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불안 
병장 이승일 01-26 03:13 | HIT : 176 
 

 
근원적 불안


지독한 염세주의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왜 염세주의자가 되었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고 한다. 
   1) 필요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우리는 고통스럽다.
   2) 필요나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우리는 지루하게 된다. 
   3)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필요나 욕구는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못한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한 고통스럽거나 지루하게 된다. 
   
이로부터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2) 만약 어쩔 수 없이 태어나고 말았다면, 차선의 방법은 가능한 한 빨리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약간 익살스러운 위의 말들은 놀랍게도 수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드려졌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차선의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 젊은이들이 어디 순전히 쇼펜하우어 때문에 자살했겠는가. 우리의 필요와 욕구가 달성되든 안되든 간에 삶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 즉 삶에 탈출구가 없다는 느낌은 이상을 위해 노력해본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져봤을 법한 느낌일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보다는 현재이고, 현재보다는 미래이다. 과거가 불행했더라도 현재의 행복은 그것을 보상해주며, 현재가 고통스럽더라도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는 그것을 인내하게 해준다. 그러나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불행으로 가득차있다고 느끼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삶의 모든가능성에 대한 회의. 하이데거는 이것을 Sorge (근원적 불안) 라고 불렀다. 이것은 어떤 구체적인 삶의 불행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며, 삶 그 자체, 나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한 메타적 거부감이다.  

  한편, ‘차선의 방법’을 택한 동시대의 여러 젊은이들과는 달리 쇼펜하우어 자신은 최선의 방법도, 차선의 방법도 택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오래 살았는데 아마도 거의 90살까지 살았을 것이다. 말년의 쇼펜하우어는 삶의 마감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그것에 저항했다. 젊은시절, 그는 인정받지 못했고 항상 외로워했지만 말년의 그는 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훌륭한 학자로서 인정받았다. 이 지독한 염세주의자는 놀랍게도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삶과 이별해야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죽지 않았는데 땅속에 묻힐까봐 두려워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일이 지난 뒤에야 땅에 묻어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젊은시절의 쇼펜하우어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미래가 불행하리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행복한 미래를 맞았다. 청년 쇼펜하우어는 모든가능성에 대해 고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통찰은 삶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조건 하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에 불과했다. 삶의 모든 가능성을 통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들의 집합”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러셀의 역설과 이보다 약간 덜 유명한 부랄리-포르티 역설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수학적 지적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 집합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삶에 대한 완전한 메타적 관점은 성립할 수가 없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가능성을 초월해있으며, 언제나 탈출구를 열어놓고 있다. 영원한 제국에 대한 희망이 하나의 착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절망에 대한 불안감, 존재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 역시 일종의 착오에 불과하다. 엥겔만이 진실되게 말했듯이‘살아있는 한, 완전히 패배하는 일은 없다.’

인간은 순간순간의 좌절감으로부터 삶 그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너무나 손쉽게 확장해 나간다. 쇼펜하우어의 삶이 암시하듯 그러한 회의는 대개 구체적인 상황이 개선되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성은 그러한 상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조건 하에서 삶이 불행할 것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낭만적)감상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 존재의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지적 오만에 불과하다. 극도의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단지 삶과 세계의 무한히 작은 부분만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삶 전체는 결코 우리의 상상가능성 안에 닫혀있지 않다. 이 사실은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받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궁극적인 패배로부터 구원해주는 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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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임채승 
22.19.47.1   읽고 나니 얼마전에 들은, 자우림의 "ashes to ashes" 음반이 떠오르네요. 
차라리 희망을 노래해야 했을.. 뭐 주관적 느낌이지만요. 01-26 * 
 
병장 이상헌 
48.18.1.36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되었다가도 더없이 행복한 낙천주의자가 되기도 하는게 사람이니.. 01-26 * 
 
병장 장선혁 
38.1.5.73   범신론적인 입장에서 개개인의 상황속에서의 현실이 개별적인 진리가 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01-26 * 
 
병장 이윤창 
32.1.4.101   어쩔 수 없이 태어나서 어쩔수 없이 사는 삶은 

정말 참을 수 없죠[...] 01-26 * 
 
 병장 임정우 
5.5.1.102   이런걸 보면 사람은 결국 생긴데로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생긴데로'는 가변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생긴데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입각해 논리를 구성해 버리고, 그걸로 우기고, 

이성적인 사고란 단지 직관적인 감성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재주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 역시 승일님의 글은 재밌습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부분들을 자극해 주어요. 으하. 01-26 * 
 
병장 한상연 
40.2.1.101   삶에 대한 염세와 나태함은 '쉬운 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 다 부질없어... 해서 뭐해 하는 그런 행동경향이라는... 인간의 심신이 편안한 쪽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본성에 부합되는 것이지요. 뭔가를 하고, 이루고, 고민하고, 쓰고 하는 것은 이런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01-26 * 
 
상병 이지훈 
22.49.1.228   저는 이 글을 보고 문득 행복한 허무주의 열정이라는 박이문씨의 책이 생각이 났어요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이라는건 정말 허무하지만 그런 허무함속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 또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참 허탈한 것이죠 
쇼펜하우어의 증명처럼 염세주의적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참 많은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무언가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을 발견하는것! 
어차피 지는 꽃이지만 그 꽃은 진다고 결코 의미없는것이 아니듯 어차피 끝나는 인생이지만 활짝 피고 지는 인생은 그렇지 못한 인생과 다른 가치의 무게를 두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것 그런것이 값진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요? 
아무튼 승일님의 글 재밌게 잘 읽었어요 헤헷 01-26 * 
 
상병 이건룡 
38.10.3.69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의 청년들, 쇼펜하우어의 농담같은 말에 그들의 자유가 형식화 되어 (자살이라는 파국으로)판단이 위축되어버린점. 청년들의 '부정적 가치의 숭고'속에서의 열정, 이를 파토스pathos라 부르는지... 

일방통행마냥 꽉막힌 그 심성들이란...어리석게만 느껴져도 연민이 드네요, 01-26 * 
 
일병 구본성 
5.12.1.71   "극도의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단지 삶과 세계의 무한히 작은 부분만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삶 전체는 결코 우리의 상상가능성 안에 닫혀있지 않다." 

멋지네요. 화이팅! 01-26 * 
 
상병 박재탁 
16.35.1.118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SSRI를 복용했다 파문 01-26 * 
 
 병장 임정우 
5.5.1.102   세상이 외치는 소리는 쩔벅거릴 뿐이다 
-재펜탁우어- 01-26 * 
 
상병 김지민 
18.16.13.19   허허 이렇게 명제로 표기하니 또 재밌네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