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날엔 장마


장마는 이삿날이라고 해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철없는 애들처럼 빼애 빼애 그칠 줄 모르는 것이, 이삿짐을 다 옮긴 후에도 마냥 이어질 것만 같았다. 이삿날 하필이면 이게 뭐람. 하기사 하필 장마철에 이사를 계획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쩌나, 기왕 계획한 일은 당장에 해치우는 것이 미루지 않을 수 있는 최선책인 것을. 옛날에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해서 이사가 실상 칼의 본래 목적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나 혼자 달랑 집에서 삐져나와 자취방을 차린 것 뿐이니까. 말하자면 독립일뿐이었다. 자연히 혼자 사는 집의 물건들은 많을 턱이 없었다. 좀 어려운 것이 있다면 침대와 책장 등 큼직큼직한 놈들이었는데, 그런 것도 용달차 한번으로 수월하게 해결 되었다.
그렇게 나의 조촐한 이사는 진행되었다. 이제는 큰 짐이 다 이동하고, 자잘한 짐정리만 남은 상태였다. 상황은 장마. 비 오는 날. 어떻게 보면 어울리기도 하는 것 같고, 작업의 힘겨움을 생각하자면 또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게 이사가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좋은 게 있다면, 이사를 핑계로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가 아니겠지. 이사하는 것을 도와주러 온 거니까 일종의 ‘구조요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쩐지 모르게 나는 독립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여자친구가 이삿짐을 함께 정리해 주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모를 일이지만 나에게는 왜 그리도 그 상상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던지. 물론 당사자의 의견은 들은 바 없다. 다만 생글 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에게서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할 뿐이다. 내 물건 날라주는 게 그리도 기분 좋냐. 하는 농담 아닌 농담까지 섞어서. 고마움은 커녕 그 따우 농담이나 해 대느냐고 구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저 나를 장난+사랑스런 표정으로 살짝 때렸을 뿐이었다.

독립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갖가지 소망을 제외하고서라도, 상황적인 특이성이 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형의 결혼이 그것이었다. 평생 결혼이라고는 할 것 같지 않았던 형이 어느 날 갑작스레 결혼 발표를 해 버린 것이었다. 형의 여자친구를 알고 있는 어머니로서도 이런 발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사태였겠지. 어머니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도 이 생경한 사태에 조금은 놀라는 눈치셨다. 허나 워낙에 티 없는 분들이기에, 그다지 조건이 없어도, 며늘아기가 착하면 됐지 하는 심정에 형의 여자친구를 별 탈 없이 맞아들이기로 마음먹으신 것 같았다. 형의 결혼 발표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어찌 보면 형의 결혼과 나의 독립은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나의 독립은, 나의 소망이라기보다는 부모님들의 소망이었으니까. 조용히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독립을 권유하는 나의 부모님들에게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방에서 놀고 있는데 ‘야 나와서 수박 먹어라’ 하는 식으로 ‘독립해라’ 라고 권유를 하셨다. 

현성아. 독립해라.
느이 형도 이제 독립해서 나가 살 텐데. 너도 독립 하고 싶지 않냐? 행여 자금이 부족하거든 조금씩이라도 보태 줄 테니까 너도 한번 나가서 혼자 살아 봐라. 아르바이트 하면서 집세 마련하고, 네 삶도 네가 꾸리고, 이제 우리도 챙겨주는 거 대신 부부끼리 오붓한 로맨스나 만들게 이눔아.

자식새‘끼놈들은 다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해라 그러면 안하겠다 한다는데, 독립만큼은 나에게도 얼씨구나였다. 그 이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독립생활의 환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멋질까. 나의 방을 스스로 인테리어 하고, 제약받지 않으며 사는 것. 나의 개성을 맘껏 뽐낼 나의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나의 ’방‘이 아니고 나의 ’집‘으로 탈바꿈 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 탈바꿈이라기 보다는 ’진화‘라는 말이 낫겠다. 왜 저그족이 잘 하는거 있지 않나 그거. 에볼루션.


“야 야 이거 이러다간 밥도 못먹겠다. 우리 밥이나 먹자 연진아”
“응?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은데...?”
그녀는 박스에서 책을 꺼내다가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책장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흐음 이런 책도 보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대답하면서 저런 표정을 잘도 짓는구나. 귀여운 녀석.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귀여운 뭐시기가 아니고 배고픈 뭐시기였다. 
“어차피 짐 정리 다 끝나면 박스 치워야지 방청소 해야지 뭐 해야지 뭐 해야지 하다보면 시간 더 늦어, 9시 넘어서 저녁 먹고 그러면 속 배린다 너.”
“어.. 나 청소까지 시킬 셈이었어?”
깜빡깜빡. 의아하다는 눈초리를 쏘아보내고 있다. 연진이는 가끔 이런 여우 총맹이같은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장난치자는 거다. 이럴 땐 무릎 꿇어야지. 그래야 애교 있는 남자친구가 되는 것일 게다.
“....일당 후하게 쳐줄게”
“아 정말? 호호홋”
서로의 대화가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럴 여념이 없었기에 나는 어둑어둑해지는 이 7시의 무렵에 짱개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삿날엔 시루떡은 못 먹어도 자장면은 꼭 먹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라. 번호는 옆집에 널부러져있는 광고 스티커로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검증되지 못한 맛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것.


