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의 저자들의 '젊은날의 깨달음'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책. 좋은 내용들이 있어 부분들을 뽑아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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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깨달음


조정래, 장회익, 홍세화, 박홍규,
김진애, 고종석, 손석춘, 정혜신, 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5





섞인 것이 아름답다
고종석


결국 내가 20세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모든 순수한 것에 대한 열정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순수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다. 그것이 종교의 탈을 쓰든, 학문이나 도덕의 탈을 쓰든, 인종이나 계급의 탈을 쓰든 마찬가지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좋게 말하면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광신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수파나 이물질을 배제하는 진리의 전유권專有權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흩어져 싸우는 개인들이란 결국 세계시민주의자들이고, 세계시민주의의 실천 전략은 불순함의 옹호다.

결론을 내리자.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아직 우리는 그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듯하지만.



인생은 단 1회의 연극이다
조정래


내가 스스로에게 세운 금기 사항은, 신문에 연애소설을 쓰지 않는다, 하는 제법 거창한 것에서부터, 두꺼운 서류봉투는 재활용한다, 하는 사소한 것까지 꽤나 많다. 그런 것들을 한 번 마음 정하면 나는 세월의 길고 F음을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실천해 나갔다. 그것은 대학생 때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치열하게 살기로 작정했던 것의 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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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인생에 큰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계속 확인하면서 어찌 한 번 마음먹은 것을 지켜나가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대하소설을 연달아 세 편씩 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먹음의 실천일 뿐이다. 그런 미련스러운 노력 말고 무엇이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고, 우리 인생에 빛을 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타고난 재능보다는 미련스러운 노력을 믿고자 했다. 타고난 작은 재주도 치열한 노력을 바치면 커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실패한 인생을 용납할 수 없었고, 더욱이 가난에 원수를 갚아야 했던 것이다. 남들이 의아해하는 나의 의지, 열정, 실천, 그런 것들의 뿌리에는 가난이 있었다. 나를 키운 건 가난이었고, 가난이 나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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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질주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황량한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언제까지 이러고 다녀야 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소외감과 패배감 같은 것이 몰려들었다. 아니야, 두고 봐라. 반드시 큰 작품을 쓰고 말 테니까. 나를 위로하고 충동하며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나는 마침내 1980년에 출판사를 넘겼다. 만 3년 만에 몇 년 동안 안심하고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밑천을 장만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돈 욕심의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걸신들린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형의 땅>을 썼고, <태백산맥>을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으니 젊은 세월은 흔적 없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상처투성이의 젊은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20년 동안 글감옥에 즐겁게 가두었다. 그리고, 하나인 아들이 장가가는 날 예식장 앞엣 세워둔 메모판에 이렇게 적었다.

“인생이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다.”



스님 방에서 본 지구의地球儀
장회익


사람이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한 요소가 ‘이해의 틀’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이 틀에 담길 ‘내용’이다. 우리가 오감이나 언어 등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면 이것은 곧 이미 형성되어 있던 이해의 틀 안에서 검토되어 적절한 위치를 배정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해의 틀 안에서 ‘내용’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때 만일 이해의 틀이 너무 협소해 이 정보들을 합당하게 정리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우리의 사고는 다시 이해의 틀 자체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틀을 키우지 않고는 사물을 더 이상 의미를 지닌 형태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틀 자체를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 틀 속에 정리된 내용만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두뇌에서는 내용을 합당하게 담아낼 여러 새로운 틀들이 시도되더라도 이 역시 우리에게는 의식되지 않는다. 오직 우연히 어떤 틀이 구성되어 그 틀 속에서 새로 입수된 정보와 기왕에 있던 내용들이 산뜻하게 새로 정리되면, 우리는 이것을 의식할 수 있다. 이렇게 다시 정리된 내용이 기왕에 이해했던 내용과 크게 달라질 때 우리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대체로 이해한 깨달음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어떻게 돈오와 점오로 나뉘어지는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이해의 바탕이 되는 틀이, 작은 변화들을 겪지 않고 한꺼번에 크게 바뀌느냐 아니면 중간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최종 단계에 이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수많은 정보나 의문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해의 틀 속에서 어느 순간 확연히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될 때 이를 돈오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중간 중간에 비교적 소폭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이해의 폭을 점차 넓혀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 이를 점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해의 틀이 연속적인 변화를 허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돈오와 점오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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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이때의 물음이라는 것은 꼭 명시적인 질문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서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어떤 모순이나 의문, 갈증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마음의 상태로 이러한 해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의문투성이이면서도 실제로는 이러한 물음을 별로 던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삶 그 자체는 어느 날 내가 살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나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는 이미 한참을 살고 난 이후이다. 그 동안의 삶에 대해 왜 살았는가 하고 되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할 수 d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고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된다. 도대체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론 여기에 대한 바른 해답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 해답의 내용은 무엇인지 하는 것은 어쩌면 ‘깨달음’을 얻게 된 후에야 알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다면 아예 깨달음에 들어설 가능성조차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 젊은 날의 초상
홍세화


