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거리를 흐르는 익사체. 
 
 
 
 

그러니까. 칼럼과 두 가지로 달라요. 하나는 현실과 관계가 없다는 거.
하나는 저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전제 및 배포를 금한다는 거.



거리를 흐르는 익사체


  버스는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일어났다. 머리가 아픈 이유는 간밤의 숙취 때문일까, 혹은 멀미 때문일까. 버스에서 내려 흡연 장소를 찾는다. 군인이란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흡연 장소가 아니면 담배를 피울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공 장소에서는 더욱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군인이란 어쩌면 괜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한 갑에 250원밖에 하지 않는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게 아니잖아. 제기랄. 이런 생각에 갑자기 짜증이 일어나 피우던 담배를 대충 꺼 버리고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한 갑에 2500원 하는 담배를 산다. 다시 흡연 장소로 돌아와서, 피운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제기랄. 그리고 제기랄.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제기랄의 군체.

  공중 전화로 걸어간다. 수신자 부담. 익숙한 전화번호. 또르르르. 또르르르. 안녕 수진, 나 상길이야. 드디어 나왔다. 있다가 시간 되는거지 응. 상길아 그런데 나 핸드폰 배터리 없다. 문자로 연락. 똑. 다시 수신자 부담. 또르르르. 또르르르. 주위에 연락 받을 수 있는 핸드폰 없어 번호좀 줘. 그리로 전화할께. 음. 그러면 진우껄로 전.똑.

  그런데 진우 핸드폰 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바쁘게 휴가를 준비하는 와중에 어처구니없게도 수첩을 부대에 두고 나왔다. 친구 핸드폰 번호는 외우지 못하면서 친구의 애인 번호는 외우는 나란 녀석이란.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매사가 이런 식으로 풀리는 것이다. 2박 3일간의 군 생활 마지막 휴가 날 갑자기 작업이 생긴 덕에 한참 작업을 하고 저녁을 먹기 전에야 겨우 부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던가. 게다가 휴가에 발맞추어 아버지의 급작스런 출장이 생긴다던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실 것 같아 집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운명은 적당히 그런 식으로 공평하다. 그리하여 제기랄.

  갈 곳이 없잖아.

  장마의 끝. 비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마는 것 같기도 하고. 낮 시간의 끝. 해가 진 것 같기도 하고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숙취의 끝자락. 술이 깬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취한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것은 갈 곳이 없다는 것. 이제는 만날 친구들도 그리 많지 않지만 만날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만나고 싶은 기분은 아니고. 외롭다. 외로운 것이다. 다시 공중전화로 간다. 수진이 핸드폰에 전화를 건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함으로 연결해드립니다. 어쩌고 하는 친절한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전화기가 꺼져있으니까 너도 저리 꺼져. 이런 뜻인가. 그러시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마음대로 되라고. 괜한 짜증들. 수화기를 들어 전화기를 내리친다.

  어디로 가야 할까.

  충분히 더운 날씨에 일단 콜라를 마시기로 결심한다. 어디로 가든지 일단 콜라를 마시고 생각하자. 다시 편의점에 들어간다. 콜라를 사고, 지폐 두 장을 내민다. 저기요. 이거. 동전으로 좀 바꿔주세요. 공중전화 좀 쓰려구요. 잘못 샀다. 오리지널 코크를 사고 싶었는데 또 무슨 생각으로 레몬 트위스트를 산 거지 나는. 레몬 트위스트를 마시며 터미널 근처의 잡스러운 가판대를 둘러본다. 적당히 깔끔하고 발랄한 녹색 티셔츠를 한 벌 사고, 군복 윗도리를 벗어 가방에 넣고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돌돌 말린 군복 바지 아랫단을 적당히 내려준다. 이정도면 밀리터리 룩 민간인. 으로 보일 리는 절대로 없지만 하는 수 없다. 조금이나마 편하게 있고 싶으니까.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까. 일곱 시. 새로운 약속을 잡기에 그다지 적당한 시간은 아닌데. 결국 대안은 친구인가. 공중 전화 부스에 들어가 전화기에 동전을 차곡 차곡 먹여준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겠지 나는. 그리고 그리로 가자.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 집에는 아무도 없고, 애인과는 헤어진 지 석 달. 그녀는 오리지널 코크를 좋아했는데. 그리고 친구들은 대체로 군대에 있다. 분명히 나도 일찍 간 편은 아니지만. 유유상종. 왜 다들 그렇게 늦게 가는 것일까. 그러니까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 갈 곳도 없잖아.

  불만의 사이로 갑자기 어떤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일 년 반 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전화번호가. 아니, 자기 기만은 그만 두자. 일 년 반 동안 종종 떠올랐지만 눌러보지 않은 전화번호라고 하는 편이 옳다. 전화, 해볼까.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거나 전화를 받지 않을 확률이 높을 전화번호. 전화를 받았다고 해도 내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바로 끊길 확률이 높을 어떤 전화번호. 왜 그런 것이 떠오르는 것일까.

  결국 전화번호를 누른다. 이 번호가 맞나. 맞겠지. 컬러링. 알 수 없는 음악. 이 아이, 이런 식의 음악을 좋아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음악. 반복되는 음악. 전화를 받을 수 없어...친절한 메시지. 재발신. 다시 전화를 하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방금 전에 전화했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왜 이런 것일까. 잠시 부스에서 나와 맑은 공기와 함께 담배 연기를 마셨다. 두 개피. 새 개피 째. 번호가 기억났다. 그리고 반복해서 누르는 전화번호. 반복되는 음악.

  여보세요

  낯설어진 낯익은 목소리. 굉장한 하이톤. 어. 나 상길이. 어 오랜만이네. 왠일이야. 휴가나왔어 응. 잘 지내시나 뭐. 나름대로. 고시 공부하고 있어. 그래. 너도 고시구나. 먹고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 아무튼 너한테 용건이 있다. 나 술 좀 사줘. 휴가 나왔는데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나 고시 공부한다니까. 술 끊었어. 에이. 니가 술을 끊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알콜남매의 혈관을 흐르는, 피보다 진한 알콜을 부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고시 공부 헛했구나. 휴가나온 군인 아저씨에게 술을 사주는 건 사회 정의 실천의 최일선이야. 공부해야 된다니까. 공부는 무슨. 앎의 실천, 프락시스였나, 그런 게 중요한 거라고. 고시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학회 공부도 헛 했구나. 알았어. 여덟시 반. 신촌 살지 신촌에서 봅시다. 약국 앞에서 봐. 그래. 딸각.

