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안전불감증 
 
 
 
 
생사의 강변에서 받은 선천성 안전불감증 말기 판정

소식들은 대중매체를 타고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그 중에서도 사건사고소식은 너무 많아서 매체의 목적과 이슈에 부합하는 몇 가지만 추려서 전해집니다. 허나, 전에 비해 역치가 높아진 시청자들은 별다른 감흥을 못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무덤덤했던 어제와 같은 오늘도, 교통사고로 몇 명이 죽었을 테고 화재로 몇 명, 익사 몇 명에 감전사 몇 명, 의문사에 살인과 자살 그리고 실종으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운구차가 몇 대 도로를 지나갔을 거고, 화장터에 뼛가루가 날리고, 얼마간의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 리터의 눈물도 뒤따라 흘렀을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쉽게 사(死)합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조폭의 폭력과 불의의 사고로 친구가 죽고, 전염병처럼 도는 불치병에 여주인공은 끝내 일어나지 못합니다. 영화에서는 대형사고로 수많은 이가 숨지는가하면, 을씨년스러운 음악이 반복될 때마다 초자연적인 무엇인가에 의해 한명씩, 산장에서 제이슨은 대학생을 유린하며, Dr. 한니발 렉터는 저녁으로 친구를 먹었습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실감납니다. 수해로 오빠를 잃은 아주머니는 토사더미 위에서 발 밑 어딘가에 묻혀있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해 발을 구르며 장마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불치병은 더 이상 이슈거리가 아닐 뿐, 많은 이들이 각종 암과 이름 모를 불치병으로 명을 달리합니다. 비오는 날, 버려진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양성하는 이유는 조직 간의 다툼으로 사람 몸에 칼을 심었기 때문이고, 대자보에 얼굴을 판 흉악범들을 숨어 다니며 새로운 희생자를 찾습니다. 그렇게 생기는 피해자 가족들이 흘리는 피눈물은 결국 피만 남아 진득하게 말라갑니다. 행여, 모두가 울음을 그쳐 스틱스 강이 마른다면, 그리하여 강을 건넜던 이들이 온기를 띄고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리될 수 없기에 생사의 강변에선 망자의 뼛가루와 산자의 눈물어린 탄식만 날립니다.


사회발전과 더불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사건사고들이 도리어 늘자, 매체는 ‘안전불감증’을 들어 설명하려고 합니다. 수해는 당국의 안전불감증 때문에 피해가 더 커진 것이고, 고시원 화재도 그것 때문에 피해가 커졌습니다. 천재와 인재에 걸쳐 두루 적용되는 안전불감증은 이제 살인자의 습격에 당한 불의의 피해자에게까지 ‘살인자를 왜 대비하지 못했나’ 는 식의 맥 빠지는 물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건사고와 안전불감증은 딱지의 양면처럼 뒤집어보면 나오는 그런 종류로 알게 모르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고에 한 몫 함은 인정합니다만, 떠들어대는 의도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소를 잃었다면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할 텐데, 안전불감증은 마치 책임전가ㅡ의식 혹은 무의식간에 부정적 이미지를 포함한 무형의 불이익ㅡ의 구실이며, 그 개념손실 정도에 따라 해당기관이 부담할 피해보상액을 책정하는 하나의 주요한 잣대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90년대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매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 대형 참사들의 주요 발생 원인에 안전불감증이 자리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를 빈발하는 자잘한 사고에까지 들이대면서 이제는 개인에게까지 안전불감증 부재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작 피해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사고책임여부가 중심에 자리하여 관련자들은 안전불감증의 잣대로 희생자들의 시신값을 저울질하니, 희생자 명단에 사람은 보이질 않습니다.

