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테리안 사유하기 2006-09-23 00:07:58 
 
병장 박형주 
 http://22.49.3.1/home/?article_srl=8382 



 베지테리안vegetarian. 보통 채식주의자로 번역되곤 하는 단어다. 이는 채소vegetable에서 파생된 단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일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생기있는, 활기찬 이런 뜻의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사실 어원이나 채식주의자라는 번역에 대해 불만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의 문제는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가령 여성주의라는 단어는 분명 페미니즘의 번역어지만 두 단어의 함의는 미묘하게, 혹은 보다 중요한 부분에서의 뉘앙스의 차이를 내포한다. 베지테리안과 채식주의자의 관계 역시 비슷하다. 베지테리안으로 자처하는(혹은 흔히 그렇게 분류되는) 사람들은 육식을 지양하지만 그 수준은 다양하다. 생선을 먹는 사람, 계란과 우유를 먹는 사람, 앞의 세 가지를 먹지 않는 사람 식으로. 또한 각각의 베지테리안에게 채식이 가지는 의미는 극히 다양하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육식과 살생을 금하는 사람과 미용과 다이어트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파괴와 낭비로 점철된 지구적 생산 체제에 반대하는 베지테리안도 있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육식 식문화가 가지는 남성적 논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이 다양한 관점과 습관의 차이를 올바르게 나타내는 데 부적합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보다는 '베지테리안'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나는 현재 베지테리안이 아니다. 과거에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평생 아닐 수도 있다. 이 글 역시 채식의 정당성과 이점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가진 한 가지 고민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갖가지 이유로 채식을 결심한 적도 몇 번 있지만 아마 3일 이상 간 적은 없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그 실천은 더욱 어렵고 큰 결심을 필요로 하게 되지만, 쉽게 결론짓고 고민을 포기하기엔 채식이라는 문화가 가지는 의미가 다른 어떤 사상이나 이념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게도 그 의미란 단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히 파괴적이고 낭비를 부추기는 현재의 육식 문화에 대한 반대가 그 첫번째고, 인간의 탐욕이 나타나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 중 하나가 고기에 대한 욕망이라는 점이 두번째, 생명에 대한 존중과 건강상의 이점은 그 다음에 자리한다. 나는 나방이나 거미는 잘 잡지 않지만 모기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비심도 베풀지 않으며, 농촌에서 기르던 닭이나 개를 잡아먹곤 하던 습관에 특별히 반대하지도 않는다. 

 농활 때 동네에서 기르던 기러기를 잡아먹을 기회가 있었다. 새를 잡는 과정은 대략 이랬다. 머리와 몸통을 붙잡고 바닥에 고정시켜 두면 다른 사람이 큰 식칼로 목을 내려친다. 한 번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요동치는 놈을 붙잡고 몇 차례 칼질을 해야된다. 작업이 끝나면 말로만 듣던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머리는 머리대로 눈을 깜빡이며 나뒹굴고, 몸통 역시 여전히 요동치기 때문에 무언가로 덮어 두는 게 좋다. 다음으로 털을 뽑고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해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털은 무지하게 거추장스럽고, 칼은 뼈 때문에 잘 들어가지도 가죽이 쉽게 벗겨지지도 않는다. 쏟아지고 터진 내장에서 각종 내용물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쯤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생닭'과 비슷해진다. 과거 돼지를 잡았던 한 선배는 그 고기를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의 나는 별 거리낌없이 직접 칼을 들었고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 고기는 아무리 삶아도 고무처럼 딱딱했기에 전혀 먹을 수 없었다. 안에서 산 닭을 잡을 일이 한 번 더 있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다만 '생명'이 '고기'가 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기억만이 특별하게 남아 있다.

 육식에 대한 회의가 크게 들었던 첫 번째 기억은 안에서 급양병 특기교육차 본 한 영상(VJ특공대)이었는데, 육질을 연하게 하기 위해 소를 거세하는 장면이 크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다리를 꽁꽁 묶은 채 거꾸로 고정시켜 놓고, 버둥거리는 놈의 가운데로 칼을 들이대는 그 장면을 본 그날 나는 도저히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화면 속의 소는 '죽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죽이기 위해서 키우고, 살찌우고, 생식 능력마저 빼앗아버리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면 저 소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인간이 소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고, 죽기 위해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문제가 있다. 풀을 찾아 대지를 누비는 것도 아니고,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도살되어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고 사육될 뿐인 것이다. 크게 고민할 기회였음에 분명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기간병들이 식판에 담아 주는 고기를 그대로 짬통에 처넣는 행위와 생명 존중의 실천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를 잡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영상으로만 접했을 뿐이다. 그 과정은 흔히 생각하듯 도끼로 정수리를 내리찍는 식의 작업은 아니다. 오히려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떠올리는 편이 더 가깝다. 철저히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분업 시스템의 대공장에서 진행되는 아주 단순한 반복 작업. 머리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내장을 제거하고 가죽을 벗기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작업은 소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아무런 감정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비린내 나는 이 공장의 작업은 적어도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행위보다는 훨씬 야만적이다. 개를 먹거나 먹지 않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하지만 소를 먹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없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육식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극히 제한된 식문화였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런 이유를 묻지 않는다. 

 위와 같은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경험과 관련한 책들을 접하며 몇 차례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정말로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다. 생산 과정에서 착취와 야만이 요구되기는 쇠고기나 고등어나 우유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이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생선은 물론 계란과 우유도 먹지 않는 가장 극단적인 이들을 비건 베지테리안이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 일상적인 먹거리를 생각해 보자.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고 된장국은 멸치로 국물을 내며 라면에는 동물성 기름이 들어간다. 대부분의 빵에는 우유와 계란이 들어가고 아이스크림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베지테리안 중에서도 비건은 그 수가 아주 적다. 바깥에서도 실행하기 어려운 이 프로그램을 안에서 하는 건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에 불과할 뿐이었다. 결국 이틀만에 실패. 특정 고기를 안 먹는다거나 하는 식의 프로그램이라면 혹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왠지 기만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시도하기가 꺼려졌다. 결국 베지테리안 프로젝트는 현재 무기한 보류중이다.

 여전히 불편한 질문을 품고 나는 고기를 먹고 있다. 생선을 먹느냐 우유를 먹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그리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 명의 베지테리안에게는 백 가지의 채식주의법이 있다는 말처럼 각자의 고민에서 결론지은 실천이라면 충분히 가치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기아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곡물에 비해 극히 생산성이 낮은 고기의 생산에 집착한다는 것, 다른 존재의 생명을 댓가로 생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그에 대한 성찰은 극히 부족하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의식이 있다면 말이다. 이 귀찮고도 복잡한 일상의 투쟁은 다른 어떤 이념과 사상의 실천보다도 어렵다. 앞으로 실행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자유롭게 사는 것은 노예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때로 영웅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부디,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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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이영기 
 난 이런 글 쓰려면 이틀은 걸리는데 (좌절)
2006-09-23 00:08:49  

병장 박형주 
 정확히 이틀 걸렸어요.
2006-09-23 00:11:13  

병장 이영기 
 <가지로> 
글을 쓰려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지 못하면서도 중대한 부분을 이토록 묵직하게 짚어내는 글을 써야하는데 어떤 필진은 하루에 세편을 뱉어내고 있으니, 너무 대조적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글이었습니다. 잘 봤어요. 

2006-09-23 00: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