  종종 가장 낮은 확률의 일들이 때로 일어나고는 한다.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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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시 사 분 전. 신촌에 도착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언제쯤 나와 정말 삼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건가 휴가나온 군인을 삼십 분씩 기다리게 하는 건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PC방이라도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응. 알았어. 빨리 나오세요 그럼. 바로 약국 앞으로 갈테니까.

  한산할 리가 없는 금요일 저녁 신촌의 어느 약국 앞. 빗방울 몇 개 떨어진다. 지나가는 몇 개의 사람들. 그렇게 나는 기다린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몇 개의 담배 꽁초를 떨어뜨리며.

  여덟 시 삼십 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런 식의 복수를 노린 건가. '비 내리는 금요일 여덟 시 삼십 분 신촌에 홀로 서있는 휴가나온 군인'이란 적당히 비참한 상황에 나를 내던지는 식의 복수. 이렇게 너는 내게 복수하는구나. 그래.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역시. 친구들이나 만나야 하는 것일까. 신촌에 살고 있는, 지난 학기에 복학한 동아리 동기가 떠올랐다. 그 녀석이나 만날까. 아니, 그래도 그 전에 전화나 한번 해 보자. 혹시나 약속 장소가 어긋났다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 근처에 공중 전화 부스가 어디 있더라. 더 이상 익숙한 곳이 아닌 신촌의 거리. 지하철 2호선마저도 익숙하지 않은데. 터미널에서 이리로 올 때 실수로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탄 덕에 지하철을 갈아탄 일이 떠오르며 적당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에서 항상 이런 맛이 난다면 담배 같은 건 끊을 수도 있겠어. 그래서 공중 전화 부스가 어디에 있더라. 저기 쯤. 있지 않을까. 몸이 가는 곳으로 움직여 전화 부스를 찾아냈다.

  여보세요

  뭐야. 아직 더 기다려야 되는 거야 아니, 당신이야말로 어디 간거야 아까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어서 그 근처에서 배회했는데 이 인간 군대가더니 혹시 길 못찾는거 아닌가 하고. 아. 그래. 그럼 지금 약국으로 와. 나도 갈테니까. 얼마나 멀리 배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떨어져 있는 정도겠지. 지금 오면 바로 만날 수 있을꺼야. 그래. 곧 봅시다.

  그렇게 만났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드레스 셔츠. 적당히 풍성한 까만 스커트. 까만 매니큐어. 은빛 장신구들. 화려하고 창백한 화장. 고시생인 주제에 여전히 고스룩인가. 나도 한때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군복 바지와 군화, 생기발랄한 녹색 티셔츠에 건강한 스포츠머리. 세 군데 모두 막힌 귀걸이 구멍. 은빛 군번줄. 오늘 시간 별로 없어. 공부해야 된다니까. 두 시간 정도는 내 주도록 하지요. 그래. 그러시든가.

  아무튼 종종 가장 낮은 확률의 일들이 때로 일어나고는 한다. 인생이란.
  그런데 그런 건, 좋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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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하려고 불렀어
  무슨 소리세요 돈 없고 갈 곳 없어서 부른 게 아니고
  아 맞다. 그랬었지. 내가 술이 아직 덜 깨서. 어제 고참 제대 회식이라서 그만 좀 과음을
  군대가도 여전하시네. 살아 있는 게 다행이야. 죽으면 어쩌나 몇번 걱정했는데

  죽기는 무슨. 죽어버릴 만큼 나약하지도 죽을 만큼 강인하지도 않다고 나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냥 그럭저럭 살고 있어. 그래 정신적인 이유로든 정치적인 이유로든 사고를 치고 말 것 같았는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신가. 나만큼 온전한 정신과 온건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어디있다고. 피식. 당신, 드디어 정신병의 영역에 진입했구나. 맥주빛 조명이 인상적인 조용한 호프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요즘은 뭐 하고 살아 고시 공부. 그 전에는 나름대로 일년 반만에 역사적으로 만나는 건데, 일년 반동안은 뭐 하고 사셨는지 궁금해서. 아. 뭐. 영화도 찍었고. 다른 학회 들어가서 공부도 좀 하고. 이것저것. 에이. 그런 이야기는 다 알아. 여성 노동 관련된 다큐멘터리 찍었었다고 들었는데. 선영이랑 둘이 작업했나 엇 어떻게 아는거지.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가. 미친 아가씨, 착각은 그만 하시지. 그보단 차라리 내가 스토커 공인 3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옳은 설명일껄. 어쩌다 누구한테 들었어. 그렇군. 보고 싶다면 다음에 보여주도록 하지. 아니, 그만두세요. 나 영화 싫어해. 알잖아.

  사실은, 헤어진 애인한테 들은 이야기야. 나는 잊고 있던 너를, 그녀는 기억하더군. 그녀는 우리 옆 동아리였잖아. 담배 연기 속으로 뱉어낸 묵음의 혼잣말.

  그래서 뭐, 일단은 사과하려고 불렀습니다만.

  무엇을 사과하게요 아. 당연히. 옛날 일 말이야. 그때. 그. 일. 정말 미안했어. 여러가지로. 에 아. 괜찮아. 나도 그 일 가지고 여러 군데서 당신 뒷담화 많이 하고 다녔으니까. 아마 동아리방 들어가려면 각오좀 해두셔야 할 껄. 누군가가 경멸의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한대 칠지도 몰라. 아 그래 내 잘못 때문이니까. 하는 수 없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 없이, 미안해. 그러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사과하면 될까요.

  하나만 사과하면 돼.

  다행이네. 하나뿐이라니.

  갈 곳 없이 헤매다가 네게 달라붙은 것이라든가. 관계에 있어 진지하지 못했다던가. 수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던가. 반쯤 스토킹 비슷한 짓을 했다든가. 양다리를 걸쳤다든가. 한 두 개가 아닐 텐데. 원래 사과하려던 수 없는 말들은 그렇게 입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뿐이라니. 그래. 하나만 사과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 또 기만을 즐기면서. 그래서 나는 무엇을 사과하면 됩니까 당연하잖아. 당신 바보야 양다리 걸친 거. 그건 정말 나한테 잘못한 거잖아. 사과해. 아. 음. 응. 그래. 미안해.