개인에게 안전불감증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유형이든 목숨의 위협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면 이후에는 그에 대해 충분히 대비를 합니다만, 어느 정도 지나면 상당부분 망각하고 최소한의 대비만 합니다. 하물며, 겪지 못한 위협은 멀게만 느끼기 때문에 대비를 안 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대다수의 인간은 사고와 위험에 무방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잠재적 위험을 신경 쓴다면 그러게 해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생활을 유지할 수 없기에 역시 또 다른 의미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Destination 2에 나오는 전편 생존자를 들고 싶군요) 개인단위의 불감증은 생리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사회는 이를 더 심화시키는데 일조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태어났기에 살아가야 하며, 그를 위해 신경써야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조율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경제생활에도 열중해야 하고 자신을 위해 취미생활도 즐겨야하는 등, 복잡한 일에 파묻혀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 길거리를 뛰어가는 이들은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지만, 그 생명의 유리잔은 어디선가 날라드는 돌에 맞고 깨질 것만 같아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생명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혹자는 사회는 개인을 보호하는데 더 좋은 시스템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이상론에 찬 이야기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죽은 희생자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낫겠지만, 언제 그렇게 변할지는 가늠하지 못 하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여전히, 그리고 유행처럼 번지는 기절놀이와 시체놀이 그리고 컴퓨터 게임이 내재한 생명경시의 작은 태동은 약 10년, 가깝게 5년 후에 지금과는 또 다른 사회적 분위기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겨냥한 상품들의 좋은 타겟으로 쓰입니다. 기우와 같은 두려움을 노려 사회는 죽음을 전제한 다양한 상품을 내놓습니다. 보험도, 건강관리도, 호신술도, SOS콜도 모두 그러합니다. 물론, 경호회사에서 의뢰인의 생명을 지켜주고 예기치 못한 사고에 보험금이 도움이 되겠지만, 정말 필요할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얼마 전 납치된 여대생이 SOS서비스로 도움을 구했지만, 경찰이 장난처럼 받아들인 덕분에 살 수 있었음에도 살해된 체 발견된 사건을 미루어 보아, 목숨이 걸린 일이란 그 막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걸 보여주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면, 주변의 도움은 꽤나 기대하기 힘든 사회인 것입니다.

안전 불감증은 오히려 집단으로 뭉쳤을 때 제어가 쉽습니다. 원초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진 군중들에게서 안전에 대한 각성은 이끌어내기 쉬우며, 일파만파의 군중심리를 잘 이용하면 경각심을 넓게 불러일으키기 용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되는 효과가 상응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집단의 장과 대변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만 과연 잘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가정교육이 잘 된 탓인지는 몰라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행인을 흉기로 찌르고 도망한 자를 수많은 시민들이 뒤를 i아 잡은 종류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 외국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기에 단정적으로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말입니다.)


생사의 문제란 무겁기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 대책도 천차만별입니다. 힘든 경제여건 속에서도 방범호신산업의 꾸준한 성장은, 사회가 무서워지고 있으며 서로에 대해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세태를 반영합니다. 안타깝지만, 그러합니다.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날로 위험해지는 사회 안에서 편집적으로 위험에 신경쓰고 살 수는 없지만, 모두가 최소한의 대비는 하고 살았으면 합니다. 명은 신에게 달린 거라지만, 생은 각자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생은 혼자 살아가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의 거미줄에 지워진 각자의 생의 무게가 자연스레 스러질 때까지, 나와 내 주변, 그리고 모두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욕심 부리자면, 항상 대비해야하는 서글픈 개인으로서가 아닌, 믿음에 바탕한 안전한 사회 안에서 말입니다. 

  
 
 
 
상병 조주현 (20060725 141556)

사합니다는 표현은 주욱습니다가 등록이 안돼서 그만    
 
 
병장 주영준 (20060725 142006)

역시 보안관. 그럴땐 '뒈진다'로 대동단결. 
이런 말씀 드리면 좀 미안한 것 같기도 한데, 주현씨 요즘 잘 달리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왠지 이렇게 말하면, 너 옛날엔 안그랬는데 요즘 잘하네. 이런 투로 들릴 것 같아서 그만)    
 
 
상병 허익준 (20060725 142709)

안전 불감증은 오히려 집단으로 뭉쳤을 때 제어가 쉽습니다 - 

우리는 이 예를 911사태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더 이상 파고들어갔다가는 난리가 날테니)    
 
 
상병 조주현 (20060725 164613)

영준씨한테서 꼭 그런 칭찬 듣고 싶었던거 알죠 
격려 감사합니다. 

익준씨, 위험위험    
 
 
상병 김청하 (20060726 120102)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적인 글입니다. 잘 봤습니다.   
 
 
병장 고계영 (20060726 120919)

안전불감증은. 개인이 죽음을 '망각'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글입니다~ 달리세요. 계속 쭈-욱.    
 
 
병장 손동철 (20060727 05141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녁을 앞두고 얼마 전 시멘트 위에서 축구하다가 넘어져 뇌진탕으로 죽을 뻔한 경험이 있는 저에게 이 글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덧붙여 개인의 문제로 발생하는 대다수의 안전사고는 생각하고 실천하는 나태함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가 아니라 만약이라고 조건을 바꿔 생각했다면 현실이 보이고 대처를 하게 될 텐데 말이죠.    
 
 
병장 엄보운 (20060729 180929)

요즘 주현씨. 정말 멋져요. 전에도 멋졌지만 말이에요.    
 
 
 병장 박진우 (20060731 144423)

어허. 이거 당신때문에 '이슈화되지 않는 죽음'이라던 나의 칼럼은 또 다시 저 나중을 기약해야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