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김연수 - 
 병장 김광철 06-12 09:20 | HIT : 218 



 아마도 입대 전 마지막으로 쓴 독후감인 듯. 




<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유령작가의 농담-





 문자란 한 벌의 옷이 아니라 변장이다. 

 『일반언어학강의』 -소쉬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이미
 첫째 음절은 과거를 향해 떠난다.

 내가 고요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나는 그것을 깬다.

 내가 아무것도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무언가를 창조한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들어갈 수 없는 무엇을.

< 가장 이상한 세 낱말>  -쉼보르스카-




1. 삶과 이야기의 괴리


 김연수의 소설에는 '실제 삶'과 '이야기'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괴리가 가로놓여져있다. 사실 이 괴리란 케케묵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 아닌가? 데카르트가 난롯가에 앉아 "혹시 내가 보는 것이 모두 환상은 아닐까?" 라는 회의를 품기 시작한 이래로, '세계'와 '주체의 표상' 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느냐는 것은 근대철학 전체를 지배한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선한 신'의 힘을 빌어서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확실성을 담보하려했고, 흄은 이 세계는 물론 주체 자신까지도 인상들의 다발이라 주장하며 극단적 회의주의로 질주했다. 칸트는 주체의 선험적인 감성과 지성의 형식에 의존하여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했지만, 역시 칸트에게서도 물자체(Das Ding an sich)는 주체에게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졌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라캉이 말한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계 속의 주체는 언어로 세계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물은 필연적으로 언어적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다. 즉 상징계 속의 주체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 또한 그의 초월적 경험론에서 "모든 경험상의 지각은 환상이다"라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이 같은 문제는 문학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루카치가 그리워하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영원히 상실된 고향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어떻게 '실제 삶'과 주체가 지어낸 '이야기' 사이의 간극을 좁힐 것인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모방론을 계승한 철저한 리얼리즘 문학으로 극복가능한가? 아니면 다른 대안이 필요한가?



2. 기록과 언어를 넘어서 



"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 하는 게 아니"(「뿌넝숴」)라는 김연수의 문제의식 또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뿌넝숴」에서 잘 드러나듯 작가에게 진정한 삶이란 이야기로 옮겨 질 때 필연적인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중국인 노인이 가진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말해 질 수 없는 것(뿌넝숴不能說)이다. 왜냐하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 삶이 가진 진실이 삭제되어버린 이야기에 대한 불만은 역사책에 대한 노인의 강한 불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진짜 역사야. 이 손,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이 손이 진짜 역사인거야." 「뿌넝숴」

 기록(이야기)은 실제 삶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며 왜곡할 뿐이다. 언어화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진실한 노인의 잘려나간 손만이 진정한 역사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전통적으로 삶의 모사물이라 여겨졌던 기록(이야기)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고 있다. "왜 사람들은 책에 씌어진 것이라면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아도 믿"는 것일까? 이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작가가 보기에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지평리에서 너는 무엇을 봤느냐?"는 화자의 물음에 오직 "뿌넝숴. 뿌넝숴"로 일관했던 여인의 답변처럼 진실한 삶은 말해 질 수 없으며, 기록은 허구적 논리에 기초할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에 대한 불만은 결국 표상과 언어 전반에 대한 회의로 확대되고 있다.

"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이란 하나도 없어. 그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울부짖거나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뿐이지. 한번만이라도 온몸으로 다른 인간을 사랑해봤다면, 마음에 그림 따위가 그려질 겨를은 없는 거야. 그저 움직일 뿐이지. 뿌넝숴. 운명이 드러나는 순간에 언어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 「뿌넝숴」

 진정한 삶은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표상)이 아니라 그저 움직일 때 비로소 드러나며, 운명이 드러나는 순간 언어는 필요 없어진다. 즉 진정한 삶은 세계를 주체가 임의대로 이야기하고 표상하는 중에 있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말하는 노자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같은 통찰은 문자란 기본적으로 진의를 왜곡하는 '변장'이라는 소쉬르의 구절과 공명한다. 