“음. 여기 괜찮네 자장면 맛”
“응. 근데 단무지가 좀 너무 짜다”
사뭇 괜히 자장면 먹다가 여자친구로서의 지조를 다 망쳐놓을까봐 그녀는 면발을 조심스럽게 빨아올렸다. 그냥 다 묻히고 먹어도 되는데. 그러면 내가 닦아 줄 텐데. 하긴. 그림은 예쁘더라도 여자 입장에선 민망하겠다. 애도 아니고 참.
오른손으로 가냘프듯 젓가락을 잡고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단무지가 좀 짜면 어떠냐. 우리가 이렇게 한 지붕 아래서 밥을 먹고 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지금 한 방에서 꽤 오래 있었다.
“연진아 너 밥 먹고 그만 가 봐라. 일당은 다음에 챙겨줄게. 슬슬 집에 전화 올 때 안됐어?”
“그래?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을 리가 있나. 짐 정리하는 건 혼자서 거뜬하겠지만, 이 외로운 밤을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라는 건 반 쯤 농담이다. 우리 사귄지는 아직 100일도 안되었으니까, 벌써부터 뭔가의 작업을 이루기엔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나는 꽤나 그녀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벌써부터 욕망을 위한 관계로 발전해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밤을 같이 보내는 건 아니더라도, 함께 있어주면 좋겠는데. 조금 더.. 하지만 나는 욕망을 꺾어 내렸다. 깨갱.
“그럼, 괜찮지”
“....이런 상황에서... 날 보내는거야??”
어쭈. 또 여우 총맹이 같은 눈빛을 막 쏘아 보내고 있다. 꽤 괜찮은 유혹이다만,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보다도 그녀는 더욱 그런 것에 대해 두려울 거다. 아마도. 내 생각엔 그렇다. 경험상으로도 그녀는 내가 첫 남자친구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녀가 나한테 말하기도 했고, 그냥 그런 거다. 그리고 남자의 육감이란 것이 있다.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첫 연애라는 것이 티가 날 때가 많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방금과 같은 농담은 대단히 대단히 발전된 모습이 틀림없었다.
“늑대를 원하나?”
받아쳐주자.
“하하”
그녀가 웃는다. 나도 웃었다. 우리는 미소를 머금고 자장면을 쓱싹 비워버렸다. 조금 너무 짜다던 단무지까지 다 먹어버렸다. 뭐야 짜다더니.... 다음에는 다른데서 한번 시켜 먹어볼까. 그리고는 품위 없게 자장면 먹은 입으로 키스를 살짝 했다. 집안도 자장면 같은데 심란하긴 하다만, 이런 상황에서 키스도 없이 보낼 수야 없지. 그건 매너도 아니거니와 나의 욕망으로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오늘 고생 많았어. 다음에도 또 부탁해♡

그녀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고, 이런 문자를 날려주었다. 우리는 연인이니까 저런 문자를 보냈다고 해서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어 라는 반응을 내뱉지는 않겠지. 
역시나 예상대로 비는 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비 오는 날 이사까지 해서 자장면을 먹었구나. 이거 꽤 괜찮은 조합인데. 나는 그제야 자장면에 의미부여를 했다. 이윽고는 ‘너 고마운 줄 알아 비 오는 날 이사까지 하고 자장면 얻어먹었으니 최고의 조합 아니냐. 이런 눈물의 자장면은 사서도 못 먹어’ 라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혼자 키득키득 웃고만 말았다. 그래 농담은 여기까지 하자. 비도 내리는데 마음도 가라앉고 있었다.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외롭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독립 하루 만에 외로움을 깨닫다니. 나도 참 빌어먹을 애정결핍인가 보구나. 비가 내리는 상황은 논외로 치자.
우산을 쓰고 걷다가 잠시 미친 기분이 들어 오른쪽으로 우산을 뉘였다. 비가 몸으로 확확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비 맞는거. 꽤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도 좋아하는구나... 맞아 우리 그때 참 좋았었지. 비 함께 맞으면서...뚝섬 유원지에서...
아 제기랄. 또 그녀 생각을 해 버렸다. 분명 나에겐 연진이가 있는데도, 혼자 있다보면 이따금 첫사랑의 망령이 나를 휩쓸고는 했다. 마치 우산 쓰고 걷다가 잠시 우산 내 팽개친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드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건가. 너는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 내가 우산을 쓰고 막아내고 있는건가. 어차피 그녀가 스스로 나에게 쏟아질 리는 없었다. 우리는 끝난 사이니까. 거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 않던가. 나의 첫 연애상대이자 첫사랑. 그 뜨거웠던 열병의 증거라니. 열병이란 말이 생각났으니까 말이지 기왕 뜨거운 김에 비나 더 맞자. 나는 우산을 올리려다가 그대로 두고 비를 더 맞았다. 방어태세가 무너지니 감흥도 다시 되살아났다. 어쩌면 나는 망령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우리는 그날. 뚝섬유원지에서 비를 맞으며. 함께 거닐고. 아무도 없는 그 뚝방길에서.....

위이이잉

바지춤이 진동을 한다. 아차 하는 생각에 연진이가 퍼뜩 생각이 났다. 답문이겠구나. 뭐라고 할려나.
핸드폰을 꺼내어 비를 맞출 수는 없었으므로 우산을 다시 올려 방어막을 쳤다. 비를 막아두고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엄지손가락으로 튕기듯 폴더를 열어보니 귀여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좀 더 있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히잉. 다음엔 정식으로 놀러갈게요 오빠♡

제기랄. 진짜로 붙잡을 걸 그랬나보다. 하긴. 그대로 버팅기고 있었다간 연진이의 집에서 전화가 와서 왜 안 들어오냐는 확인 검문이 있었을 것이다. 통금이 확실할 만큼의 엄한 가정은 아니더라도 딸래미 걱정은 할 만큼 하는 부모님들이니까. 행여나 연진이가 외박한다면 부모님께 호된 꾸중을 들을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무단 외박이라면.
나는 다 그녀를 생각해 준거다. 그래 그렇지. 사실 말하자면 오히려 나를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 정도의 부담을 지울 만큼 나는 용기 있지 못한 놈이니까. 하기사 남녀의 성관계에 있어 책임을 묻고 안 묻고의 문제도 참 웃긴 것이긴 하다만. 섹스라는 것은 그래도 아직, 어느 정도의 부담감을 전재로 하니까. 오히려 사랑이란 것을 논외로 쳤더라면 가벼웠을 텐데. 그녀와 나의 관계는 사랑이란 것을 논외로 칠 수가 없었다. 뭐 다 핑계지 핑계. 하지만 아무튼 간에 내 생각으로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었다는 데에 있어서는 동감 한다. 연진아.

