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시민권 
병장 이승일 01-16 00:01 | HIT : 195 
 

 


"다음 세기가 오기 전에, 인간의 피조물은 시민권을 획득할 것이다.... "
이제 이러한 말은 더 이상 SF소설가의 공상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을 표명하겠지만, 또다른 일부 사람들에게 이것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서구의 역사는 '우리' 라는 단어의 확장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인들에게 '우리' 란, 폴리스의 시민들이었다. (그 숫자는 200만명이 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우리' 란 단지 정치적, 군사적 아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열될 수 있으며, 서로 반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립을 넘어 여전히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지적하지는 못하겠다. '언어'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나이브할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사해동포주의는 '우리' 의 외연을 槿賤羚駭? 로마제국의 번영을통해 '우리'의 범위는 더 넓어졌으며, 그 패망을 통해서는 더더욱 넓어졌다. 그 후 서구사회에서의 '우리' 란 유럽인을 가르켰다. 이것은 지리적이라기보다는 종교/문화적이었다. 
'우리' 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적지않은 유럽인들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들에 대한 침략과 파괴, 살상은 많은 경우 도덕적 죄책감을 수반하지 않았다. 유럽의 귀족들은 흑인 노예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대상의 범주에 애초에 집어넣지 않았다는 뜻이다. 귀부인들은 흑인 노예가 있는 곳에서도 거리낌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도덕적 책임감, 수치심 등은 오직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갖는 감정이다. 
  인간의 외연은 점점 넓어졌으며, 결국 생물학적 종의 외연과 같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며 현재와 같은 외연을 갖는 '인간'의 역사는 아마도 미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긴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배타적 집단에 속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한다. 이 영향력이란 '우리'의 다른 구성원이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정도는 통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수학적 규칙성과 무질서 중간의 어디 즈음 존재하는 영향력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적 소통이며, 타자를 우리로 만드는 요소이다.  '우리' 의 확장은, 소통가능한 대상의 확장에 다름아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번의 확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어느정도 통제 가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래의 로봇들은 점점 '우리' 로 느껴질 것이다. 흑인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놀랐다는 어떤 영국 상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기계덩어리가 우리와 소통가능한 언어를 '진짜로' 사용한다는데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흑인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인간의 일부가 되었듯, 로봇들도 그러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엘런 튜링은 튜링테스트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기계와 인간을 서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한다는 생각을 기초로하고있다. 튜링테스트는 바로 인간이 기계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테스트이다. 현재 가장 훌륭한 지능형 로봇은 약 10%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스스로를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게끔 만드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90% 이상의 사람들이 어떤 로봇과의 대화를 인간과의 대화와 구분할 수 없다면, 그 로봇은 인간에 준하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 현재의 추세대로 보자면, 이런 날이 그렇게 먼 것 같지는 않다. 
사실 튜링테스트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현상이 본질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에 있다. 튜링테스트는 "구별 불가능한 것은 동일하다" 라는 라이프니츠의 명제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의 존재자들이 본질적으로 구분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적 판단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은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바, 즉 그것들이 표현해내는 바에 의해 구분된다. 때문에 같은 것을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형 로봇이 인간과 그 표현형에 있어서 구분될 수 없다면 로봇은 , 흑인이 인간의 한 종류이듯이, 인간의 새로운 종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너무나 가벼운 해석이다. 행동주의나 기능주의자들의 바램과는 반대로, 인간의 마음은 단지 표현되는 기능으로서는 포착될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1인칭의 자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수행하는 기능들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아무런 지능의 흔적도 보여주지않는 돌맹이 조차 1인칭 자아를 갖고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격, 혹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능이라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자아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건 타인의 마음의 존재 여부는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로봇이 실제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우리가 그렇다고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며, 로봇의 정치적 미래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후자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정치운동가들은 로봇의 인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투쟁할지도 모른다.(그중에는 우리들의 자식이나 손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인간으로 볼 수 있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라고 외치는 종교계나 보수파의 목소리와 싸워야 할 것이다. 영화인들은 로봇과의 사랑과 애정을 다루는 영화들을 쏟아낼 것이며, 심지어 로봇들 자신이 그러한 영화를 제작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래에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은지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가 여성이나 흑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할것인가에 대한 과거의 문제보다 덜 진지하거나 더 황당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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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임현종 
54.12.1.98   흠 튜링테스트에서 벌써 참가자의 10%씩이나 혼동되게 만들 정도의 인공지능이 나왔다니. 몰랐습니다. 놀랍군요. 

인간과 흡사한 로봇이 등장했을 때, 그들이 나타내는 감정적 표현이나 인간적인 행동들은 아마도 입력된 정보를 유연하게 조합해서 나타내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영화나 책등에서 그들이 입력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 로봇의 감정을 부정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죠. 