  미안합니다.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다니까. 나도 당신 뒷담화 많이 하고 다녔으니까. 이렇게 사과를 받았으니 나도 미안해야 하나 이거. 아무튼 사과했으니까 오늘부터 뒷담화는 자제하도록 하지. 다행이네. 원래 제대하고 나서 사과하려고 했어.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 상황에 사과하면 왠지 좀 정치적인 것 같아서. 왜. 무슨 일이라도 아. 그게. 나 깨졌거든. 누구랑 응. 그때 그 사람이랑. 뭐야, 그럼 그런 짓을 하고도 그 사람이랑 계속 사귀었던 거야 완전 쓰레기로군. 뭐 내가 그렇지. 아무튼 깨진지 좀 되었어. 백일쯤 되었나 이제.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사과하면 좀 오해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제대한 다음에나 연락할라고 그랬는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오해와 정치적인 문제를 만들 것 같아서. 돈도 없고 갈곳도 없겠다, 겸사 겸사 오늘 해버린 거야. 미안해. 아. 그러신가. 그래서, 군생활은 할 만 해 뭐. 나름대로. 고시 공부도 나름대로 할 만 할 것 같은데, 그거랑 대충 비슷하다고 보면 될꺼야. 그나저나 왠 고시냐. 어울리지 않게. 3년 전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내 경고했던 것 같은데. 

  몰라. 먹고는 살아야지. 그리고 첫 재판 때는 반드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갈 생각이야

  힘이 필요하다고. 권력이 필요해. 무엇을 하건. 동아리 때려치우고 나서 이것 저것 해 봤는데. 무엇을 하던지 힘이 필요하니까. 성매매든, 교육이든 가족 문제든. 나. 평택에도 갔었는데. 미군기지 이전 문제 때문에 말이야. 당신 그 근처에 근무하지 않나 음. 그 근처라곤 하지만 미군하곤 별로 전혀 상관 없는 곳인데. 거기서도 느꼈어. 뭐든 하기엔 내가 우리가 너무 무력하더라고. 그래서 고시라도 봐야겠어요.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한 문제고. 그래 바보냐. 고시라도 본다고 너한테 네게 필요한 힘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냐. 문정현 신부였나, 평택에서 싸우던 아저씨. 그 사람이 일개 판사보단 훨씬 많은 권력이 있을텐데. 그래도 별 거 없었잖아. 그리고 세계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세계가 바뀔 수 있을 것 같냐. 에휴. 삐딱한 여고생도 아니고.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가씨야. 좀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없어 그래도 예전보다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좋아 보여.

  이어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삐딱하고 어린 녀석. 시간은 제법 흘렀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장르문학에 희망을 가지고 있고, 가끔씩 인터넷 소설을 쓰고, 잡다한 정보들과 함께 일상의 소소한 유쾌함을 즐기는 녀석. 논쟁에 있어 감정적으로 일단 폭발하고 싸운다거나. 아아. 맞아. 아마도 이런 성격들에서 나는 나의 과거의 모습을 보고 어쩌고 지껄이면서 연애를 했었다. 나라고 해서 그 아이보다 어른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식의 사고를 이어가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과, 이 아이도 조금은 더 어른스런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옛날 일들. 옛날 일들. 그러거나 말거나 옛날 일들. 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눈 앞 그녀와 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그녀와 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나저나 팔의 그 상처들은 뭐야. 아직도 자해 같은 걸 하는 거냐. 정신 차려. 열일곱 여고생이 아니라고 너는. 글쎄. 열일곱 남자 고등학생이 남긴 상처치곤 오래가는 상처를 가진 말년 병장보단 나은 것 같은데. 내 쪽은 예쁘기라도 하지, 당신 쪽은 영 엉망이잖아.

  이내 맥주가 다 떨어졌다. 배고프다. 뭐라도 좀 먹자. 글쎄, 차라리 나가서 소주나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나 술 많이 마시면 안 된다니까. 일찍 들어가봐야 된다고. 저기요. 맥주 피처 하나랑, 나초 하나 주세요. 평소에는 허스키한 목소리. 전화를 할 때나 사무적인 말을 할 때는 애교 섞인 굉장한 하이톤. 여전하구나. 자잘한 습관들은 삶에 대한 자세만큼이나 잘 바뀌지 않는다. 나는, 나는 글쎄. 모르겠다. 나는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여전하다니까. 대학에 입학했을 때나. 3년 전이나. 입대할 때나. 지금이나. 완전 쓰레기. 그나저나 돈은 좀 가지고 있어 음. 뭐. 휴가나올 때 몇 푼 빌려 나오긴 했어. 그렇게 적당히 먹고 마시고 두 시간, 호프를 나왔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많이 바쁘신가
  응. 공부해야 된다니까
  예전처럼. 바쁘니까 술이나 먹자,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인데
  젠장할 군바리
  그러시든가
  뭐가 그러시든가, 냐.

  결국 소주를 마시러 갔다. 이렇게 될 것은 몇 퍼센트의 확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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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나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그녀를 속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기만은 이제 집어치우겠습니다. 나는 그 때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힘들었습니다. 힘들었어요. 최근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렇게 당신이 나를 떠난 것 처럼 나는 당신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아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역사와 피해자의 역사는 언제나 다른 것 처럼 말입니다.

  당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나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 나는 그녀에게 사과할 생각입니다. 미안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때 그랬던 것은 정말로 미안해. 라고. 헤어지던 날 당신은 내게 소리치셨습니다. 너는 단지 여자 친구가 필요한 거잖아. 그러면 그 때 그 니 후배랑 다시 사귀든가. 날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마 아닙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당신인데. 당신일 뿐인데.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당신에게 행한 그 모든 나의 잘못들을 나는 하나씩 풀어가야 하는 것일 테니까. 스스로의 잘못들을 하나씩 해방해야 될 테니까. 이런 것이 또 당신을 아프게 할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무엇이 되든,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당당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녀는 다시 나의 보통 후배가 되어야 합니다. 만나지 못할 옛 연인이 아닌 그저 하나의 후배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지금의 당신으로 인정하는 것 처럼, 당신도 나를 나로 인정해 주세요. 언젠가 다시 시작할 우리의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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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 안 써

  귀찮아. 나 비 맞는 거 좋아하잖아. 군대 간다고 취향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잊어버렸구나. 불쌍해 보이면 씌워주던가. 당신이야말로 잊어버렸구나. 나 귀찮은 일 싫어하는 거. 그냥 맞고 가시던지. 그래. 아무튼 조금 걷자. 이 근처에도 마실 곳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그냥 조금 걷고 싶어서.