나도 안타깝다 다음에 오면 오래오래 있자~ 그땐 자장면 말고 오빠 손수 요리해줄게 ^^ 조심해서 들어가~

이상의 닭살스런 문자를 보내고 나는 메시지 전송 화면을 쳐다보다가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콕 눌러 폴더를 닫았다. 그리고 그처럼 간단하게 쏘옥 바지 주머니에 다시 핸드폰을 넣었다.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걷다보니 집 앞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우리 집이라니. 저번에 집 구경 할 때, 그리고 오늘 보긴 했다만, 도무지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집은 오피스텔 형식으로,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상권과의 주택지역의 경계점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시끌벅적함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의 입지였다. 나는 나름대로 다시 나의 집 창문을 바라다보며 만족해했다. 그래, 나는 독립했구나.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혼자 자축파티라도 할 양으로 집 건너편 건물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들어갔다. 장마인데도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어 놓은 걸 보면, 주인이 더위를 으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습기가 싫던가. 어쨌거나 밤기운도 에어콘만큼 빵빵하겠다. 오늘 이사도 했겠다. 나는 맥주 피쳐와 오징어땅콩, 오감자를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6000천원입니다”
삑삑 거리며 물건들을 찍더니 점원이 가격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래 요즘엔 가격 다 여기 액정에 나오더라.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 임마. 후훗. 오늘은 이사해서 기분 좋으니 봐 준다.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지갑을 열어 뒤적거렸다.
“근데 사장님 여기 우리 건물 5층에는 왜 점포가 안나죠? 저주라도 걸렸나”
“꼭대기? 아 5층 거기? 글쎄다. 벌써 거의 1년째 사무실이고 가게고 아무것도 안들어 오던데, 때 되면 들어오겠지”
“것 참 이상하네, 여기 정도면 지하철역 가깝지, 상권이지, 대학 부근이지 뭐가 들어와도 괜찮을 법 한데”
“별 걱정을 다 한다. 그럼 네가 하나 차리던가”
참 넉살 좋은 사장과 점원이다. 원래 이런 관계가 이 정도의 친밀도를 유지하던가? 그건 그렇고 이 곳이 그 정도의 메리트를 가진 지역이었구나. 나의 집은 상권에는 해당 메리트가 없다고 쳐도, 대학부근이라는 주변 물가의 저렴함 이라던가, 지하철역이 가까운 점등이 꽤나 큰 메리트였다. 아 내가 좋은 곳에 살고 있구나.
“여기요”
돈을 주면서 나도 이 사람들에 넉살에 편승해 ‘요 앞에 이사 온 사람이에요 앞으로 자주 들릴테니 잘 부탁드려요’ 하며 너스레를 떨까 하다가 관두었다. 하고 싶으면 내일 쯤 하지 뭐. 어차피 기억 못할 텐데.
“6000원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아 그럴까 내가 뭐 하나 차려볼까”
봉투 값이 아까워 주섬주섬 들고 가려고 하니까 점원이 또 미련을 못 버리고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이 못마땅하다는 눈치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알지만서도 나는 괜스레 인사를 건넸다. 뭐 식구들이랑 같이 살 때도 전혀 못 본 풍경은 아니었지만, 혼자 사는 집안에 혼자 들어오려니 느낌이 또 달랐다. 아 이것이 독립이란 거구나. 그래 한번 잘 살아보자. 나는 괜스레 감흥에 빠지고 유쾌한 기분이 들어 맥주와 과자를 방에다 던져버렸다. 이런 소소한 자유도 있구나. 엄마가 있을 때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저게 과연 내 새‘끼 맞나 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셨겠지. 아무튼 나는 홀로임을 만끽하고 싶었다. 맥주가 통통거리며 굴러다녔다. ’나 혼자에요‘라고 말하는 듯.
냉장고에 맥주를 넣고 나서, 나는 나머지 정리를 계속 진행했다. 아무리 감흥이 돌아도 아직 정리도 덜 된 전쟁터에서 축제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늘 미루고 내일 미루다 보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 그렇게 깔끔 떠는 성격은 아니지만 서두 첫날의 시작을 산만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열리지 않은 박스가 두 개 있었다. 뭐 저런 것쯤이야 소소한 물건들일테니까 금방금방 정리 하겠지.

서랍이라고 쓰여져 있는 박스를 뜯었다. 그러고 보니 서랍 안에 물품을 하나도 넣지 않았었구나. 그러고 보면 나는 가끔 서랍 정리하는 걸 참 좋아했던 것 같다. 귀찮기는 해도, 가끔 서랍 체 빼내어 다소곳이 정리를 해 놓고 보면 참 기분이 그리 뿌듯할 수가 없었다. 뭐 이내 망그러지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나, 다 커서나, 군대에서나 서랍 정리만큼은 제대로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처럼 설레는 기분으로 서랍들을 하나둘 빼내어 대충의 들어갈 물품들을 머리 속에 분류 구상해 놓고, 박스의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필통이며, 다이어리, 병뚜껑 모음, 노트들, 등등의 잡다한 것들이 차례로 나왔다. 하나 둘 분류를 하다 보니, 곧 바닥이 나오고 있었다. 하기야 애초에 많은 물품도 아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예쁜 박스가 하나 담겨 있었다. ‘추억’이라고 써져 있는 박스였다.
그래 난 그 박스가 어떤 추억을 뜻하는 박스인지 알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비가 들이치지 않는데. 이 박스가 ‘비’인 셈이로구나. 난 우산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또 들어오는구나. 이렇게 불쑥 심심치않게 튀어나오네. 니가 놀래기냐. 이건 관련 없나. 하여간
나는 괜스레 착잡해지고도 청순해진 감흥으로 박스를 차분히 들고 바라보았다. 팔꿈치를 다른 박스에 기대고 딱 눈높이에 맞춰 지긋이... 그리고 슬며시 박스를 열었다. 생각대로였다. 그때 그녀가 보냈던 편지.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 그 조그만 편지하며, 유일하게 선물했던 스킨. 내가 그녀와 대화한 엠에센 기록, 그녀의 사진들이 담긴 CD 한 장, 그리고 6면이 ‘현성이’로 쓰여져 있는 주사위, 조그만 엑세서리 등이 담겨져 있었다. 추억이 고대로. 스킨에서 살금살금 나온 스킨냄새가 추억을 향기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록 내가 한동안 쓰던 향기이지만. 그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발랐던 스킨이니 만큼.
나는 그랬다. 연진이를 두고도 이런 감흥들을 쉽사리 손에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이름이 6면에 적혀져 있는 ‘현성이’ 주사위만 꺼내어 들고 박스를 조심스레 닫아 맨 밑 서랍에 놓아두었다. 하하. 내 이름이 쓰여져 있는 주사위라니. 생각도 참.


