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그러자 게렌의 기사 네스트로가 물었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위의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 예측 불가능성에 호소하여 자신의 대답을 정당화시키려한다. 이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논증을 통해 제시할 수 있다.. 


  [만약 철수라는 사람이 1300 이후의 자신의 미래를 모두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1300 이후의 자신의 행동, 주변 상황에 대한 완전한 예측 보고서를 가지고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13시 5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수를 마시게 되어있고, 그것이 코로 잘 못 넘어가 재채기를 하게 되어있다. 그 재채기가 교수의 안경에 튀어 C 학점을 받게 되어있다. 철수는 이제 이러한 미래를 알았으므로 그것을 바꿀 수 있다. 그는 목마름을 참고 음료수를 마시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재채기도 하지 않을 수 있고, 교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철수의 원래 예측은 틀렸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논증의 요점은 미래를 엄밀하게 알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바꾸면 애초의 예측은 틀린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미래를 엄밀하게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는 것이다. 

  자기 예측 불가능성이 정말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논의에는 예측 가능성 이 결정 가능성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우주가 완전히 결정론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면 (예측할 수 없다면) 결정론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의 무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논리적으로 자기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단, 그 사람에게 예측 내용을 알려주거나, 예측 보고서에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래서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의 미래를 예측했다고 해보자. 내가 충분히 꼼꼼했다면, 친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의 예측 보고서에 써있는 바로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예측한대로 웃고, 말하고, 짜증내고, 일어나고, 재채기를 하고,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모두 자유로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정확한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친구는 스스로가 자유로운지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그의 행동은 모두 계획되어있는 그대로이며, 그는 각본을 잘 이행하는 훌륭한 꼭두각시일지는 몰라도 결코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알 수도 있다, 나의 미래는 나에게 있어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되어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라고. 
  때문에 자유는 결코 무지일 수 없다. 우리는 자유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회피 할 수 없다. 세계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관장하는 뇌가 결정론적이라면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결정론적이라고 해도 그 내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된다는 논리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자유를 확인하기 위해선 인간의 뇌가 진정으로 결정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뇌의 작동방식에 양자역학이 어떤 식으로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야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은 비 결정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학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결정(론)적’ 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자. 
  결정론적인 체계의 대명사는 컴퓨터에서 쓰이는 알고리즘들이다. 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조건문들로 구성된다. 예컨데,

   if A, then B      
  
그런데 잘 보면 알겠지만, 조건문의 전건은 조건문의 후건에 대한 충분조건이다. 즉
‘if A, then B’  라는 조건문에서 A 는 B이기 위한 충분한 조건이다. B가 되기 위해서는 A가 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충분한 조건이 만족 되어야만 알고리즘이 돌아갈 수 있다. 만약 위와 같은 충분한 연결고리가 없다면, 알고리즘은 돌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면 

  if A, then B or C 

와 같은 조건문은, 별도의 조건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프로그램에서 쓰일 수 없다. A가 어떤 것의 충분조건인지 알려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만약 A 라면 과연 B인가 C인가 컴퓨터는 여기서 더 이상 계산할 수 없게 된다. 

  이상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결정론적 체계의 중요한 특징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자, 이제 뇌에서 양자역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참고로 양자역학 자체는 하나의 수학적 체계이고, 이것을 결정론적으로도, 비결정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비결정론적 해석이 대세이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에 따르겠다. ) 
아주 작은 입자들의 움직임이 비결정론적이라는 이야기는, 한 위치나 상태에서 그 다음 위치나 상태로 넘어가는 데에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전자의 위치가 1초 동안 (0, 0)에서  (2, 1) 로 변했다고 하자. 뉴턴 역학, 상대성 이론, 멕스웰의 전자기학등의 소위 ‘고전 물리학’ 에 따르면 전자의 위치가 바뀐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표준 해석에 따르면 충분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위치를 결정짓는 원리가 없다는 것이다. 전자가 (0, 0)에서 (2, 1)로 움직인 것에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전자는 꼭 (2, 1) 로 움직였을 필요도 없다. 그 위치는 여러 가능한 위치들 중에서 운 좋게도 선택되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를텐데 말이다“ 라고. 

