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아마도 지금, 저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목소리에 한정하여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노래들을, 가사의 언어적 마술이나 음율의 매혹을 피해 찾아 듣고, 즐기니까요. 떨림, 박정현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울리는 그 울림 하나만으로 저는 행복해하고, 환희의 열락에 젖어들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음악을 아직 들을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취향 너무도 천박하여, 보다 추상적인 음율의 미학을 느낄 여력이 제게 그저 없는 것 뿐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래식을 즐겨 들을 여력도 없고,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 취향을 계발해본 경험도 아직 없습니다. 단순히 제가 듣는 건 아리따운 목소리 그 한정일지도 모릅니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으로, 저는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가엾은 귀를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보다 앞에 가로 놓인 어여쁨에 시선을 빼앗기는 불운하고도 천박한 취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략]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박정현의 입술은 지금 절정의 끝에서 종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도, 환상의 끝에서 현시로의 일탈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 안에서 저는 목소리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니까요. 비록 제 귀가 천박함의 늪을 아직 헤어나지 못했을지언정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확신합니다. 문제는 보다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음률의 협주를 듣지 못하는 제 귀일 따름이니까요. 그래서 비록 천박할 지라도, 저는 기분좋게 우울함에 고개를 흔들어 봅니다. 아름답게 끝을 향해 달리는 노래와 함께요. 

"목소리" 06. 9. 11. 중 발췌 

 

뒤상이 처음 양변기를 거꾸로 메어 놓았을 때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이는 한 둘이 아니었다. 샘이라니. 대체 저 양변기의 어디에 미술이 있고 예술이 있다는 말인가. 예술은 자연과 감성의 창조적 해체와 재조합, 이라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뒤상의 샘은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이었다. 아무리 전위가 유행이라지만 저것의 어디를 예술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저건 저 자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 뒤상의 샘을 예술이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논리는, 분석하면 매우 간단했다. 예술가 본인이 만들지 않은 것, 그것을 대체 어떻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창조물을 어떻게 예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추상화를 예술이라 이해 못하는 이들의 논리도 분석하면 매우 단순하다. 예술가 자신의 노고가 느껴지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못한 저 물감의 덩어리 그 어디가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혹자의 취향을 가리켜 대놓고 천박하다고 일컫는 경우가 근래에는 점차 보이지 않고 있다. 취향은 개인사이고 오로지 개인의 호오에 따른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사회의 중론이 모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술이나 생활 그 모든 것에서 천박함과 고상함은 더 이상 분명하지 않고 다만 순수하게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만 입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는 예술이란 곧 예술가 개인의 감성과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 개인의 감성 간의 충돌이라고 볼 때 정당화할 수 있다. 즉, 감상자 자신의 감성 또한 예술을 만들어가는 한 주체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개개인의 감성을 단순한 잣대로 천박하고 고상하다고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의 의미는 -이즘의 사회정신에서 개인의 사유로 분할되어 사라진다. 

명백하게도 예술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우매한 질문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 현대의 사유에서, 예술에는 의미가 없다. (여기서의 ‘없다’는 지나치게 무수하여 사실상 없는 것에 다름없다는 말의 줄인 말이다) 따라서 예술을 바라보는 개인의 취향을 가로하지 않는 태도는, 즉 고상하고 천박함을 따지지 않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미는 모든 것에 내재되어있고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뒤상의 뒤집혀진 양변기조차 이제는 전위적 의미를 상실했다. 사진만 하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그 어떤 대상을 그저 단지 고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진예술가가 그 장면을 고정시키고자 결정했을 사유, 그리고 감상자가 바라보면서 느끼길 원했을 미학을 감상자가 느끼는 것으로 사진은 예술의 자리를 획득한다. 뒤상의 양변기은 ‘낯설게하기’뿐 아니라 사진예술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어졌다. 즉, 여기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예술가’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개인’을 평가할 기준은 사라졌다. 

천박함과 고상함은 과연 의미를 상실한 사어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예술을 작성하고 감상을 느끼는 모든 것의 권리와 책임은 이제 개인에게 이연되어있지만 이것이 모든 감수성을 동등한 높이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리어 개인의 감성이 지고의 위치로 올라갔기 때문에 감수성을 단련할 책임은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일정한 틀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개인은 자신의 감성을 말해야하고, 예술행위와 비평행위의 모두는 타인의 그것과 그대로 대립각을 세우기 때문이다. 나만큼이나 타인 역시 자신의 감성으로 예술과 비평행위를 행할 수 있으며 나의 예술행위에 대한 책임은 그대로 내가 져야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예술과 비평이 타인 모두에게 납득할만 해야 한다는, 보편성 획득 강제의 또 다른 형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최소한 자신의 취향으로 인해 타인이 불필요한 폭력을 입지 않도록, 취향을 단련할 책임이 생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흔한 말로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비평을, 타인이 자신과는 다른 예술적 자아의 표출형으로 보고 괜한 고민을 하도록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취향이 천박하거나 고상하다는 말은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예술적 취향과 감성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준으로 자신이 성찰해낼 수 없는 취향은 곧 천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과 자신의 감수성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지 않은 취향은 천박하다는 것이다. 

그 설명의 방식이 꼭 문법적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성찰은 예술적 취향과 비평 양 자 모두에게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개인적 감성의 표출은 자유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타인이기에, 성찰의 정도는 곧 취향의 고상하고 천박한 정도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현실과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 예술가는 천박한 자에 해당하고, 예술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한 비평과 감상은 천박함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모든 권리가 개인에게 귀속된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물론 천박하고 고상하다는 평가 역시 전적으로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책임에서 누구도 스스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