있잖아. 나한테는 행운의 주사위가 하나 있다?
응? 뭔데? 누가 너한테 총 쐈는데 그 주사위가 막아주기라도 한거야?
으이그 낭만 깨는 소리 좀 하지 마 좀. 
ㅡ 그리고 그녀는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살짝 아팠다.
그런 소리 그만하고 직접 보기나 해.


그게 이 주사위였다. 행운의 주사위라고. 내 이름이 나오면 행운이라서. 온통 주사위를 떡칠해 놨다고 장난스럽게 말했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그리고는 둘이서 신나게 좋다고 주사위를 주고받던 생각이 났다. 받지 못해 굴러떨어지면 저거 보라고 행운의 숫자가 나왔다고 낄낄댔었다. 그리고는 키스했었지 아마.
나는 그 생각에 피식 웃었다.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어두고서.

정리에 청소까지 다 하니까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비는 지겹게도 아직까지 오고 있었다. 줄기는 조금 약해진 탓에 소리가 많이 들리진 않았지만, 비가 온다는 것 만큼은 확실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풍경이라니. 내 집은 이렇다할 풍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숲이 펼쳐진다면 참 좋겠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상권과 유흥가, 주택지역뿐이니까. 그것도 정면에는 아까 내가 맥주를 샀던 편의점 건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어 그마저도 다른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잇. 뭐 내가 풍경까지 따지게 생겼어. 그런 건 나중에 출세하고 생각하자고. 하며 나는 낙천적으로 맥주피쳐를 땄다. 자축의 시간이었다.

“독립을 축하한다 현성아!”
꿀꺽 꿀꺽
“크아아”

큰 글라스에 따라놓고 한 컵을 다 비워버리니까 이사를 마친 시원함이 훨씬 더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여기에 또 노래가 빠질 수 없지. 분명 내가 바랬던 독립생활의 판타지에는 ‘음주생활공간의완성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고로 분위기 좋은 바에는 좋은 노래가 빠져서는 안되니까. 나는 나의 탁월한 선곡에 맡겨 이사온 집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키고, 예전부터 내가 추가해 놓았던 윈엠프의 플레이 리스트를 띄워 올렸다. 딸깍. 플레이.
첫 곡은 헤드윅 OST인 Wicked little town 이었다. 캬 죽인다. 볼륨 좀 높여볼까. 너무 많이 높이면 옆집에서 난리 칠테니까 적당히. 적당히.
그러고 보니. 이 노래는 또 감출 수 없는 감흥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신나는 기분으로 갈려 했더니 안되겠네. 바꿔야겠다. 이 노래는 그녀와 함께 DVD방에서 본 헤드윅의 OST였다. 건전하게 영화만 잘 봤는데도, 이상하게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맞는건가. 영화도, 옆에 있던 그녀의 따스함도 지금까지 아련히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팔을 뻗어 마우스를 잡고 곡을 바꾸려다가. 나도 모르게 다른 버튼을 눌러 다시 곡을 처음으로 돌려 놓아버렸다. 노래는 흘러나오고 있었다. 빗소리도 아련하게 들렸다.

극 중 트랜스젠더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련하게 말했다. 사악한 작은 마을에서, 나의 목소리가 들리느냐고, 들린다면 따라오라고. 그래. 따라와 달라고. 힘겹지만 따라와 달라고.
나도 말했었다. 나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신음하듯이.
따라와. 나는 너를 사랑해. 사랑해. 그러니 너만 괜찮다면, 다른 길이 없다면, 나의 목소리라도 따라와, 내가 최소한, 그렇게라도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나는 항상 너를 부르고 있으니. 너만 괜찮다면 따라와 주렴. 그렇게 말했다. 그랬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무엇인가 두려워졌어.’ 라고 말했었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야옹야옹 하고 그녀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런 목소리 따위 무시할 만한 그 두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느새 맥주를 좀 마셨는지 취기가 살짝 돌고 있었다. 피쳐를 보니 1/3가량이 남아있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현성이’ 주사위가 불쑥 나왔다.
흥 제기랄 현성이 주사위 좋아하시네. 행운이라고? 행운? 그런 행운을 져버렸단 말이야? 까고 있네. 정말. 웃기지도 않아. 나는 노력했는데. 아니. 사랑했는데, 왜 너는 나를 져버렸을까. 나는 그렇게 가치가 없었나. 나 혼자 울고 있던게 잘못이었을까. 너를 좀더 울게 해야 했을까. 빌어먹을. 이따위 주사위...
나는 벽을 향해 세게 주사위를 집어 던졌다. 힘차게. 성깔을 부리면서.

파작!

