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특집 7th - 김동석 Part 1  Q&A편 
 
 
 
 
회원특집 7th  - 김동석 Part 1  Q&A편



상병 조주현

1. SF에서 이것만은 꼭 읽어봐라!(혹은 봐라!) 평도 함께,

1923년 휴고 건즈백이 Scientifiction이라는 신조어를 내놓은 이래(물론 그 이전에도 프로토-SF는 있어왔습니다만) 수많은 SF소설이 쓰이고 읽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SF가 태생적으로 Science, 즉 과학이라는 '기술'을 토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소설에 쓰인 과학이 낡아버리면 소설의 구조 자체도 낡아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SF를 이야기할 때 '최신', 혹은 '최첨단' 처럼 과학기술에나 나올 법한 용어가 나오는 것은 바로 SF가 쓰는 도구인 과학이 그만큼 장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빛이 나는 SF소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훨씬 늦게 개봉한 '스타 워즈'보다 더 세련되어보이는 것은 SF의 S라는 도구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SF를 쓰는 목적은 단순히 최첨단 기술을 고안해내서 그 기술을 적절히 써먹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기술이 세계(또는 인간이라 한정지어도 좋습니다)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과정을 얼마나 잘 그려내는가에 달려있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입니다. 이 작품은 아서 클라크가 계속해서 다루는 '외계 지성과의 접촉'을 가장 가깝고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SF가 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953년에 나온 소설임에도 에반게리온(인류보완계획은 이 작품에서 따온 아이디어죠)과 스타크래프트(오버로드와 오버마인드는 이 소설에서 따온 이름입니다)까지 영향을 미친 소설이기도 하지요.

2. 차분한 느낌으로 진한 커피한잔을 옆에 놓고 글을 쓸 것만 같은 동석씨, 자신을 비유하고 싶은 그 어떤것이 있다면 무엇 

실은 제가 실생활에서 그리 차분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장난치기 좋아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일이 없으면 방에서 뒹굴거리며 각종 해괴한 공상에 빠지는 걸 좋아합니다. 다만 책마을에서는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죠. 
일전에 황민우씨는 저를 일컬어 헤르마프로디투스hermaphroditus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3. 동석씨의 인생은 어떤 음악처럼 펼쳐질 것인가. 글로써 악곡을 들려주세요. 가사도 넣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칸딘스키처럼 자신의 미학을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실 학교 다닐 때에도 예체능 계열 중 음악은 늘 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수학에 약한 것도(음악과 수학은 밀접한 학문이지요) 한 이유겠지요. 글로써 악곡을 지어낸다는 것은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네요. 대략 비슷하게 흉내내보자면 이런 식이겠지요.

나는 물음표가 떠다니는 수영장에 발판 위로 올라있습니다 물살은 빠르게 물결치고 자아내는 소리들은 네 개의 떨림으로 사위를 감싸돕니다 헤엄칠 줄 모르는 난 발판에서 떠밀리어 물 속으로 들어가지만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발목까지 참방참방 잠기어 그 위를 걸어다닙니다 물수제비마냥 튀어 물결을 비스듬히 가르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퍼져가고 이내 사라지고 달음박질 따라 흘러 물결소리와 어우러집니다 이내 가로지른 수영장 밖은 까끌까끌한 모래사장입니다 모래가 물 묻은 발바닥과 닿으며 침묵같은 소리를 냅니다 찌르는 햇빛에 바싹 마른 모래는 물기를 머금은 발에 까끌까끌한 감촉을 남기며 걸음 뒤로 물러납니다 햇빛에 부딪힌 모래가 순간 빛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빛났다가 다른 모래에 부딪혀 떨어집니다 모래사장 지나 열려있는 바다에 첨벙 들어가며 발을 씻습니다 모래는 물결에 휩쓸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스러지고 곁에 둔 샌들은 파도에 들어가 어느새 바다 위 저만치에 흔들흔들 떠 있습니다 바다냄새가 바람 타고 코앞을 지나칩니다



병장 송희석

닮고싶은 장점은 없고, 저사람을 보고 어떤 단점이 있는지 부터 파악한후, 그것은 닮지말아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4. 언문일치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일치하는 동석님을 봤습니다. 군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꽤 어렵다고 봤습니다. 허나 아직까지 전 궁금하고 회의적인 시각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언.문.행 일치입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동석님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완벽한 언문행일치란 불가능합니다. 심리학적 방어기제로 무의식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까지 완벽히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이런 걸 물어보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희석님이 질문하시는 언문행일치란 인간이 의지의 발현인 언문행 이 세 가지를 의지적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멋대로 해석해보겠습니다. 문자적 의미의 언문행일치를 실천한 역사적 인물은 해탈 이후의 고타마 싯다르타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예수의 경우는 뺨을 맞았을 때 다른 뺨도 돌려대지 않았다는 성경의 기록이 존재합니다...라는 것은 농담)

언문행은 의지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하지만 발현의 양태는 전혀 다르죠. 기본적으로 말은 규정하고자 하는 것, 글은 남겨 퍼트리고자 하는 것, 함은 바꾸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언행일치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써 제시된 '말'을, '함'으로써 의지만이 아닌 현실로 끌어온 결과물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은 '함'에 앞서 예고된 부수적 표현기제에 불과하지요. 제가 생각하는 언문행일치는 세계를 규정한 자신의 '말'을 '글'로써 남기며 또한 '함'으로써 자신이 규정한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계를 규정한 '말'은 그 자체로 불구이며 따라서 그에 수반한 '글'과 '함'은 불완전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함'이 바꾼다는 미래지향형 의미체계를 가진 이상 '함'을 '말'과 '글'에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함'이 의지의 실현이 아닌 살아감 그 자체라고 인식한다면, '함'에 수반한 '말'과 '글'로써 언문행을 일치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윙엘이 하느님의 존재를 '되어감' 속에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멋대로 날조해봅니다.

5. SF소설은 환상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희망하는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단어로 치환시킨후 문장을 만든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SF소설과 환상소설과 가장 큰 차이점을 3가지만 이야기해주신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SF소설과 환상소설은 모두 19세기 낭만주의와 모험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같은 가지에서 난 이 두 장르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와 근대적 합리주의가 대두된 이후입니다. 근대 이후 환상소설은 낭만과 모험, 즉 현실과 일상성(또는 항상성homeostasis)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환상'으로써 충실히 반영한 반면 SF소설은 근대에서 제기된 합리성을 수용하여 '과학'을 토대로 비일상을 그리고 있지요. 환상소설이 '탈현실'의 문학이라면 SF는 '비현재'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SF는 '과학적' 사변speculation에 근거한 세계관을 다루는 반면 환상소설은 '논리적' 사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얼핏 비슷한 말처럼 보일 수 있으나, 과학적 사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계(1차 세계)의 과학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메커니즘이고 논리적 사변은 그에 반해 소설 속의 가짜 세계(2차 세계) 내의 규칙이 모순되지만 않으면(그러니까 논리적이기만 하면) 과학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해도 등장할 수 있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SF에서는 신도 마족도 심지어 자신이 사는 세계까지 심심해서 파괴해버리는 투명드래곤이 존재할 수 없지만(신과 마족과 투명드래곤의 물리적 실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환상소설에서는 가능하죠. '논리적'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SF소설은 주로 '우리'의 과학을 다루기 때문에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 미래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환상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를 다루는 소설이 더 많습니다.

