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디까지나 상상이며, 실제로 실행하기에는 많은 위험요소가 따를 뿐만 아니라, 교육의 취지에서 어긋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므로 다만 이론임을 밝혀 둠. 
일종의 잡소리, 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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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기독교 이야기를 하게 되서 민망하고 또 죄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가치판단을 떠나 객관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설파된 방법의 주축에는 ‘공포심의 유발’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통한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피해가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제시해 온 것이 기독교의 한 설파방법 중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속세에서의 마땅하고 선한 삶에 대하여 응분의 보상을 받는 ‘천국’의 교리 역시 설파 방법 중의 하나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에게 공포와 보상의 동기부여를 동일한 면에 두고 교리를 설파했을 때, 더욱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공포’이다. 이것은 교리가 전파되는 선교의 논리이지만 크게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이것이 바로 ‘교육’의 논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종교를 설파하는 것도 해당 종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고차원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그 수많은 교육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공포를 통한 동기부여로 공부를 한 적은 없었던가? 한번 회상해 보자. 그러면 곧 이러한 대사들이 머리 속에서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 공부 안하면 저기 저 사람처럼 된다(지하철역에 쭈그린 거지를 가리키며 어머니가 하는 말)
공부 게을리 하면 못생긴 여자랑 결혼한다 너. (이 얼마나 공포발언인가?!!)
숙제 안 해오면 정강이 500대다
이거 못 풀면 죽을 각오 해라

뭐 등등의 대사이다. 각자 개인사 속에서 찾아보면 굳이 내가 예를 드는 것보다 훨씬 많은 량의 대사들이 뿜어져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더 이상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자, 그렇다면 어디 이러한 동기 부여가 비단 ‘공부’에서만 나왔던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공포 심리를 자극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일테면 간밤에 피리를 부는 것을 막기 위한 어머니들의 교육이라던가(귀신 나온다) 음식을 남기면 죽어서 맨홀에 빠뜨려져 자기가 평생 남긴 음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남긴 음식까지 먹어야 한다 는 둥의 도덕적(?)인 교육들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살펴보면 우리가 도덕적인 교육 속에서 이런 공포발언을 피해 안간힘을 다해 ‘착하게’살아온 것을 알 수 있다. 귀신이 싫어 밤에 피리를 불지 않았고, 찌꺼기 먹기 싫어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쳐맞기 싫어서 숙제를 한적도 많았거니와, 평균점수를 상승시키기 위해 커피를 하루에 다섯 잔씩 먹기도 했다. 동화 속에서도 이런 공포 교육이 등장하는데 바로 ‘호랑이와 곶감’이 그것이다.


이처럼 공포를 통한 교육은 실제로 그 성과가 있다. 물론 교육의 수용자가 머리가 크면 클수록 그 ‘공포’의 차원도 확대되고 고차원적이 되어야 하겠지만, 공포의 조장이 교육에 효과를 더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논의해 보고자 하는 공포를 통한 교육은 단순히 체벌과 협박에서 그치는 정도의 ‘공포교육’이 아니라 좀더 심층적이고 정신적인 공포를 유도하는 교육이다. 일테면 ‘지옥’과도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서 학생들이 망각하고 살다가도 이런 미지의 공포에 이따금 부들 떨게 될 수 있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세뇌를 통한 준비작업으로 이루어 질 수 도 있고, 호르몬의 투약으로도 가능 할 것이다. (이거 점점.. 위험해 지는 것 같긴 한데 어디까지나 상상이라는 거~) 혹은 가상현실로 하여금 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의 끔찍한 미래를 직접 체험하게 해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물론 조금 더 과학 기술이 발전한 뒤에) 그러면 마치 치과에서 호되게 당한 아이가 양치질을 열심히 하게 되듯이, 공부를 불티나게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런 공포 교육은 자율성에서 어긋나며, 교육을 통한 성취가 ‘두려움에서 벗어난 인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 해 볼 때, 역시나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공포가 가질 수 있는 효과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건데, 충분히 선한 쪽으로 올바른 취지 하에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젓가락질 못하던 나에게 ‘너 처갓집 가서도 그럴래?’ 하며 공포교육을 시킨 어머니께 감사하고 있다. 참으로 효과적인 교육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