 우리가 가진 언어와 기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에선 총살 직전의 어느 작가의 고백을 통해 부역, 친일, 애국 등이 임의대로 재단되는 역사를 비판하고 있다. 역사가는 여급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목숨을 버린 친일문인을 '자유대한의 순교자'로 기록할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작위성 앞에서 화자는 "백주의 작열하는 햇살 속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 편린의 진실도 건질 수 없"다고 외친다. "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기에 역사적 기록은 '한 편린의 진실'조차 건질 수 없는 것이다.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을 전복함으로써 역시 기록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작가가 펼쳐 보이는 실제 상황에 비교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록된 <춘향전>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왜곡인가? 기록된 <춘향전>은 강직한 관리였던 변사또를 부패한 탐관오리로 바꾸어버리고,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철없는 사랑만을 외쳐대던 춘향이는 지고지순한 열녀로 윤색한다. 김연수는 우리가 의심 없이 믿어왔던 기록의 객관성을 뿌리부터 흔들어 대고 있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주인공은 자살한 연인과의 사랑을 소설로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가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 소설 속에서 그는 분명히 무의미한 존재였다. 은밀한 존재는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소설속의 문장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자신이 쓰는 소설 속에서 그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중략) 하여 둘이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가 쓰는 소설에서 사라졌다. 결국 그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등반일지에 적는 것과 같은 것들, 식사의 시기와 장소와 종류, 혹은 그날 불어온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것도 아니라면 만난 장소와 대화를 나눈 시간 등이 전부였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정교하게 짜인 인과관계로 직조된 서사 안에서 정작 화자의 진실한 사랑은 지워지고 만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남은 것은 마치 "등반일지"와도 같은, 진정한 기의가 증발된 무의미한 기표들뿐이다. 



3. 우연의 세계



 그렇다면 그 이야기되어 질 수 없는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기록될 수 없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 인식하고 있는가? 그가 인식하는 진정한 역사, 진실된 삶의 영역은 명징한 논리와 필연성,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인과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우연'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 작가가 성재의 입을 빌려 "안중근이 하얼삔에서 이또오를 죽인 것은 우연 중의 우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지금까지 객관적이고 필연적 사실로써 인식했던 역사책에 기록된 진실은 한낱 '우연중의 우연에 불과한 사건'으로 강등된다. 이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역사이고 삶이기에 성재는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는 버릇을 그만뒀다." "세상의 일들은 늘 짐작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이제 성재에게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보는 일이 아니었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 우연만이 연속되는 삶 속에서 더 이상 앞일을 짐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생은 이리저리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주어진 우연적인 상황을 "납득하는 일"일 뿐이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의 벤저민 스티븐슨은 어떠한가?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을 맹신하며, "이제 세계의 모든 곳이 뉴욕으로, 보스톤으로 바뀌고 있"으며 "모든 인간들이 미국인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였다. 심지어 그에게 "미국인이란 자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인식된다. 그는 미국이 지닌 진보와 자유의 가치가 널리 퍼져나갈 것임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토록 그가 숭배하던 덕목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스티븐슨은 미국의 사상을 전파할 대상으로 여겼던 "은자의 나라"에 와서 도리어 자신이 믿었던 가치들을 벗어던지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곤 미국과 정반대인 그곳에서 행복해 한다. 그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법칙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허구였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러한 법칙과 가치가 지배하는 역사는 말 그대로 '거짓된 마음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런 가치들은 역사책 속에서나 유용하게 다뤄질 것이다. 스티븐슨의 말을 빌자면 실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가치들이 아니라,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미국의 프런티어를 믿고 상상하는 자라면, 세계의 모든 곳에 자유와 진보의 성조기가 펄럭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은자의 나라의 평온함과 소박함을 상상하는 자라면 그곳에서 행복감을 누릴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필연적 법칙이란 없으며 그런 것은 모두 누군가의 혀와 펜 끝에서 날조된 의도적인 가치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작가는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역사가인 조르주 뒤비의 말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분명 작위적이고 그릇된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야기됨으로써 사건들과 낱낱의 내용, 하찮은 사실들이 사건 당시에는 갖지 않았던 엄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어쩔 수 없이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조르주 뒤비의 적절한 지적처럼 사건 그 자체가 아닌, 후에 이야기된 사건에는 필연적으로 '작위'와 '왜곡'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사건 당시에는 하찮은 사실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납득할 수 없는 우연으로 가득 찬 삶을 필연적 인과법칙으로 꿰어 맞추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 성재의 고백처럼 이런저런 법칙으로 따져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어진 우연을 납득하는 것을 뿐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진 세영의 "네즈미, 그건 정말 새였을까? 내가 본 게 확실할까?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라는 질문에 네즈미는 "그렇지 않을 거야.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확실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우연히 우리 앞에 다가온 사건이며, 우리는 이리저리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믿는 수밖에'는 없다. 