  언젠가 자주 들리던 소주집이 없어졌다. 황량한 공사판으로 변해버린 곳. 뭐야 이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여기쯤 있었을텐데. 어. 여기 있네. 그곳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소주집으로 통하는 두 개의 골목 중 한 곳이 폐쇄된 것에 불과했다. 언젠가 그 곳도 그리로 통하는 하나의 골목처럼 이렇게 없어지는 걸까.

  나는 맥주 마실 꺼야

  소주 페트 두병에 빛나는 현대정치사상연구회 역대 최강 알콜남매의 신화는 어디로 팔아먹은 거냐. 글쎄. 팔아서 돈이라도 나오면 어딘가 팔았을텐데, 그냥 버렸어. 아. 그래. 

  이봐, 옛날에도 몇번 이랬었다고. 나 숙대 근처에서 언니랑 자취했을 때 위염 생겨서 소주 못마신다고 맥주 따로 시켜서 마시고 그랬잖아.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나저나 그 언니, 결혼했어. 그래 어. 속도위반, 그리고 하는 수 없이 결혼했지. 원래 결혼할 사이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가는구나.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어 미칠 지경이야 요즘엔. 그나저나 아가씨, 연애는 안 해 응. 3년 전에 한번 해봤는데, 남자는 다 쓰레기더라고. 그리고 공부해야지. 아, 그렇군.

  생선 한 마리.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고전적인데. 아. 양다리라는 거 하고 있을 때 여기 정말 많이 왔어. 애인이 무려 둘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와서 미친듯이 마셨지. 과연 쓰레기로군. 그렇게 놀면 재미 좋았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들. 요즘 책은 뭐 재미있는 거 있나 학교는 어때 이제 졸업할 때 되지 않았냐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살아 적당히 중요하지 않은 그런저런 이야기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께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몰래 맥주를 한 보금 마셨다. 목이 말라서. 그리고 돌아오는 그녀. 동그란 아랫배. 살이 좀 빠져서 눈에 띄는 건가.

  배 나왔네. 살은 좀 빠진 것 같은데

  이봐. 살도 그대로라고. 오죽하면 얼마 전에 부산 내려갔다 왔는데 엄마가 살을 빼라고 하겠어. 고시생한테 살빼라고 하는 정도면 심도있는 상황이잖아 삐딱하군. 그래도 살은 좀 빠진 것 같은데. 배만 좀 나온 것 같다니까. 

  아니라니까. 하면서 어깨로 쳐진 머리를 양쪽으로 들어올리는 그녀. 착시 현상이야 착시 현상. 머리카락을 이용하는 거지. 아. 그런가. 뭐 그게 중요한가. 술이나 마십시다. 저기요, 맥주 한병만 더 주시겠어요 여전한 하이톤. 뭐야. 공부한다면서 몰라. 그냥 마셔. 어차피 지금 들어가나 술 더 먹나 그게 그거야. 그나저나 당신 내 맥주 마셨지 엇. 어떻게 알았지. 당신 습관이잖아. 그랬나. 습관일 것 까지야. 그런데, 다 좋은데 담배 끊었다면서 군인 담배 빼앗아 피우면 좋냐, 아가씨 그리고,

  그런데 말야, 페미니즘과 양다리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지

  양다리는 인간에 대한 예의 및 염치 부족이고, 페미니즘은 정치사상 아닌가 어. 그렇다면 내가 가진 정치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비판해야지, 내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양다리를 가지고 공격하면 안되는 거잖아.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포르노를 보는 것과 양다리를 걸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래 그런가. 하지만 양다리와 상관 없이 당신은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꼴통이라고. 아 그래. 내 감수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꼴통으로 매도당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문제잖아. 논쟁해야지. 그리고 나서 공격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가씨가 날 꼴통으로 매도하는 건 감정의 문제에 기반하는 거잖아. 그래도 학회 동기들 중엔 나름대로 제일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봐. 미소년에 열광하는 아가씨한테 그렇게 공격받고 싶지는 않다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건 포르노랑 다를 것이 없다니까. 아.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감수성.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논쟁의 여지는 많을텐데. 특히나 아가씨가 내게 가한 매도에 대해서는. 나 입대 환송회때 술마시고 나한테 지른 거 기억 안 나냐. 제일 그럴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척 하지만 실은 당신이 제일 꼴통이야. 구제 불능이라고. 니가 규홍 씨 보다 더 한 새'끼야. 너같은 꼴통 새'끼가 어떻게 페미니즘 분과 분과장이었지 뭐 그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내가 꼴통이라는 건 인정하겠는데. 아니, 인정할 수 있겠는데 그런 식의 질러대기는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 나는. 뭐. 이제 앞으로 볼 날도 많을테니 차차 논쟁해보면 되겠지.

  괜찮아. 당신 동기들 간부 셋 다 꼴통이었으니까

  그나마 당신이 좀 나은 편이었는데. 그리 사고를 치셨으니 끝이지 뭐. 우리 학번 애들, 당신 동기들 다 싫어해. 규홍선배나 재형오빠나 당신이나. 그건 익히 알텐데 뭐. 그래. 중요한 일은 아니지. 이제 나는 외부인이니까. 복학 후에 갈 곳이 하나 줄었다는 정도니까. 이것 참, 조금 아픈데. 군대가기 전에 나름대로 목숨을 걸었던 연애와 동아리가 이렇게 날아가는구나. 풋. 하지만 괜찮다네. 내겐 꿈이 있거든. 제대 후에 새로 학회나 하나 새로 꾸려볼까 하는 생각이야.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규홍이랑 말이지. 둘 다 땅을 치는 부족한 감수성으로 일이 풀리겠냐마는, 뭐든 하는 게 안 하느니만 못하겠지. 그래. 열심히 해 보시게. 예비역 아저씨.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규홍선배야 글쎄. 쓰레기끼리 싹트는 우정이랄까. 재형이는 나 제대하고 거의 곧바로 군대가잖아. 입대 전에 사귄 친구 중에 나랑 학교 같이 다닐 친구는 규홍이밖에 없을껄 아마. 근데 왜 규홍이는 선배고 재형이는 오빠고 나는 당신이냐. 글쎄,

  애인으로는 영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은 좋은 남자 친구니까.

