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삽질의 왕이다 
 
 
 
 


137. 나는 삽질의 왕이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하다. 글을 쓸 적에는 결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여건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니 조낸 빨리 쓰고 자는 거다.

근래에 나는 태풍과 호우로 인한 전국가적 비상 시국을 맞아 연일 복구 작업을 위해 전투적으로 투신한 바 마침내,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삽질 하나만큼은 그 영묘한 이理를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작업 B조에서 걸출한 삽의 명인이 한명 탄생하게 되었고 간부님께서는 이에 '작업반장'이라는 칭호를 내려 명인의 탄생을 기렸다.

나의 생애가 늘 칭찬만 받으며 이루어졌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좋은 소리 한 마디 못들어봤을 정도로 지리멸렬하진 않았다. 하지만, 삽질을 잘 한다는 칭찬은 정말 처음이었다. 나는 마치 태어나 처음 듣는 칭찬인 양 가슴이 뛰었다.

사실 칭찬이라고 해서 다 기분 좋은 건 아니다. 가령, 너는 머리가 좋으니 하면 잘 할 거다라는 유의 칭찬은 결코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런 소리라면 개, 뿔이다. 대한민국에 자식으로 태어난 이들 치고 머리 나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느 집에서나 자기집 자식은 다 영재, 수재이며 노력만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 즉, 능력이 주어졌으니 성취하지 못함은 자신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 주어진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날개인가 족쇄인가. 그 날개인지 족쇄인지 모를 무엇 덕에 정말로 주변의 어느 누군가가 요구하는 어떤 지경에 이른다면, 그것은 성취인가 파멸인가. 성취와 파멸의 표지판이 같은 곳을 향하는 이 세계를 나는 신뢰해야 하는가, 부정해야 하는가. 지금 나의 행동은 노력인가 부역인가. 내 삶은 나의 것인가.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정말로 내 삶을 보다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을지도 모를 많은 미끼들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시대는 TV처럼 단방향인 법이어서, 오직 세계가 내게 무언가를 제시할 뿐이다. 거부한다는 자체는 성공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 빈 자리를 새로운 것들로 채우기는 쉽지 않다. 세계는 공고하고 창조의 여백을 찾는 과정은 지난하다.

그래서, 시큰둥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삶 역시 마찬가지로 시큰둥하다. 그 시큰둥한 마음을 세계의 구태를 거부하고자 하는 열정이라 스스로 자위하려 해도, 환희는 결코 말장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삶은 여전히 공허하다. 그런 그들이, 즉 말로는 의기충천하고 삶으로는 지리멸렬한 이들이 가장 손쉽다는 점에서 함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책을 받아들이며 탄생하게 되는 인간 유형이 바로 룸펜이다.

룸펜은 세계의 균열 지점에 서있는 사람들이고 바로 그것이 그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존립 근거가 된다. 하지만 세계의 입장에서, 룸펜은 지극히 안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기력하고 정박적이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세계의 균열을 채우는 아교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차라리 깡패나 폭주족이었다면, 제법 이 세계도 한번쯤 두려워할 법 한데. 세계의 균열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 룸펜이 되는 일은, 스스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계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때문에 여기서 룸펜의 신경증이 시작된다. 룸펜의 정체성은 세계를 거부한다는 점에 있고, 하지만 그 이후의 뚜렷한 대책이 없기에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자신의 정체성에 위협 요소가 되므로, 룸펜은 더욱 세계를 거부하면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지만 이는 결국 더 큰 무기력감을 낳는 악순환으로 연결될 뿐이다. 그런 룸펜의 악순환은 논리적으로야 무한히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은 한계를 가진 동물이라,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실성하거나 죽음을 택하게 되는 종착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은 거짓말이 틀림없다. 세상은 엄연히 물리적인 공간이고 세상의 변화라는 것은 다분히 물리적인 변화를 말한다. 펜이 변화를 모색하는 한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물리적인 힘을 갖지는 못한다. 펜을 든 사람이 굳이 이 세계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는 어느 순간에 그런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이제 펜 대신 삽을 들었다. 따분한 사무실 생활에 대한 환멸과 대명천지 아래서의 육감적인 삽질에 대한 동경을 원동력으로 나는 실로 오랜만에 뭔가 한 가지 일에 몰입했고, 낯선 기분도 잠시 요령을 익히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정말 신들린 듯이 삽질을 했다. 흙은, 세계는 나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나는 나의 팔뚝과 어깨로 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어제 쓰고 다시 낀 장갑의 축축함과 뭣 같은 냄새, 흙범벅이 된 전투화와 몇 개의 담배꽁초가 든 호주머니, 그리고 별로 차갑지 않으며 겉이 지저분한 패트병 음료수를 나는 구석구석 사랑했다. 세계는 숨이 차 오르는 대로 육감적이었고, 그것은 충분히 하나의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으시시한 관념의 환영들만이 부유하던 종잇장의 세계를 벗어나,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이야말로 내 삶이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삶의 체험이란 늘 감동적이다. 삽질은 내게 하나의 구원이었다.

