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 들려주는 아련한 거대서사 - 호비트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예술의 역사는 총체성 상실의 역사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서사문학이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적 총체성이 완전히 파멸하고 인간의 인식들만이 파편처럼 남아서, 정신이 방황하게 되며, 그러한 불안한 평정을 되찾기 위해, 그 안에서 하나의 소우주Micro Cosmos인 내적 총체성을 두가지 방식 (루카치에 의하면 돈 키호테적인 방식과 율리시스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하나의 총체적 세계로 수렴하면서 확립하려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루카치의 이론은 분명 푸랑크푸르트학파의 막시즘적 측면에서 반드시 반성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미학이론에 있어서 루카치의 '총체성 상실과 예술진화'는 과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왜냐면 이성(데카르트적이고 유럽적인 주체사유를 말합니다.)이 정립되지 않은 무지몽매한 시기였기때문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가 넘어가면서 중세는 차츰 서양 학자들에 의해서 조차도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움베르트 에코는 <포스트모던인가, 아니면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책에서 서양의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라, '무정형의 시기'라고 명명하면서, 유럽 문화의 핵심인 비이성적이고 상상력의 과장을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과 구조주의의 싹이 틔워지면서 고대부터 유지되어오던 신화는 완전히 파멸해버렸습니다. 낭만주의 문학이 결국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면서 르네상스까지 유지되어오던 유럽인들의 신화적 상상력은 모두 '가짜' 혹은 '거짓', '몽상'으로 매도되었고, 이것은 당시 문화적 흐름과 이데올로기의 진행에 따라서 '보존되어야할 유산'으로 낙점되고 '동화童話'라는 방부제를 뿌려 장르문학의 틀에서 영구보존하려 하였습니다. 
  
 아동문학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긴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중세시대에 널리 읽혀졌던 파르치팔의 성배이야기나 아더왕 이야기, 샤를마뉴 전설, 그리스 신화같은 작품들은 이제 토마스 불핀치 3부작처럼 하나의 '재미난 교양'이나, '어린이 이야기'로 묶여져 '여가'와 '교육'으로 넘어갔고, 인간의 순수한 날개중 하나였던 신화-몽상적 상상력은 이제 자유를 잃고 리얼리즘이 만들어놓은 감옥으로 유폐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기계화와 산업화 속에서 인간은 역사에 없었던 극도의 불안감과 자아붕괴를 맛보아야했고, 그렇게 일그러진 자아는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양식으로 극단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이런 동화童話를 동화Fairy Tale로 인식하고, 그것을 아동문학의 틀에서 끌어올려 예술의 경지로 일구어낸 영국의 한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상상력의 천재, 20세기의 음유시인. 그가 바로 현대 판타지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로날드 류얼 톨킨이고, 그의 최대 걸작은 다들 입모아 말하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이 아니라 <호비트The Hobbit>라고 저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계보  
  
 영국 낭만주의 문학은 매우 독특합니다. 물론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커버필드>나 <크리스마스 캐롤>, 혹은 호즈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이나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 시리즈>등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문학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겠지만, 영국의 동화는 그보다 훨씬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에 대한 독서감상문에서도 잠시 밝혔지만, 영국의 민담은 요정과 숲에 대한 애착, 바다에 대한 경외감이 매우 강하며, 이것은 동화 이전에 문학과 민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19세기까지 계속 진해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C.S 루이스와 더불어 톨킨이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조지 맥도날드의 <공주의 고블린>같은 소설을 읽어보면,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얼마나 중세적이고, 민담적이면서도 더불어 실재적인지를 뼈저리게 알 수 있을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영국 낭만주의문학은 독일낭만주의문학과 더불어 유럽의 정서를 가장 빛나게 보여준 분야라고 생각되고, 실재로 영국 문학은 그 이후에도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적인 정서를 굉장히 많이 가지고 현재 문단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톨킨은 어린이야기라고 불리는 동화를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 이해하는것을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의 명저인 <On Fairy Stories>와 <On Fairy End>를 읽어보면, 어린이에게서 발견된 '순수성'이라는 것은 사실 상상력의 산물이고, 그 신화적 상상력은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어른'들에게도 문학적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말하면서 저 유명한 '환상문학의 4가지 효과' (환상, 회복, 도피, 위안이라는)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 현대의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창조된' 옛날 이야기 
  
 여기서 톨킨이 말한 '회복'의 효과는 C.S 루이스가 말한 '경이의 환상'과도 일맥상통 하는 부분으로, 리얼리즘에 가려 얼룩진 우리들의 불투명한 시야를 닦아서 넓은 상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획득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환상문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회복Recovery'으로서의 환상문학, 그 엄청난 효과의 핵심에 놓여진 그의 대작이 바로 <호비트>이며, 그렇기 때문에 호비트는 제가 읽어온 모든 소설중에서 가장 사랑하고 경외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호비트를 읽어본 사람에게 "이 작품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난감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비트가 정말 엄청나게 재밌는 소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정작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잡아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경우는 죄를 짓고 고뇌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서 사회적 죄악과 개인의 양심 사이의 트라우마를 그려내는 작품이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같은 경우는 투쟁하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강인한 모성애를 전달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톨킨의 소설은? 톨킨이 이 소설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저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순수문학가들이라는 사람들이 판타지소설, 환상문학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표적이 됩니다. 재미를 위한 이야기만 존재할 뿐, 어떠한 메세지도 없고 그렇기때문에 소설이 공허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우매한 소리입니다. 톨킨은 이미 그가 교수생활 시절에 자신의 문학과 더불어 판타지문학의 가장 위대한 효과로 '회복'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톨킨은 당대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이면서 상상력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와 베오울프, 에센바흐와 크리스티앙의 성배이야기에 매려되었고, 북구신화와 그리스신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공부하고 연구한 이러한 신화학과 문예학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세편의 걸작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반지전쟁이라고 불리는 <호비트>,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의 삼부작입니다. 
  
