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에 관하여 
 병장 이승일 06-04 04:55 | HIT : 227 



[1] '선악의 피안' 의 피안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선 악, 즉 좋고 나쁜 것에 관해 명확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으며, 그 기준 자체에 대해 의심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커가면서 상대방의 기준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일종의 상실감 혹은 배신감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요즘의 아이들은 이러한 배신감으로부터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없다. 그것은 각자의 관점과 선택에 달린 것이다.' 라는 관점을 쉽게 채택한다. 그리고 이 관점을 정신적 성숙함의 표상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 아이가 정말로 배운 것은, 혹은 배웠어야할 것은, 자기 자신의 기준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기준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기준이 틀렸다는 사실로부터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거부하는 데에 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세상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어린아이들조차도 청년, 그리고 성년이 될 때까지 "이것이 더 좋다, 저것은 옳지 않다" 등의 말을 끊임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선악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기준이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면, 최소한 그것을 남에게 말하고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조차 어떤 형태로든 선과 악이 존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당위성 자체가 선과 악에 대한 표상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에게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상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보편적 선악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선과 악의 논의가 유치한 취급을 받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의 정신이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인의 삶을 관찰해보면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이 과거의 인류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혼란을 통해 불안을 잊고, 순간순간의 자기위안으로 만족하며 서로를 불신하면서도 또한 극도로 외로움을 느끼는 현대인을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중대한 착오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저 사람은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는 것이지 '저 사람은 성숙의 경지에 도달 했구나' 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현대인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고, 때문에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여의 정도가 너무나도 지나친 나머지, 스스로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선악의 부재에 대한 믿음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것은 아마도 선악의 기준에 대한 주관성, 혹은 상대성이다. 그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변화해왔다. 그러나 이 '변화' 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인식이 그만큼 불완전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에 관한 인간의 이해가 해마다 변한다고 해서 자연법칙이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물리학은 400여년전의 그것과 매우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 자체가 변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생각해보면 도덕관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대적인 것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상대적인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 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지, 도덕관념 자체라고 보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녀사냥' 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중세에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차이는 '마녀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라는 사실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도덕적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근본적으로 악한 마녀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우리 옆집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중세인들 처럼 마녀를 사회에서 쫓아내거나 심지어 죽이려고 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마녀사냥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마녀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녀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실의 문제이며, 우리가 만약 중세인들 보다 무언가 더 개선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의견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의식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면모를 많이 갖고 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도덕법칙에 대한 인식의 상대성에 불과한 것이다.



[2] 도덕 법칙 

 악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이전에, 도덕 법칙의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비록 이 글이 도덕법칙 전반에 관한 글은 결코 아니며 단지 악이 무엇인지에 관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도덕법칙 전반의 지위와 의미에 관해 잠시 생각해보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법칙' 이라는 표현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지만, '도덕법칙' 이라는 표현에는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도덕 법칙이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법칙성을 인간의 행동에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정반대에 가깝다. 법칙(law)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행동에 관하여 먼저 적용된 개념이다. 자연법칙이란,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법칙이 자연도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파생되어 나온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자연법칙이 더 근본적인 것이고, 도덕법칙은 무언가 가공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관심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외부세계로 옮겨간 데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고대 인류가 자연에 관해 충분히 예민한 관찰력을 갖고 있지 못해서 자연세계의 법칙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예민한 '마음의 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와 행동의 법칙을 더 이상 파악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자연법칙이 도덕법칙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개념이라는 것은 근대 초기에 자연법칙을 어떠한 표현으로 기술했는지를 확인하면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뉴턴은 그의 주저 '프린키피아' 에서 "Everything that is on Earth must fall to the ground"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현대 영어에서는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로서는 분명 혁명적인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must 는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과는 중력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표현을 단지 비유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그 개념적 근원은 보다 더 심오하고 밀접한 방식으로 당위성과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당위적 법칙이 사실적 법칙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임을 이해하고 나면, 전자를 후자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무언가 본말이 전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도덕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에 대한 법칙이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후자는 아마도 심리학의 영역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위법칙의 의미가 드러난 후에야 사실법칙의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3] 선의 결여와 왜곡으로서의 악(惡) 