 이 같은 역사와 삶에 대한 인식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화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르주 뒤비와 매우 흡사하다.

"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겉으로는 빈틈없는 인과관계로 짜여진 역사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역사를 지탱하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우연의 소산들이다.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우연히 만난 전처와 같이 걸었던 길을 애써 기억을 되돌리며 되짚어 걷는다. 그리고 행여 잊을세라 지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표시한다. 걸었던 길을 되짚어 봄으로써 화자는 그 행로에서 애써 뭔가의 필연성을 발견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에 그녀를 우연히 만난 것부터가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 누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 같이 길을 걸었던 일을 단지 우연의 소산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결국에 화자가 발견한 것은 지도상에 헝클어져 표시된 의미 없는 그들의 행로뿐이다. 그들이 만난 것. "그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녀가 화자를 "이끌고 다닌 행로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화자가 "지도에 그은 선은 모든 일이 지나간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런 선이 됐다는 의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다만 우연들이 지배하는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화자는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화자는 "이제는 억지로라도 그런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믿는 나이가 됐다." 삶은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납득하는 것임을 그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4. 거대한 농담



 이처럼 진정한 삶이 톱니바퀴 같은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할 때, 그것은 하찮은 우연들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삶을 지배해왔던 필연성에 바탕을 둔 진지한(척하는) 심각한 '서사'는 자연히 우연성에 기반을 둔 '농담'의 형태로 바뀌지 않겠는가? 진정한 삶은 빈틈없이 꽉 짜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연히' 던진 말이 웃음을 유발하는 실없는 농담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인과관계에 의해 기록된 역사책은 결코 삶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책에는 농담이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 원인과 결과만이 나열된 책이니까." 

" 그녀나 나나 이제는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삶을 이해하기엔 서른네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부족하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김연수가 파악하는 삶이란 결국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다. 우연성에 기댄 실없는 농담에 대해 필연의 잣대를 적용하여 이렇게 저렇게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우연히 내 앞에 던져진 농담은 단지 납득하고 받아들이면 그 뿐이다. 화자와 그녀의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는 행위는 여전히 농담을 농담으로 즉 삶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을 이해하기엔 서른네살이란 나이는 아직도" 버겁기만 하다.   

 그들에게 "농담이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한 것처럼 삶이라는 거대한 농담은 항상 희극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때론 「뿌넝숴」의 노인처럼 엄청난 전쟁의 상흔을 감추고 있으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처럼 되찾을 수 없는 사랑의 상실을 겪기도 한다. 한편「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에서는 죽음을 앞두고 회한에 젖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말해질 수 없는 진실한 삶으로서의 농담은 두 가지의 역설에 기초해 있다. 즉 그 농담은 '말해질 수 없음'과 '진실함'이라는, 실없는 농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성질을 지닌다. 농담은 이야기 될 수 없는 삶의 다른 표현이기에 말해 질 수 없으며, 필연적 인과율이 아닌 우연성에 기초한 실없는 농담이기에 오히려 삶의 진실함을 드러낸다.

 작가가 파악한 진실한 삶이 이처럼 말해질 수 없는 농담의 형태라면, 이제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아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가 있는가? 작가가 표현해야 하는 진실한 삶이 그 근본성격에서 말해지기를 거부한다면,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해야하는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김연수에게는 '리얼리즘 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삶 자체가 이야기되기를 거부하므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모사물이어야 한다는 모방론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작가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뿌넝숴」)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곤란 속에 빠져있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 하는 게 아니"(「뿌넝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계속에 진입한 이상 우리는 바로 자신의 '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통하여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해야만 한다. 여기서 '이야기 될 수 없는 삶'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엄청난 역설이 성립한다. 우리가 언어를 거치지 않고 실재와 곧바로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징계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뿐이다.