그러나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즉,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의 어떤 현상의 예상치와, 그러한 이유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의 예상결과가 서로 다른데, 실험적으로 후자가 옳다는 것이 1982년 아스페Aspect라는 인간에 의해 검증되었다. 철학적인 명제가 물리학 실험실 안에서 결판 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뇌의 신경세포 안에서도 위와 같이 충분한 이유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말아야할 까닭은 없다. 예를 들어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a가 다른 세포 b, c 와 연결되어있다고 하자. a 에 약한 자극이 입력되면 a 는 b 로 신호를 보낸다. 어떤 임계치 이상의 강한 신호가 입력되면 c 로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a가 b든 c든 다른 세포로 신호를 보내려면 일단 a 내부의 전압이 낮아지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a 세포 밖에서 a 안으로 충분한 양이온이 공급되어야한다. 그런데 이 양이온 입자들의 크기는 양자역학적 효과를 어느 정도 실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작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양이온들의 위치 변화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지 않으며 여러 위치가 중첩된 상태로 진행한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에 의해 특정한 위치로 (해당 위치의 확률진폭을 제곱한 크기의 확률로) 무너진다. 때문에 a 에 같은 크기의 자극이 입력되더라도, 양이온들의 양자역학적 행동 때문에 c 로 신호를 보낼만큼 충분한 양이온이 공급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해서 b 로 신호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경체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뇌는 비결정론적인 시스템이 되는 것이며, 인간의 사고나 감정은 결정될 수 없고(예측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실제로 우리의 신경체계가 양자효과를 반영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거나 그렇지 못할 뿐이며, 단지 '무지'라는 인식론적 트릭을 딛고 서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8-01 1320) 

  
 
 
 
병장 조주현 (20060801 111307)

이거 무지무지 좋은데요. 
자유라, 자유라. 
가지로    
 
 
병장 조주현 (20060801 111357)

끝부분이 약간 수정되었군요. 
이것도 좋군요.    
 
 
병장 이훈재 (20060801 114410)

반가워요. 책마을에 과학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 같아 즐거워요. 사실 저는 문과출신이라 자연과학에 젬병이거든요. 저는 직선운동만 알고 원운동은 모릅니다. 포물선 운동 문제를 푸는 친구가 어찌나 대단해보였는지 몰라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정말 관심 초집중의 대상이지요. fMRI 사진 수준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전방대상고랑이라는 부위가 자유의지랑 관련이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 부위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도권과 관심을 잃는다고 하네요. 수동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생각하고 반응하는데는 지장이 없는 것 같다는데.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적인 방법으로 논리적 증명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극미시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약간 덩치를 키워 조직 차원에서 바로보면 무언가 경향성이나 규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병장 이훈재 (20060801 114544)

가지로 가지로    
 
 
병장 고계영 (20060801 114935)

먼저.. '자유'에 대한 여러방면의 접근. 특히 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점에 대해서.. 
청하님은 뭐하시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잘 읽었습니다. 보론적인 측면에서. 

[양이온들의 양자역학적 행동 때문에 c 로 신호를 보낼만큼 충분한 양이온이 공급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해서 b 로 신호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정도 해부학적인 지식이 있으신 것 같으므로. 
먼저 신경세포에서 신경세포의 '흥분'은 [일단 a 내부의 전압이 낮아지는 과정을 거쳐야한다]은 맞습니다. 단일 신경세포의 자극의 전달은 세포내액과 세포외액의 양이온 N+-K+ pump과정을 통해서 신경세포가 흥분하게 되고. 이러한 흥분은 세포체에서 신경세포 말단의 축삭말단으로 이동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일 신경섬유에서는 승일님의 말씀처럼. 양자역학적에 의한 양이온의 공급 문제를 드실수도 있겠지만. 신경의 연점-시냅스를 통한 이동에는 '양이온'만으로 이동이 불가능 라다는것입니다. 축삭종말에서 다른 신경섬유로의 이동과정은 전기적인 것이 아닌. 축삭종말에 있는 시냅스 소포속에 있는 신경전달 물질에 의해서 이루어 집니다. 
즉, 단일 신경세포에의 경우 양자역학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지만. 우리가 느끼고 움직이는 과정에는. 양이온에 의한 것만으로 '흥분'이 '전달'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간단히 이것으로 비결정론적인 시스템이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며. 승일님의 글에 보탬이 되고자 쓴 글임을 밝힙니다. 나중에 따로 글을 써야겠어요. 하하하. 
밥먹지 전에 빨리쓰느라.. 흠. 이상하긴 하지만..    
 
