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Adios>



  따분해. 
너는 말한다. 너는 평소처럼 그 자리에 앉아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정지해 있고, 너는 언제나처럼 지친 눈빛으로 비스듬이 창가를 내려본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노란 햇살의 틈새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다. 빛을 피해 숨어버린 그림자들은 모두 등 뒤에서 서로 눈짓한다. 사람들의 인상은 말뚝처럼 단단하지만 그 사이에서 그림자들은 저들끼리 표정만 주고 받으며 급히 자리를 피하고 못내 아쉬워한다. 카페에 갇힌 나와 너의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 사선을 향해 도망치려 하지만, 공간에 사로잡혀 이내 멈춰버린다. 카페 안은 우리들 뿐. 점원은 보이지 않는다. 이 곳은 언제나 섬뜩한 한산함으로 가득하다.
  나는 너의 시선을 따라서 창밖을 바라본다. 조용한 시선의 흔들림조차 멎어버린 봄날의 오후. 너는 긴 머리칼을 미세하게 흔들거리면서, 귀여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리고, 마치 풍경화에 그려진 인물 스케치같은 표정으로 빨대를 물고 커피를 마신다. 흙빛 아메리카노 커피는 목구멍을 타고 진주 귀걸이와 텅 빈 눈동자, 그리고 하얗다 못해 금빛으로 적셔진 단정한 원피스까지 퍼져나가며 씁쓸한 카페인을 그녀의 몸에 심어놓는다. 그녀는 카페인이 필요하다. 그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이제 쓴맛이 감도는 흙빛 커피밖에 없는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모든 다른 것처럼 정지해있는 것 같다. 나는 말없이 너를 응시한다. 숨 쉴 수 없을정도로 공기가 딱딱하다. 
  우리는 매일마다  햇살이 비쳐드는 두어시쯤이 되면, 카페 <Adios>에 간다. 유럽풍 오두막 산장처럼 생긴 이 작은 카페는 명동 한복판에서 조금 비껴있는 오래된 빌딩과 빌딩 틈새로 갈라진 골목 안에 숨어있다. 우리가 그 카페를 처음 발견한 - 그것은 분명 발견이었다 - 날은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은둔해버렸고, 오랜 동안 우리는 낡은 습관처럼 그 곳을 드나들었다. 너는 그곳에서 늘 진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나는 늘 키위주스를 시킨다. 하지만 나는 주스를 마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늘 그렇게 너는 카페인을 흡수하면서 오후의 정경을 그려넣고, 나는 글라스에 맺히는 물방울처럼 수많은 상념들을 행인들의 그림자 속으로 박아넣으려 한다. 너와 나 사이에서 말들은 진한 커피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버린다. 그것은 이를테면 무서운 중독이다. 침묵의 중독.
  세상은 정지해버렸어. 너무 오래전에......
  너는 커피를 빨아들이며 내게 몸짓한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정확히 읽어냈으나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주문해 놓은 키위주스는 기다란 글라스에 땀방울을 송송 맺어가면서 대답을 재촉한다. 머릿속이 아득하다. 키위주스는 파랗다. 아니 달콤하다. 그건 마약이다. 마치 그녀가 마셔대는 커피같은. 마시면 모든 것이 끝맺을 것이다. 정지한 시간에서 벗어나 카페인으로 도망가는 그녀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실 것이고 나는 키위주스를 마실 것이다, 그러면 이 현기증도 너와의 침묵도 그리고 이렇게 지독히도 오랜동안 지속되었던 시공의 틈새에서 오는 악몽같은 평화도 매듭이 지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너는 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내가 가는 길을 너도 함께했고, 네가 좋아하던 골목과 소로(小路)들을 나는 함께 걸어갔고, 그렇게 찾아낸 우리만의 카페가 바로 여기, Adios였다. 우리는 말없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침묵의 메세지를 배웠고 고요한 세상에 둘만이 마주하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긴 여행의 끝, 고향의 포근함 같은, 영원히 함께 쉬고 싶은 요람같은 곳을 우리는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카페 Adios.
  나는 잠시 되뇌이며 시선은 창밖으로 꽂아두고 너를 바라본다. 너는 카페인에 취한 것인지, 오래된 습관에 중독된 것인지 모를 희미한 눈빛으로 이제 나를 가리킨다. 사랑스럽지만 익숙한, 아니 눈 속의 영혼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샘물 같은 너의 시선은 이제 경이롭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너에게 그러할까.
거리의 그림자들은 여전히 눈짓한다. 말을 걸고 싶어한다. 그들은 진하고 옅은 제각각 표정이 있지만, 그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말도 허락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갈 길로 끌려가고 있을 뿐이다. 만나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림자들은 얼마나 슬퍼할까. 그들은 그림자들의 슬픔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겹쳐진지 오래 되어, 서로의 색조가 배어나고, 섞이고, 오랫동안 같이 바래갔던 우리의 그림자는 이제 너무 닳았고, 진부해졌다. 녹빛 키위주스를 주문한 내 그림자가 그녀와 같은 커피색인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카페인에 전염되었기 때문일 거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낯선 사람의 그림자들은 얼마나 기대되는 눈빛으로 다른 밝기, 다른 표정의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가. 우리에게 그런 눈짓은 파란 물감에 풀어놓는 파란 잉크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곧 나였고 그것은 둘 중 하나가 소멸되고 멈추어 퇴색함을 의미한다. 나는 얕게 한 숨을 쉰다. 