 죽음 이후 도달할 곳은 아마도 소설(언어)을 통해 연인과의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실패한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주인공이 그리던 곳. 즉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같은 곳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곳을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세계의 끝'으로 가기위해 설산을 넘었던 주인공은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영영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즉 아직 '세계의 끝'에 이르지 못하고 세계 안에서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 실재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다.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계속 이야기해야만 하는 세헤라자데의 운명처럼, 삶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해야만 한다. 작가가 이러한 역설을 타개하고자 하는 모색의 과정을 우리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을 들추어 봄으로서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쓰기 위해서 '나'는 그간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런데 한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이 시점에 이르러, 문득,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깨닫는다.......  다만 그 책들을 통해 '나'보다 더 심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을 위안으로 삼는다.......이 책에서 '나'는 너무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나'는 유령작가가 됐다.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작가의 말>       

< 작가의 말>에서는 김연수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기부정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짓말"로 규정짓는다. 삶이란 기본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인데, 자신은 거기에 대해 떠들었으니 자신의 소설은 모두 헛소리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본인이 쓴 글을 부정해 버리는 이러한 지독한 자기부정이 또 어디 있을까? 기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책은 다 거짓말이다. 읽었던 많은 "책들을 통해 '나'보다 더 심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우연한 삶을 마치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있는 것처럼 기술하려하는 수많은 책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의 거짓말은 그들의 거짓말보다는 심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야기는 진실한 삶은 말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거짓말은 역설적이게도 어느 정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본인의 소설을 거짓말이라 치부해 버림으로써, 세계를 묘사하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심각하고 근엄했던 작가는 사라지고 이제 그 자리를 '유령작가'가 대신한다.  김연수는 기존의 작가들처럼 단단한 리얼리즘의 반석 위에 자신을 정초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근본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그동안 의심 없이 믿어져왔던 필연적 인과율에 기초한 사실적 서사가 실은 허상이었음을 폭로한다. 발붙일 지반을 모두 상실한 그는 이제 기존의 작가상(像)을 부정해 버리고 실체 없는 유령이 되어 거짓말하기를 자처한다. 즉 김연수는 그의 고백처럼 "유령작가가 됐다."

 내가 '고요'라고 발음하는 순간 그 고요를 깨버리는 것처럼, '미래'라는 첫 음절이 이미 과거를 향해 떠나는 것처럼, 실제 세계와 언어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불일치 속에서 작가는 유령이 되어 떠도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뿌넝숴(不能說)를 연신 외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작가가 하는 말이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그는 유령작가가 되어 '진실한 삶은 말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즉 유령작가는 여전히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음(不能說)'을 끊임없이 '말해야'만 하는, 그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이 '유령작가'는 마치 '농담'처럼 다음과 같이 모순적인 말을 중얼거려야만 하리라.

" 뿌넝숴(不能說). 뿌넝숴. 그 말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얘기. 말해보게나. 어서. 어서."「뿌넝숴」

* 병장 김청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14 10:32)  


 일병 김준호 
 오오 김연수씨 책을 사서 갖고 오려고 했는데 이 책 너무 읽고 싶어져요. 요즘 책이 잘 안 읽혀서 걱정 중이었는데 감사합니다. 06-12   

 병장 김지민 
 개인적으로 김연수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글은 <가지로> 06-12   

 병장 김병완 
C`est la vie. 광철님의 이름을 보고 게시물을 클릭할 때 점점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네요. 가지로. 06-12   

 병장 이건룡 
 역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의 언어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본의가 아닌 정치적 멍에 쓴 꼴로 전락해 버렸군요. 최근 접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웃음) 득하고 간 바가 크군요. 잘 읽었어요. "가기로!" 06-12   

 병장 이승일 
 저 역시 지민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미 가지로 왔기에 "가지로" 를 외칠 수 없는게 안타깝군요. 하지만 한가지 당연한 진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네요. 우리가 거짓말쟁이인 한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거짓이 거짓인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 영원히. 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