어라.
분명 나는 벽에다가 던졌는데, 미끄러졌던가보다. 유리창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 호야! 이사 첫날부터 이런 호사가! 성질이 버럭 났지만, 겁부터 났다. 어차피 내 살림이라 그다지 걱정할 게 없건만서도, 오랫동안 부모님과 같이 살아온 까닭에 혼날 두려움이 먼저 앞섰던 것이다. 나는 이내 침착해 져서 나 혼자 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갈아 끼우면 그만이지. 한 2만원이면 될래나?
갑자기 사악한 작은 마을이고 나발이고가 짜증나서 나는 소리를 확 줄여버리고 유리창 상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신기하게도 거미줄처럼 금이 갔을 뿐, 깨어져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중창이라 바람 맞아 떨어질 가능성도 별로 없을 것 같긴 한데. 어쨌거나. 젠장. 깨어져 버리다니. 약하기도 해라.
살짝 취한 기분으로 유리창을 쳐다보며 맥주를 홀짝이는데, 건너편 건물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글자 전광판. 세련되게 디자인된 폰트로. Carpe Diem 이라 쓰여져 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BAR 전광판이 반짝이고 있었고. 
카르페디엠이라. 멋진데? 술집인가보네. 그러고보니 아까 저런 가게가 있었던가? 층수를 세어보니 5층이었다. 응? 5층? 아까 편의점 점원이 점포 안난다고 그랬던 데 아니던가? 신기했다. 창문 밖으로는 비가 오고 있었다. 아마 점원이 잘못 알았나 보지. 하하. 바보같이. 숫자도 못 세나. 그러고보니. 제대로 된 바를 가 본지 참 오래된 것 같았다. 창문도 깨지고, 음악 들으니 우울도 한데, 자축파티를 바에서 제대로 한번 가져볼까. 좋다. 나는 이것도 기회다 싶어 마음을 다졌다. 가게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현재를 즐겨야지. 이까짓 창문 깨진 거 걱정해서 뭐해. 혼자 살 걱정해서 뭐해. 지금 기분을 즐기자고! 마치 가게가 나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날씨도 술 마시기 딱 좋았다.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합산하여 나가기로 마음먹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창문 깬 장본인이 바닥에 디굴 거리고 있기에 집어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현성이’가 나와있었다.
쳇. 행운이라면 행운이구나.

나는 남은 맥주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건너편이므로 굳이 우산을 챙길 이유는 없었다.


밖은 반짝반짝 거리고 있었다. 도로와는 좀 먼 까닭에 내가 좋아하는 빗길에 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스팔트에서 속살거리는 비 소리는 한지의 튕김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더욱 멋지게도, 유흥가의 전광판이 그 반짝이는 도로에 비쳐 빛들을 알록달록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 알록달록한 소리들이 솨아아아 거리는 것 같았다. 카르페 디엠. 맙소사. 술을 마시라고 온 거리가 나를 재촉질을 하는 구나. 나는 얼른 뛰어 건너편 건물로 넘어갔다. 편의점 옆으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니 엘레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서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마치 액정에 떴던 6000원처럼 1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편리하구나. 어디에 있는지, 이게 얼마인지 바로바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란 건.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헹. 생각해 보면, 부정하고 싶지만 이렇게 내가 이곳의 바를 찾아 올라가고 있는 까닭도 다 어디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자취 때문일 것이었다. 술을 마시면 내 머리 속 액정에 그녀가 어디있는지 띠링 나올까. 최소한 추억 속의 그녀라도 찾을 수 있겠지. 헛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베이터는 띵 하고 5층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가게는 여과없이 엘레베이터를 내리자마자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펼쳐지는 감흥의 공간이라니. 아 멋지다. 집 바로 건너편에 이런 멋진 바가 있다니.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나는 주머니속에 있는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마력이 발휘가 되는 건가. 어처구니 없다. 나는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아직까지 잊지 못하며 신뢰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비단 그것이 과거의 그녀라 할지라도. 추억속의 그녀라 할 지라도. 술을 먹으면 머리속 액정에나 나타나는 그녀라고 한다더라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지금 나에겐 연진이가 있는데.

“어서오세요”
따로 종업원 없이 바텐더가 유리컵을 닦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바였다. 보사노바풍의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은 대여섯 명 정도. 원형 탁자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도 보였고, 그야말로 바에 앉아 홀로 홀짝이는 사람도 있었다. 창가 쪽 자리에서 반짝이는 거리를 내다보며 음악에 심취한 사람도 있었다. 바를 많이 가본 것도 아니지만, 이 바는 딱 내 취향이었다. 그나저나 비싸 보이는데, 괜찮을까. 많이 마시지는 않으리라 기약하며 딱 3만원만 가지고 나온 나였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비에 살짝 젖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바텐더 앞쪽 의자에 앉았다. 일단 한숨부터 쉬자. 이런 분위기 좋지만, 적응 안되는 게 사실이니까. 오늘 저녁 만해도 나는 자장면을 먹고 있지 않았던가. 과분한 자축파티였다. 그래도 이런 날 기분을 내야지. 현성이 주사위도 그러라 하지 않았던가. 헹.
내가 자리에 앉아 무엇을 시킬지 몰라 고민을 하고 있자니 바텐더가 조용조용 닦던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쪽에서 병 하나, 저쪽에서 병 하나를 꺼내어 들고는 컵에 섞어 따르기 시작했다. 얼음도 몇 개 넣었다.

“럭키.”
“네?”
그는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갑자기.
“서비스 입니다. 운이 좋으신 분이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뭘 기다렸다는 거지?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바텐더가 주는 잔을 들어 조금 홀짝였다. 톡 쏘는 탄산이 강하면서도 향이 알싸한 술이었다. 목으로 타고 들어오는 걸 보면, 알콜농도도 그다지 낮아 보이진 않았다. 어쨌거나. 맛이 기막혔다는 거다. 술에 대해 무지한 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나서 조금 더 홀짝이고 있으려니, 바텐더는 무관심한 듯 나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그머니 고양이 발걸음처럼 웃으며 제 할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 옆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도 그러했다. 나는 먼저 이런 자리에서 말을 거는 데에 익숙치않았으므로, 영 이 자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뭐야 나는 좀 말도 걸어주고 그럴 줄 알았지.
어쨌거나, 공짜 술도 생겼겠다. 나는 되는 데로 이 술로 뻐기기로 결심을 하고 잔을 들어 창가 쪽으로 이동을 했다. 뭐 딱히 어떤 대인관계의 발전을 기대하며 이곳에 온건 아니니까. 반짝이는 도로의 흥취나 느끼면서 자축을 해야겠다. 마침 건너편으론 우리집이 보일테니까. 금간 유리창을 보면서 독립의 결심을 홀로 칭찬해 줘야지. 하기야. 내가 먼저 결심한건 아니지만서도.

