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이승현 - 동일시의 문제

이 글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전적인 영향 아래 쓴 글입니다. 특히 상상력이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그의 주저 중 하나인 <공기와 꿈, 서문- 상상력과 가동성>에서 제시된 상상력 개념을 기반하였습니다. 책마을에서도 시에 대한 접근이 한층 더 있었으면 싶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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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 이는 시인들에게 마련된 최종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물론 시를 대하는 매순간 시인들은 그 의문을 맞닥뜨린다. 마지막 한 번, 일생을 다해 구축해 온 독립적인 자신의 시세계에 묻기 위하여, 마지막 그 순간에 다다르기 위하여 순간마다 그 질문을 수없이 되뇌는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다시 그 질문을 이루는 수없는 다른 질문들을 내포한다. 이를테면, “시와 여타의 예술이 구분되는 시의 고유성은 어떤 것인가?” 혹은 “시적 상상력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와 같은 결정적인 질문들. 이러한 질문들의 연속이 우리를 정말 마지막에 이르게 할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단지 예감한다. 시의 직관이 현실에 대한 확신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순간, 이제 막 태동하는 어떤 순간에 대한 예감이라면, 우리를 이끄는 예감을 따라 우리는 질문의 수없는 되뇌임을 통해 마지막 물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 수없는 되뇌임의 일환으로 나는 여기서 몇 편의 시와 이미지들 속에서 발견한 한 가지 현상에 대하여 기술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오브제에 대한 시적 자아의 심리적 동일시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케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시들 중에서 유독 시적 자아가 어떤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대상의 생명력으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에 시인은 시를 통해 존재론적 변환을 꾀하게 된다. 시의 오브제들 중에서 변환의 가장 극적인 표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불이다. 불은 태워 없애는 소멸의 속성을 갖는 것과 동시에 타오르는 에너지 그자체로서 소멸과 존재가 공존하는 곳이며 시적 자아가 불과 동일시될 때 혹은 불에 이끌릴 때 우리는 그 강렬한 생명력과 끊임없는 죽음의 암시를 목도할 수 있다. 예컨대 랭보는 불이 되기 위해 주문을 외운다.

“보라, 불길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타오른다.
자, 악마여. “   <아르튀르 랭보 - 지옥의 불 중에서>

다음의 시는 심리학자 융이 <리비도와 상징>이라는 논문에서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변환적 상징의 분석을 통해 진단했던 정신분열증 환자 미스 밀러가 발병 전에 쓴 작품이다.  

태양을 향한 나방 - 밀러

처음으로 의식 속으로 기어 들어갔을 때, 난 그대를 그리워했네.
내가 아직 번데기로 누워 있을 때, 나의 모든 꿈은 그대에 관한 것이었네.
나와 같은 종류의 수많은 무리가 자주 버린다네.
그대에게서 나온 희미한 불꽃에 부딪히며.
단 한 시간만 더 - 그러면 나의 가련한 삶이 끝나리.
나의 마지막 갈망은, 그러나 최초의 소원과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그대의 장엄함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 그런 뒤.
단 한 번의 황홀한 눈길을 붙들 수 있다면, 난 만족스럽게 죽어가리라.
언젠가 내가 그대의 무한한 광휘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아름다움과 온기, 그리고 생명의 원천을!

시인은 번데기로 태어나 태양의 꿈을 꾸고 나방이 되어 태양을 향해 날아간다. 시적 자아인 나는 “태양을 향한 나방”이며 태양의 장엄함에 가까이 가기를, 그래서 그 무한한 광휘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를 갈망한다. 시인의 생명은 태양을 향해 날개짓하는 나방의 동력으로서 존재한다. 태양, 영원한 불, 심원한 빛에 대한 무의식적 지향은 인류사에서 갖가지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우리는 이 시에서도 동일한 심리적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 영원한 불, 생명의 끝없는 원천, 완전한 절대에 대한 그리움.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비천한 삶에 대한 인식마저 일깨우고 만다. 시인은 결코 태양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덧없는 삶은 태양의 빛과 동화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태양에 닿기 위해서는 삶을 버려야만 한다. 나방은 태양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불에 타 죽는다. 나방의 무분별한 굴광성은 예정된 비극을 예고한다. 이후 시인 밀러는 무의식의 환상적 조류에 휩쓸려 정신분열에 이르고 만다. 이 시는 창조가 아닌 증상, 심리적 투사에 가까운 것이며, 불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의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즉 시와 불이 완전히 일치되기 위해서는 소멸을 극복해야만 한다. 신화적인 인간, 고대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에 몸을 던짐으로써 불과 하나로 결합하였다. 철학자는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죽음이 아닌 재생을 예언한다. 그는 화산의 불로써 다시 살아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인간 의지의 도약이며 폭발이다. 

“철학자는 한 인간의 초라한 삶의 불행에 떠밀려 에트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화산의 부름을 받아 에트나로 뛰어드는 것이다. 화산은 단순히 희생자를, 누구든 상관없이 한 사람의 희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화산은 엠페도클레스를 원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시학의 단편들, 3장 엠페도클레스 중에서>

화산이 엠페도클레스를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산은 엠페도클레스 고유의 소멸점이며, 그 자신의 無이다. 화산에 뛰어듦으로써 그는 에트나이며, 에트나는 곧 엠페도클레스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삶으로 죽음을, 죽음으로써 삶을 긍정한다. 죽음을 위하여 삶을 살고, 삶을 위하여 죽는다. 모두 타버린 불은 한 순간에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와 無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롭다. 시의 이미지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는 불의 이미지와 함께 몇 번이라도 다시 살아난다.  