승일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살면서 익혀온 정보들을. 유연하게 조합해서 행동할 뿐이 아닌지. 



.....그나저나 이거 김청하의 나가토프로젝트가 이뤄지는 것도 멀지 않았을지도?(......) 01-16 * 
 
일병 구본성 
5.12.1.71   MBC에서 로봇 3부작 시리즈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고 있더군요. 지난주 방영분 끝자락만 볼 수 있었는데, 인간 두뇌 대뇌피질의 100만분의 1에 관한 모의 테스트(일종의 분석이라고 생각됩니다)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현재로선 전부를 테스트할 수 있는 기술적 여건(컴퓨터 성능)이 안 되는데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할때 2015년 정도면 테스트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8년정도 뒤면 말이지요.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어보면 처음 부분에 인간의 '의식'을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 과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뮬레이션 기능 으로 나누고 이것이 컴퓨터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전자의 경우 체스를 두는 컴퓨터, 후자의 경우 워 게임 같은 것을 수행하는 시뮬레이션 컴퓨터를 예로 들지요. 이 두가지 기능을 합쳐 놓은 것이 결국 인간의 '의식'과 같은 기능을 수행할 것이랍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에 관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인간이란 결국 DNA란 일종의 정보저장물질의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이분법이란 무의미해 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사실 저도 제대로 받아들이진 못 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흥미로웠던 점 또 하나는 인간이 이미 사이보그라는 xx식(이름을 까먹었네요)의 주장도 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CPU에서 연산 작용을 하고 기억을 위해 RAM같은 메모리를 가지고 있듯이 인간은 이미 자신의 두뇌에만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과 같은 부속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식이라면 도구적 인간이란 개념은 사이보그적 인간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듯 하네요. 예가 좀 황당한 것 같지만, 인공심장같은 장기들이라든지, 좀 더 잘 볼 수 있는 눈 같은 것만이 사이보그를 01-16 * 
 
일병 구본성 
5.12.1.71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SF를 공상으로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왠지 살아 생전에 매트릭스같은 상황을 겪게 될 것 같은 두려움같은게 생겨난 것 같습니다. 

덧, 글 써놓고 장난치다가 클릭해버리는 바람에 2개로 나눠졌네요.. 01-16 * 
 
일병 전영재 
22.48.4.106   애니 매트릭스의 한 편이 생각나는 글이군요. 
매트릭스의 시초를 설명하면서 '기계들의 반란'을 소재로 삼았죠. 자유를 외치며 시위하는 로봇과 인간들을 경찰과 군대가 무력 해산시키고, 나중에는 탱크로 진압하는 장면은 20세기의 장면과 너무도 비슷하더군요. 

핵심은 인간의 '지능'혹은 '의식'을 무엇으로 정의하냐인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 매트릭스에서도 로봇 하나가 주인을 죽이면서 시작되는데 그 첫 질문은' 나는 누구이며 왜 이렇게 죽도록 일할까'였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런데 그 자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을 내리거나 혹은 인정할까요? 흠... 01-16 * 
 
병장 황민우 
56.3.1.62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가 생각나네요. 아니면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 원작을 각색한 명작인 <블레이드 러너>나... 이 작품들에서는 안드로이드(인조인간)와 인간을 구분해내는 가장 중요한 경계선으로 '기억'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지요. 이 기억이 '경험'에 의해 각인된 인상이냐, 아니면 외부에서 '프로그래밍'된 기억이냐에 따라서 블레이드 러너들은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해내는 내용인데, 하여튼.. 

스타니슬라프 렘의 <솔라리스>와 더불어 이 소설이 이미 30년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소설로 꼽혔던 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사이버펑크 담론이 소멸한지 20년도 안되서 그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로봇의 '사유'를 동반한 2차세계와 현실의 평행선상구조, 그런까 SF문학담론에서 말하는 사이버펑크와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한 포스트모던- 하이퍼텍스트적인 성찰에 대해서는 움베르트 에코의 <Travel To The Hyperreality>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이번에 사서 동석이랑 같이 f어봤는데, 엄청 흥미롭더군요. 01-16 * 
 
병장 정준엽 
56.53.1.32   '우리'의 범위가 넓어진다면 그 만큼 좋은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두려운 것은 
아직도 '우리'로 인정받지 못한 '우리'가 있는데 새로운 '우리'가 먼저 '우리'가 된다면, 인류사에 낙관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는 것이죠. 01-16 * 
 
병장 윤대근 
32.1.28.15   동질감을 가져야 하는 범위의 문제겠지요, 
과연,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만화책 "플루토" 도 강추합니다, 
아톰을 원작으로 한 색다른 만화. 20세기소년, 몬스터 등의 "나오키" 선생님의 만화입니다. 

