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인사만 드리는 것은 머쓱한 것 같아서,
9월 말부터 지금까지 계속 놓지 않는 책, 김애란 작가의 시작 [침이 고인다]에 대한 글입니다.
저번 달 말에 썼던 것인데... 이런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문학이니, 그런 것도 무척 관심있지만 아직 수준이 많이 낮아서 어려운 글들은 못쓰겠고요(웃음)
다시금 열심히 활동할 것을 약속드리면서...






침이 고인다 / 김애란






 김애란과의 첫 만남은 그녀의 첫 소설집이었던 [달려라, 아비]에서였지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편들의 모음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노크하지 않는 집>이었습니다. 책 뒤에 붙어있던 어떤 비평가의 말마따나, 아비투스Habitus, 어떤 동질화된 취향으로서의 주체, 일상에서의 예기치 못한 작은 균열에서 어렴풋이 주체의 지워짐을 인식하게 되는 그녀들의 서사가 흥미로웠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육체에 ‘각인’된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Fiction의 형식으로서 녹여내는 솜씨가 무척이나 노련했습지요. 뭐, 그 외의 작품들도 그 질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컨대, 그녀의 cynical함에 꽃혔달까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제 머릿속 어딘가로는 분명 ‘rookie'라는 영단어가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동시에 전 열렬히 그녀의 그 다음 작(作)을 기다리게 되었지요.




 운수 좋게도, 두 번째 만남 역시 그다지 먼 곳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즐겨 보던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그녀의 단편이 실렸던 것이지요.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라는 다소 긴 이름의 작품.(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이 단편은 <자오선을 지나갈 때>라는 다소 짧아진 제목으로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됩니다.) synopsis라 하면 -딱히 여유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 한 대졸 여성의 재수 시절에 대한 회상- 이라는 한 문장, 아주 간단하게 요약 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마는, 노량진을 경유하는 지하철 1호선에 대한 지극히 상상적인 묘사,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한 ‘재수생’의 다층적인 감정이 담담하게 녹아있는 대사들, 또한 다소 비극적인 상황도 comedy적인 요소로서 치환시키는 잘 익은 위트까지. 그래서인지, 무엇보다 방금 뽑은 커피마냥 따스한 것이 일품이었지요.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catch하지 못했던 김애란의 다른 조각들은, 또 그 나름의 맛이 담뿍- 배어 있었지요. 첫 소설집보다 한층 푸근해진 톤에 매료된 저는,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해 -마치 습관적으로 일회용 커피 뽑아먹듯-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동시에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다음을.




 시간은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그 동안 몇 번의 가을과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이 지나(어느새 입대를 하고) 해마다 태어난 곳을 다시 찾아오는 연어처럼 가을이 무사히- 찾아왔을 무렵. 이제는 제법 신산해진 공기가 생경한 어느 아침, 창가에 앉아 무심히 신문을 보던 저는 갑작스레 멍-해졌습니다. 그녀의 신작(新作)! 그 잠깐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을까요. 잊고 있던(하지만 삼삼했던) 옛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것처럼, 가슴 한켠이 주체할 수 없이 설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곧 책을 구입할 기회가 생겼고, 책이라는 것에 가격이 메겨져있다는 것이 괜히 낯설어져서, 이 것 뭔가 굉장히 수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미 눈에 들어온 책, 놓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가장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미련 없이, 아주 미련 없이 책을 계산했습니다. 적요(寂寥)한 밤, 종일 지쳐간 몸이 겨우 후미진 공부방 구석에 혼자만의 공간을 꾸릴 때, 그때서야 책을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피식- 하고 웃으며, 때로는 살짝 눈시울이 젖어감을 감지하며.




 쌉싸래한 9월 하순, 그녀의 갓 나온 작품집 [침이 고인다]는 지금까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달란트들, 이를테면, 담담한 일상에서 빼죽하니 튀어나와 있는 틈새를 포착해내는 영민함, 건조하며 남루한 도시의 삶을 상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내는 작법, 늘 주변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건져 올릴 수 없는 생기 있는 대사들까지, “난 어느 하나 소모된 것 없다”고 가볍게 검지를 흔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좀 더 내밀해지고, 한 문장 한 문장 공손하게 다듬어왔으며, -꼭 그 것에 대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그래서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까지 내다보게 된 것 같습니다. 첫 작품집의 표제작이었던 <달려라, 아비>등의 단편에서 가늘게 내비쳤던, 남성 부재(不在)의 가족 서사는 더욱 ‘여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화합니다.(이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가족이 아닌, 어미-자식의 구성입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전략은 흔히 feminine하다고 부르는 요소들에 대한 소멸로 나아갑니다. 여성에 대한 ‘상징적인’ 오해 -혹은 기표- 들이 제거되는 가운데 강조되는 지점은 ‘어미’로서 생명력을 지닌 여성이지요.) 그녀의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도회적 동일성’의 늪에 포획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낮은 곳으로 임한 것일까요, 그녀의 인물들은 전작들에 비해 더욱, 경제적 약자가 되어있습니다. 화폐적 불평등이 전제된 가운데, 가난한 자들의 욕망은 그 자신에게 반드시 결핍/부재로서 되돌아오게 되지요.(자본주의에서라면, 이는 경제적 능력과 관계없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요.) 그러한 결핍에서 유래되는 피로감, 씻어낼 수 없는 고독은 <도도한 생활>,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나갈 때>, <기도> 등 단편집 전반을 통틀어 대부분의 작품에서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체가, 타인의 욕망에 의하여 규정되고 작동하게 되는 메커니즘. 가끔씩, 우리가 ‘모든 것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이런 구조화된 틀 속에서 ‘나도 모르는 새/문득’ 균열을 목격하곤 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상징적 구조란 사실 ‘피곤’한 것이니까요. 뜻하지 않은 실재와의 조우(遭遇), ‘분열증’이 시작되는 곳은 이 지점입니다. 하지만, 그 ‘조우’에서 Cut을 외쳤던 전작 [달려라, 아비]의 경우와는 다르게, 김애란은 그 지점에서 몇 발자국 더 걸어 나갑니다. 작품집의 가장 첫 소설, <도도한 생활>의 마지막 부분을 잠시 인용하자면,