  아. 그래. 나도 그냥 선배나 오빠 시켜주면 안 될까. 농담이고, 이것 참 영광이로군. 최근에 나도 그걸 느낀 덕에, 당분간 연애나 사랑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무튼 영광이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아, 1년 반 전의 그 날은 두려웠어.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이 취한 채로 널 본 거야. 미안해. 그것도 역시 무례한 짓이잖아. 사과할께.

  그런 걸 사과하려고 부른 것이 아닌데.

  그런 사소한 것들을 사과하려고 부른 것이 아닌데. 미안해. 실은 그때 정신이 없었어. 3년 전에, 너한테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었어. 그 때 나는 힘들었고. 모든 것이 짜증났고. 다만 편하고 싶었고. 이리저리 휘청이며 건너온 현재로부터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고. 당위에 얽매여 사는 삶이 힘들었고. 감정에 취해 그냥 살아보고 싶었고. 학회장 일은 힘들었고. 여러 가지 사건들에 몇 몇 친구들을 잃었고. 신념이랄 것 까지는 없는 내 생각들은 논쟁에서 마구 무너져내렸고. 그때 사귀던 친구와 심하게 싸웠고. 결국 참지 못하고 헤어지자고 했고. 그리고 거기에 네가 있었고. 그래서 너를 사랑한다 말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중요한 것은 사과해야 할 것은 양다리가 아니라, 내가 편하기 위해서 너를 사랑했던 것인데. 그런 걸 사과하고 싶은데. 그런 걸 사과해야 하는데.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편한 대로. 편할 대로. 익사체처럼. 몸에 힘을 빼고 그렇게 흘러가는 걸까 나는 또.

  뭐해. 멍하니.

  아. 그냥. 생각.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군인인 것 같지 않아 응. 군인 천국이로군. 신촌은 소외된 자들의 낙원이고 말았으니. 그런가. 그리고 잡담들. 한 병 추가되는 맥주. 그리고 소주. 그럴 거면 소주를 마시지 그래 나 공부해야 된다니까. 아가씨, 벌써 열두시인데. 공부는 무슨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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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슬슬 나가 볼까. 시간도 많이 늦었고. 돈도 없고.
  그래. 그나저나 큰일인걸. 이런 날이면 나 집에 가다가 아무 남자나 붙잡고 술사달라 그러는데. 게다가 집 바로 앞에 모텔이 있는지라.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정말로 변한 게 없구나 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지. 그리고 언젠가 관계를 가졌지. 내가 첫 남자였잖아. 제기랄. 덕분에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를 이유로 나는 두어 달 간 피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는데. 위험한 척 하지 마. 아. 사과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각났어. 왜 나는 네게 진지하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너같이. 머릿속으로 하는 비겁한 사과. 얼마나 많은 기만을 수행하는 것일까 나는 오늘. 데려다 줄께. 어차피 신촌 살잖아. 여기서 멀어봐야 얼마나 걸리겠어. 집에 곧장 들어가서 푹 쉬세요. 내일은 공부 열심히 하고. 오늘 나한테 말린 거 보충해야지. 이것 역시 기만일까.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그러고 싶으면, 나 붙잡고 술 사주세요, 해봐. 그러면 사 줄 테니. 적어도 그편이 덜 위험할꺼야. 쳇. 흥이다. 성폭력 사건의 90퍼센트는 아는 사람이 가해자라지 아마. 그나저나 당신은 어떻게 들어가려고 응. 글쎄. 모르겠다. 어디든 갈 곳이 있겠지. 일단 너 데려다주고 생각하려고. 우산이나 씌워 줘.

  천천히, 걸었다. 군화는 편리하단 말이야. 물 고인 웅덩이를 밟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디자인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고. 조금 무거운 것이 문제지만 삶의 무게보단 가벼우니까 이 정도면 나이스. 중얼중얼. 외롭네. 젠장. 중얼중얼. 그렇게 금새 처음 만난 장소인 약국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뭐야,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 주제에 아깐 왜 이리 늦게 나온거야 글쎄. 그냥. 당신이야말로 약국 앞에 내내 붙어있었다면서 왜 안 보인 거지. 글쎄. 말년 병장이라 그래. 주위의 시선을 피해 스스로를 은닉하는 유용한 기술이 체화되는 거지. 시덥잖은 농담들. 시덥잖은 농담들을 하면서 그녀의 집에 닿았다. 고시원.

  금요일 새벽 두 시 치고는 지나치게 한산한 곳. 신촌에도 조용한 구석은 있는 법이다. 늘어선 고시원들. 불 꺼진 서점들. 어울리지 않게 찬란한 불빛을 내뿜는 모텔 한 채. 조용한 구석이 있건 없건 신촌에 모텔이 없는 곳은 없다. 조금 거칠게 내리기 시작하는 비. 제법 젖어버린 녹색의 싸구려 티셔츠. 이 정도면 가방 속에는 홍수가 났겠구나. 휴가 끝나기 전에 학교 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군복을 좀 빨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왔어. 당신은 정말 어떻게 할 건데
  글쎄다. 너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생각하련다
  그래. 잘 가고. 군생활 잘 버티고. 사고치지 말고
  너나 잘 견뎌라. 공부 열심히 하고. 안녕.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조금 넓은 곳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지니 않는 골목은 여전히 한산하다. 신촌이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금요일 밤인데. 신기하기도 하지. 비 때문일까. 묘한 기분을 참기 힘들어서 대로로 걸어나왔다. 빗물처럼 흘러가는 자동차들. 방울처럼 흘러가는 사람들.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털썩, 공중전화 부스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여덟 시 반 이후로 여섯 시간 만이구나. 안녕. 그동안 잘 있었니. 대답은 바라지 않는다. 조용히 담배를 피운다. 톡. 입에 문 담배 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담배 꽁초 특유의 역한 냄새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신기한 일이다. 불 붙은 담배의 향과 불 꺼진 담배의 향이 이렇게도 다르다니. 한참 동안 역한 맛을 음미하다가 떨궈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피운다. 또 새로운 담배를. 또 새로운 담배를.