감정은 가지지 못했지만, 이성적으로는 완벽한 로봇들이 나오지요, 
이미 사람이 되어버린 로봇. 01-16 * 
 
상병 김지민 
18.16.13.19   잘 읽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무리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동일시라고는 하지만, 흑인과 로봇을 같은 선상에 두고 '흑인처럼 로봇도 그렇게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오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승일님의 글 맨 앞에 나와 있듯이 '생산자'가 누구인가가 아닐까 해요. 만약 이 글에서 흑인이 비교 대상이 아니고 우리 '황인' 이라던가 '한인'이었다면 과연 기분이 썩 괜찮았을런지 조금은 걱정이 되는군요. 



로봇의 최초 생성 목적이 '노동력의 절감' 이었던 만큼, 인간은 로봇을 만들어서 '최대한의 착취'를 이룩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어쨌거나 생산자는 인간이고, 생산자는 생산의 목적을 가지고 있을테니까요. 만약, 로봇이 자신들의 시민권을 주장할 때쯤이라면, 이미 통제 불능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요. 

이와는 별 개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보면서 느낀 것이 참 많았더랍니다. 현상적으로 차별화 되지 않는 그들을 과연 우리는 구분해야 할까. 인간처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그들에게 아픔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로봇이라는 이유로? 감성 놀이 로봇은 그렇게 헌신짝 처럼 버려져서 아픔을 겪고... 

인간의 능력이 점점 커지는 만큼, 그만큼의 가치관도 성립되어야 하겠죠. 참으로 신께 오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창조자'로서의 가치관 말입니다. 

(어라, 열심히 쓰고보니 핀트가 좀 많이 빗나간듯... 킁) 01-16 * 
 
병장 이승일 
54.2.9.70   지민 | 이 글에서의 인간은 순전히 유럽중심주의적이죠. 비교 대상은 흑인이 아니라 황인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인간'의 확장이 유럽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 의 역사를 동아시아문화권 중심적으로 다시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관점에서보건 그 외연은 계속 확장되어왔으며, 이 글의 의도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너무나도 나약한 개념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더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100년이 지난 후 지민씨의 리플을 사람들이 본다면, "흑인 노예를 미국 땅에 데려다놓은 목적은 어쨌건 노동력 절감이 아니었는가?" 라는 과거 미국 남부사람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생산자' 라는 말은 굉장히 오도적이에요. 대체 무엇을 생산했다는 말이죠?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구 위에 있는 물질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조합하거나 분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생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회로를 구성했을 때 인공지능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태어나게 하지만, 자식의 인격을 부모가 창조해낸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이죠. 만약 신이 물질과 자연법칙을 만들었다면, 궁극적으로 로봇 역시 그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01-16 * 
 
 병장 임정우 
5.5.1.85   항상 승일님 글은 재밌게 읽고 있는데 -수학 정리한 것은 몰라서 제외- 
제대로 답글을 달만한 수준이 못되어 버벅이고 있습니다. 

"구별 불가능한 것은 동일하다" 라는 라이프니츠의 명제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의 존재자들이 본질적으로 구분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적 판단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부분이 인상깊습니다. 약간 무섭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01-16 * 
 
상병 김지민 
18.16.13.19   데려다 놓은 것과, 조립해서 만든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흑인의 경우 애초의 존재 목적은 '인간으로서의 삶'이었지만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백인들에 의해서 뒤바뀐 경우였고, 로봇이란, 애초의 존재 목적이 '노동'이니까요. 

로봇 역시 그의 피조물일 따름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기야 우리가 생산해 낸다고 하는 것은 우리 능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겠지요. '그' 처럼 완벽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지는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로봇을 조립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인 이상, 거기에 대한 책임은 있어야 겠지요. 승일님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치 부모님들이 자식을 낳고나서, 이 녀석의 인격은 우리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니, 우리 책임이 아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 처럼이요.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떠오르네요. 01-16 * 
 
병장 홍지욱 
54.12.5.122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동의는 힘들군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고도의 '구조'에 의해서 '생기는 '기능'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것이 권리를 줄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하면, 당분간은 로봇의 시민권은 어려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도 어디서 부터 '생명' 이라고 정의할 지에 대해서 첨예한 대립을 하는 것을 보면, 로봇의 시민권 역시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 것 같군요. 01-16 * 
 
병장 이승일 
54.2.9.70   정우 | "제대로 답글을 달만한 수준이 못되어 버벅이고 있습니다." 그건 아닌거 같은데.. (먼산) 