곁가지로 더 이야기를 하자면, 종종 SF소설이 근대 제국주의의 팽창정책, 즉 '정복'과 짙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혹을 사는 것에 비해, 환상소설은 오히려 근대 이후로 '상실'되는 환상성에 대한 향수와 '복원'이라는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초기의 SF작품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 '탐험'(실은 정복)인 것은 19세기~20세기 초반 서양의 현실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환상소설은 그와는 반대로 사라져가는 신화와 전설, '비과학적' 이야기들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6. 마지막 질문입니다. 조금 칼을 꺼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 모든 시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주영준씨하고 같은 견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저의 이유는 '시'는 결국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은유가 포함된 '단어'를 써서 그것을 형상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합니다. 특히 일제시대 시절과 70~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 시들을 부정합니다. 특히 '기형도'시는 정말로 부정합니다. 무슨뜻인지 잘 아실겁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으니 문학적 능력으로 '은유적 표현'을 써서 시를 쓴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것을 '용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일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충분히 할수 있지만 그것보다 '시'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할수도 있을것입니다. 허나 전 부정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굳이 꼭 '시'만 써야 했을까요 꼭 그렇게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야 자신의 말을 꺼낼수 있던 것일까요 동석님 생각이 너무나 궁금해 이렇게 공격적으로 물어보는점 미리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립니다. 좋은 답변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가 「나는 송희석을 긍정한다」라는 글을 쓰면서 굳이 어슐러 K. 르귄의 글을 인용한 것은, 그날 밤 저와 이야기하며 시에 관한 부정을 언급한 희석씨에 대한 답변의 씨앗이 들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시'는 은유입니다. 사실 모든 문학은 은유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은유는 삶을 기반으로 그려나간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언어라는 물감으로 삶이라는 그림을 그려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요 저는 어슐러 르귄이 말한 '예술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에 그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도저히 말로는 자신이 원하는 효과 - 즉 타인을 자신이 의도한 바에 가깝게 변화시키는 - 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엄보운씨와 쪽지로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의 인간소외에 대해 아무리 논리정연하게 떠들어봤자 '오늘은 편지를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작은 말의 파급력을 넘을 수 없고, 말년 병장이라고 인간관계의 허무주의에만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라는 옳은 쓴소리보다 '지금도 당신에게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은가'라는 충고가 더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논설문을 쓰지 않고 수필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파고들어갈 수 있는 언어를 삶과 세상에서 퍼올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은유와 돌려말하기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은유는 오히려 자신이 바라보는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언어가 한 가지의 의미만 가질 때, 한 문장의 외침을 위해 긴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언어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얼개를 통해 이야기한 것도 바로 그것이고요. 결국 소통은 이해와 변화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변화를 촉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음악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글을 씁니다. 시와 여타의 문학은 그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희석님이 시를 부정하는 것은, 제게는 마치 진성이나 두성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음악인과도 같은 느낌을 주네요.



병장 황민우

닮고 싶은 타인의 장점은 없고, 존경하는 사람은 닐 영, J.R.R 톨킨, 아이헨도르프, 노발리스. 어찌보면 내가 지향하는 정체성의 모든것이 이 네 사람으로 응축될지도. 

인물평  내 스스로 별명을 짓자면, 중세의 닐 영Medival Neil Young이라 부르는데, 동석씨는 미래의 닐 영 Future Neil Young이라고 부르고 싶어. 어찌 생각하면,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중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형상의 같은 질료를 가진) 
결국 환상과 자유분방함이 당신과 나의 아주 공통된 접점이 아닐까 


7. 두어번 만나면서, 특히 두번째 만남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다지 물어볼 말이 없어. 동석이가 대략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나의 신비한 직관력의 세계) 그러니까 너에 대한 질문이나 개인적인 것들은 묻지않을게. 어차피 차차 알아가야할 문제니까. 

너와는 '배우는' 입장에서 같은 점이 둘다 '환상'과 '상상력'에 천착했다는 점이고, 그 점에서 미묘하게 다른 점은 너는 SF에서, 나는 판타지에서 출발했단 점이랄까 어차피 너나 내가 지향하는 그 스트림()이 마이너리티에 숨어있을당시 두 매니아층의 경계는 거의 없던시절이었고, 너와 내가 거의 같은 통속()에서 자라왔다고 생각하니까 어찌보면 같은 족속이라고 보여지기도 하고.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갈게. 1월21일에 처음 만났을때도 카페에서 키위주스마시면서 이야기했던 담론이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니까. 왜냐면 너와 내가 만날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네가 고스트라이터에 올렸던 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글이었기에. 
그때 내가 말했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예술담론은 '노발리스'가 주목받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신화를 뛰어넘는 다원화된 정신의 '초신화학'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것은 단지, '껍데기만 전통(우리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 '정신의 신화화(보편화)'라고 지적했었고, 그 우리고유의 것의 복원은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그 형식에 있는 것이아니라, 형식과 상징 안에 내재된 아우라의 소통구조 (이에 대해서는 카시러의 '인문학 구조내에서의 상징형식 구조'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함)의 신화화를 꾀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완성이라고 생각하거든. 난 그런 점에서 블랙메탈에 국악멜로디를 차용하는 오딘Othean의 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있고, 어느 원로작가의 신춘향전 같은 라이팅백 소설과 이영도의 '눈마새'시리즈 역시 부정적으로 보고있어. 그것은 단지 모더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행하는 단계의 중요한 속성, 즉 해체주의와 크로스오버의 과도기적 단계였을뿐이지, 그 안에서 예술미학적인 아우라를 뽑아내는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거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문제는 해체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그 안에 담겨진 정신적 의미들이 상실되었다는 점이야. 모더니즘은 '다다'의 정신으로 하나의 이데아로 여러가지 조각들을 기우는 형식이었는데, 포스트모던 예술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정신마저 해체되는 (즉 아우라가 파편화되는) 사태까지 오고, 그것을 미봉책으로 막아보려했던 시도가 바로 '크로스오버'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크로스오버가 나쁘다는것도 아니고, 좋은 시도로 보여질수도 있고 다분히 시대적 특성이 담겨있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티의 고질적이고 태생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나갈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한국 익스트림메틀씬을 예로 들어볼게. 나는 우선 우리나라 블랙메틀 밴드들이 그로울링 창법을 구사한다는 것 자체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블랙메틀의 그로울링창법이라는 것은 게르만족 샤먼(그러니까 Ogre들)이 주술적 제의노래를 부를때 사용하는 압운법 방식, 그러니까 북구의 원초적 전사들이 주술적으로 외치는 고함에서 시작했어. 그것을 데스메틀과 접목하여 라인을 만들고 메틀적으로 게르만전사의 노래와 가까운 그로울링작법을 시도한 밴드가 베놈과 블랙사바스였고, 그 원초성을 블랙적으로 완성시킨 밴드가 바로 엠퍼러Emperor였어. 그러니까 익스트림 메틀의 그로울링창법은 본질적으로 게르만-노르딕적 주술성을 가지고 있고, 북구밴드였기에 가능한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메틀로 수용하는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해. 
따라서 익스트림메틀의 그로울링창법은 유럽 북구민족의 정체성의 표현이었고, 이것이 극단화된 블랙메틀에서 샤머니즘적 보컬음계와 리듬을 도입한 메이헴Mayhem의 보컬라인은 완전한 블랙메틀의 정체성(그러니까 안티크리스트적인 사악함뿐만이 아니라 자신들 지역의 토속적인 신화와 주술을 블랙메틀에 도입하면서 마법적 기운을 획득하는)을 완성하였기때문에, 메이헴이 블랙메틀의 창조자라고 말할수 있었던 거니까. 
이점에서 한국 블랙메틀 밴드의 그로울링 창법사용은 물론 블랙메틀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바람직하지 않다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한국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있어서는 지양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런 본질적 수용부분이 껍데기만 돌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국악 음계를 도입한들 블랙메틀의 한국적 수용은 기대할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오딘의 음악은 블랙메틀과 국악 '멜로디'와 '정서'의 한국적 수용이지, 블랙메틀의 한국적 수용이라고는 보기 어렵거든. 물론 조금 다른 방향으로 탈출구를 모색한 문샤인Moonshine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 사일런트아이Silent Eye의 초기 음악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커. 보컬 서준희씨의 샤우팅 고음창법은 놀랍게도 그로울링이 아니라 창(昌)에서 쓰일법한 창법과 라인을 사용하는 신선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이건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이영도의 눈마새가 소설적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을지 몰라도, '동양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단지 '동양적 세계관을 사용한 판타지소설'이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야. 이 소설이 동양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한국 신화에서 차용한 하늘치나 두억시니, 꽃에서 태어난 용같은 한국신화의 편린들을 소설에 가져온것과 도깨비와 나가들의 등장과 특성때문일걸 왜냐면 눈마새가 사용하는 영웅의 여행구조와 퀘스트구조는 동양, 즉 우리나라의 신화적 정신추적과정이 아닌, 단순히 서양의 퀘스트전설Quest Legend이 동양적 옷을 입은 것에 다름 아니니까. 