나는 이제 부대 작업의 최선봉에 서서 집에 가는 그날까지 삽으로써 내 삶을 구하고 이 세계를 구할 것이다. 삽이 나를 그렇게 이끌 것이다. 자네도, 함께 하겠나.

세계의 룸펜들이여, 삽질하라!



2006. 7. 25. 火, 육군 모 부대 작업반장 광삽의 병장 김강록

 

  
 
 
 
병장 주영준 (20060727 090520)

김강록이 삽질명인이라니. 
하긴. 나 일병때 곡괭이질 하던 시절에 나도 칭찬 딱 한번 받았었는데. 아마 군에서 받은 유일한 칭찬. 
- 
'오. 영준이 사람 좀 묻어봤나보네'    
 
 
 병장 김동환 (20060727 091112)

이름이랑 잘어울려요.    
 
 
상병 김민성 (20060727 091329)

[신간]삽질의 시대(원제밀리터리의 숲) - 무라카미 강록키 저- 39,900원 절찬 판매 중    
 
 
상병 조주현 (20060727 091408)

굉장합니다. 강록씨의 삽질이 여기서도 느껴질만큼 역동적인 글이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묘한 뉘앙슨데.. 
강록씨 스타일의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병장 이영기 (20060727 120353)

사실 본인도 낫질, 톱질로 칭찬을 좀 받아봤습니다. 아직도 전지가위는 제 것입니다.    
 
 
병장 박원홍 (20060727 121557)

육체적, 정신적으로 노력을 쏟는 노동의 신성함이야 이루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헌데 온몸이 다 쑤시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어나다'라는 표현이 어색합니다. '기어다니다'라는 표현에 익숙해진 최근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727 124614)

민성 39,900원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없어요. 절찬 판매가 될수없는 가격. 
39,650원 정도면 '뭔가 구린 내막이 있구나'정도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죠.(응)    
 
 
상병 김민성 (20060727 143554)

동환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산뜻한 가격 삼만구천구백원은 식상한데. 
인터넷서점 할일이나 적립금을 통하면 삼만구천육백오십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마케팅 조언 감사합니다.    
 
 
병장 박형주 (20060727 181215)

아니 이건 날씨의 영향 파트 투가 아닙니까. 하나 더 나와줘야 바란스가 맞을듯한데.    
 
 
병장 고계영 (20060727 214421)

형주  예. 이렇게 계속 압박을 넣어야 합니다앗! 
제목을 보는 순간 예전에 어느 글 댓글에서 이야기 되었던.. '반지의 제왕'패러디가 생각나는군요. 
'삽질의 제왕'이라..    
 
 
하사 윤석호 (20060728 031538)

계영 나는 타이타닉이 생각났어요.(크) 

그나저나 오늘은 목동의 김프로가 아니군요. 그만큼 삽질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다는거 겠죠. 하지만 형이 좋아하는 것을 나마저 좋아할수는 없군요. 그래도 난 삽질이 싫어요.    
 