마침, 창가 쪽으로 앉은 사람 중에는 여자가 한명 있었다. 뒷모습이 꽤 예쁜데, 마치 그녀 같다. 뒷모습이 그녀를 닮았어. 하핫 내가 취했나보다. 빌어먹을 아직도 망령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나는 나를 책망했다. 그리고 알싸한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그녀 옆옆 자리에 앉았다. 말했듯이 나에겐 굳이 대인관계를 발전하려는 목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연진이도 있으니까. 라고는 해도 사실은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옆옆 자리에 앉아 취기가 좀 돌면, 그녀 닮은 저 여자에게 말 걸 용기도 생기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나의 집을 바라보며,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할 셈이었다. 그러나 이내 목적은 전도되어, 점차 의욕을 꺾어내리고 있었다. 지금 내게는 자축보다도 그녀를 닮은 저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자축의 감흥에 빠져들다가도 흘끗거리게 되었다. 주머니에 있는 주사위를 또 만지작거렸다. 아 성질나. 뭘 이렇게 흘끔흘끔 보지. 소심하게. 대뜸 한번 쳐다보자. 그리고 나를 바라보면, 그때 대담하게 말을 걸자. 아 뭐 내가 작업한댔나. 그냥 여기서 말 걸고 노는거지 뭐. 연진이한테 굳이 미안할 필요 없다.
그리고 나는 용기있게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옆 눈으로 창가에서 모여모여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였다. 이내, 그녀도 나를 쳐다보았다.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무리 현성이 주사위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마음에 드는 바에서라 할지라도,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제기랄. 내가 헛것을 보나. 나는 좀처럼 현실감각이 나지 않았다. 취한 건가. 그렇게 많이 안마셨는데.
“어....유... 유민이?”
그랬다. 유민이가 내 앞에 있었다. 그녀와 뒷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녀였을 줄이야.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장소에 그녀가 있다니. 너 어떻게 된거야. 여기 왜 있니. 나는 마음속에서만 질문들이 회오리 쳤다. 흡사 오늘의 장마처럼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아, 현성이구나”
그녀가 맞았다. 말도 안돼. 더군다나 심란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 나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자. 너는 헤어질 당시 ‘나는 이제 너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자신 있어’ 라고 당당히 선언했던 녀석이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우리가 이런 자리에서 만난 것이 놀랍지도 않니?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억지로 연기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작스러웠다.
“너 맞어? 어, 이상하네”
나는 바보같이 막 웃음이 나왔다. 심각해야할 것 같은 상황인 것 같은데. 아닌가? 즐거워야 하는 상황인가? 아 모르겠다.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아무것도 제정상이 아니었다. 사고체계는 이미 감정에게 추월당한지 오래였다. 나는 되는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아니면 누구야”
그래, 그렇지. 니가 아니면 누구겠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신기해서..”
그랬다. 신기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 같았다. 이사 온 첫날, 우연찮게 찾은 집 건너편 바에, 그녀가 앉아있다니. 그것도 내 집 쪽을 바라보면서. 순간, 이러저러한 예상들이 빗발쳤다. 어처구니없는 망상들. 행여 그녀가 나를 잊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요 1년간, 그녀는 나를 그리워했고, 연락 두절된 시간 동안에도, 나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연진이를 사귈 때도, 그녀는 나를 찾고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내가 이사 온 집 건너편의 바에서, 나의 집을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흥분은 그것을 나름대로의 논리로 바꿔 놓고 있었다. 말도 안돼! 와 그럴 듯 한데의 충돌이 머리속에서 온통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다. ‘너 여기 나 보러 온거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물음은 이 정도 취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여긴.. 웬일이야?”
“...”
그녀는 대답 없이 그저 술을 홀짝였다. 칵테일이였다. 분홍빛이 나는.
나는 대화를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옆자리로 옮겨가는 행동을 취했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연인도 그 무엇도 아니지만, 옆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니까. 이래도 되는 거야.
“참.. 오랜만이다.”
참. 뒤늦은 인사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인사가 우선이었는데, 급작스런 상황은 일상적인 대화를 가로막고 있었다. 장마가 일상적인 이사를 가로막았던 것처럼. 그렇게. 내가 바에 와서 일상적인 취기를 보일 수 없듯이, 그녀와의 대화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이사 온 첫 날, 그녀와의 오랜만의 만남. 그리고 이 바. 모든 것이 생경했다. 우리 부모님이 형의 결혼 통보를 받았을 때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러게.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대화는 또 가로막혔다. 비는 그치지 않았는데, 대화는 그치고 있었다. 계속 내려야지. 계속 대화해야지. 나는 알 수 없는 의무감 내지는 욕심에 사로잡혔다. 하기야, 이렇게 오랜만에 둘만 있는 상황에서 ‘그래? 그럼 잘 지내’ 하고 따로 노는 것도 웃길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는 처음이네”
“아. 응”
그랬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론 처음이었다. 세상은 좁다는데, 그녀는 1년간 나와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참 넓은 듯 한데, 이사 온 집 건너편에서 그녀를 만난다는 건 참 아이러니 했다.