여기서 첫번째 질문에 마침표를 찍을게.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도 물었고 내 생각을 분명히 이야기했었지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에 대한 대안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완성(해체성이 다원주의로 전이되며 정신과 아우라가 다원주의로 해체되어 확립한다는)이라고 생각하고, 그 완성의 실마리를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보았다고 말했어. 그것은 작가 자신이 가진 민족적 정체성을 완전한 포스트모더니티로 해체시킨다음에, 그런 무정형의 상태에서 보편적 아우라를 추출해내어 '새로운 신화'로 재복원하는 초신화학적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했었고, 이 정체성 확립은 블랙메틀에 국악멜로디를 어우러지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블랙메틀의 본질, 즉 극단적 파괴적인 음악의 주술성이라는 블랙메틀의 매커니즘적 측면에서 우리의 주술성(그러니까 국악이 아니라 민요나 무가들에서 뽑아올 필요가 잇었지. 이점에서 오딘의 차용은 훌륭하긴 했지만 잘못됐다고 생각해)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블랙메틀을 '해체할'필요가 있는것이었고, 눈마새의 영웅중심 퀘스트전설은 보편적 인물의 퀘스트확립으로 보편적 전설이 되어버리는 우리민족의 '구복여행'같은 낙관적 퀘스트로 다시 쓰여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거야.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이사벨 아옌데는 분명 이것을 성공시켰어.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우리도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마르케스가 등장한 70년대 이후로 이 시도를 훌륭하게 성공한 나라는 그 어느나라에도 없다고 생각해. 내가 글을 쓰고 음악을 하는 목표는 바로 그거야. 한국적 해체. 포스트모더니티의 한국적 완성. 나는 그것을 대개의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지적하는것처럼 초신화학에서 찾아야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고,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위와같은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려고 해. (이건 순전히 내가 생각한 문제들이니까, 다른 평론가의 의견과는 다를수 있겠지.) 이에 대해서는 동석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현대 환상적 사실주의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 경계소설과 판타지소설에서 위와같은 대안을 찾았다고 한다면, SF주의자인 동석이의 입장에서는 SF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대답을 듣고 싶어. 

형, 질문이 이렇게 길면 답변도 길게 할 수밖에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질문보다 짧은 답변을 하게 되었네. 

남미의 경우는 현실 속에 18세기 대포와 19세기 자동차가 20세기의 사람들과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 하지만 이미 우리의 경우는 파괴된 과거의 위에서 자라난 세대라고 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정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한복과 민속놀이는 명절에나 '체험'하는 '이색적인' 문화로까지 그 의미가 격하되었고 간신히 민요나 고전문학 정도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한국의 신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한국적 완성은, 그나마 신화와 전설이 잘 보존되어 현대 일본인들의 집단의식까지 전달되어있는 일본의 경우보다 더욱 어려운 일일 거야. 하지만, 언제나 문물을 받아들이며 그 문물의 물적 기반은 물론이고 우리의 모습까지 담아냈던 숱한 분야의 장인들이 우리 나라에서는 늘 있어왔으니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현대 SF는 내우주inner universe와 외우주outer universe의 갈등이라고 표현하고 싶어. 과격하게 말해서 SF는 외부의 미지를 주로 다루었던 60년대 이전과 인간 내부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70년대 이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현대의 SF는 이 내우주와 외우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거든. 최근에 그렉 이건, 이언 맥클라우드, 스티븐 박스터등의 하드 SF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는데, 사이버 펑크 이후로 소외되었던 하드 SF가 사이버 펑크의 소멸 이후로 다시 재조명되는 이유는 이들의 실험이 내부우주와 외부우주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예를 들어, 그렉 이건은 『쿼런틴』에서 외부 우주와 '격리'된 지구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주를 결정짓는 세계관 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존재양태 자체를 근원적으로 탐구하고 있거든.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하드SF는 50년대의 하드SF보다 오히려 사이버펑크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어쨌거나 사이버펑크는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천착한 서브장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야기적으로는 모험소설에 가깝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지적 방랑이라고 할 수 있지. 모험 자체가 지적 방랑에 연유하여, 모험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이미 독자에게 지적인 고민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거든.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내우주와 외우주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에서도 진행되고 있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그 예라고 할까. SF가 S와 F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변소설은 '사고실험'을 기반으로 지적 사변을 전개해나가는 거지. 예를 들어 테드 창의 중편인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의 기반을 가진 외계 지성의 세계관을 그리고 있어. 그들의 언어는 하나의 선(線)으로써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사고의 총체를 표현하고, 그러한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함으로써 인간도 자신의 인생을 총체적 시각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관찰하고 사고할 수 있게 되지. 다시 말해 과학적 합목적성에 대해 과학'기술'이라는 실체적 도구로써 탐구했다기보다는 과학에 입각한 '사고실험'을 통해 구현해낸 거라고 할 수 있어. 이러한 점에서는 하드 SF의 방법론과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SF가 사고실험의 문학이며 SF가 추구하는 바가 '과학이 세계(또는 인간이라고 한정지을 수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지향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어. 그러나 현재는 이 두 가지의 상이한 흐름이 겹치면서 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특징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SF의 이론적 근본인 Science와 형식적 근본인 fiction이라는 체계가 해체되어가는 것이라고 봐. 『쿼런틴』에서 스토리텔링은 픽션, 그러니까 '이야기'로도 진행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학, 그러니까 사고의 흐름과 과학적 논리의 발전방향으로도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고 있거든.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과학과 이야기가 양분되어 과학은 도구로써만 이야기는 소설적 구조로써만 활용되던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SF소설, 과학(또는 사고실험)과 이야기가 혼연일체가 된 소설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거지. 말하자면 현대의 SF소설은 이야기가 흐름을 이끌어나간다는 소설의 기본적 명제마저 해체했던 조이스의 시도를 SF적으로 재시도하는 셈이랄까. 운동으로써의 사이버 펑크가 소멸한 이후로 SF는 이렇다 할 신조류의 등장없이 공백기를 거치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공백기도 아니고 하드SF의 르네상스도 아닌, '과학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 극단적인 사고실험의 문학으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봐. 
이런 현상은 현대의 철학이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지. 양자역학의 문제들을 철학적 고민 없이 실험과학만으로 증명해낸다고 해서 그 결과의 철학적 의미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양자역학은 철학의 오랜 담론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문제를 과학자들이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는 학문이지. 생명공학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발전해온, 그리고 숱한 생명체들의 근원과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는 학문이고. 이미 과학은 철학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해온 문제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어. 따라서 과학과 철학은 이제 예전처럼 따로 떼어서 설명하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지금은 철학의 실험적 증명이 가능하고 과학의 철학적 예언이 가능한 시대니까. SF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건 이전처럼 낯선 기술에 대한 경이 따위가 아닌,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의 실증을 토대로 한 사고실험(사변)을 통해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철학적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 이러한 점에서 나는 SF가 환상소설과 함께 앞으로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8. 첫번째 질문이 너무 길었으니 두번째랑 세번째는 간단히 물어볼게. 동석이는 주로 인디음악에 대착을 많이 가진다고 하는데, 물론 그점에 있어서는 나도 많이 공감하는 면이 있어. 하지만, 영어가사는 그 뉘앙스적 맛이 다르더라도 엄연히 우리가 가사를 음미하고 즐길수 있으며, 그 점에 있어서는 한국 인디음악과 같은 비교대상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정서적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음악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핵이라고 생각하니까 별 문제는 안된다고 생각하거든. 