세월은 역시 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품었던 의식과 이념은 세월과 함께 그 빛이 바랬다. 그 빛 바램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의 정서였다. 그 세월은 또한 자유, 민주, 인간의 자리에 토익점수, 학점, 취업준비가 들어앉도록 했다. 예술도 장르도 불문하고 간소하고 간편하고 감성적인 것이 선택된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발 빠른 트렌드 따라잡기가 문화인 듯 행세한다. 심각하게 살기 싫다고 한다. 진지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제도가 바뀌어도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은 고정되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아 그 확률 또한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떨며 내달린다. 음악에 심취하고 문학을 얘기하고 철학에 몰두하면서도 가질 수 있었던 확률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야 가질 수 있는 확률로 되었다. 이상한 현상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도 아니고, 소수의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 확률을 높이자는 것도 아닌, 확률은 그대로 둔 채 모두가 모든 걸 버리고 전력 질주하는 것이다.

설사 그 확률 안에 들어 직장과 집과 차를 갖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만 유지가 가능하다. 그렇게 모두를 걸고 ‘올인’한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지만 단 한 가지 예기치 못한 불행만으로도 일시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주택, 의료, 교육, 노인, 실업 등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을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봉급 100만 원과 유럽 사회의 봉급 100만 원은 그 가치가 다르다. 주택, 의료 교육 등 거의 모든 걸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와 봉급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힘을 모아 크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고 외나무다리에 연연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익적 가치가 실종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싹틀 수 없는 사회는 ‘나 먼저 살고 보자’, ‘내 것은 무조건 지키고 보자’는 이전투구의 풍토를 만들어냈다. 애석한 것은 ‘나만 안 떨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이 위태롭고 협소한 외나무다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감으로 사람들은 더욱 악착스레 매달리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의 것돠 함께 내 것을 지키고, 생존을 넘어 인간적 삶을 되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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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는 곧 나를 억압하는 사회다. 개인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로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된 사람을 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축하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의 상대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유 역시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마치 상대적 가치인 양 그 실용성이 강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려선 안 된다.

영악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로부터 수상쩍은 기미를 알아챌 수 있는 맑은 영혼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불의를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모한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았다. 영혼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래서 아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남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러고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대부분 일생에 걸쳐 오직 두 번 긴장한다. 대학입시 깨 한 번, 그리고 임용이나 취직할 때 한 번, 그뿐이다. 그리고 이성의 성숙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거의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그것은 강조하건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병장 진규언 
  그야말로 강바닥 돌무더기의 자갈마냥 흔하디 흔한 '민초'의 처지에서 외나무다리를 부여잡으려 하는 저로서는 홍세화씨의 글이 가장 와닿네요. 06-04   
 
상병 박준연 
  역시 홍세화씨.. 저는 자대 처음오는 날도 되게 많이 긴장했는데..(웃음) 06-04   
 
병장 박요한 
  저도 개인적으로는 홍세화씨의 글이 많이 와 닿습니다. 06-04   
 
일병 김준호 
  글이 좋아요. 문득 신영복 선생님의 <따뜻한 가슴과 연대만이 희망이다>를 읽고 싶어지네요. 
다음에 나가면 들여와야겠어요. (웃음) 06-04   
 
상병 김대윤 
  제 개인적으로는 간만에 괜찮게 본 홍세화씨의 글이네요. 
사람에 대한 기대만큼 실망을 했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