 이제 악의 문제에 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견지하고자 하는 관점은 "악은 선의 결여이자 왜곡"이 라는 관점이다. 아래의 어떤 글에서 이건룡씨가 알맞게 인용해주셨듯이,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가장 유치한 것으로 간주되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원하지, 이미 존재했던 생각을 다시 되돌아보는 데에는 그다지 너그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생각에 대해 더 이상 너그럽지 않고, 그것을 가능한 선택지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시켜놓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생각은 또 다시 새로움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김지민씨가 과거의 진부한 비유가 다시 참신한 비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이 관점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우선 우리가 '악하다' 라는 속성을 궁극적으로 어디에 귀속시켜야 할지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인가, 아니면 의도인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극악한' 사례들은 모두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나치의 대학살 까지 가지 않더라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연쇄 살인, 강간, 사기 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이지 그 의도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의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연쇄 살인범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살인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강간범은 강간하고자 했고, 사기꾼은 사기를 치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 형법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의도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형법에서는 범죄를 의도와 결과라는 두 가지 요소로 분석하는데, 원칙적으로 형량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의도이다. 예를 들어 살인 의도가 있고 그 결과로 사람이 죽었으면 그것은 살인이다. 한편 의도만 있고 결과가 없으면 살인 미수, 의도는 없는데 결과가 있으면 과실치사로 분류된다. 그리고 살인 미수가 과실치사보다 더 무거운 범죄로 취급된다. 또한 의도와 결과가 모두 있는 상황일지라도, 그 의도가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느냐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진다.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사람의 의도와 충동적인 의도는 동일하지 않다고 판단되며 전자가 더 큰 범죄로 취급된다. 법률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양심에 비추어보아도 정말로 악한 것은 의도에서 발견된다. 악한 의도는 없었는데 행위가 결과적으로 나쁜 상황을 초래한 경우,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무지' 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농약을 보약으로 착각하고 자식에게 먹여 죽게 했다거나, 마을 주민이 자연재해로 인해 사망했다거나 하는 경우, 어떤 앎이 그곳에 있었다면 나쁜 결과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모가 좀 더 신중했다면, 그리고 마을 주민이 자연 재해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우리가 안타까움이나 부조리를 느끼는 상황이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여기는 상황은 분명 아니다. 따라서 악한 의도가 없는 나쁜 결과들은 무지, 즉 앎의 결여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분명 악이지만, 그것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단지 있어야할 것이 없어서 생긴 하나의 <현상>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에 가까운 악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우리는 행위나 그 결과가 아닌 사람의 의도를 들여다봐야한다. 정말 악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악한 의도를 반드시 포함해야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의도 중 어떤 것이 정말로 나쁜 것일까 생각해보자. 여기서 '정말로' 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지금 현상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악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현상이란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는 것인 반면, 실체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나는 악이 선의 결여이거나 왜곡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므로, 만약 실체적인 악이 존재한다면, 나의 추측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행위의 악함은 하나의 현상이며 앎과 신중함의 결여임을 위에서 확인했다. 이제 악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악한 의도란, 현상이 아닌 실체로서, 즉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도 해체되지 않는 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로 치유 불가능한 악이 존재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악한 의도가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 
 도둑질하려는 의도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이 의도는 어떤 사물을 갖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은 만약 그 사물을 이미 갖고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그런 종류의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에서는 절도가 거의 일어나지 않듯이, 도둑질하려는 의도는 물질적인 풍요가 주어진다면 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물질의 결여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독립적이고 실체적인 악으로 볼 수는 없다. 
 살인하려는 의도는 어떠한가? 이것은 사실 하나의 의도로 포함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증오 때문에 살인하려고 할 수도 있고, 사랑 때문에 살인하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서 살인하려고 마음먹을 수도 있다. 마지막 경우에는 문제가 쉽다. 그 재화가 있었다면, 살인의 의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런 종류의 의도는 실체적인 악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살인하려는 의도는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을 갖기 위해서 외도하는 애인을 살해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접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사랑의 왜곡에서 기인한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한다.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결코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사랑의 가장 천박한 일부분일 뿐이다. 만약 애인을 제대로 사랑했다면, 그를 파괴하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사랑은 선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며, 사랑에 의한 살인은 이 선한 것의 왜곡으로부터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증오로 인한 살인은 어떠한가? 아마 대부분의 살인이 증오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증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 이라는 말처럼, 증오는 어떤 종류이건 간에 사랑하는 감정 위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증오한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에서 무언가 기대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세상을 증오하는 것이다. 사람을 증오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무시당할 때 그를 증오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면, 증오심을 느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대는 분명히 어떤 종류의 신뢰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신뢰란 사랑의 일부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선하다고 간주하는 어떤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증오에 의해 살인의 의도를 갖게 된 경우, 그것은 분명 악한 것이 틀림없지만, 항구적인 악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선한 감정이 왜곡되고 상처받은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독재자의 의도는 어떠한가? 만약 그가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사회를 쥐어짜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가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되 그 대상이 오직 자기 자신에 국한되어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의 (가장 작은) 부분집합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랑이 선하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도 어쨌거나 악하지는 않다. 그것은 단지 엄청난 결여인 것이다. 만약 그 독재자가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일으켜보려는 생각으로 독재를 하게 되었다면 어떠한가? 이 경우 그 의도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이 사회를,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일 테고 앞의 경우보다는 더 선한 의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독재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롭게 하는지 알지 못할 수 있다. 즉 그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악한 결말을 빚어낼 수 있다. 만약 그가 엄청난 능력과 지력의 소유자이고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독재는 훌륭한 결말을 맺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악하다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의도들은 대부분 현상적인 것이고 상황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그 본질은 사랑이나 신뢰와 같은 선한 것들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 선한 것이 제 모습을 상실하고 왜곡될 때 악한 의도가 출현하는 것이지, 그것이 해체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악한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믿기에 가장 실체에 가까운 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만이다. 다른 의도들은 가변적인 상황에 의해서 경쟁적인 속성을 띠는데 반해,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상대적인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이다.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건,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교만은 허영심보다도 더 악하다. 허영심은 최소한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의존하는 감정이다. 그것은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없다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대와 애정도 결여되어있다. 하지만 교만조차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 그것은 어찌되었건 사랑 - 자기애 - 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독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에 대한 사랑은 어쨌거나 일반적인 사랑의 부분집합이다. 단지 그 사랑의 방향이 자기 내부로만 향해있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왜곡되어있고, 더 큰 것을 결여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교만은 사실 무지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사람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 뿐 아니라 그에게 행복을 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 물질적 풍요, 명예 등의 요소 또한 분명히 타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제어할 수도 없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어찌 보면 그에게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조차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만든 적도 없고, 영원히 살 수도 없다.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존재의 측면에서조차 그는 사실상 완전히 무력하다. 그가 만약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진심으로 교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교만은 가장 큰 무지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무지란 분명 앎의 결여이며, 따라서 가장 악한 의도로 간주할 수 있는 교만조차 선한 것의 결여요 왜곡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결언