동석이가 한국에 꽁꽁 숨겨져 있는 인디음악을 찾아듣는 재미가 있는것처럼 나도 역시 60~70년대 포크록 밴드의 음악을 찾아듣는 재미를 가지고 있거든. 그 정서는 아마 닿아있는 부분이 많을거야. 그래서 나는 굳이 인디밴드에 중점을 두고 음악을 청취할만한 필요성을 못들었고, 트립합을 찾아듣는것만큼의 비중으로 국내 인디씬을 찾아듣고 있거든. 동석씨가 왜 그렇게 인디음악에 붙들려 있는지가 궁금하고, 특히나 나처럼 포크 사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도 궁금해. 왜냐면, 지금 우리 또래에 포크사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그것도 모던한 맛이 없으면 그나마 듣지도 않는다는 사실. (단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포커파인트리Pocerpine Tree나 데이빗 그레이David Grey를 듣는 사람은 거의없다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빅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나의 경우는 태생적으로 보헤미안 기질이 있어서 자연히 포크를 좋아하게 된것 같아. 올드팝도, 모던록도, 헤비메탈도, 심지어 블랙메틀까지 포크적 향취에 귀가끌리거든. (웃음) 

간단히 말해서, 처음 음악을 진지하게 들었던 것이 한국 인디음악을 듣고나서였거든. 그 이유도 크다고 할 수 있어. 물론 구체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만. 내가 한국 인디음악을 좋아하는 건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동시대를 함께 숨쉬며 만들어지는 인디음악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음악보다 더 와닿는 바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거든. 내가 Music Talk에서 내 인생의 음악을 미선이의 음악이라고 한 것은, 포크와 그런지를 통해서 동시대의 정서(내가 살며 느끼는 바)를 음악으로 소화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어. 그건 단지 '음악'이라고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와 문화, 우리의 이야기와 우리의 감성이 녹아있는 총체적 예술이라고 보는 거지. 뭐, 오버그라운드가 아닌 인디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상업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메이저의 음악보다 인디가 어쩌면 더 대중적인, 음악인 자신과 닮은 리스너들과 같이 호흡하며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고.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공감하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 것이지, 대중적 우상이 춤추고 노래하는 멋진 모습을 동경하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국내 인디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거겠지.

내가 포크를 좋아하는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포크 특유의 음유시인 같은 느낌의, 홀로 기타를 들고 여리지만 흔들림없이 연주하는 모습이 좋아서기도 하고, '통기타를 든 시인'이라 불렀던 지난날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포크 음악의 역사가 좋아서기도 하고, 포크에서 느끼는 순수하고 절제된 분위기가 음악의 가장 근본적인 매력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9. 동석이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연인관계가 꼭 소울메이트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어떻게였냐고는 묻지마.웃음) 나는 연애를 딱 두번했었고, 둘다 애인이면서 소울메이트인 관계가 합치되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거든. 늘 같이 영화보고 음악듣고, 미술관가고, 글도 같이 쓰고 평론도 같이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착각을 하고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것은 아닌것 같아. 소울메이트가 아니라도 연인일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에 대해서 동석이의 생각이 어떤지도 알고싶어.   

태생적으로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내 여자친구의 경우는 성격도 취향도 나와는 전혀 다르지만 사랑하는 것은 그와는 그리 연관성이 없더라고. 흔히 정서적 교감이 원활하면 부부관계도 원활하다고들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겠지. 그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을 때 훨씬 어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더 쉬운 일이 되기도 하지. 다르다는 걸 확실히 인정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할 일이 없거든. 예를 들자면, 자상한 남편이 바람났을 때와 난봉꾼 남편이 바람났을 때 어떤 부부가 더 이혼할 확률이 높겠어 난 자상한 남편이라고 생각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믿음이 한 번 깨어지게 되면 다시 상처를 아물게 하기란 더욱 어렵거든. 있는 그대로, 모르는 부분까지 사랑해줄 마음이 들었을 때는 오히려 소울메이트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겠지. 뭐, 그런 의미였어.



일병 김지민 

닮고 싶은 장점  미쳤다고 할 수 있을만큼, 강직하고 올곧은 '신념' 
동석님 - 팔베게가 느껴지는, 뭔가 모를 원숙함이 배어나오는 사람. 

