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표명-고통에 대하여 실눈뜨기. 살아가기. 글쓰기. 2006-09-26 15:18:44 
 
병장 주영준 
 http://22.49.3.1/home/?article_srl=15149 


  어디부터 나의 글을 시작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부터 나의 글이 끝났었는지 떠오르지 않으니까. 헤어졌다. 네 달 전에. 5년 3개월간 함께했던 그녀와. 쉽지 않은 날들이 어렵지 않게 흘러갔다. 불면증으로 수면제 다섯 알을 먹고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하던 날들도 있었고, 자다가 울면서 깨어난 날들도 양 손으로 세어 볼 만큼은 있었다. 며칠 전 까지도 하루에 두 번 정도는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네댓 권쯤 읽던 책들을, 일 주일에 한 편 정도 쓰던 글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약하다. 약했다고 생각했다. 힘들었으니까.

  힘들었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운명적으로-그녀, 책상에 쌓여있는 책의 제목을 조합하여 떠오른 스펠링을 가진 이메일로 메일을 발송하던 일로부터 시작한-만난 첫 사랑과 5년 3개월을 사귀다가 군대에서 헤어짐을 통보받은 사람은, 제법 꽤 나름대로 힘들다. 책마을이 27사에 있던 시절, 그리고 보급창으로 이사 온 초기에 나름대로-어디까지나 나름대로-날카로운 글들을 뱉어내던 나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의 세 달 동안, 나는 사랑과 관련된 글들만을 뱉어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필진이었다. 책마을은 나의 졸문 몇 개를 인정해주고 나를 필진으로 선출해주었다. 내가 필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만고만한 적당히 유려한 글솜씨 때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필진이 되기 전에 끄적거렸던 몇 개의 글들로 드러나는 나의 자세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글들을 생산하는 것이었을 테고.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하였다. 나의 아픔 때문에.

  개인이 가진 개인적인 아픔이란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아끼는 만년필 한 자루를 잃어버린 것과 사랑을 잃은 것과 암에 걸린 것 중에 그 어느 것도 다른 것 보다 더 아프다거나 혹은 덜 아프다고 섯불리 말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팠다. 많이 아팠다. 그러나 나의 아픔이란 결국 내가 약한 탓이었다. 다만 내가 견디지 못하였다. 내가 견디지 못했기에 나는 그렇게 무너져내리며 감정적인 글을 내뱉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왔다. 어떤 것도 생산하지 못한 채.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것도 생산하지 못한 채. 아무 것도 아닌 동시에 '책마을'에 대하여 스스로 커다란 책임을 가져야 하는 필진인 주제에.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 시간적으로, 네 달 전에 내게 찾아왔던 고통은 태어나서 느낀 세 번째의 강렬한 고통이었다. 두 번째의 고통이 나를 할퀴고 지나가던, 소위 사춘기라고 불리던 시기에 내게 힘이 되어 주신 분이 있다. 그는 누구보다 강력했고, 누구보다 날카로웠으며, 누구보다 행복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그가 내게 힘이 되던 시절 그는 나로서는 정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춘기 시절 그렇게 의지하고, 이후로도 5년 동안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그의 고통을 나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하였다. 그가 그의 고통에 대하여 직접 말하기 전까지, 정말로 나는 단 1%도 그가 그런 삶을 그 시절에 살았다는 것을 그 이전부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럼에도 그토록 강력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고통은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끼는 만년필 한 자루와 사랑과 건강을 동시에 잃는 것은 그 중 하나를 잃는 일 보다 보통은 더욱 아프다. 그는 내가 겪은 고통보다 분명하게 더욱 더 큰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있던 시절에 철 없던 나의 사춘기, 자잘한 나의 생채기들을 감싸주었다.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즐겁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이미 그러지 못하였다. 나는 그저 폐를 끼쳐 왔다. 물론 어쩌면 내 사랑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조그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고, 그에게 어떤 진동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개발새발 쓴다고 해도 5년 3개월간 함께했던 무엇을 잃은 사람의 감정이란 그 정도는 될 수 있으니까. 그저 재미있게 읽어 준 사람들도 있었을 지 모른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 그런 글을 쓰지 않았을 테니까. 나란 녀석은 원체 결핍이 심하니까. 그래. 내가 의지해왔다. 나는 나의 글에 의지해왔고 나를 읽어주는 사람들의 감정에 의지해왔다. 내가 말이다. 사람이란 힘들 때는 물론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힘듬이 뭐라고 나는 기대기만 해 왔을까. 내가 써야 될 글들이 있었음에도. 물론 모른다. 아무도 내게 어떤 글을 쓰고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느꼈다. 이건 아닌데. 라고. 그리고 이제는 느꼈다. 응. 이건 아니야.