헤어지자.
갑자기 왔던 그녀의 문자였다. 나는 그녀에게 한동안 문자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자연히 만남도 한 동안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우리의 관계가 그로 인해 금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밀고 당기기는 연애의 차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니까.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데, 나는 그 스킬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언제나 튕기고 빠지는 쪽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하는 일종의 ‘거부’에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리도 가슴이 아팠었는지.
아무튼, 그렇게 그녀는 연락이 없던 내게 일방적으로 단 4글자의 문자를 보내왔다. 사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런 문자가 아니었다. 나의 침묵은 그런 대화가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 작은 것 같았기에, 그래서 내게는 힘겨웠기에, 침묵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나를 좀더 사랑해 줘. 나를 좀더 바라봐 줘. 내가 여기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니. 하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론은 그렇게 4글자였다. 절망이었다. 나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너의 사랑은 이렇게 밖에 되지 않았구나. 그래. 관두자. 너는 나를 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어. 그래. 그랬던 거야.
그리고 나는 그래. 라는 딱 반절의 문자로 승락을 했다. 그리고는 단 한 번의 만남 이후에, 근 1년간 마주치지 못했다. 말하자면, 말 그대로 헤어진 이후의 첫 만남이었다.


“왜 그렇게 헤어졌을까..”
실없는 소리를 해 버렸다. 헤어진 연인끼리 1년 만에 만나서 이런 대화를 하려고 하다니. 나는 정말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녀는 나를 깜빡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파마한 긴 머리에서 생머리 단발로 바뀐 것 이외에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발랄한 듯 커다란 눈, 고양이 등 같은 입술 선, 조금은 크지만, 얼굴의 비율에 어긋나지 않는 코, 동그라면서도 절대 펑퍼짐하지 않고 귀여운 얼굴. 타고난 목선에 빗장뼈까지,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던 그녀 그대로였다. 이렇게 나를 이상하다는 듯 깜빡이며 쳐다보는 눈빛 까지도.
“그럼 어떻게 헤어졌어야 했는데?”
늘, 그녀는 나의 감상적인 말에 이런 식으로 이성적인 딴지를 걸었다. 그래 애초에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묻지 좀 마. 나에겐 아프다고. 그러나 사귀던 때처럼 아프진 않았다. 그 무렵엔 이런 딴지 하나하나에도 대못이 박히곤 했었다. 아파. 아파. 투정하진 않았지만, 나는 견디기 힘들어했었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이 그녀의 사랑에 대한 나의 평가를 낮게 만들었다.
“잘 들어.... 장마는 시작되기 나름이야”
“어?”
그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언제나 그래. 차가운 가슴과 뜨거운 가슴이 있는 한. 장마는 시작되기 나름이야. 전혀 다른 바다에서 태어난 둘이 만나서 시작되는 거야. 그 둘은 계절에 만나 시작되는 거야. 언제고 그것은 시작되는 것들이라구. 하필이면 만나 부대껴서, 서로를 깨닫고 이질감 속에서 펑펑 우는 거야. 필연적인거라구. 때론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장마는 그렇게 오는거라구”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잔을 들어 마셨다.
“키스하며, 뇌성을 울리고, 아름답게 쏟아지지. 그리고 그 후엔, 뒤엎고 깨지는 세상의 새벽과 밤이 남아. 진흙들 흘러내리고, 진창인 터가 남는거야. 어쩔 수 없이. 전부를 쏟아낸 후에야 비 로서 내리쬐는 열통의 오후가 있는거라구. 장마가 그치는 건.”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너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헤어진 것 뿐이야. 장마 이후에, 무지개만을 생각하지 마”
그녀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대듯 한쪽으로 얼굴을 치우치고 잔을 들어 짤랑거렸다.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을 말하는건가. 밀고 당기고, 서로를 옮겨 쏟아내다가, 이윽고 스러지고 마는, 장마를 이야기 하는건가. 우리가, 장마였다고, 아니 우리의 사랑이 장마였다고 말하는 건가. 나는 불현듯 그녀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기야. 작별이란 것은 아름다울 수 없었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란, 좀 채로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건 영화나 주라고 하지. 젠장할.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도, 열렬히 사랑했어. 나름대로 다 쏟아냈었다구. 그걸 아직도 모르니”
다시 한번 그녀가 잔을 짤랑 거렸다. 창밖으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의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나도 많은 것을 느꼈었다. 연진이를 사귄 이후에, 나의 첫 연애가 무척이나 서툴렀음을. 그렇게 나도 그녀를 상처 주었음을 깨달았다. 누가 그랬더라. 외로움이란 것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그렇게 본질적인 것이라고. 그래. 우리는 착각 속에서 빠져나와, 모든 걸 다 쏟아 낸 이후에, 그렇게 외로움을 느꼈었나보다. 서로가 이해하고 있다는 대단한 착각을 다 쏟아낸 이후에.
“내가... 너에게.. 했던 행동들은 모두다.. 모두다 사랑이었어..”
그토록 감흥적이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나를 보고도 무덤덤했던 그녀가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왜 헤어질 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지금 우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헤어졌는데, 우리가 그리던 사랑의 도화지를 잘라내고, 우리는 갈라섰는데, 자르기로 해. 그리고 서로의 추억을 잘라 나눠가지고 우리의 삶은 양분되었건만, 이렇게 서슬퍼런 가위의 날로 다시 만나 무엇을 하겠다고, 이런 따뜻한 말을 하는 거야. 하긴 그러고 보면 시작은 나였다. 그리고 실상 이런 말들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만도 아니었다. 적당한 취기. 이 바의 분위기. 다 좋았다. 이런 말을 듣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돼. 나 너를 책망 하려는 거 아니야. 그리고 많이 깨달았어.”
그리고 나도 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사실이 그랬으니까. 그래. 한동안은 참 그녀를 미워했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왜 나의 마음을 몰라주었을까. 고민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비겁하다는 것을. 하물며 그러한 깨달음은, 연진이를 사귄 이후에 더욱더 증폭되었다. 이제는 내가 경험자이고, 상대방이 무경험자였으니까. 마치 나와 유민이처럼. 나는 유민이의 입장에서 연진이를 사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이해가 되었다. 비록 그게 싫었지만. 그러한 깨달음들이 무척이나 싫었지만.
“그리고 그런 깨달음들이 싫었어. 나는.. 나는...그런 깨달음을 빌미 삼아서... 원동력 삼아서.. 새사람이 되기 싫었는데..”