10. 나는 따뜻하고, 밝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동석님의 글을 보면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어디서 나오는건가요 

저로서는 제 글이 정말 따뜻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밖에서 글을 쓸 때는 늘 차갑다는 말을 들어왔거든요.(너무 드라이하고 얼음장같아서 살을 좀 붙일 필요가 있지 않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말 뒤에는 '진짜' 살도 좀 붙이라는 말이 늘 따라왔습니다) 이번에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면서 제 글을 오랫동안 봐온(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으니까 어느새 7년이군요) 분께 책마을에 올린 글을 몇 개 보여드렸더니 '너답지 않게 난삽하고 수사가 늘어진다'는 요지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수필을 쓰면서 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셨는데(저는 밖에서 수필은 거의 쓴 적도 없고 남이 쓴 수필을 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책마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느새 책마을의 수필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었고, 좋은 면보다 난삽함과 수사만 늘어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왔죠. 하지만 불만은 없습니다. 제 글이 변화하고 있는 과도기라고 생각하니까요. 밖에서 글을 쓸 때도 언제까지나 차갑기만 해서는 안될 거라 생각해왔거든요. 수필이라고는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읽은 게 전부인 제가 답잖게 수필이랍시고 붓 가는 대로 쓴 글들은, 그저 제가 살아오는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여러분들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소박한 욕구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사람을 대할 때 그리 따뜻하지도 않고 아직도 사람을 만나는 것에 어색하고 여유롭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런 제가 따뜻하다면, 글쎄요. 그저 솔직해보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거짓말 잘 못해요.(입술에 잔뜩 바른 침은 뭐지)

11.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동석님은 저에게, 가슴으로 시를 쓴다고 평하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매번 궁금했습니다. 어떤 근거에 의해 이루어진 판단인것인지. 말해주세요. 기왕 직접 만나 이야기 하면 좋겠지만(웃음) 

지민님은 다작가입니다. 지금도 쓰고 싶은 것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실 테지요. 제가 지민님께 가슴으로 시를 쓴다고 말했던 것은, 지민님의 시가 머리로 시어를 골라내고 언어적 구조에 천착했다기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시상과 시어들을 마치 우물에서 바로 퍼올려낸 물로 밥을 짓듯이 시로 만들어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민님의 수사는 꾸밈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예요.(후배들에게도 자유롭게 새벽 2시에 술 먹고 전화하는 자유주의자 김지민...)

12. 군생활중 '이루었다' 라고 스스로 얘기할 만한 꺼리가 있다면  

뭐, 군대에 있으면서 자격증이나 토익점수나 전공공부에 매진하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식의 공부에 그리 적성이 맞지도 않고요. 군대에 악습과 폐단을 고쳤다거나 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별로 좋은 고참도 좋은 후임도 못되었거든요. 물론 맡은 일을 안 했다거나 같이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뭐 업무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고 해야겠지요) 2년동안이나 있으면서도 이 부대라는 곳에 전혀 정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그렇다고 '군생활하면서 책 200권을 읽자'라든지 하는 목표도 없었고요. 어떻게 보면 실패한 군생활, 나태한 군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루었다고 얘기할 만한 걸 굳이 하나 찾자면, 여자친구와의 인연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입니다.(비호감엔 염장으로 대응)



병장 노지훈

닮고 싶은 장점  예술가들의 예리한 관찰력 
인물평  그가 검을 휘두르면 나 따위는 부스러질 것 같습니다. 

13. 위 인물평과 같이 저는 당신이 어렵습니다. 저를 보고 글로써 한 번 웃어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저를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마도 15번 질문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부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게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지요. 만약 육이은씨나 김석윤씨가 팬티만 입고 복도를 활보하거나 밥 먹으면서 트림과 방귀를 양산해내고는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뽐내며 포만감의 미소를 짓는 분대 고참이었다면 그들의 글을 보고 그렇게 감동할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점수가 좀 깎이기는 했을 겁니다. 물론 덧글로 농담도 주고받았겠죠.(황민우 병장님은 어제 코딱지 판 손으로 닭튀김을 배식하시면서 저를 감동시키시더니(물론 이 감동은 위장의 감동입니다. ...밥 먹다 그거 보고 속 울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글로도 저를 감동시키시는군요. ...예,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먹어서 소화불량으로 속이 울렁거립니다. 정말 감동적이에요라든지) 물론 이것은 글로 여과되지 않은 실상을 체험하였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니 해답은 딱 하나뿐이지요. 정모에서 만나서, 제 면상을 보고 실망하시는 겁니다. 노래방에서 제가 노래부르는 행태를 보셔도 좋고요. 솔직히 지훈님의 인물평은 제게 맞지도 않고 부담스럽습니다. 닭살도 돋는 것 같고요.  

14.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짧게 글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럿일 수도 있고, 한 명일 수도 있겠죠.(씨익)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습니다.

아니, 그냥 짧게 쓰라고 하시기에. 핫핫.(...)

15. 14번 질문을 한 이유는, 당신이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표현하길 아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제 느낌이 틀렸나요 사실 제가 그러하기 때문에 따질 문제는 아니지만, 이유를 듣고 싶네요. 

사실 저도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일상 이야기도 하고, 넋두리도 하고, 웃긴 얘기도 하고(이래보여도 지인들에게 꽤 웃긴 녀석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물론 여기서야 워낙 센스가 뛰어난 분들이 많아서 별로 눈에 띄지는 않을 테지만요) 여하튼 편하게 지냅니다. 여기서는 일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은 셈인데, 실은 제가 이곳을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대 내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 전역인사에서 했던 말처럼 역할극에 불과하지요. 그렇다고 휴가 나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엔 이곳은 너무 열려있는 것 같고, 또 열심히 작업하다 들르신 분들 염장 지르는 것도 같아 좀 꺼려지기도 하고요. 요는, 책마을이라는 공간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엔 너무 열려있는 공간 같다는 생각입니다. 시인부락 같은 곳은 대부분 직접적 친교가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 공간 내에 제 몫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러기에는 제가 모르는 제 글의 수용자가 너무 많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이곳에서 제 사랑이야기를 늘어놓거나 개인적인 신변잡기를 늘어놓는다면, 뭐 재미있게 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읽히는 것이 '나'와 '무리'의 관계에서 '나'의 이야기가 아닌 '무리'에게 읽히는 많은 이야기 중 하나로 묻힐 뿐이라면 저는 그런 글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게 그건 무의미할 뿐더러 해서는 안될 일이니까요.(저의 소중한 경험은 저에겐 귀한 보석만큼 가치있는 것이고, 이기적이게도 그것이 남에게 하찮은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책마을에 올리는 글은 저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글만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역하고 몇 해가 지나 제 이름이 잊힌 때에 제 글이 인트라넷 어딘가 펌글로 돌아다니더라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상이야기는 그 사람이 잊힐 즈음엔 쉽게 잊힐 것이겠지만, 제 글은 제가 잊힌다 해도 얼마간은 남아서 인트라넷을 떠돌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해봅니다. 

이거 또 엄숙한 이야기만 해버렸군요. 



병장 박민수

닮고 싶은 ...  장점이라기 보단, 재능을 닮고 싶어요. 특히 무언가를 표현하는 능력. 

16. 음악을 참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저도 꽤나 좋아하는지라 관심이 안 갈수가 없네요. 혹시 공연도 많이 다니시나요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으실텐데. 전 이대시절 '빵'의 마지막 공연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페일슈, 운디드 플라이, 피들밤비, 잠, 속옷밴드가 함께했던 공연인데요. 눈물을 쏟을 뻔 했다는. 그 시절 빵의 'stairway to heaven'도 아련하네요. 흐. 동석님의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나는 공연, 한번 소개해 주세요. 