  공중 전화를 든다.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동전으로 석 달 전까지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전화기가 꺼져...알았습니다. 알았다고. 알았다니까. 꺼지면 될 거 아냐. 수화기로 전화기를 내리치려다가 몸에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뭐야. 이거 마시고 취한 건가. 소주 페트 두명에 빛나는 현대정치사상연구회 역대 최강 알콜남매는 이렇게 무너지는군. 유치하게 무슨 짓이야 이게. 다시 앉아 담배를 피운다. 두 대. 이로써 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두 갑 반의 담배와 서울에서 산 한 갑의 담배가 다 떨어지고 내게 남은 담배는 없다. 후우. 이런. 당장 돈도 없다. 베리 나이스.

  공중 전화를 든다. 걸어야 하지 말아야 될 번호로 전화를 건다. 익숙해지지 않는 컬러링. 여보세요 응. 나야. 잘 들어갔니. 나 좀 어떻게 해 줘. 갈 곳이 없어. 응. 집 근처 대로의 공중전화 부스. 응. 올 때 담배 한갑만 사다 줘. 집 앞에 편의점 있더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쓰레기같이. 상관 있나 쓰레기가 쓰레기짓을 하는 것이 잘못된 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담배만 안 떨어졌어도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을꺼야. 이런. 한 갑의 담배에 20개피씩 포장해서 팔아먹는 거대 담배 자본의 문제라고 이건. 나는 체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4년 전에나 어울렸을 법한 농담을 공중 전화에게 건넨다. 대답은 기다리지 않는다.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금새 그녀가 나왔으니까.

  뭐야. 어쩌라고.

  나 좀 어떻게 해 줘. 갈 곳이 없네. 돈도 없고. 게다가 외로워. 업보랄까 뭐 그런 것이지. 입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네. 자취라도 했으면 집에서 재워주었을 텐데. 고시원에 사는지라. 아가씨. 술 좀 사주세요. 외롭습니다. 목구멍 아랫쪽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똑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건 나쁜 짓이야. 심장으로 중얼거렸다.

  외로워.

  외로워.

  발음되지 않는 소리. 그렇다고 너를 사랑하는 건 아닌데. 다만 취한 거야. 힘든 거고. 누구라도 좋으니 키스하고 싶고, 껴안고 싶지만. 외롭게 살아야지. 연애나 사랑 따위는 하지 않아. 그런데 도대체 왜 불러낸거야. 물어보는 나. 대답하지 않는 나. 뭐야. 어쩌라고. 공중전화 부스에 걸터앉아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너도 사랑이 필요하겠지. 외롭구나. 하지만. 하지만.

  3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잖아.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때 나는 눈 앞의 그녀를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다른 종류의 고통과 함께 3년을 즐거이 보냈을 텐데. 그 때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왜 글쎄. 기억하기 귀찮은 것은 기억나지 않는 편리한 기억 회로를 갖춘 덕에. 지금도 손을 뻗으면 되는데. 손을 뻗으면 되는데. 하. 하하. 3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라니,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3년 전과 똑같은 착각이겠지. 손을 뻗으면 닿으리라는 그런 종류의 착각. 뭐야.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어떻게 해 주길 바래

  글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아니 그게 아닌데. 나와 같이 있어주면 좋겠는데. 축축한 스커트 아래 네 무릎에 키스하고 싶은데. 3년 전 처럼. 외로워. 다만, 힘들어. 아니. 그게 아닌데. 뭐 하는 거야. 나는 아직도 나를 떠난 그녀를 사랑하는데. 아. 너도 나를 떠나갔었지. 참. 어슴프레한 눈길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차비라도 줄까

  차비가 있으면 뭐 해. 갈 곳이 없는데. 집은 텅 비어 있고, 내가 휴가나온 사실도 모르고 있고. 신촌에도 친구는 충분히 많은데. 충분히 많아 한 명 있구나. 귀찮아. 귀찮아. 힘을 빼고, 손을 거둔다. 될 대로 될 지어다. 가장 낮은 확률은 가장 낮은 확률로 이루어질 지어다.

  전화라도 빌려줘. 규홍이 폰 번호 있지
  글쎄. 지워버렸을 텐데.
  재형이 번호는 있겠지
  아마도.

  친구네서 자야겠다. 또 민폐 끼쳐서 미안. 너도 좋은 친구야. 좋은 후배고. 귀여운 녀석. 그동안 미안했어. 안녕. 다시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전화좀 할께. 또르르르. 재형군. 나 상길이다. 응. 휴가 나왔어. 너 군대 가기 전에 한번 다 모이자고. 규홍이 전화번호좀 이 번호로 넣어줘. 딸깍. 지잉. 문자. 전화. 규홍아. 나 상길. 갈 곳이 없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하냐. 좀 재워주라. 응. 버스 정류장 있는 데야. 빨리 오세요. 15분 그쯤이야 신나게 기다려주지.

  가 봐. 나도 이제 갈 곳이 생겼으니까. 아니, 잠깐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이 아저씨, 이런 건 연인 사이에나 하는 거야.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네. 그럼 연인 하지 뭐, 라는 말에는 다행히 브레이크가 붙었다. 담배나 주고 가렴. 그래. 잘 들어가. 죽지 말고. 아니, 집까지 데려다줄께. 요 앞인데 뭐. 편의점에서 살 것도 있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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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 어느 대로 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중전화 부스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일으켜 세운다. 옆으로는 반쯤 빈 소주병. 띠리리리링. 서 있는 남자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네. 네. 아. 응. 상길이 만났어. 잘 챙겨줄 테니 걱정하지 마. 딸각. 이봐, 일어나. 부스스 눈을 뜨는 한 남자 서 있는 남자를 잠깐 쳐다보고, 여자를 잠깐 쳐다본다. 우후, 얼빠진 웃음을 흘리며 그는 지껄인다. 새로운 섹스 파트너인가 예쁜데. 그새 또 후배 꼬신거야 안색이 변하는 다른 남자. 그리고 여자. 능력도 좋아. 2학년 때만 몇 명이었더라. 하나 둘 셋 넷 다섯명이었나. 여섯명이었나. 쓰레기 같은 새'끼. 반응하지 않는 서 있는 남자, 그리고 여자.

