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병장 이승일  (2006-12-16 055156, 조회수  36)   
 
 
제목   
   자연과학에 대한 몇 가지 잡소리 
 
 






1. 종이 위에 연속적으로 그려진 사과 그림을 스캔한다고 상상해보자. 스캐너는 아주 작은 사각형들의 격자를 그림 위에 갖다 댄다. 그리고 각각의 격자에 해당하는 색상값을 구하여 사과 그림을 디지털 정보로 변환한다. 
그런데 스캐너가 사용하는 격자의 모양이 반드시 사각형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정삼각형이어도 무방하고, 육각형 모양이어도 상관 없다. 스캐너는 여전히 사과 그림을 꽤 괜찮게 디지털 정보로 인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스캐너가 사용하는 격자의 모양은 임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과 그림이 특정한 모양의 격자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은 그 그림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우리는 다른 모양의 격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학 체계가 자연 현상과 갖는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자연 현상이 이러이러한 역학 체계로 훌륭하게 설명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자연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없다. 스캐너가 우연히도 정사각형 모양의 격자를 통해 그림을 감지하듯, 역학 역시 우연히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자연 현상을 기술한다. 이 ‘우연’ 이라는 말은 물론 좀 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스캐너의 감광센서가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획되어있는 것은 사실 그것이 대량 생산을 위해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모양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격자의 모양은 스캐너가 인식하려는 그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캐너 자체의 생산방식과 관련된 무언가를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역학의 구조가 이러이러하게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은, 자연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인식 구조에 관한 무언가를 진술한다. 
따라서 우리가 역학 체계의 질서에 대해 어떤 신비감이나 경외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실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식 구조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수학에 의해 훌륭하게 기술된다는 점이 갖는 놀라움은 자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학에 대한 것이다. 



2. 우리는 자연과학이 순수한 경험에 의해 완성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에 대한 설명을 완결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원리들, 이를테면 인과율은 경험으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추론하기 위해 이미 전제하고 있어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과율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형식이 지켜지는 방식으로 세상을 발견한다. 
  인과율과 같은 개념을 뇌 신경구조의 특징 속에서 발견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뇌신경의 흐름을 분석할 때 그것은 이미 인과율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인간이 왜 이러이러한 논리적 규칙을 직관적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가를 규명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무의미한 시도이다. 이런 시도는 잘 해야 순환적인 설명을 해낼 수 있을 뿐이다. 



3.  과학적 실험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참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엇이 참으로 판단 할만 한지를 알려줄 뿐이다.(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리라는 것은 참이 아니라 참으로 판단할만한 것이다.)  
   어떠한 과학적 실험도 이론을 참으로 확증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참의 관념이 전혀 경험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우리가 귀납추리를 통해서는 단 한번도 참 의 관념을 만족 시킨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귀납 추리의 목표가 어쨌거나 참인 지식을 얻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귀납적으로 볼 때 매우 이상하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참에 대한 관념이 경험을 귀납적으로 일반화하여 얻어진 것일 수 없음을 뜻한다. 만약 참 의 관념이 경험적으로 획득된 것이라면, 우리가 단 한번도 그것을 만족시킨 적이 없었다는 슬픈 사실 때문에, 그 관념은 즉각 폐기되었을 것이다. 수천년 동안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고 아마도 수천년이 지나도 성공할 수 없는 작업을 우리가 하고 있다면, 그 작업의 목표 - 참된 지식을 얻는 것 - 는 분명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혹은, 우리는 수천, 수만년의 경험 정도로는 도저히 무언가를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진리(참)라는 관념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과학은 이것을 허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쨌건 경험과학이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경험과학의 명제들이 참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만약 어느 적정 수준의 기준 하에서, 자연과학의 궁극적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즉 우리는 어떤 자연현상이 일어날 만 하고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 할 기준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우리 삶의 문제들 중 어떤 것이 해결되었을지 생각해보자. 과학의 결실로부터 나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깨닫게 되었는가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깨닫게 되었는가 혹은 무엇이 옳은 행위이고 무엇이 그른 행위인지 깨닫게 되었는가 우리는 궁극의 과학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고,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다. 궁극의 과학이 지닐 수 있는 철학적 가치는 바로 이러한 사실, 즉 그것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아무런 대답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완성된 자연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5. 자연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가 결정 된 이후에, 그것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완전히 결정해주는 경험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험에서 그 근거를 찾지만, 그것들은 기껏해야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매 순간 우리의 행동에 완전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생각해보자. 변호사는 이 살인행위의 이유를 최대한 외부의 사실들로 분산시킴으로써 원고의 책임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원고가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당해왔다는 점, 범행 당시 알콜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 등 등.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사실들의 집합은 어떤 경우에도 원고의 책임을 모두 떠 안을 수는 없다. 왜냐면 사실들의 집합으로부터는 실제로 어떠한 행동의 정당성도 직접 따라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이러 하다 . 라는 명제들의 집합으로부터 이러이러 해야한다 라는 말이 귀결될 수는 없다. 이것은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들의 수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양자가 담겨져 있는 형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오직 사실의 형식을 만족시키는 명제들만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는 어떤 당위성도 생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적 필연성과 윤리적 당위성을 자주 혼동한다. 서구의 언어는 실제로 그러한 혼동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험을 일반화한 명제인 “The apple must fall to the ground. 와 윤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He must help the poor 라는 발화에서 공통적으로 must 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 그 예이다. 



6. 검증 가능성을 근거로 비 과학적인 개념들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같은 방식으로 ‘검증 가능성’ 이라는 개념 자체도 공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검증 가능성을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한 요소로 채택해야하는지는 전혀 검증 가능하지 않다. 또한 검증 가능성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 오류에 해당한다. 그것은 예를 들면 “무게는 자(ruler)로 측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양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7. 자연과학이 매우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또한 그것이 단지 도구라는 사실도 발견한다.






 

 

병장 김청하 읏. 일요일에 답글 달겠습니다.  20061216    

병장 조주현 흥미롭군요.  2006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