네요. 

'그렇다. 나는 그대의 위험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사랑과 희망을 기울여 그대에게 간청한다. 그대의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 
그대는 아직도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대를 원망하며 악의에 찬 시선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도 아직은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끼고 있다. 고귀한 자는 만인을 방해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착한 자들에게도 고귀한 자는 방해물이다. 착한 자들이 고귀한 자를 착한 자라고 부르더라도 그들은 이와 같이 부름으로서 고귀한 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한다. 착한 자는 옛 것을 원하고 옛 것을 간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귀한 자가 착한 자가 되는 것은 그의 위험이 아니다. 오히려 뻔뻔스러운 자, 비웃는 자, 그리고 부정하는 자가 되는 것이 그의 위험이다.' 
<산 위의 나무에 대하여 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Friedrich Nietzsche> 

"그래서 '사람'이 필요합니다. '관계'가 필요합니다. 까탈스럽고 유별난, 때로는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정녕 그들이 원하는 바의 앎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신하고, 그들이 조소하는 현실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1-08
15:18:46
  

 

상병 김예찬 
  니체는 기지 있는 글쟁이는 독자들이 글을 읽을 때 살짝 미소 지을 만큼의 재기를 부린다고 쓰기도 했죠. 제 글이 지나친 경망이 아니었나 하고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2009-01-08
15:37:22
  

 

병장 박경민 
  김예찬급 김예찬 역시, 2009-01-24
16:2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