사실 공연을 다니고 싶었지만 많이 가지는 못했어요. 대학교 1학년이 거의 다 지나가고부터 폭넓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거든요. 많이 늦은 셈이죠.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음악들과 새로운 음악들을 듣는 것으로도 버거웠어요. 봇물 터지듯 엄청난 양의 음악을 들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죠. 마치 중학교 시절 방학동안 집과 비디오 대여점만 진자처럼 왕복하며 하루에 5편씩 영화를 뇌속에 쑤셔넣은 때와 비슷했다고 할까요. 그 중학교 시절 거의 영화관에 가지 못했던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언제 좋은 공연 있으면 저도 좀 데려가주세요. 흑흑.(주변에 공연 데려가줄 사람이 없어서 슬픕니다)

17. 또 음악 얘기네요. 일전에 민우님과 함께 밴드를 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어요. 어떤 악기를 다루시나요 그리고 가장 많이 연주했거나, 연주하기 좋아하는 곡이 있다면요. 

핫핫... 실망하실 것 같네요. 밴드를 한다고는 했지만 기타는 코드도 잡을 줄 모릅니다. 예전에 운지법 배우는 단계에서 때려쳤지요. 어차피 밴드에서는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할 것이고 보컬(왜 제가 보컬인지는 모르겠지만)이기 때문에 악기에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아요. 사실 제가 완전히 다룰 줄 아는 악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바이올린이나 플룻도 시작단계에서, 피아노도 바이엘만, 뭐 이런 식이었거든요. 지금이야 기타를 배울 마음을 먹고 제대로 하려고 하지만, 연주를 잘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밴드를 하기 위해서라는게 더 정확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 동석님의 '쉬운 낱말만으로 씌여진 좋은 글'에 다가가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아무래도 내공 부족이겠죠. 많이 배워야겠죠. 지금의 동석님의 글을 만나기까지 겪어온 자취들을 알고 싶어요. 무언가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다던지, ㅡ얼개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지만ㅡ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와 같은.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책이 재미있어서입니다. 모든 책이 다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전공책도 재미있어서 보는 거지 공부하려고 보는 건 아닙니다.(물론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그건 책을 본다기보다는 공부의 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어렵고 재미없다면 읽기 싫어집니다. 세상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단어들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별을 바라보면서, 고상하게 철학적 고찰을 하면서 걷는다고 발 밑의 진흙탕에 빠지지 않는 건 아니죠. 제가 읽은 책들 중에 여러분들이 절대 이해가 불가능할 몹쓸 서적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저는 송희석 병장이나 황민우 병장같은 괴물이 아니거든요. 뭐 제가 철학적 담론을 제시할 만큼 사고의 폭이 넓지도 않고 위대한 삶을 살아오지도 못했으니, 뻔한 삶을 산 제게서 나오는 것은 뻔한 얘기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일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제가 올리는 글들은 남들도 다 생각했을 법한 것을 풀어서 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담은 글을 올리지 않았던 건 다만 귀찮아서, 혹은 그 문제를 그 정도로 깊게 고민할 생각을 안 했던 것뿐이겠죠. 저는 그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일깨우는 글을 쓰는 것이고, 거기에 만족할 뿐입니다. 거창한 욕심을 버리고 제 사유의 결과를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렇게 쓸 수 있는 글에만 집중하다보니 비록 발전은 더디다고 해도 읽기 쉬운 글이 나올 수는 있는 것이겠지요. 뭐, 저는 작은 것에도 모든 게 담겨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별 욕심도 없고요.



병장 권기범

닮고 싶은 장점  인내심, 친절함, 단호함 

19. 르귄의 어둠의 왼손 머릿말을 보고 드는 생각. SF의 은유에도 여러 갈림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한 은유나(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이건아니잖아, 이건아니잖아) 어떤 정치적 의식이나 주의가 담겨 있는 풍자같은 것들. 동석님은 순수문학적인(몰정치적) SF와 뭔가 노리는 뜻이 있는 듯한 SF중에서 어떤 것을 더 좋아하세요 

정치적이지 않은 소설이 있을까요 정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소설이 있을까요 언어 자체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정치성을 휘발시킬 수는 없겠지요. 특히 SF에서는 현실의 외삽extrapolation이 강렬할수록 정치적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르귄의 소설들이죠. 익히 알려져있는 르귄의 주요 작품군인 어스시 시리즈와 헤인 시리즈는 설령 르귄 자신이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부인할지라도 다분히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소설들입니다. 헤인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은 각각 당시 미국 사회의 주요 쟁점이었던 '페미니즘'과 '공산주의-자본주의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고 '읽히죠'. 르귄이 『어둠의 왼손』을 두고 '이건 페미니즘 문학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해도 『어둠의 왼손』이 페미니즘에 끼친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정치성'이라는 화두를 놓고 볼 때, 중요한 것은 작가(공급자)의 의도라기보다는 독자(수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있으니까요. 그게 정치의 속성이기도 하고요. 예수가 교회의 권력화를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예상했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의 세계에서 자신의 사후까지 크리스트교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존재가 필요했다고 여겼기에 베드로를 반석으로(중간에 바울이 끼어들어버리기는 했지만) 교회를 세운 거겠죠. 만약 그가 교회라는 정치적 구심점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1세기 전 에세네Essene파의 '의의 스승Teacher of justice'처럼 이름조차 묻힌 채 사라졌을 겁니다. 어쨌든, 예수는 이후 교회라는 막강한 권력의 상징이 되었지요.
소위 순수문학이라고 부르는 작품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광장』을 이데올로기 소설로 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광장』은 탈이데올로기 소설이고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광장』이 이데올로기 소설로써 가지는 위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광장』에 대한 제 생각과 『광장』이 가진 정치-사회적 의미가 다르다고 하여 『광장』을 싫어할 생각은 없습니다. 텍스트 자체로써 『광장』은 위대한 작품이고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흔히들 SF를 미래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미래소설은 정치적인 색채를 띤 경우가 많았죠. 이는 오랜 옛날, 현재는 SF의 한 갈래로 포함된 장르인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소설이나 '과학적' 풍자소설들이 현 세태의 치부를 드러내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삽extrapolation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SF도 그런 정치적 의도를 가진 SF들이 많지요. 회사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는(예를 들면 동석 삼성) 극단적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의 미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회 부조리를 그린 『Jennifer Government』같은 소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그런 작품들도 좋은 평을 받고, 『어둠의 왼손』이나 『빼앗긴 자들』처럼 휴고상이나 네뷸러상을 수상하며 SF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문학 순수주의자가 아니므로 정치적 소설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냐.

시대가 지나고 그 문학작품이 다루는 정치적 알력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미래에서 보았을 때, 그 작품의 문학적 감동이 바래지지 않는다면, 미래의 독자에게까지 훌륭한 고전으로 읽힐 수 있다면 그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설로 쓴 이상 그 작품의 정치적 의도와는 별개로 소설로써의 작품성을 먼저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정치적 의도로 쓴 소설일지라도 문학적 작품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은 그 정치성이 희미해진 미래엔 작품이 발표된 당시만큼 작용하기 힘듭니다. 1984가 작품이 다룬 미래의 시기보다 훨씬 후인 지금에까지 읽히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문학적 작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이런 반문을 할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만약 문학적으로는 엉터리인 작품이 사회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변화를 일으켰을 때도 그 작품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소설이 문학적으로 엉터리인데 사회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널리 읽힐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정치적 함의를 은유적으로 내포한 '소설'이 널리 읽힌다면, 일단 그 '소설'이 기본적으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의 문학성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죠. 뭐, 극단적으로 '둘다 좋은 작품인데 한 작품은 문학성이 좀 더 좋고 다른 작품은 정치적으로 좀 더 훌륭하다면 둘 중 어떤 것을 고르겠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묻는다면 그때 그때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동물농장』과 『1984』중 더 뛰어난 소설을 고르라고 하면 망설여지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제게 정치적 SF와 정치적이지 않은 SF 중 무엇이 더 좋냐는 물음은 그런 미묘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앗, 결국 모르겠다는 말인데 쓸데없이 길게 써버렸네요. 허탈함을 느끼실 분들께, 죄송합니다. 제가 가끔 이래요. 그냥 모르겠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설명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제 풀에 지쳐 결국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죠. 핫핫(자랑이냐!)