 
상병 김청하 (20060801 115327)

앗, 내가 쓰려던 주제인데! 저랑 비슷한 주제를 생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예측가능성과 결정가능성의 분리라던가 일반적으로 예측불가능성을 이유로 자유를 정립()시킨다는 점에서는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만, 저는 근본적으로 두뇌가 - 인간이 - 예측불가능한 결정론적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미래 또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지요. 

또한 양자역학적 확률파동붕괴가 과연 인간의 자유를 뜻할까요 그 점에 대해서도 저는 의문이 생깁니다. 자세한건, 후에 정리해서 글을 써보도록 하지요.   
 
 
병장 고계영 (20060801 120157)

제가가지로! 보내버리죠.. 흠.    
 
 
상병 이승일 (20060801 121942)

훈재  자유의지의 느낌과 자유 그자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는 매우 심리학적인 개념인데 반해 제가 이글에서 이야기한 자유는 결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사이에 어떤 논리적 관계가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계영 양이온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개입되어있는 것 만으로도 양자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Na+ 이온 위치의 양자중첩은 그대로 신경세포의 흥분과 억제의 양자중첩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또한 신경의 전달이 b로 가는 상태와 c 로 가는 상태의 중첩으로 이어집니다. 즉 a,b,c 의 상태는 
u 양이온이 a 안으로 어떤 양 이하로 유입됨활동 전위가 b 세포와 연결된 축삭끝으로 이동함b세포로 글루타메이트 분비 + i양이온이 a 안으로 어떤 양 이상 유입됨활동전위가 c세포와 연결된 축삭말단으로 이동함c세포로 글루타메이트 분비 
가 됩니다. u 와 i 는 각각의 상태에 대한 확률진폭이구요. 때문에 그 이후에 어떤 인과적 
과정이 있는가와 상관 없이 최초의 양자중첩은 어느 한쪽으로 무너지기 직전까지 계속 유지됩니다. 그리고 .. 제가 말한 방식 이외에도 양자 효과가 개입될 수 있는 여지는 신경계 안에서 아주 많지 않을까요    
 
 
상병 이승일 (20060801 122412)

청하  저도 한동안 두뇌가 '예측불가능한 결정론적 기계' 라고 굳게 믿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그 믿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 매우 기대되네요! 그리고 확실히 양자역학적 비결정성이 곧바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론)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 그러나 단지 비결정성 이외에도 의식의 중요한 측면들을 설명해줄 수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겠스브니다    
 
 
병장 김동석 (20060801 123847)

멋지네요. 물리학은 영 지식이 없어서 코펜하겐 해석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방향 양자 실험이나 아스페의 실험이나 하는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기만 했는데, 이 글은 아주 명쾌하게 정리가 되어있네요. 

어쨌든 하이젠베르크 이후로 라플라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싸움은 아직도 이어지는 듯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상병 김현동 (20060801 124707)

제목은 굉장히 인문학적인데. 배신이군요.    
 
 
병장 고계영 (20060801 125537)

승일  하하하. 그렇죠. 신경계 자체가 전기적 흥분 덩어리니 뭐. 
댓글에서 말했지만. 예전에 제가 쓴 글도 있고 해서 '보론'의 의미로 쓴 것이지. 승일님의 말씀에 부정하기위한 글은 아님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승일님의 글은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담백한 글이기 때문이죠.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신경계라는 것을 가정집에 깔려 있는 '전선의 배합'정도로 생각할 수 도 있기 때문에. '신경계는 복잡하답니다~''전기신호라는게 신경세포 하나로 전달되는 게 아니랍니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흥분됩니다. 승일님 같은 분이 책마을에 나타나셔서. 저의 미천한 지식이 공개되겠습니다. 하하하. 
더 자세한 글을 쓰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깁니다. 

청하 기대하고 있으니 빨리. 승일님 같은 동료!도 생기셨잖아요. 

++ 언제나 '자유'하면 사람들마다 생각이 틀린 이유는. 자유라는 의미가 서로 조금씩 다른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승일님이 '예측불가능성'으로 글을 풀어나간 것과 같이 말이죠. 청하님은 어떻게 풀어 나가실까...    
 
 
상병 이승일 (20060801 125933)

현동  저도 제 자신이 인문학적인 감수성이 부족한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배신자가 되긴 싫은데 ..    
 
 
상병 김청하 (20060801 191936)

에이 뭐 굳이 이과 문과 나눌 필요 있나요.   
 
 
병장 주영준 (20060801 195554)

내가 실은 이과 출신이었는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하루종일 놀다 지금에서야 읽은게 억울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