  여기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매듭을 짓기 위해서.
매듭이 필요해. 너는 여전히 빨대로 커피를 연신 마셔댄다. 입을 열진 않는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다. 길고 긴 여행의 매듭이 지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그레고리우스 매듭이든, 청홍실로 엮은 쪽의 매듭이든.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림자는 태양의 운행에 따라서 늘이고 줄이며 표정을 바꾸고 몸을 움직여야한다. 우리는 태양의 뜨거움을 피해 정지한 카페로 잠시 몸을 숨기고 그것을 즐겼을 뿐이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주문한 음료에 의하여 색깔을 받은 그림자는 묶여버렸고, 고여버렸고, 섞여버렸다. 너는 나다. 그래서 너와 나도 소멸해버렸다. 이 카페의 평화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내 말들은 네가 여기서 맛들인 카페인보다 약하다. 아마도 너에게 또다른 놀라움이 필요했으리라. 이제 내 말들은 어떤 것도 너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설혹 내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되더라도 그녀는 지금 말없이 커피를 마실 것이다. 
  커피 좋아했니. 네가 커피를 싫어해서 피했지만 이제 마셔야할것같아 카페인은 우리에게 치명적이거든 우린 여기서 그림자 죽이는 법을 배워야해. 어째서 내 그림자도 커피색일까 나는 키위주스를 마시려 하는데. 그러니까 지금 그대 앞에 담겨있는 달콤한 녹색 주스를 마셔버리라구 이건 약속이자 의식이니까 그림자에 색깔들은 여기를 떠나가면서 곧 검게 사그라질거야 그래도 마시고나서 이 카페를 뛰쳐나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마법처럼 각자 새 그림자와 새 생명을 받게 될거야 그리고 또다른 슬픈 그림자를 만나봐야지. 이제 우리도 다른 그림자를 만나야할 것 같아 하지만 여전히 커피색 그림자를 잠시 가졌고 그러므로 해서 녹색 그림자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해둘게- 그걸로 충분하겠지. 응...
  나는 슬픈 얼굴로 미소짓는다. 너는 여전히 귀여운 얼굴로 가볍게 고개만 흔들 뿐이다. 
  카페 Adios .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야. 나는 너의 명랑함에 대답대신 키위주스를 마신다. 달콤한 향이 머리끝부터 목을 타고 온 몸에 퍼져 내 그림자에 전해진다. 흙빛이 사라진 그림자에는 은은한 초록빛이 감돈다. 그녀와 나의 그림자는 그래서 분명해진다. 너, 나. 서로 빛을 찾게 된다. 슬프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서로 또다른 여행의 시작이다.
  너와 나는 둘이서 카페를 떠난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골목 끝의 거리에서 우리는 멈춰선다. 행인들 뒤에서 배회하는 검은 그림자들은 저마다 우리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찾는다. 그리고 몰래 우리에게 눈짓하는 그림자 뒤를, 끌리는 데로 따라가며 각자의 길을 만든다. 너는 이쪽, 나는 저쪽으로 걷는다. 나는 카페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활보하며 낯선 사람의, 색을 잃었지만 분명히 두개가 된 그녀와 나의 검은 그림자를 바라본다. 색은 이제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우리는 평소처럼 미소로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칠년이 지났다.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머물렀던 그 이름의 카페는 이미 찾을 수 없다. 어디에도 카페가 있었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제 Adios라는 카페는 명동에 존재한 적도 없고, 이백년 전에 이미 문을 닫았다는 소문만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너와 나 우리가 오랜동안 멈추었던 그 카페는 이제 일상 너머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나는 가끔 명동을 지날 때마다 그 곳을 찾아 골목을 헤매며 돌아다녀보지만, 카페 <Adios>가 존재했던 곳들은 이미 내 시야에서 문을 걸어잠가 버린지 오래다. 카페는 흙빛 그림자를 명동 어디쯤 감춰놓고, 우리 같은 정지된 커플의 일치되버린 그림자를 기다릴 것이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만난 적이 없다. 


- Fin. -

(2007.3.3 pm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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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나름대로 정리된 플롯을 가지고 질서있게 써본 일종의 미니픽션입니다. 분량이 원고지 20장 정도 되더라구요. 아직 조금 다듬어야할 부분은 있는데, 그냥 읽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한번 올려봤어요. 요새 이런 짧은 단편 습작들 쓰는데 온 생각을 쏟고 있느라 다른 거 눈 돌릴 시간이 없네요. 이 작품 말고도 세편의 단편을 더 쓰고 있는데, 그것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올려볼게요.

이 단편은 사실 저의 마지막 연애 이야기이고, 조금 중남미 풍으로 쓰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재밌는지는 모르겠네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