 
상병 조형규 (20060728 104159)

삽질의 왕이란 표현은 군생활의 많은 시간을 삽질과 함께 보내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일텐데요. 삽질따위, 잘해봐야 칭찬은 잠깐이고 부려먹는 시간만 많아지는 게지요. 킁. 

그러나 역시, 룸펜들은 삽을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병장 김강록 (20060728 115330)

'삽질의 제왕'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따온 이러한 용어는 '절대자' '권력자'와 같은 유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는 제가 의도하는 바와 그다지 부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말하는 '삽질의 왕'은 지난날 우리의 삶을 풍미했던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 식의 작명과 맥을 같이 합니다.    
 
 
병장 강승민 (20060728 131438)

아,잘읽었어요. 무슨 꼼꼼하게 정리된 노트필기 같애(웃음)    
 
 
하사 윤석호 (20060728 192152)

외화된 권력이 아닌 내재된 권력이군요. 개인의 타이틀은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을가지고 있죠. 제대로된 타이틀만 얻는다면 개인의 능력치가 올라가는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이 시스템은 마비노기에서 특화되어 있는 시스템이기도 해요.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니 '자아'라는 시스템에 스팀팩을 먹인것과 같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도 권력의 일종이에요. 나라는 시스템에 가하는 자아의 권력 행사. 

그나저나 내일은 나올수 있어요 아님 19일날 나오나    
 
 
병장 김강록 (20060728 193906)

석호  19일 뵙겠습니다.    
 
 
병장 엄보운 (20060729 181438)

맙소사. 

'... 그리하여 마침내, ... 나는 이제 펜 대신 삽을 들었다. ...' 이 부분에서 카타르시스. 쫘르륵. 사랑하오 강록씨.    
 
 
병장 김강록 (20060730 131356)

보운씨 요새 저만 보면 너무 칭찬해주신다. 저 좋아하죠 ('백만장자의 첫사랑' 이연희 버전)    
 
 
병장 고계영 (20060730 194751)

그럴껄요. 사랑한다는데. 강록 ..Heart.. 보운 그렇죠    
 
 
상병 이훈재 (20060730 213726)

그리스인 조르바 같애요.    
 
 
병장 엄보운 (20060731 083650)

강록씨의 요즘은 정말 군더더기가 없어요. 당신의 글의 익숙해졌기에 그렇다기 보다는, 당신이 이제 막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숱한 여정들이 강록씨의 어제에 자리잡고 있겠지만, 우리의 공통된 상황, 즉 전우의 시각에서 관찰해보자면. 그 시작을 기다리는 한 사람으로서 요즘의 강록씨 글은 정말이지 좋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깐, 요- 피스! 김병장 나이스 샷.    
 
 
병장 주영준 (20060731 084526)

김강록 당신을 후기 강록주의자로 임명합니다.    
 
 
병장 엄보운 (20060731 094433)

병장 주영준 적절한 표현이오. 끄덕 끄덕.    
 
 
병장 김강록 (20060731 104321)

노파심에 한 마디만 거들자면, 저는 결코 혼자서 별천지를 살아가는 외계인이 아니라 여러분과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걸 겪으며 생활하는 한 명의 국군 장병입니다. 저는 예전에도 다른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한 명의 이등병이었고, 일병이었고 상병이었으며 지금은 말년 병장입니다. 이 글 역시 앞으로의 새로운 생활에 들떠있는 전형적인 말년 병장이 쓴, 때 되면 당연히 나올 법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소박한 한 편의 글일 뿐입니다.    
 
 
 병장 박진우 (20060731 144845)

저는 
'그라인더질의 명인' 이라던가, 
'비상시 당직사관을 대신할 함교 전화수' 라던가, 
'부사관보다 함포 사수의 역할을 더 잘아는 장전수'라던가, 
'주포의 알고리즘을 군생활 30년한 원사만큼이나 알고있는 유능한 병'이라던가, 
'30미리 함포 분해결합의 장인'이라는 소리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기에 
병장 김강록이 부럽기만 합니다. (라는건 진짜일까, 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