  가 버리는 여자. 서 있는 남자, 냉소적으로 말문을 연다. 경박한 새'끼. 니가 원래 그런 놈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사람 잘못 본 건가. 연락하지 마라. 길에서 뒤져버려. 아깝군. 날이 좀더 추웠어야 했는데. 취한 남자에게 침을 퉤 뱉고 여자가 간 방향으로 뛰어가는 남자.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꺼내 피운다. 킥킥 웃는 남자. 어디로 가지. 이거. 원. 나. 참.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마음대로 하라고. 어차피 빗물에 씻겨갈 거.

  어디로든 가야지. 비척이며 학교로 들어선다. 다음 달이면 다시 학생이구나. 그런데 갈 곳이 없네. 화장실에서 잘까. 제기랄. 동아리방이나 가야지. 자고. 아침 일찍 나가자. 동아리방이 있는 학생회관에 들어선다. 현대정치사상연구회. 거창하군. 80년대에 꿈꾸던 현대정치사상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아직도 여기에 이렇게. 그리고 아래 달린 거창한 전자식 자물쇠. 잠깐. 비밀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기억나지 않는군. 기억나지 않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이런, 비참한 학회장의 말로인가. 내가 학회장 할 때 달았던 장치 같은데 저거. 훔쳐갈 거라곤 컴퓨터 한 대 밖에 없는데. 뭐하러 저런 걸 달았지. 문에 기대 앉는다. 기대 앉은 그의 눈에 옆 동아리방의 문이 보인다. 교양철학회. 이거나 저거나 거창하기 짝이 없구나. 잠깐. 저 방 문의 비밀번호가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회 학회장이었던 석달 전까지 나의 애인이었던 그녀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한두 번 그쪽 학회방에서 자 본 것이 전부인데. 신기한 일이로군. 자물쇠. 틱. 틱. 틱. 이건가. 덜컥. 열렸다. 피곤해. 피곤해. 불 꺼진 지저분한 동아리방. 여기나 우리 동아리방이나 너저분한 건 똑같군. 자야겠어. 피곤해. 익사체처럼,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시간이 지나가겠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눈을 뜨겠지 나는. 그렇게 누운 얼굴 위로 강물이 스쳐간다.
 

  
 
 
 
일병 김지민 (20060808 164129)

후, 잘 읽었습니다. 폴라로이드의 연작이라도 해도 될 것 같네요 
나쁘게 말하면, 큰 차이를 모르겠다는 그런거. 
객관화가 훨씬 도드라 지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도 좀더 명확하지만, 이렇다할 플롯의 전개가 아쉽습니다. 영준씨 소설에서 대화가 갖는 힘에는 정말 감탄합니다. 
잘 봤습니다.    
 
 
병장 이영기 (20060808 164413)

어쨌든 플롯의 부재, 류. 잘 읽을께.    
 
 
병장 조주현 (20060808 164635)

난 좋기만 한데.. 
미적지근한 나른한, 몽롱한    
 
 
일병 김지민 (20060808 170146)

나도 좋긴 좋아요. 이히    
 
 
병장 송희석 (20060808 170542)

지민씨, 영준씨 색깔소설을 읽으면 그순간 좌절할지도 몰라요. 흐흐.    
 
 
일병 김지민 (20060808 172140)

희석  정말 보고 싶은데. 안올려 주시려나.. 음. 그리고 난 이미 어느정도의 열등감이랄까 그런거 있음. 흑.    
 
 
일병 김지민 (20060808 172506)

절대. 짬에 관한 열등감 아님. (방어막)    
 
 
병장 박종민 (20060808 185803)

그러나 이미 그는 무덤을 팠다. 

일!    
 
 
병장 이훈재 (20060808 185838)

나!    
 
 
병장 박종민 (20060808 185902)

탱! 

브라보.    
 
 
병장 송희석 (20060808 195811)

근데, 이거 사소설인가 정모때 물어봐야겠다.    
 
 
병장 이영기 (20060808 200101)

주영준의 전언  이 인간들 남의 소설에서 일나탱 놀이라니, 




좋은 걸    
 
 
병장 엄보운 (20060808 215112)

사소설이 아닐런지. 잘 읽었어요, 영준씨~ 밀도 높은 코멘트는 다음 기회에.    
 
 
병장 민경갑 (20060809 010200)

되게 평범한것 같은데 밀도 높은 대화가 이 단편에 '맛'인것 같아요. 하루키처럼 말이죠    
 
 
일병 김지민 (20060809 072024)

별별게 다 생기누만    
 
 
병장 주영준 (20060809 073519)

희석  자꾸 부끄러운 습작 거론하는 저의가 뭐요. 색깔소설. 
희석, 보운  물어보고 말고 할 것 없이 사소설 아닙니다. 폴라로이드 연작도 아니고. 풀어가는 방식에서 몇 가지 유사점이 있지만-이를테면 작품세계와 주인공 간의 평면적인 관계맺음이나, 독백 스타일라든가 하는. 그런데 그거야 잘 못 쓴 1인칭 소설의 대부분이 공유하는 점이니까 치워두고. 고진이나 다른 일본 '문학'평론가가 핵심적으로 지적한 사소설의 특징-작가의 삶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는(이와 관련해서 대중적 명저 '윤리21'에서 꽤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사소설이 아닙니다. '프로 작가적 일기 쓰기'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망상에 기반한 픽션입니다. 지난 번 진우씨부터 해서 내 습작을 사소설로 몰아가려는 건 마치 자기표현의 측면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성적으로 음란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들구요(단지 예시입니다. 동의할 수 없는 예시라면 다른 글에서 논쟁하죠. 나름 문학에 진지하기에 이 텍스트에서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소설 장르가 '사생활'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장르이기에 얼마든지 작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구요. 그런 식의 몰아붙이기는. 
- 
아무튼. 모두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인간들 남의 소설에서 일나탱 놀이라니.    
 
 
병장 엄보운 (20060809 080851)

병장 주영준 실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병장 주영준 (20060809 081542)

보운  엥.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죄송합니다. 강하게 말하려던 거 절대 아닌데. 다만 어제 당근으로 현재 비몽사몽 중이라서. 밀도있는 코멘트 기대할께요 (웃음). 아 졸려.    
 
 
 병장 홍석대 (20060809 082132)

아. 괜찮네요. 
괜히 담배 피러 나가게 만드는 당신. 조금 미워.    
 