지민 | 예로 드신 비유에야 당연히 공감을 하지만, 약간 맥락이 벗어난게 아닌가 하네요. 지민씨가 말씀하신 책임이라는 것은 이미 대상을 인격체로 받아드린 후 고려해야할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죠. 자기가 만든 도자기를 부실 때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의 아쉬움이란 나 자신의 손해에 대한 아쉬움이며 인격체를 파괴할 때 느끼는 죄책감 따위는 아니죠.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로봇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면, 책임감이라는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로봇을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욱 | 우선 생명의 정의에 관해서는 바이러스를 제외하고는 생물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있습니다. 혹시 낙태와 관련하여 '어디서부터 인간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와 혼동하신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을 직접 확인하신다면, '당분간' 이라는 지욱님의 표현은 매우 짧은 기간만을 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01-16 * 
 
병장 성태식 
54.7.5.228   재미있는 글이네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인공지능이 탄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둔요. 

언젠가 그.. 책 나누미에 이런 글을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신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증명하려면 신과 관련된 현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녀야 한다. 
(신의 부재도 마찬가지) 
1. 신이 존재할 때 이 현상이 일어난다. 
2.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이 현상이 일어난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과 관련된 감각적 현상은 항상 일어나기만 한다. 
따라서 이 감각적 현상이 신과 관련되었는지 신과 관련이 없는지 알 수 없다. 

사실에 대한 감각적 인식은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 인공지능화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눈앞에 빨간 점이 보이면 '빨간 점이 보인다.'는 명제는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지요. 
일련의 세포군이 빨간점의 감각적 현상을 가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당위에 대해서는 불가능하지요. 
가령 '나는 배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한다.'는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세포는 없으니까요. 
물론 식욕을 느끼게 하는 세포는 있습니다. 
어느 세포가 활성화되면 식욕을 느끼고, 비활성화되면 식욕을 느끼지 않도록. 뭐. 그런식으로요. 
그러나. 도대체 어느 세포가 활성화되면 '나는 배가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고, 
비활성화되면 이 명제가 거짓이 되나요? 

만약 '나는 배가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한다.'는 명제가 거짓이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나는 배가고플때 밥을 먹지 않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조금 과감한 주장이지만, 이런 측면에서 당위명제는 정보의 일종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따라서 컴퓨터 인공지능으로 프로그래밍 할 수 없다고 봅니다. 01-16 * 
 
상병 오윤식 
16.37.1.129   로봇은 단지 생산력의 향상과 노동력의 절감을 위해 탄생할 존재입니다. 
생산자인 인간은 목적에 부합하여 로봇을 생산할텐데, 과연 위에서 언급한 '사랑'과 '애정'이라는 불필요한 기능을 로봇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인간의 피조물인 로봇이 동등한 성질을 지니고 같은 권리를 누린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미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로봇이 요구하는 정치적 참정권 이상의 권리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결국 헐리우드에서 표현되는 로봇의 애정과 사랑, 아픔, 슬픔이라는 감정을 굳이 주입시켜 로봇을 생산해낼 필요도 없고 이로 인해 로봇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여 노동3권을 비롯한 노동근로법에 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때는 이미 로봇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산 수지가 맞지 않는 상품은 더이상 연구되지 않을 것입니다. 01-16 * 
 
 병장 임정우 
5.5.1.102   세상에 사람은 많고 우연은 더욱더 많습니다. 
게다가 우연이 사람을 홀리는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우연이, 로봇을 단순한 로봇으로 멈추게 할거라고 단언하는건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01-16 * 
 
 병장 김청하 
52.2.6.71   나 빼놓고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니 뭔가 배신감.. 

튜링 테스트는 사실 워낙 뜬금없는 녀석이라서 최근에는 일반 주제에 대해 모든 입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행해지지는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LPC. 뢰브너상 콘테스트라면 한정된 주제에 대해서만 행해지고, '뜬금없는 입력'과 같은 것들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요. 사실상 간편하게 AI인지 인간인지 여부를 알아낼 수 없는 법인데, 아직 이 경우조차 그리 성공적인 모델이 제출되지 않고 있다고 하는군요. 01-17 * 
 
병장 이승일 
54.2.9.70   난 사실 청하씨 보라고 쓴건데 보지도 않으니깐 배신감 .......... 뢰브너상 수상한 챗봇이 바로 저 10%의 주인공이라지요. 나도 엘리스봇이나 그런 챗봇한테 나름대로의 튜링테스트를 해보았는데 .. 물론 '뜬금없는 질문'포함해서 .. 
근데 그런 질문 A다면 튜링테스트로서의 의미가 사실상 격감하지 않나 - 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