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허구에 관하여 : 황민우씨의 경우 
 병장 이승일 05-11 12:30 | HIT : 309 




<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이 말을 토해냄으로써, 이 명제가 부당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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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의 소설이 일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최소한 그것의 스토리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소설이 주는  매력 -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중 하나는 진실과 허구의 뒤섞임 속에 있다. 황민우씨의 <시간의 한 연구>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 도 거의 동일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우선 전혀 소설같지 않으며, 일종의 리포트나 논문과 같은 스타일로 씌어졌다. 이 글은 '진실한 문체' 로 기록되어있지만, 그 내용 속에는 의도적인 거짓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석이 몽땅 거짓말이다. 그는 플라톤, 사르트르, 하이데거, 베르그송 .. 등 등의 사상가를 인용하며 주석을 달고 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실제 그들의 저서에는 그러한 문장이 없으며, 내용도 의도적으로 왜곡되어있다. 

 황민우씨가 의도한 것은 꽤나 명백하다. 그는 우선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개념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지각하는 것 속에는 이미 수많은 허구가 포함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아무 문제 없이 즐기고 감탄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즐거움과 감탄'이라는 인간의 반응은 객관적 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양식이나 문체 따위에 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실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불과하다고 판단될 수 있다. 황민우씨는 허구들을 조합하여 <진실의 형식> 을 구현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을 대하 듯 진지하게 읽는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이 뻥이었음을 알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기존에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도 이렇게 뻥에 불과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황민우씨가 의도한 것이다. 그는 진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부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근거없이 세워진 독재정부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짜 독재자를 사람들 앞에 출몰시켰다. 국민들이 여전히 그를 자신의 통치자로 떠받드는 것을 즐거이 감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사기'를 통해 <진실의 권력> 이란 결국 사람들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 이미지일 뿐임을 알리려한다. 만약  진실이 가진 권력이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 내 마음대로 진실의 권력을 자유로이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허구가 진실을 대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태여 보이지도 않는 진실을 찾는 대신 쉽게 다룰 수 있는 허구를 창조하여 그것을 진실처럼 여기고 즐길 수 있다. 니체의 초인처럼, 자기 자신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이 황민우씨가 말하는 '유희'의 핵심이다. 

 이 유희는 일반적인 소설의 유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우선 강조해두고 싶다. 대체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것이 허구임을 미리 알리고 글을 쓴다.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허구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존재하지만, 완전히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소설가들의 유희는 허구라는 한계 내에서의 유희이다. 혹은 허구의 영역에 몸담은 채 우리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탐색>해보려는 몸짓이다. 나는 이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황민우씨가 시도하는 작업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그 시작에서부터 허무는 일이다. 이를 통해 거짓을 생산하듯 진실을 생산하고, 진실을 대하듯 거짓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런데 이 재능있는 젊은이의 유희는 -약간 재미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태생적 한계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자. 먼저 황민우씨가 의도한 작가와 독자간의 소통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인지 자세히 되짚어보자. 황민우씨의  논문 비슷한 소설, 혹은 소설 비슷한 논문을 읽으면서 독자는 그 속으로 몰입한다. 독자는 그것을 진실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읽는다. 그러다가 독자는 무언가 석연치않은 점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주석이 완전히 잘못 되어있다는 점. 이것을 황민우씨에게 지적한다. 황민우씨는 그제서야 이 모든 것이 사기였음을 대수롭지 않게 밝힌다. "응? 난 그냥 장난한것 뿐인데?" 이를 통해 독자는 허탈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진실에 대해 가졌다고 착각한 진지한 태도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된다. 이로써 황민우씨는 승리감을 만끽하게되며 독자는 황민우씨의 유희 속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황민우씨는 사실 전혀 승리하지 못했음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황민우씨 본인의 도움으로 인해 독자는 결국 진실과 허구를 구분해냈기 때문이다. 독자는 황민우씨의 소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결국 알아버렸다. 단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시간을 소모하여' 진실을 알아내는가. 그러나 이 시간의 소모가 진실-허구의 구분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진실과 거짓은 구별불가능하다' 라는 황민우씨의 모토는 스스로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작가 자신에 의해 그것을 구별하게 된다.
 만약 황민우씨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어떨 것인가? 그는 이것이 사기라는 영영 사실을 은폐하고, 끝까지 진실인 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경우 황민우씨의 사기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그는 "너는 나에게 속았어!" 라는 사실을 반드시 말해줘한다.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은연중에 그것을 알려줄 수 있어야한다. 그가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한 것임을 독자에게 알려주지 못한다면, 그의 글은 단지 숱한 실수들을 범한 것으로 간주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황민우씨가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소설이 사기임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하고 싶은 메세지를 전할 수 없고, 만약 사기임을 고백한다면 그 고백으로 인하여 독자들은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최초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진실과 허구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분명하게 지각하게 된다. 진실을 가장한 허구를 더 경계하고, 그 기준을 더 예민하게 만듦으로써 거짓의 설자리를 점점 더욱 더 좁게 만든다. 그는 진실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승리 속에서 자유롭게 유희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한 일은 오히려 진실을 가장한 허구의 부당함을 더욱 명료하게 밝힌 것이었다. 거짓은 이렇게 스스로로 인해 패배하고 만다. (이 점에서 그의 글은 '필요악' 이라는 영예로운 작위를 수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민우씨의 저항은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다. 그의 글쓰기는 세상의 부조리와 혼탁함에 대한 냉소적 외침이다. 그것은 웃음으로 포장된 원망이오, 유희로 가장된 투쟁이며, 소통으로 위장된 자기폐쇄이다. 우리가 어찌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우리 자신을 또한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와 동일한 부조리와 허위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와 같이 원망하고, 그와 같이 투쟁하며, 그와 같이 자기안에 같혀 있을텐데 말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의 가여움을 자각해야한다. 