  힘들다. 여전히 힘들다. 비록 며칠 전에 그녀와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지만.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죽어버릴 정도는 힘들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뭐냐. 그래. 사랑을 잃은 것이 안 힘들 리는 없다. 하지만 힘이 든 것과 그래서 몸에 힘을 빼고 삶을,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차곡차곡 겹쳐 있는 삶들을 방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녀가 내게 말한 것 처럼. 그리고 그 분이 내게 이야기한 것 처럼.

  여전히 힘들 것이다. 때로는 또 휘청이는 감정과 함께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되도록이면. 서 있을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주저앉는 것은 패배라는 표현도, 죄악이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무의미다. 나는 나의 삶을 무의미로 채우지 않을 것이다. 아프지만. 아직은 아프기에 고통을 직시할 수 없지만. 고통을 직시하면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 테니까, 당분간은 실눈을 뜨고 고통을 곁눈질할 수 밖에 없겠지만.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오랜만에 써 보는 '글'이라는 것. 여기저기, 기분좋게 비틀거린다. 글을 쓰면서 쓰면서 계속 표현들이 걸리고 문맥이 애매해지고 이곳 저곳 비문들까지 보인다. 살 것이다. 살아야 한다. 글을 쓸 것이고. 책도 읽을 것이다. 비록 힘들겠지만. 나는, '타오르는 혁명의 불기둥, 그대 청년 사회학도'다. 그녀, 가 다니던 사회학과의 과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나는, 글쓰기에 문학에 삶의 약간을 건 미등단 작가다. 작가지망생, 따위의 패배주의적이고 비겁한 타이틀은 없다. 나는 작가다. 다만 아직 등단하지 못한. 그리고 나는, 교육학도다. 아니, 다 필요없다. 나는. 사람이다. 살아가는. 그리고 일단 책마을에서는, 필진이다. 그거면 된다.

  글. 을. 다시 써. 보리라.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배우리라. 건강해 지리라. 삶을 팽개치치 않으리라.
  그녀, 나의 여신과 다시 함께하기 위하여.



-일전에 보급창 시절에 끄적거렸던 '소신표명'에 대한 스스로의 댓글이랄까요.

                                        
작품명 : 내 슬픈 자화상 - 우울도 87%(Colored)
천원짜리 연습장에 적, 흑 플러스펜
2006. 9. 21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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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이영기 
 허어. 
멋있다, 고 먼저 말하고. 
우선은 칼럼을 억지로라도 뱉어내라. 그 이후에서야 다시 한번 말해라, 지금 이렇게 말해도, 너 스스로를 '사회적 약속의 틀'에 메어 억지로 일으키려는 시도 이상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게 맞는 순서, 같구만. 
도리어 위로나 격려는 필요없는 상태인듯하니. 
잘 써보. 

2006-09-26 15:23:28  
병장 송희석 
 이제서야. 맘에 드는군요. 쳇. 너무 늦었어. 너무 늦어. 허나 뭐 아직은 봉인되어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2006-09-26 15:32:10  
병장 민경갑 
 진정한 변태가 시작되었다.

2006-09-26 15:32:12  
상병 도윤섭 
 저는 … 그래요. 저는 영준씨 같은 분을 보면 부럽네요.
무슨 말을 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어요. 미묘한 이 감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군요.
힘 내세요. 위로가 아니라 영준씨 글에 대한 제 감사의 표현입니다. 분명 좋은 글 쓰실 거에요. 기대할께요.

2006-09-26 15:44:10  
병장 이훈재 
 요즘 뉴타입이 유행이야. 파이팅.
2006-09-26 15:45:45  
상병 김지민 
 뉴타입
2006-09-26 15:54:32  
일병 김윤호 
 끄적끄적, 연필이 지나가는 자리에 나타나는 빛이 나는 회색빛의 찬란함.

2006-09-26 16:11:05  
병장 주영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교육학 3부작부터 시작해보든지 해야죠.
완성도는 초기의 글보다 많이 떨어질 겁니다. 일단은 '글'을 너무 오래 놓고 있었으니까.
-
.....완성도 없는 삶이라고 할 지라도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2006-09-26 16:27:03  

병장 이영기 
 생은 생을 영위한다니까.
2006-09-26 16:39:28  

병장 민경국 
 '이 모든 것들도 곧 지나갈 것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보아둔 한 문장입니다.
고통도 기쁨도 모두 지나가고 나면 기억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자신의 궤도를 만드는 것은 자신 스스로인 법.
자신을 위한 힘을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2006-09-26 16:31:12  
병장 고계영 
 이제야 제대로 읽었습니다. 저의 바쁜 일과가 원망스러워 지는군요.
...... 앞에 있다면 정말 와락! 안아줬을텐데..(어이~어이~ 다들 이상한 상상하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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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New는 내가 처음으로 지민씨에게 내린 휘호로 그 저작권은 저에...(퍼-억)

2006-09-26 18:31:22  
병장 엄보운 
 담담한 당신의 글에서 진솔함을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2006-09-26 20: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