 톨킨은 작품을 쓰면서 끝까지 이 '회복'과 '위안'의 감동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회복의 효과는 <호비트>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나고 있고, 영국 민담적 특징을 모두 간직한 최고의 영국 소설중 하나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호비트>는 이야기, 즉 서사Narative에 대한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난데없는 손님의 방문과 그에 의한 모험의 시작으로 출발합니다.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평화롭게 사는 한 사람에게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서, 혹은 뜬금없는 이유가 생겨서 모험을 떠나게 된다는 시작은 전세계 모든 민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돌연한 출발>이라는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찾기 위한 완벽한 유토피아로의 모험으로 표현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담인 <구복여행>이나, 아이헨도르프의 <방랑아이야기>역시 이러한 돌연한 출발로 시작하며, 그런 모험 자체는 완벽한 유토피아로 상정되는 세계로 모험을 떠나서 "행복"을 찾는다는 결말로 이행됩니다. 
  
 바로 이 <호비트>가 그 '행복을 찾는 이야기'라는 민담적 서사 그 자체를 이야기 하는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메세지는 '사랑, 우정, 행복, 배신, 고뇌'같은 리얼리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핵심주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이야기'라는 서사문학 본연의 테마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보 배긴스는 갠달프와 소린을 비롯한 열두 드워프의 방문으로 인하여 뜬금없는 돌연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기약없는 모험이며, 즐겁고 흥분되는 여정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든, 빌보가 사는 가상의 중간계든 섭리(신의 섭리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에 의해서 완벽하게 돌아가는 가이아Gaia입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이런 세계를 이끌어가는 초월적 존재Nous의 섭리와 은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의 은총에 의한 '행복의 회복'은 중세 모든 유럽 음유시인이 부르는 옛 신화시대의 이야기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왜냐면, 고대 상상력의 세계는 신들에 의해서 흘러가는 시대였고, 모든 것은 신들에 의한 은총에 의해 자연과 인간과 동물들의 운명이 결정지어졌으며, 인간은 그런 신에게 은총을 바라며 행복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W.H 오든이나 조셉 캠벨의 영웅신화와 민담의 구조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톨킨은 20세기 초엽에 아무도 시도하려들지 않은 이런 중세-고대의 신화학적 정서를 복원하여 하나의 완벽한 회복의 문학으로 재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점에서 이 작품은 가장 압도적이고 완벽합니다.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신화시대로의 회복을 선물한 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2000년 실시한 <영국 지식인들이 꼽은 100대 명저>에 당당히 포함될 수가 있었고, 토니 블레어 총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호비트>가 꼽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영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바로 <호비트>라고 하니, 이 작품에 대한 유럽적 회복의 정서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 총체성으로서의 <호비트>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톨킨은 '회복의 문학'으로서 판타지를 이야기했고, 그 모든 정수는 바로 이 작품에 담겨있습니다. 신화시대로 복원된 가상의 세계(이 작품에서는 중간계입니다.)에서 총화된 완벽한 유토피아 위를 즐겁게 여행한다는 이 명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겠습니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명문을 제시합니다.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을 보며 나아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 시대인가?" 
  
 물론 이 한문장에 루카치 이론의 핵심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별이라는 것은 신의 섭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에 스며있는 신의 섭리를 이해하며, 그를 따라서 은총을 받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지극히 그리스-로마적이고 신화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행복과 당위성으로 충만한 '총체적 세계속의 즐거운 모험'이었다고 루카치는 지적합니다. 
  
 <호비트>에서 빌보배긴스가 갠달프와 떠나는 모험은 이러한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톨킨 스스로의 모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톨킨은 이런 완벽한 총체성 (톨킨의 용어로는 이 총체성을 내재적 리얼리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으로 총화된 세상에서 즐거운 모험을 제시하므로써,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완벽히 총체성을 상실하고 파멸한 인간의 내적 자아를 복원하려 한 것입니다. 
  
 호비트를 끝까지 읽은 모든 독자들은 슬프면서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우면서 분노하는 여러가지 복잡미묘한 감정을 동시에 모두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빌보가 갠달프와 함께 샤이어로 돌아오는 과정을 정말 영화필름처럼 순식간에 보여주는 대단원에 이르면 하나의 거대한 서사(이야기) 속에 스며있는 당위적인 은총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톨킨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어느순간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에 경험하는 폐부를 찌르는 진한 감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톨킨이 그렇게 설파한 판타지소설의 '회복효과'이며, 루카치가 지적한 '상실된 총체성'의 복원인 것입니다. 
  
  
 이 것을 이해한 다음에 비로소 환상문학은 진정한 '문학'으로서 순수문학 안에서의 '담론'으로 포용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애들이나 읽는 공상 이야기'나 '의미없이 즐거움만 주는 옛날 이야기'로 매도될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상실한 채 낙담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얼룩진 시야를 닦아주고, 신화시대의 상상력과 총체성을 회복하는 '회복'과 '위안'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진정한 문학현상의 하나로서 판타지소설 혹은 환상문학은, 드디어 톨킨에 이르러서 그 엄청난 문학적 프뉴마(Pneuma영혼)를 불어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때문에 저는 지금도 환상소설을 읽고 있으며, 그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언제나 아이헨도르프, 노발리스, 푸케와 더불어 J.R.R 톨킨이 왕좌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 생애 최대의 소설로 톨킨의 <호비트>를 꼽기에 저는 일말 의심의 여자기 없습니다. 이 작품은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 상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하나의 해답을 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