 진실은 진실이지 거짓이 아니며, 거짓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다. 어느 유치원생이 이것을 모르겠는가. 아, 진실은 얼마나 부당하면서도 또한 공정한가! 가장 작은 아이에게도 명료하지만, 온갖 지식과 재능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도리어 스스로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니 말이다.  ... 진실을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탁월한 지능이라기 보다는 아주 약간의 시력이다. 

* 병장 김현동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11 16:17)  


 병장 홍지택 
 진실이 가지고 있는 부당한 권리라는 것... 정말 많이 느끼고-주위에서...- 또 생각했던 문제인데.. 

 참 재미있는 컨셉의 책인것 같군요... 

 정확한 제목이 어떻게되나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05-11   

 병장 김민성 
 지택/ 후후...이건 "책"에 대한 후기가 아니라 책마을 유지셨던 황민우씨가 썼던 "글"에 대한 후기죠. 그래서 카테고리가 "독서후기"가 아닌 "내글내생각"이죠. 

 논의 수준이 상당해서 마치 독서후기 같군요. 승일님과 민우님의 내공은 정말 대단합니다. 
 부럽군요~(발그레) 05-11   

 병장 도윤섭 
 이 글은 뭐… 두말 할 필요가 없군요. <가지로~> 05-11   

 일병 황인준 
 그냥.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두분다. 
 황민우씨의 글을 많이 보지 못했다는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진실을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탁월한 지능이라기 보다는 아주 약간의 시력이다. 
 이 부분은 정말로 와닿네요. 그러한 시력을 갖추려고 노력을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죠. 
 그러기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읽고 또 읽을 따름입니다. 언제쯤이면 조금이나마 시력이 발달할런지. 05-11   

 일병 황인준 
 아! 저도 외칩니다. 
 가지로~ 05-11   

 병장 김현동 
 우하하하하. 황민우씨의 글을 가지고 이런 글을 쓰시다니. 민우씨에게 꼭 보여주고 싶군요. 05-11   

 병장 김광철 
 민우님의 <시간의 한 연구> 를 읽지 못해서 안타깝군요. 
 어쨋든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저 역시 <가지로~!> 

 개인적으로 민우님의 글도 함께 책가지에 올려놓으면 좋겠다는... 05-11   

 병장 진규언 
 아쉽네요. 황민우 님이 이 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저도 가지로 추천합니다. 광철님의 말씀을 좇아 민우님의 글도 함께 올랐으면 좋겠어요. 05-11   

 병장 심승보 
 글쎄요, 정말 의외의 반응들이군요. 어떤 각도에서 접근하더라도 이 글은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심각하기 그지 없는 과격한 글이 아닐까 합니다. 네, 분명히 승일씨는 변하고 있군요. 아니, 이미 완벽히 변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전 이 글에 가지로를 흔쾌히 외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다소 씁쓸합니다. 적어도 승일씨는 제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진심을 이해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 '진실'과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 이 혁명적 용어들은 여전히 제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05-11   