병장 김희곤

닮고 싶은 장점  끈기. 왕성한 호기심에 반비례한 지속적인 관심이란.... 

동석씨는 저를 부럽다고 하셨지만(그 당찬 비호감 때문에) 저야말로 동석씨가 너무 부러운걸요. 

20. 저는 메이저한 음악만을 주로 들어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취향은 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왜냐면. 전 90년대 음악이 좋거든요. 똑같은 메이저라도 말이죠. 참고로 전 서태지, 이적, 신해철, 김광석, 유재하 등등을 좋아하고 거의 외국어로 가사가 된 노래를 듣지 못했어요. 이런 저에게 마이너의 세계로 입문하게 할 음반을 추천하신다면. 적어도 세개 이상이면 좋겠군요. 한 노래 말고 앨범으로 추천해 주세요. 

사실 희곤씨처럼 메이저 음악을 주로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Music Talk를 쓴 거예요. 제가 Music Talk에서 언급한 앨범들은 대중적이면서도 깊이있고 구하기 쉬운 앨범이죠. 어쨌든 구하기 힘든 절판 명반을 추천하여 희곤씨를 피곤하게 할 수야 없으니, 일단 시중에 구하기 쉬운 것들로 추천드릴게요. '서태지, 이적, 신해철, 김광석, 유재하'에서 공통점을 뽑아내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좋아하시는지는 짐작할 것 같네요. Music Talk에서 다룬 마이 언트 메리 3집이나 미선이1.5집도 괜찮고 자우림 3집이나 델리스파이스 4집, 조규찬 7집, W 2집 정도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구할 수 있는 앨범만 추천하려니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쉽네요. 제가 추천한 앨범들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앨범들일 거예요.

21. SF도 관심만 많지 막상 읽어본게 없군요. 그치만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굉장히 유명하다는 것은 어디서 주어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겠지만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논평을 해주신다면 

논평이라기보다는,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작가 아서 클라크의 문학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SF를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아서 클라크를 읽고 나서였죠. 『스페이스 오디세이』시리즈가 그의 중요한 작품군인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요.(사실 나머지 소설들은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이어지는 작품으로 『2010 오디세이 II』, 『2061 오디세이 III』등이 있고『3001 파이널 오디세이』가 마지막 작품입니다) 아서 클라크는 외계 지성과의 접촉을 여러 소설에 걸쳐 묘사해왔는데, 그의 대표작이자 비교적 초기작인 『유년기의 끝』은 외계 지성과 인류의 관계가 매우 가깝게 그려지는 반면 후기의 『라마와의 랑데부』같은 경우는 외계 지성과 인류가 거의 몰이해 단계에까지 이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같은 경우는 『라마와의 랑데부』보다 『유년기의 끝』에 더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외계 지성이 직접적으로 인류에 관여하는 『유년기의 끝』처럼 가까운 접촉은 아니지만 『라마와의 랑데부』처럼 무심히 지나쳐버리지도 않지요. 오히려 『유년기의 끝』보다 더 치밀하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부터 인류를 지켜보며 조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음모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참 물이 올랐을 때 쓴 책이라고 할까요.

22. 항상 글을 따뜻하게 쓰신다고 생각했는데 연애도 그렇게 하시나요(제가 요새 좀 많이 궁금해요 그쪽으로. 하핫) 

따뜻한 연애라는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여자친구와의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음, 제가 따뜻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여자친구와 2년 동안 서로 힘든 시기를 떨어져 지내면서 견뎌냈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물론 입대 전에는 나름대로 잘해주려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같이 여행을 다니거나 하지는 못해서 추억을 많이 남길 기회가 없었다는게 좀 아쉽네요. 그때의 저는, 어쩌면 따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장 고계영 

당신이 꼭 닮고 싶은 타인의 장점은 자신감. 
동석씨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우리들의 영원한 '잡답주의자' 

23. 제가 본 동석님은 자신을 보여주며 남들에게 다가가는듯한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석님에게 있어 '남'이란 무엇입니까 

타인이란, 영원히 알 수 없으나 영원히 알아가야 할 그 무엇. 타인은 비극이라지만 비극은 또 다른 희극이라는 말도 있지요. 삶은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부조리하지만, 결국은 걸어가는 것 자체가 나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오겠지요. 타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제가 보여주는 저의 모습은 수많은 가면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만든 것은 저 자신이지요. 가면을 하나 보여주면 타인의 가면도 하나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가면을 만든 그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게 '남'과 '나'라고 생각합니다. 

24. 동석님은 언제나 불꽃튀는 '논의'들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 하시는 것 같던데, 그러한 자세를 가지게 된 계기나 사상! 같은 것이 있으신지..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기는 했지만, 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황민우, 송희석, 허원영, 김대현 등과도 토론했었고, 책마을에서 논의가 있을 때는 내글내생각을 써서 제 생각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고요. 의도적으로 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입대 전에는 키보드 워리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걸요. 다만 덧글로 논의를 진행한다거나 논의의 전제와 자료 등의 기본 제반사항에 제한이 있거나 불명확한 경우, 중간에 그 논의에 끼어드는 것보다 다른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제가 보기에 논점이 명확하지 않다면 뛰어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논의는 오히려 논리보다 삶과 삶이 부딪혔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5. 동환님과 공동 질문.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저 단 한 단어로. 

사랑. 



상병 이훈재

닮고 싶은 장점 
 눈(시력)이 좋은 것, 노래 잘하는 것, 그림 잘 그리는 것 

동석 씨는 문화를 가지고 노는 자세가 올바른 사람. 

26. 저는 SF 독서경험이 일천해서 퇴마록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제 고교시절 짝꿍이 판타지랑 신무협 작가였기에 애정이 있어요. 놈의 이름은 나민채인데, 작품명은 하크, 반로환동 등. 혹시 (그럴리는 없겠지만) 읽어보셨다면 평가를 부탁해요. 출판이야 했지만 권당 200만원으로 1쇄 찍어서 대여점에만 있을지 싶어요. 아, 요점으로 돌아가서 '귀여니'건으로 인터넷 소설이 한바탕 요란을 떨기도 했는데, 이런 식의 출판문화 나아가 문학의 창조와 수용, 하이퍼텍스트 문학과 같은 제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한 친절한 견해가 궁금해요. 

