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태> -이상- 
 병장 김광철 05-08 11:14 | HIT : 354 



< 권태> - 도시적 감수성과 원시적 향토성이 빚어내는 불협화음

 흔히 우리가 이상과 그의 작품을 말할 때는 '초현실주의 작가' 혹은 '세련된 모더니즘 기법' 등의 단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위와 같은 수식어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상은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것을 모더니즘적 수법으로 제시하거나, 실험적인 초현실적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의 작품들은 삶의 모습을, 특히 농촌의 풍속이나 현실을 정직하게 담아내고자 했던 당대의 리얼리즘 문학과는 대비되는 '도시적 감수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이상이 서울 토박이인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김윤식이 지적하듯이 서울 토박이로 태어난 이상에 있어 '서울'이란 그의 모태이자 그를 에워싼 전부였다. 이 '도시적 감수성'이야 말로 이상이 그의 작품에서 냉소적 매스로 개인의 내면을 해부하고, 언어와 문법을 해체하며, 전위문학의 선봉에 서게 했던 원동력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시적 감수성이 향토적 농촌과 맞닥뜨렸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서울 토박이인 이상이 농촌의 삶과 부딪쳤을 때 그는 어떠한 대응방식을 취했는가? 혹은 취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상의 농촌에 대한 대응이 '권태'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 권태>는 이상이 성천(成川)에서의 체험을 가지고 쓴 수필이다. 서울 토박이였던 이상에게 있어 인천을 뺀 시골 체험이란 배천 온천 다음이 바로 성천이었다. 그러나 배천 온천 체험은 각혈과 기생 금홍이로 인한 일시적 체험이었기에 그 나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성천 체험'은 특권적이자 특징적인데, 서울 토박이인 이상이 결핵 치료용으로 간 배천 온천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 없이 그의 자의에 의한 행복하고도 자유스런 선택의 고장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성천이란, 아무런 목적 없는 시골체험이란 점에서 특권적이자 절대적이었다. 그는 성천에서 비로소 서울(근대)과 다른 별세계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성천 기행이란 충격적이자 대단한 체험이었다.   

 먼저 이상이 성천에서 처음으로 농촌과 마주했을 때 그는 어떠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는가? 이상은 농촌을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세계로 보고 서정적으로 묘사하려 하거나 혹은 농사일로 부단히 바쁜 역동적인 세계로 파악하여 농촌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농촌을 미개한 세계로 상정하고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이상이 관찰하여 스케치하는 농촌의 풍광은 철저한 권태 그 자체였다.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태의 극권태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농촌에 대한 태도는 물론 당시의 다른 작가들과는 판이하고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정지용이 노래한 것처럼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었던 농촌은 이상의 화폭에서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인 소가 권태로운 반추를 되풀이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노천명이 찬양했던 <푸른 五月>은 이상에게서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초록으로 변색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나 배설행위조차 권태를 피하기 위한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채색된다.

 이렇게 이상의 <권태>에서는 기존의 작품에서 농촌이나 자연을 그리던 방식과는 판이하게 농촌의 모든 대상이 철저하게 권태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그렇다면 유독 이상이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농촌을 그려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즉 그의 권태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상의 '도시적 감수성'이 성천이라는 '원시적 향토성'과 맞닥뜨렸을 때 발생한 불협화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성천은 서울 토박이로 도시에서의 생활에 익숙했던 이상이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 도시와는 전혀 다른 향토적 생활양식과 조우했던 곳이었다. 때문에 성천 체험에서 익숙지 않은 주변 환경으로 인해 이상이 겪었을 혼란은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권태>에서도 도시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특유의 냉소적 칼날을 곳곳에 들이대고 있다. 때문에 기존의 농촌은 이상의 날카로운 칼날아래 권태로 가득 차서 숨 막힐 듯한 공간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의 칼날은 그 이상 나아가지를 못한다. 정확히 '권태' 그 지점에서 더 이상 전진 없이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칼날은 개인의 내면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즉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 마련이며, 그리하여 이상의 칼날은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적 감수성으로 날카롭게 벼린 칼날도 이상이 처음으로 마주친 농촌의 단단한 향토성을 해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농촌의 투박한 결은 그의 칼날이 더 이상 내면의 성찰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이상은 다만 극도의 권태에 머무를 뿐이다. 즉 이상에게는 "자의식의 과잉조차가 폐쇄되었"으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이상 특유의 칼날이 들지 않는 농촌에서 내면에 대한 해부는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 이상은 그곳에서 질식할 것 같은 권태에 짓눌릴 뿐이다. 