 “(전략)... 나는 셋방이 물에 잠겨가는데 무슨 짓인가 싶었다. 빗물은 어느새 무릎까지 차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물에 잠겨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대로 두다간 못 쓰게 될 게 분명했다. 순간 ‘쇼바’를 잔뜩 올린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가슴을 긁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흙먼지 사이로 수천 개의 만두가 공기 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니의 영어 교재도, 컴퓨터와 활자 디귿도, 아버지의 전화도, 우리의 여름도 모두 하늘 위로 떠올랐다 톡톡 터져버렸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깨끗한 건반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반 위에 가만 손가락을 얹어보았다. 엄지는 도, 검지는 레, 중지와 약지는 미 파. 아무 힘도 주지 않았는데 어떤 음 하나가 긴소리로 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중략)... 사내의 몸에서 만두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빗줄기는 거세졌다 잦아지길 반복하고,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나는 피아노를 치고, 발목이 물에 잠긴 채 그는 어떤 꿈을 꾸는지 웃고 있었다.” / [침이 고인다] 中 <도도한 생활>, p41~42




 그녀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셋방이 물에 잠겨가고’, ‘언니의 예전 애인이 술에 취해 현관에 쓰러져’있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애란(의 인물)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 것이 실제로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담보하는 지, 혹은 그녀의 ‘환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이제 ‘그녀의 첫 이야기’ 즉, 새로운 ‘주체’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어떤 뛰어넘음 -초월-입니다. 그녀가 도달한 공간은 ‘구조화’ 되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그 곳은 ‘환상/상상’을 매개하여 건너갈 수 있는 차원입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끼는’ <칼자국>의 그녀도, ‘예전에 동경하던 학교 선배의 빈 집을 찾는’ <네모난 자리들>의 그녀도, 김애란의 인물들은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는 통로에 접속합니다. 이전의 ‘배치’에게 그녀는 ‘안녕’을 고합니다. 물론 그 것은 완전한 ‘단절’이 아닌, 그녀를 짓누르던 ‘억압’을 넘어서려는 첫 시도입니다. 이로서, 김애란의 identity는 좀 더 확실해집니다. ‘환상’을 경유하여 ‘극복’으로. ‘대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향유’로. 그 것이 그녀의 전략이 아닐까요? 도회적 공간을 ‘환유적 이미지’의 연쇄로 표현해내는 그녀의 문체는 인물들과 ‘환상/상상’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역시 놓칠 수 없습니다.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후략)...” [침이 고인다] 中 <자오선을 지나갈 때>, p117




 한 장, 한 장. 한 글자라도 놓칠 새라 가벼이 읽지 않고 넘겨간 페이지가 쌓이다 어느새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낄 때, 그 ‘동요’하는 마음을 놓치기 싫어서. ‘진동’을 그렇게 손쉽게 놓을 수 없어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한 행, 한 행을 읽어나가다가 결국 더 이상 읽어 갈 글자 없이, 빈 공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가슴 한 구석도 따라 비워져, 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그저 눈을 감고 몇 분이고, 누워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한 번 책의 앞 장을 펼치고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자면, 조금씩 몸이 떠오릅니다.


 

03|상병 조현식  
 저는 단편집이 아니라 '침이 고인다' 만 읽었는데, 젊은 작가라는 매력만으로도 무거워 보이는 요즘 소설들 속에서 충분한 활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에요.

2007-11-13 14:26:37 | ipaddress : 48.2.154.120  
03|병장 최강  
 글 잘쓰시네요(웃음)

마지막 구절이 크게 마음에 와닿네요...

조금씩 천천히 한행, 한 행을 읽어나가다가 결국 더 이상 읽어 갈 글자 없이, 빈 공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참 표현이 좋네요~

2007-11-13 16:46:31 | ipaddress : 20.50.1.207  
  
 아. 글을 정리하다가 이 글에서 손이 멈추었습니다. 

늦게나마 추천 찍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2007-11-28 23:47:15 | ipaddress : 52.2.6.64  
03|병장 김영훈  
 저도 <편의점에 간다>가 제일 좋았어요. 
늦게나마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소설에 좋은 후기네요.
2007-12-17 15:53:36 | ipaddress : 56.13.1.14  
03|병장 문혁  
 좋은 소설을 알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2007-12-27 16:18:35 | ipaddress : 22.39.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