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ORPG와 Role Playing 
「리니지II 완벽공략본」을 읽고


미리 변명하지만 -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부분을 통해 분류되는 것은 종종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고, 많은 경우 그것은 대상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주기보다는 분류자 자신의 편견에 대한 진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곤 한다. 그러나 논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정치적 통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 필수적일 때도 있다. 

일본의 MMORPG 플레이어는 어느 정도 RP(Role-playing)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캐릭터 자신의 목적이라든가 전반적인 세계관, 이외의 사소한 설정들에 대해 수집하고 어느 정도 그에 따라 역할을 수행Role Playing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는 그저 자신의 의지를 게임 속에서 수행하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다. 세이클럽으로 대표되는 ‘아바타’를 통한 수익창출 성공사례가 쏟아짐에 따라 게임 자체적으로도 [마비노기] 라던가 [라그나로크 온라인] 등을 중심으로 캐릭터의 외관에 신경 쓰는 성향이 나타나긴 했으나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이 또한 게임의 세계 속에 구현된 자신의 의지에 대한 치장에 가깝다고 본다.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정리하자. MMO의 축복은 일본의 게이머 들에게는 RP에, 한국의 게이머 들에게는 G에 뿌려졌다.

물론 글 처음에 변명했듯이 일본이라고 G에 집착하는 플레이어가 없는 것은 아니며, 한국이라고 RP에 대한 의지를 가진 플레이어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서버가 통합되어 운영되는 경우는 보기 힘들고, 어느 정도 서버나 게임에 따라 중시하는 가치가 갈리는 경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들 3검이 얼마고 노버프 상태에서의 쌍검 데미지가 정확하게 얼마인지를 따지고 있는데 혼자 호드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앞서 말한 일본 게이머의 스테레오타입을 롤플레이어로, 한국 게이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게이머로 부르도록 하자. 롤플레이어에게 캐릭터는 이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임 세계 안에 존재하며, 플레이어가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하나의 인격이다. 어느 정도 자신의 결정과 충돌한다거나,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적더라도 그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지는 않는 것이다. 그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와 그에 의해 움직이는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분리해낸다.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는 동일하지 않다. 

한편 게이머에게 캐릭터는 그저 게임 내에서 자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하나의 인형에 가깝다. 플레이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많을수록 좋고([마비노기]의 매크로와 같은 부분은 자동이긴 하지만 플레이어의 컨트롤 영역이다), 액션성이 높기에 컨트롤하는 여지가 많은 게임들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이 더 선호한다. 이 맥락에서 ‘아바타’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대리자라는 측면에서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중요시되지 않거나 아예 무시되며, 어떤 높은 곳의 의지 - 게이머의 - 를 수행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는 삭제되고, 그곳에 게이머의 아이덴티티가 들어가 아바타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다수의 롤플레이어들은 이러한 게이머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 그들이 보는 게이머들은 그저 게임 시스템에나 천착하고, 세계관이나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친 채로 그저 레벨과 돈 밖에 모르는 천박한 플레이어들이다. 타인의 시선이 항상 전제되는 MMO월드에서의 좋은 장비는 분명히 발생시키고, 사람들은 그 권력에 심취하며, 좋은 무기와 아이템에 대한 의지가 바로 권력에의 의지다. 그들은 게임 속에서도 현실의 언어로 소통하고, 현실의 논리를 이용해 멋대로 게임을 재단한다. (로제 카이와는 이것을 ‘놀이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무기를 고르는 기준은 오로지 성능이며, 그들에게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는 그나마 의미가 있지만 세계관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이머들은 대부분 롤플레이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종종 롤플레이어가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의 아이덴티티, 혹은 롤플레이어 자신의 제 2의 아이덴티티를 역겹다고 생각한다. 게이머 남성이 여성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것은 그것을 그저 시선의 대상, 하나의 인형으로 보기 때문이지 결코 실제로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들은 그렇기에 롤플레이어 남성이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축출한다. 삼검류 데미지 산출 공식조차 모르는 주제에 이것저것 자기 나름대로 설정을 덧붙이기까지 해서 연기하는 롤플레이어들은 그저 게임을 잘 모르는 인간들일 뿐이다. 

물론 롤플레이어와 게이머가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서로 다른 하나의 방식일 뿐이고, 둘 중 어느 한 가지만을 택해서 RPG를 하는 것도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플레이하는 것은 바로 (놀랍게도 RP와 G가 모두 들어있는) RPG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롤플레이어도 온전한 게이머도 실제 게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전한 롤플레이어는 연극 무대에 있을 것이고(물론 그조차도 온전하지는 않다), 온전한 게이머는 차라리 도박을 하고 있을 것이다. MMORPG 플레이어들은 그 두 가지 극단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오로지 숫자와 데이터로 가득 찬 이 책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게이머를 위한 책이며, 게이머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구현함으로써 그들의 논리를 재생산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들이 이러한 수치들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할 용의를 가진다는 것은 MMORPG가 갖는 권력이 이미 상당 부분 현실에 침투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이 든 사람 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온라인 게임이 허무한 것은 그것이 그저 데이터일 뿐이기 때문이라거나 게임 내에서만 사용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타인과의 관계에도 권력으로 작용하지만, 게임이라는 간접적인 시스템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책과 공략들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게이머들과는 달리 롤플레이어들은 그들 자신의 무기를 개발하지 못했고, 아마 그들은 게임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을 서서히 잃어갔을 것이다. 게이머가 롤플레이어가 되는 일은 많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게임 내에서 이성을 꼬시는 것 또한 자상하고 친절하게 아이템을 사주는 쪽이 더 쉽다(……고 한다. 안 해봐서 모른다).

물론 모든 MMORPG가 TRPG의 잃어버린 유산, RP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게임은, 특히 MMORPG는 (미술이나 음악과는 달리) 완성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큰 방향을 개발자에 의해 정해지지만 결국에는 플레이어들이 주도적으로 플레이의 방향을 찾고, 그에 따라 게임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MMO의 축복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당신들의 즐거움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