 자신의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자 이상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이러한 혼란된 그의 모습은 작품 안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품에서 이상은 지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농촌이 빚어내는 권태에 대해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는 처음 최 서방 조카와의 장기가 끝나고 자신은 "왜 최 서방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는지 자책한다. 그는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리기를 원한다. 즉 "아주 바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 자신이 들고 있는 칼날조차 팽개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도 농촌의 권태로운 대상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권태를 자각하지 못하는 농민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라고 자위하고 있다. 앞에서 내팽개쳐 싶다고 저주한 칼날을 이제는 그나마 권태를 인식할 수 있게끔 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도시속의 원시인' 못지않게 '농촌속의 도시인'도 혼란스러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도시적 감수성과 원시적 향토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모순적인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취하며 갈팡질팡 헤매던 이상이 종국에 도착한 곳은, 그 숨 막힐 듯한 권태 속으로 젖어드는 것 이었다. 그는 결국 끝없는 권태인 양 자신을 짓누르는 암흑 속에 누워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며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라고 힘없이 중얼거리는 것이다. 자신의 무기가 도저히 먹히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상은 결국 도시적 감수성과 원시적 향토성이 빚어내는 음울한 불협화음을 들으며 심연 같은 권태 속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 권태>는 도시적 감수성의 작가인 이상이 향토적 원시성의 세계와 만났을 때, 그의 대응 방식을 여실히 나타낸 매우 흥미 있는 수필이다.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상이 그의 화폭에 전에 없는 실로 기묘한 기법으로 그려낸 <권태>라는 농촌 풍경은 그의 다른 문학작품만큼이나 독특하고 현대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으리라.  

* 병장 김지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09 10:54)  


 병장 김지민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지문으로 처음 접했었지요. 얼마전에 한국의 명 수필이란 책에서 다시 접했는데, 정말 충격적이더군요. 확실히 무언가 '다른 맛' 이 풀풀 나는 글이었어요. 시니컬하고, 답답하고... 

 광철님의 이 글, 정말 좋군요 <가지로~!> 외쳐봅니다. 05-08   

 병장 김태호 
 이상의 '매상'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상 본인과 가족을 속이고 애인과 가출해 버린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글 입니다. 
 이상같은 왠지 4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집을 나가버린 동생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한편으론 걱정을 하는 평범한 한 오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와 다를바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감도에서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이상이 갑자기 옆집 형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하하 05-08   

 상병 탁찬연 
 이 글을 보니 다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05-08   

 병장 이승일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언어영역 공부한답시고 읽었더랬죠. 광철씨께서 도시적 감수성과 농촌의 향토성이라는 일관된 구도를 제시해주어서 작품을 더 잘 되새겨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상의 빈틈없는 자의식이 어디에서 비롯하였는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자의식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반사적 자의식이 아니었나해요. (도시적)삶의 부조리와 불가해성이 그를 자극했고, 그것을 통해 그의 의식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농촌에서, 그의 자의식은 아무런 생명력도 획득하지 못한 채, 그냥 서서히 꺼져간 것 같군요. 

 한편 저도 예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자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를 생각하다가, 딱 한시간만 완전히 집중해서 고민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경우가 종종 있었죠.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거라고 생각했구요. 그래서 가끔씩 집근처의 산 (북한산) 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서 여유롭게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기는 커녕 아예 아무 생각도 없어지는거에요. 그냥 나른하고 아무생각하기 싫고... 
 저는 이상이 왜 이런 경험을 글로 썼는지 공감이 갑니다. 그것은.. 사실 두려운 경험이거든요. 나의 자의식이라는 것이 별거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 그냥 어떤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일 뿐일 수도 있다는 느낌... 나 스스로는 "산소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느낌. 
 이상이 느꼈을 두려움도 이런 종류의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해요. 05-08 * 

 상병 전경원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05-09   

 상병 이기중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상이 농촌에서 느끼는 권태라는거, 저도 친척집에 며칠씩 머무르고 있다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급작스런 변화라던가 예측불가능한 사건 같은게 없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이들면 농촌에 살고 싶다는 사람들과 감성의 공유가 잘 안되기도 하고. 
 가끔 이곳에서도 할 일이 없는 주말이면 권태에 짓눌릴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05-09   

 병장 진규언 
 정말 좋습니다. 조심스럽게 저도 <가지로~!>를 외칩니다. 
 반복되는 나날로 인한 권태로움이 이어지다, 권태로움을 자각할 수도 없는 극권태의 상황까지 오는 경험을 한걸 보면, 이상이 보편적인 경험을 입맛에 맞게 풀어놓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05-09   

 병장 이승일 
 핫, <가지로> 가 두개나 모였으니 하나만 추가하면 가지로 가겠군요! 
 저도 <가지로~!> 05-09 * 

 병장 이건룡 
< 가지로>입니다. 

 빼어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05-09   

 상병 박수영 
 정말 잘 읽었습니다. 드디어 가지로가 완성이되는군요! 

 빼어난 글솜씨입니다. 05-09   

 병장 김광철 
 허걱~!! 오전 정신교육 다녀오니 글이 갑자기 순간이동을....;; 
 변변찮은 저의 雜文이 감당하기에는 책가지라는 후광이 너무나 버거워보이는군요.;;; 
 아무튼 좋게봐주셔서 감사해요~(웃음) 05-09   

 상병 이지훈 
 역시! 05-10   

 상병 박준연 
 글을 참 깔끔하게 잘 쓰셨네요. 
 중1 교과서에 실린 글 아니었나요? 권태 (땀) 

 이상은 오감도 라는 시로 유명하죠. 
 무엇으로든 해석가능하기에 무엇 이상의 가치를 지닌 시 .. 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