좀 더 인간적인 양식에서의 불의 이미지는 촛불이다. 침묵하는 방 안의 질서 안에서 촛불이 혼자 고요히 타오른다. 고독한 명상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을 바라보면서 몽상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의 명암을 깨닫는다. 촛불은 꿈꾸는 몽상가 자신이다. 몽상가는 촛불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불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심지가 타들어가고 밤은 무한한 듯하다. 우리의 시간이 눈앞에 있다.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 - 촛불의 미학 p.45>  

촛불에게는 삶과 죽음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 작은 입김에도 쉽게 일렁이고 흔들리지만,  그러나 촛불은 다시금 방 안을 메우는 어둠을 밀어내면서 천장을 향해 곧바로 타오른다. 불꽃의 수직성, 그것이 촛불이 가진 고귀한 운명이다. 위로 타오르는 불꽃이 몽상가에게 다른 곳, 위쪽에 있는 어떤 곳을 꿈꾸게 한다. 수직성의 원리에는 일체의 초월성이 내재되어 있고, 높이의 몽상을 꿈꾸는 몽상가는 촛불로부터 보다 위를 향하여 상승하는 정신심리, 승화의 미학을 발견한다. 

“계속 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불꽃, 그 원초적 이마주가 진실한 이마주가 아니라면, 나는 나 자신의 몽상이나 먼 옛날의 추억 등을 말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스스로의 위를 날고 그 첨단을 넘어, 그 최초의 비약을 넘어 새로운 비약을 붙잡는 불꽃,..”
                                        <가스통 바슐라르 - 촛불의 미학 p.94>

위를 향해 타오르는 불꽃은 새로운 생성,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꿈꾸게 한다. 어두운 방, 조그맣게 밝히며 홀로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그는 천천히 몽상에 빠져든다. ‘타오른다’라는 말이 그의 내면에 가득해진다. “타오른다, 무엇으로부터, 나는 어디로?” 짧아지는 심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뾰족한 불꽃의 형상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그는 촛불을 자신으로 꿈꾼다. 촛불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몽상가는 새로운 생성을 꿈꾸는 존재, 현실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가 된다.

2.
동일시의 과정에서 ‘이미지’는 독립적인 항으로서 오브제와 시적 자아라고 하는 개별적인 항들을 일치를 통해 매개하여 연결짓는다. 이미지는 그 자신의 소재가 된 오브제와도, 창조의 주체인 시인과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동일시는 오브제 → 이미지(일치) ← 시적 자아의 도식으로서 가능하다. 이 때 이미지는 오브제와 시적 자아의 개성적인 일치를 표상하는 새로운 상징으로서, 비현실의 현실이라는 창조적 층위에서 존재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들의 불은 모두 다른 불이며, 그러므로 매번 새롭게 생성된 불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이 동일시를 통해 존재론적 변환을 시도할 때 진정 존재하는 것은 이미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닌 그 ‘무엇’이다. 즉, 오브제에 대한 심리적 동일시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상상력의 문제이다. 이미지는 현실의 한계, 지각의 한계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취한 배”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롭고 방종한 영혼인 랭보 그 자신인 동시에 비틀린 감각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의 현존을 보는 견자시인을 표상한다. 랭보는 취한 배가 되어 말한다.

“나는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 소용돌이와
파랑과 해류를 알고 있다. 나는 저녁을,
비둘기 무리처럼 고양된 새벽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때때로 보았다!“ 

나는 보았다 거대한 늪이, 레비아탄
한 마리가 골풀 사이에서 온통 썩어가는 통발이,
잔잔한 가운데 물이 무너져내리는 곳이,
심연 쪽으로 폭포를 이루는 먼곳이 술렁이는 것을!

빙하, 은빛 태양, 진주모빛 물결, 잉걸불의 하늘!
갈색 만들의 밑바닥에 펼쳐진 보기 흉한 양륙지들,
거기에선 이들이 득실대는 거대한 뱀들이
검은 향기를 내뿜으면서 비틀린 나무에서 떨어진다!

나는 항성의 떼섬들! 그리고 헛소리하는
하늘이 표류자에게 열려 있는 섬들을 보았다.
ㅡ 수많은 황금빛 새들이여, 오 미래의 원기여,
너가 잠들고 유배되어 있는 곳은 저 밑바닥 없는 어둠 속인가?
<아르튀르 랭보 - 취한 배 중에서>

상상력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현실적 지각이나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의 현실을 실현한다. 오브제에 대한 동일시는 ‘나’라고 하는 현실적 차원의 존재를 상상 활동, 즉 시인 고유의 이미지를 통해 창조된 비현실의 존재와 관계 짓는 일종의 은유이다. 은유는 사물들 간의 숨겨진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 혹은 부여하는 것. 동일시는 시적 자아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이에 나아가 우리는 동일시에서 은유로의 이행적 탐구를 통해 현실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확장시키는 적극적 활동으로서의 시적 상상력의 본질을 추측할 수 있다.   //
 
 
 
상병 박수영 
  오오. 잘 읽었습니다. 시는 완전 문외한이었는데 말이죠. 그 짧은 문장들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구상들과 의미가 담겨있는건지. 05-25   
 
병장 김병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확실히 승현님의 설명을 읽고 랭보의 시를 읽으니 와닿는 느낌이 많이 다르군요!! 05-25   
 
상병 김현진 
  랭보에 대한 제 관심도 더불어 모락모락 피어나는군요 히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