 
병장 송희석 (20060809 095551)

영준 사소설 장르자체가 '사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오해한 당사자에게 '폭력을 쓴다고'몰아붙인다는것은 참 이해할수 없죠. 만약 영준씨가 내글내생각을 통해 '여신'에 관련된 내용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사소설'이라고 전혀 추측하지 않았을겁니다. 오케이 이정도면 영준씨가 화날이유가 없죠    
 
 
병장 엄보운 (20060809 111810)

병장 송희석 글쎄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영준씨가 기분이 나쁠 여지는 충분해 보입니다. 어떠한 대목에 대한 지적없이 전체적으로 이 소설이 사소설적인 느낌이 난다는 식의 발언은, 영준씨의 다른 글로 인하여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할지라도.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규정한다는 점에서 좋은 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제대로 말하려면 '수필과 사소설은 다르지 않은가' 에서 부터 다시금 논의를 거듭해야 겠지만, 전 소설을 쓴 영준씨가 기분이 나빴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 코멘트를 쓴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확고한 입장이 아닌 이상 물러서는 것이 글쓴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비문학과 다를테니깐요.    
 
 
병장 송희석 (20060809 125107)

보운 물론 영준씨가 '그래도'기분이 나쁘다고 말한다면 저역시 할말은 없습니다. 허나 영준씨는 '몰아붙인다.'라고 말한것은 이해가 안된다는 겁니다. 지민씨의 행동은 논외로 치고, 저는 그저 '이거 사소설인가'라는 의문점을 제시했을뿐입니다. 만약 뒷편에 보운씨도 그저 의문으로 그런 질문을 들었다면 오히려 몰아뭍인다고 오해한 '영준'씨가 너무 강하게 말한것이 아닐까 라는 점이죠. 

작가의 의도를 독가가 규정할수는 없지만, 장르자체에 대한 의문점은 제시할수 있는것은 독자의 자유가 아닐까 사료되네요.    
 
 
병장 엄보운 (20060809 130255)

병장 송희석 끄덕 끄덕. 희석 씨 입장 역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준 씨에게 서둘러 사과를 구한 것은, 저의 짧은 코멘트가 장르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넘어 영준 씨의 의도를 곡해하여 규정지으려 한다는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전 깊지 않은 생각으로 답글을 달았고, 그것으로 인해 글쓴이가 기분이 나뻤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물러서야 하지 않은가'라는 것이 제 입장인 거지요. 

희석 씨 행동을 판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직전의 답글은 희석 씨를 대상으로 한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병장 송희석 (20060809 130522)

보운 제가 잠시 착각했군요. 전 보운님이 '사과'하라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텍스트라 생각했거든요. 이거 잠시나마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병장 엄보운 (20060809 131446)

병장 송희석 아닙니다. 제가 글을 명확히 쓰지 않았는걸요. 누구에게 사과를 요청하는 건, 극단적인 경우에 한합니다. (먼산)    
 
 
병장 박종민 (20060809 203640)

아아, 아침에 위와 비슷한 내용의 리플을 달았었는데, 
날라갔어요 (울먹) 요즘 책마을 접속 난이도 너무 빡세... (...) 
그동안 희석씨와 보운씨가 주고 받으셨군요. 
처부 하계휴양 다녀왔습니다. 아 알콜모드. 
아침에 메모장에 저장해둔거 올립니다. 

영준  주민들이 사소설로 '몰아붙이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영준씨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fiction을 위하여(독자들로 하여금 私念이 침투하도록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설정면에서 좀 더 자유로워 질필요가 있습니다. 영준씨 말대로 소설의 형식만 놓고 본다면 이건 사소설과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데다, '작가의 삶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는' 이라는 특성에서도 이번 소설은 사소설이라는 의심을 사기에는 충분합니다. 장소, 신분, 등장인물의 정서라던가... 인물, 사건, 배경이 영준씨가 책마을 주민들에게 들려준 개인적인 근황과 상당히 밀접해 보여요.(물론 단편적인 몇 줄의 정보를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나름 책마을 주민들은 영준씨에 대한 오마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건 아니건 그건 나중 문제고 말이죠.) 괜히 몰아붙이는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기분 푸셔요. 흣. 

창작에 있어 감정의 몰입과 이입을 위해서 라면, 퇴고중에 모든 '걸리적거리는' 어휘들을 다른 어휘로 치환하는 방법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네요.(고유명사 같은거 말이에요.) 

쓴소리를 좀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임을 염두해주시기 바래요. 

이 소설 굉장히 붕 떴습니다. 
이전에 올려주셨던 '다리'에서 보여준 그 풍부하고 기발한 감수성도 안보이고. 
폴라로이드처럼 애절하면서도 차분한 색감을 그려주지도 못하구요. 
이전의 글들에서 두각되던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메타포들도 굉장히 미약하고.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은. 
그간의 영준씨의 소설은 필요없는 문장인듯 하면서도 항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부분적인 미쟝센이랄지. 상징이라든지. 전체적으로 호흡을 골라주는 역할도 했었고. 
언뜻보면 군더더기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쓸데없는 문장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마추어들이 가지기 쉬운 군더더기표현들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면에서 몰입도도 좋았고, 

하지만. 
이번 소설은 표현만을 위한 표현들이 많이 보이네요. 그러니까, 
'군더더기' 말이에요. 좀 더 읽어봐야 하나. 
영준씨에 대한 예의차원에서는 몇 번이고 더 읽어 보아야 하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번 편은 매우 불친절합니다. 
소설이 불친절하다 함은, 
가독성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심각한거죠. 
여전히 지민씨가 말씀하셨듯이 영준씨의 습작에서 보여주는 
그 대화의 놀라운 힘은 여전하군요. 하지만 그것 뿐이에요. 
마지막 문단같은 파괴력을 조금만 더 확장시켰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감상은, 

좀 아쉽습니다. 

영준씨 지금 헤메고 있는거 아냐 
당신답지 않아요. (이 말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난 후에 쓰기 망설여지는 문장 LIST에 올라가 버렸어요. OO답다거나 OO답지 않다는 말은, 듣는 이에게는 상당한 폭력이 될 수 있겠더라구요. 인간은 자기조차도 제대로 모르는데. 함부로 남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되죠. 그러나 이 시점에서 꼭 던져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 해명하고 있는 것일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