사귀던 무렵. 유민이는 자주 말했었다.
“니가 부러워. 너의 그 순수성이 부러워”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뭐가 순수하다는거야. 욕망으로 넘쳐나기도 하고. 추악한 면도 많은 놈인데. 뭐가 순수하다는 거야.

그리고, 연진이를 사귀며 알았다. 진짜 순수성이 뭔지. 상처받는 순수가 어떤 것인지를. 두 번째의 기회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비겁함이었다. 그런 것은 전혀 순수하지 못했다. 나는 연진이를 순수하게 연애하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비겁한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너를.. 너를 닮으면 안되는데... 자꾸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서...”
나는 혼잣말인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이야기를 중얼 거렸다. 
“... 하하. 책망 안한다더니. 뭐야. 결국 나 따위는 닮기 싫다는 거네”
따지고 보자면 그런거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듣자하니, 새 여자 사귀는가 보구나”
“아.. 응”
그랬다. 연진이는 새 여자였다. 신기하구나. 그토록 그녀를 추억하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연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새 장마였다. 새 장마는 그 이전의 장마를 덮어버리고 있었다. 뉴스에서 올해의 장마를 떠들어 댈 때면, 행여 작년의 수해와 비교를 하더라도, 언제나 주가 되는 것은 올해의 장마였다. 그처럼. 그녀는 지나간 장마였다. 그래. 그랬구나. 너는 추억속의 사랑일 뿐이야. 그래. 나는 두근거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어.
“키스.. 해도 될까?”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헤어진 이후에 그토록 꿈꾸었던, 그런 장면. 그런 것인데, 지금 해도 되는 걸까. 새 장마인데. 유리창으로 장마의 비들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 투닥 투닥.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숨결로 다가왔다. 미적미적하면서도 시원하고도 달콤한, 부드러운 연유의 감각이 입술에서 돋아났다. 부드러운 생물들이 입술에서 잉태되는 것 같았다. 입안에 체리향이 감돌았다. 나는 연진이 생각을 했다. 바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나의 집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딱 키스장면에서 나의 필름은 끊겨 있었다. 행여나 싶어, 핸드폰을 열어 문자의 기록을 뒤져 보았으나, 연진이의 굳모닝 문자 외에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잠꾸러기 오빠. 일어나 아침이야 아침~♡

키스.. 했던가. 나는 입술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체리향이 아직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근거림은 없었다. 이상했다. 뭔가 된 것 같은데 이상한 느낌이었다. 울렁거리지도, 기분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다만 사실 그자체로 다가왔다. 마치 과거처럼, 추억처럼. 어제 일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문께로 갔다. 창문은 어제처럼 금이 가 있었다. 어제 일은 꿈이었을까. 라고 묻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향기까지도. 저 카르페디엠바에서... 나는 분명...
이라고 생각할 때에, 나는 건너편 건물에서 전광판을 발견하지 못해 당황했다. 분명 어제 있었던 전광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유리창 너머의 내부로는 폐허같은 모습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꿈이었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현성이 주사위가 손에 잡혔다. 

나는 그날 오후에 연진이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모처럼 점심도 같이 먹고,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하는 데이트를 얼마나 그려왔던가. 이런 욕심들이 있는 것을 보면, 어젯밤의 일들이 더욱더 믿어지지 않았다. 꿈인게 틀림없구나. 그리고 문자를 보낸 이후에, 인테리어 가게로 가서 새 유리창을 맞춰 왔다. 예상과 크게 가격이 다르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3만원으로 처리가 가능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와 느낌은 많이 달랐다. 새 장마. 새 장마. 내리는 비들이 모두 연진이 같았다. 키스를 한 것은 어제의 그녀인데도, 오히려 비를 통해 추억들이 새삼 생각나지는 않았다. 일테면 비오는 날 뚝섬 유원지에서 비 맞으며 키스하던 추억이라던가. 그런 것들. 생각나긴 하더라도 추억하지는 않았다. 구태여.
그리고 주사위도 박스에 넣어 서랍 속에 고이 닫아 놓았다. 엑소시스트는 아닐지언정, 어제 분명 과거는 청산된 것 같았다. 망령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존재하고 있었다.



...

“창문은 왜 깨졌어?”
“아... 어제, 누가 밖에서 돌을 던졌나봐..갑자기 팍 하고 깨지더라고 하하.”
창문을 갈려고 떼어낼 때에 침대에 앉은 연진이가 물었다. 나는 말도 안돼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데?”
그러면서 그녀는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게 말이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을까.
“있잖아 연진아... 끙차..”
창문이 없는데도 비는 들이치지 않았다. 방 안에 비가 들어올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응? 뭐?”
나는 힘을 들여 새 창문을 갈아 끼워 넣었다. 드륵 드륵 하고 잘 열리고 닫혔다.
“이번 장마는... 안 끝났으면 좋겠다”
“어?”
나는 씨익 웃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마 끝나야 좋지. 이렇게 축축한데?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글쎄. 끝나더라도. 지금은,. 지금은 안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속으로 말하지 못한 말을 되뇌었다. 새 창문은 깨끗했다.

나는 깨진 창문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버려둔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므로, 인간이라는 것은 간사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장마 같은 것이니까. 과거의 일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여 버린다고 해도 내 가슴속에서는 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인간은 파편을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순수할 수 없는 내 사랑에 대해 연진이에겐 미안하지만, 그만큼 순수하게 노력하리라 다짐했다. 마치 새로 갈은 저 창문처럼. 그래. 그렇게. 



비는 계속 내렸고, 그날 밤, 바 카르페디엠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