나민채씨의 소설을 읽어본 적 있습니다. 하크를 읽어보았었고, 반로환동도 첫부분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당시 고교작가 중에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 중 한 명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판타지 소설이 한참 붐을 이루다가 잠시 잦아들 무렵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또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제 생각이지만 한국의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하이퍼텍스트라는 그릇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귀여니의 소설은 만화적인 하이틴 로맨스를 인터넷의 어법으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죠. 소설가가 출판을 전제로 온라인 연재를 했던 최초의 소설인 복거일씨의 『파란 달 아래』가 92년 작품이니 벌써 햇수로 15년이 흘렀지만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그 이후로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귀여니가 쓴 이모티콘 같은 것은 벌써 퇴마록이 귀여니보다 몇 년은 더 일찍 활용했지요) 하이퍼텍스트라는 그릇의 특징을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작가들이 '출판'을 염두에 두고 오프라인의 소설과 같은 작법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학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는 하이퍼텍스트라는 공간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양영순의 『1001』같은 작품은 온라인에서만 존재하는 스크롤을 잘 활용해서 그렸습니다. 『마린 블루스』같은 작품은 출판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각적 틀을 깨뜨렸지만, 『1001』의 경우는 아예 출판하기 곤란한, '인터넷에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법'으로 그린 경우입니다. 현재 한국의 하이퍼텍스트 문학 중에서 이 정도의 예라도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던가요 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는 거창한 담론을 두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하이퍼텍스트가 줄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기법이나 효과를 이용한 예가 없었다는 것은,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온라인에서 만들어지는 실시간성 문학'이라는 정도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7. 질문을 본 지금 딱 떠오르는 노래 한 곡, 이거 들어봐요 할 곡 하나가 있다면요 

가리온의 '무투'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르는 노래는 이 곡이네요. 
제가 한국 힙합 중에서 이 곡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요.
   


병장 엄보운 

인물평과 질문에 대한 답. 

동석씨 글을 읽다보면 정말이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혼납니다. 당신의 너무나도 정확하고 미려한 문장에, 나의 부스러기와도 같은 글들은 단번에 나가떨어지며 내 사고와 표현은 당신의 문장에 모질게 당한 기분이 들어요. 당신의 친절하고 쉬운 문장문장들이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무서웠답니다. 내가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삶에 대한 태도가 정갈해지고 눈빛이 좀 더 진지해졌다면, 그건 당신의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깐 당신은 친절한 만큼, 당신의 생각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그 능력만큼, 그만큼 나에겐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드문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란 게지요. 

동석씨의 생각은 티없는 가을 하늘처럼, 책마을 위로 언제까지나 펼쳐져있을 겝니다. 이렇게 쓰고나니 당신의 전역을 배웅하는 기분이 드네요. 


질문. 

28. 동석씨의 엄청난 독서편력은 책마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자신이 걸어온 독서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시기별로 묶어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손에 잡히는 모든 책을 무섭게 읽는 시기를 지나 자신만의 영역이 생기고 그것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는 일반 법칙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동석씨의 바른 독서법에 대한 경험을 듣고 싶네요. 동석님이라면 책마을에서 가장 바르게 책을 읽어오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저는 독서편식이 심합니다. 읽는 것도 소설책이 압도적이고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재미있는 책은 읽고 또 읽으면서 다시 되새김질하기 때문에 읽는 책의 양도 그리 많지 않고요. 일단 문학을 가지고 저의 독서법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가장 처음 꼽을 수 있는 변화는 어렸을 때 『호비트』를 읽은 뒤 겪은 것입니다. 『호비트』는 제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가 역사를 좋아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 본 책의 절반이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술이지요. 하지만 『호비트』는 우리가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를 이야기하는 책이었습니다. 마치 요즘 아이들이 『해리 포터』를 읽으며 겪는 충격처럼, 아니 제게는 더 커다란 충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때까지 제게 이야기란 신화와 역사 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경계선에 서서 이야기하는 책은 거의 보지 못했죠. 『호비트』는 제가 신화와 역사와 이야기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경험인데, 어떤 한 분야의 책이 반드시 그 분야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후로 다시 신화에 빠져들었는데,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나서 제가 골랐던 책이 유시주님의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습니다. 처음에 서점에서 그 책을 산 이유는 아마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제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죠. 초등학생인 제게 신화는 그저 '이야기'로써만 존재할 뿐 우리의 실제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신화가 은유로써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요. 트로이 목마와 김영삼의 삼당합당을 비교하고 프로메테우스와 독립운동을 엮는 글이란 신화와 역사의 대화뿐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호비트』와 마찬가지로 이 경험은 제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학과 그에 수반하는 비평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 다시 읽었던 『성경』이 있지요. 성경은 문학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시편과 아가의 문학성과 욥기와 전도서의 지혜는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재미있기만 한 중학생에게 욥기와 전도서가 이야기하는 생의 모습은 어떻게 비추어졌을까요. 읽은 시라고는 교과서에 실린 시가 전부였던 아이에게 시편과 아가의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고어체의 문장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순수한 문학적 충격에 있어 지금까지 『성경』을 뛰어넘는 작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게 최고의 책은 성경입니다.  

마지막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니체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을 거예요. 니체는 제게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신조차도요. 사실 고등학교 시절 생에 대해 냉소적이게 된 것도 니체의 영향을 받아서인데,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기는 했어도 니체는 어쨌든 결과적으로 좋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의심이 없었다면 근저에서 나오는 긍정도 없었을 테니까요.

29. 직접적으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동석님께서 작성해주신 책마을의 여러 글들은 '제가 느끼기에' 저의 부족한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주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좀 더 확실하게 동석님의 의도를 알아주길 바라시는 부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조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약, 꼭 그런 특별한 경우가 없었다면 동석님을 존경하는 한 사람인 제게, 아무 말이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독선적이야.' 이 말 한 마디는 지금의 저를 이끈 가장 커다란 원동력이었습니다. 내게 보여진, 내게 던져진 세상의 모습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세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죠. 흔히 해답은 질문 속에 있다고 합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글을 읽는 것에 앞서 먼저 글쓴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글쓴이의 심정을, 그리고 글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가는 대로 쓰되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쓰되 붓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참된 글쓰기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30.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아가는 도중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고 서로가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덕목은 무엇이 있을까요 동석씨가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이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저같은 사람이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저 자신이 관계맺는 것에 서툰 사람이니까요. 다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알지 못할,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감내하고 먼저 순수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보이는 자세입니다. 자신을 멋지게 꾸며내려 안간힘 쓰는 것이나, 내 얘기만 하느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나,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타인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타인은 그런 '알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려 하게 되지요. 
 

  
 
 
 
병장 황민우 (20060809 173024)

역시 동석이는 생각하는 부분이나 영향을 끼친 여러부분에서 나랑 굉장히 비슷하네.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소설도 톨킨 할아범의『호비트』인데, 동석이는 초딩때, 나는 대딩때.. (털썩...좌절중..)    
 
 
병장 송희석 (20060809 181921)

민우 걱정마시오. 아직까지 호비트를 못읽어본 나도 있다오.    
 
 
병장 김희곤 (20060809 185834)

동석씨 답변 잘 봤어요. 추천하신 음반은 자우림 3집 말고는 없더군요. (델리스파이스는 가물가물. 분명 있긴한데 아마 1집일래나) 빨리 만나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