 병장 이승현 
 황민우씨의 글을 직접 읽어보지 못해서 조심스럽지만, 민우씨가 목적했던 바는 단지 진실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05-11   

 병장 김지민 
 그러게요 제가 보기에도 의외의 반응들인데요. 
 승일씨가 어떻다, 이 글이 어떻다 하는 건 아닌데, 글의 취지와 댓글들의 방향이 상당히 엇갈린 듯. 제가 이해하기에는 복합적인 분석을 통한 냉소적 언어가 느껴지는데요? 히히 
 사실 저는 좋지만 (.....) 

 아무튼 재밌게 읽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황민우씨의 글을 단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 이렇다할 코멘트를 못남기겠네요. 05-11   

 병장 성태식 
..... 갑자기 게시물이 없어져서 당황했었는데 가지로 이동했군요. 
 아쉽게도 승보씨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민우씨의 글을 보지 못해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그의 의도는 '완벽한 속임수가 있다면?' 정도로 요약될 듯 합니다. 따라서 그가 상당히 정교한 속임수를 창안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속임수를 밝히는 행동은 글의 의도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또한 민우씨의 의도에 대한 분석에는 승일씨다운 명확함이 보이지만, 그에 대한 반론의 과정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군요. (비록 제가 싫어하는 개념이기는 합니다만..) 다르게 말해 감각적으로 환원가능한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대상은 구별불가능하되, 구별불가능한 대상을 같다고 할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조금 오류가 보입니다. 물론 진실과 거짓은 다르지만 그것이 진실과 거짓의 구분가능성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우려되는것은 승보씨께서 지적하신 부분과 유사합니다. 제 관점에서 승보씨가 지적하신 '혁명적 용어'들은 '동정'에 기반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정은 승자(혹은 우월한 자)의 권리입니다. 즉,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관점이 전제되어야 하지요. 이 부분에서 아마 승보씨가 과격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뭐. 어쨌든. 어서빨리 나와서 셋이 술+스파게티(.... 안 어울려....) 앞에 놓고 이야기하자구요. 
( 캬득) 05-11   

 병장 김광철 
 승보님께서 지적하신 것과 같이 이 글은 충분히 과격합니다. 어쩌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심지어 '불쾌할'수도 있는 글이지요. 

 그러나 승일님의 글은 오히려 그렇기 떄문에 <책가지>에 남겨질만한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승일님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상은 민우님의 글이지만, 궁극적인 재물로 삼고 있는 것은 보르헤스로 대표되는 <환상적 사실주의>가 문학적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진리와 허구의 문제인 듯 싶습니다. 

 기존 문학계에서 진리/허구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접근을 이루었다고 대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환상적 사실주의>에 대해 어찌보면 하나의 '테러'라고 할 만큼 이토록 냉소적 매스를 들이대고 있는 글을 저는 이제껏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이 글은 어쩌면 매우 의미있는 논쟁의 핵심적인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05-11   

 병장 이승일 
 앗.. 책가지로 오다니 ... 영광입니닷 - 05-11 * 

 병장 심승보 
 광철님/ 사실 승일씨의 이 글에서 제가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대목은, 이 글의 독립적인 논지 외의 것들이 많이 얽혀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점은 좀 양해를 바랄게요. 아쉽게 아직 저는 보르헤스의 '환상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좀 더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그 밖의 다소 사적인 이야기들은 개인적인 쪽지를 통해 오해를 더 풀고자 합니다. 05-13   

 병장 이승일 
 막 저는 투명인간 처럼 가운데 있고 광철씨랑 승보씨가 제 몸을 통과해서 싸우는 것 같애요.(머쓱) 두둥...결론은 제가 나쁜놈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부드럽게 쓴다고 썼는데, 인격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음 한편 승보씨, 이 글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저는 보르헤스적인 황민우씨의 글에 대해 비판한 것이므로 보르헤스적인 사조(?)에 대해서 일단 알아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 글에 그러한 사조 이외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얽혀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리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황민우씨 조차도 <시간에 관한 한 연구> 라는 글을 통해서만 얽혀있을 뿐이에요. 전 황민우씨(의 글 말고 그 개인)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괜히 미안해 지는군요. 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