 이상의 의견에 대해 얼마나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요즘과 같은 시대에서 일반적인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이런 의견을 갖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과거에 내가 이런 의견에 반대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이런 종류의 의견은 세상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선 선과 악의 기준은 당연하게도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악이 선의 결여라는 의견은 매우 유아적으로 보였다. 이 세상이 얼마나 깊고, 다양하며, 그래서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치하게도 오직 선으로 가득 찬 세계상을 갖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이 무지의 소산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의도는 그 근원을 찾아서 생각해보면 모두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는 것들로 구성되어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의도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 無에 불과하다. 마치 완전한 어둠이 빛의 완전한 결여에 불과하며 절대0도란 에너지의 완전한 결여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물론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완전한 無 조차 허용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현실에서 끊임없이 악을 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세계가 훨씬 더 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한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원형을 보지 못하고 단지 평면으로 여기듯, 우리는 존재의 범위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부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선의 결여와 왜곡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이 선의 결여이고 우리가 발견하는 세계가 악해 보인다면, 실제 세계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해있음이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악하게 보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두려움이다. 혹시라도 세상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면 그것을 간과했다가는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삶을 살 것 같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느니, 불행한 현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결국 악을 해체시키고 그것이 실체가 아님을 드러내 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가진 자유의 한 측면일 따름이며, 바로 그 자유와 선택에 의해 우리는 악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선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 병장 김청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04 08:48)  


 상병 김현진 
 잘 읽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외쳐봅니다. 

" 가지로" 06-04   

 상병 육심일 
" 가지 한표 추가요" 06-04   

 병장 박동일 
 일단 가지로 갑시다. 06-04   

 병장 김청하 
 이런 고전적이고 범용적이고 '유치한' 주제에 대해 이러한 통찰력을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참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해서 승일 씨께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승일 씨께서는 '악이라고 생각하는 의도가 그 근원을 찾아서 생각해보면 모두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인간의 욕망 그 자체도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까요? 어떤 사람이 강간을 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그에게는 정말로 선한 의도가 어딘가에 존재할까요? 쾌락에 의한 살인은 어떻습니까? 단순하게 자신의 성욕이나 살해욕(?)을 충족시키고자하는 종류의 일차원적인 '자기애' 또한 극단적으로 왜곡되어있을 뿐인 사랑이며, 결국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살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를 현실의 자신보다 너무 많이 사랑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자기애 또한 그 계층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이겠군요. 06-04   

 병장 이승일 
 제 글이 사라졌길래 제가 글을 써놓고 안올린 줄 알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청하씨의 말씀과 관련해서는, 좋은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원하거나 필요로 한다는 것이겠지요. 영어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필요(need)란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고, 원하는 것(want)은 오히려 무언가가 넘쳐서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애정결핍자의 사랑과 사랑이 넘치는 자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경우든 당연히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나, 넘치는 것을 발휘하는 것이나 둘 모두 선하다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대체 무엇을 필요로하고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청하씨는 강간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런데 강간이 도대체 왜 나쁜지 한번 생각해보죠. 그 사람은 성욕에 의해서 강간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 - 필요건 원하는 것이건 - 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욕망 자체는 분명히 선한 것입니다. 바로 이 욕망에 의해 인류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사람에게 기쁨을 주니까요. 문제는 이것이 다른 종류의 선, 훨씬 더 큰 선을 해친다는 점에 있습니다. 강간은 흔히 피해자의 인격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하니까요. 자, 그렇다면 강간범은 작은 선을 위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선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 가장 큰 이유는 그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선', 즉타인의 인격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큰 기쁨의 원천이 되는지 강간범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만원을 얻기 위해 1억원을 버리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1억원짜리 백자를 오천원짜리 개밥그릇과 바꾸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그것의 가치를 '모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무지입니다. 쾌락에 의한 살인 등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자살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우선 이것은 명백한 '살인' 의 하나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인격성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그러한 측면에서, 자살은 살인과 동일하며, 이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인격성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살인에 관해서는 위의 글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이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자기애에는 한가지 측면이 더 추가되어있을텐데 그것은 이미 청하씨가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길게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마도 불충분하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