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영향 
 
 
 
 
136. 날씨의 영향 


삶의 문제는 그것이 지겹다는 데 있다. 우리는 답을 이미 알고 있지만 오히려 답을 너무나 빨리 찾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답으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란 단선적이고 구태의연해서 불필요한 과정을 건너뛸 수가 없다. 장단을 맞춰주어야 하고, 아양을 떨어야 하고, 그래서 뒤에선 하품이 나온다. 지겨운 내 인생.

어제는 일기장을 펼쳤지만 잘 되지 않았다. 대개 이런 경우 내가 하는 고민은 똑같다.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멍청이가 아닐지라도, 나는 그 얘기를 그저 덮어두어도 잘 살 수 있다. 특정한 동기나 동인이 곧 반드시 특정한 행위에 성공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 관계는 다분히 자의적이고, 그 자의성에 비극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삶에 보다 충실하는 행위일까.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나는 이 문제를 그저 덮어두어도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손을 놓아버린다. 이런 식의 결론은 여지껏 나를 열심히 쫓아오던 이 세계를 졸지에 마치 닭 쫓던 개 꼴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충분히 악당 같고 따라서 짜릿하다. 하지만 어떤 냉소도 그 이면으로 얼마간의 자학을 품고 있다면, 나는 매번 약간의 향락을 선사하는 미봉책으로 내 인생을 좀먹어 들어가는 셈이다. 결국 두 발로 물 위를 달리는 것처럼 어떤 몸부림도 진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의 참된 특이성은 언제나 그것의 몰락에 있고 단지 빈 공백을 견딜 수 없다는 미적 취향에 의해 맹목이 텅빈 인생을 채운다. 게다가 나는 또 이렇게 사뭇 진지한 척 하나마나한 말장난으로 스스로의 삶의 무게를 모독하고, 또 그걸 알아챈다. 재미없게, 무얼 해도 지겨운 내 인생.

날씨 탓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결론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날씨 탓이다─이는 완벽한 핑계이므로, 나는 어떠한 혐의로부터도 도망칠 수가 있다. 하지만, 날씨 탓인 건 사실이다. 자연이 대단해서라기보단 인간이 대단찮기에, 어차피 이성도 논리도 그날그날 기분에 달린 일이다. 그리고 기분은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실로 명백한 사실이었다. 정적 속에서 무기력했던 나는 문 밖에서 맞이한 빗소리에 해방감을 느꼈다. 빗소리는 따분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오래전에 필시 한번은 보았을 '비'를 주제로 한 뽀뽀뽀, 즉 TV는 사실인 듯한 기분이 들었고 세계는 곧 안정감을 찾았다. 그리고 싹트는 모종의 낭만─하지만 그것도 여건에 의해 조성되는 결과적 산물일 뿐이다. 최근의 며칠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각박했다.

비는 죽어라 왔고, 물은 끊기고, 뉴스의 재해 관련 사건사고 소식과 어수선한 부대 분위기 등은 내게 왠지 겸허한 마음 씀씀이를 강요했다. 하지만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 일이다. 내가 사는 현장은 너무나 적나라한데, 겸허한 마음 씀씀이는 바른생활 교과서에나 나올 것 같다. 차라리 이효리에게 뽀미언니를 시켜주어라. 아니면 채연은 어떨까. 아니, 삐딱한 심통은 그만 부리자. 겸허한 마음가짐은 기능적으로 탁월하다. 그런 마음으로 비에 홀딱 젖은 채로 삽질이라도 하면 나는 마치 TV에 나오는 군인이라도 된 듯하다.

세계의 제안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비록 송일국과 오연수가 동갑일지라도, 드라마는 그럴 듯 하다. 하긴 레슬링 선수의 땀방울도 짠 맛은 날테니까. 이거 내가 요새 TV를 너무 많이 봤나. 그럴지도 모른다. 딱 여기까지만 온전한 내 삶의 영역이다, 라고 말하기엔 TV는 너무 생생하다. 그것은 내가 몸으로 겪는 삶보다도 더욱 실감이 난다. 대민지원 나온 TV 속의 국군 장병에게서는 비에 젖은 뭣같은 냄새가 없다. 젖은 활동화도, 젖은 양말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정준호는 어떤 장면에서 쓰러진 술병 안에 담긴 술이 콸콸 쏟아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한다. 어디 피같은 술을. 하지만 분명 내쪽에 더욱 리얼리티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더 멋있는 건 영화 쪽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화면이 현실보다 우위에 있는 건. 이건 약간 재미있다.

비 오는 날, 전기마저 끊긴 컴컴한 침상 위에서 난데없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낯선 조도. 어두운 것은 종이요, 완전히 어두운 것은 글씨다. 소설 자체와는 하등 관련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라는 식의 표현을 나는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온갖 냉소적인 폼은 다 잡으면서도 결국 글씨와 종이라고 하는 것의 권위에 굴복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밝은 형광등 아래의 이데올로기이다. 어두운 침상 위에서 나는 글씨와 종이라는 것의 물리적 국면과 조우했다. 신전의 수호자 형광등이 사라진 벌거숭이의 세상에서는 책 또한 호흡을 통해 서서히 그을리는 한낱 고깃덩어리인 나와 처지가 비슷했다. 이렇게 공평할 데가. 지금껏 내가 몰입했던 것은 모두 허깨비였던가.

그리하여 날씨는 위대하다. 책도 그 물리적인 국면에 이르러 비에 젖거나 어두운 곳에서는 그저 언젠가 공장에서 출시된 무엇이다. 전기가 끊기면 TV도 한낱 장식품이거나 때로는 폐기물일 뿐이다. 그 어떤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도 날씨 앞에서는 한계를 폭로당한다. 보라, 인류의 지난 문명사를. 역사를 이끄는 힘은 바로 날씨에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마스카라가 빗물에 번졌다면, 징기스칸이 고비사막 한가운데서 폭염으로 목말라 죽었다면, 정지훈이 비의 의미가 한국적인 맥락과 사뭇 다른 나라의 가수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자랑하는 온갖 고상한 것들이 허깨비가 맞다면, 그것들을 거둬낸 벌거숭이의 지상에는 무엇이 있나. 대지는 늘 고착화되어 있기 마련이고, 자연 상태의 모든 다이내믹함은 날씨에서 나온다. 즉 대지가 공시적인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날씨이다. 인간에게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면 그것의 기원은 날씨이고 인간은 날씨의 변화에서 그것을 배웠다. 비바람과 눈보라, 폭염과 우박을 맞으며 우리는 혁명의 idea를 획득했다. 혁명은 결코 무언가를 거스르는 반자연적 습속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연사적 특성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혁명적 존재다.

하지만 저 나일강과 황하에 논과 밭이 생기면서부터, 정착민이 집구석에 틀어박히는 취미를 가지면서부터, 인간은 문명이란 이름으로 점차 변질되었다. 자연의 극복은 자연과의 단절이 되었고,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다이내믹함을 습득할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보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네모 반듯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매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삶에 대한 지겨움. 정착민들의 문명은 발전해가고 그러한 문명의 상징인 고층 빌딩은 갈수록 경쟁하듯 층수를 높여만 간다. 이런 자살하기 좋은 환경의 조성은 삶이 지겨워 차라리 죽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 보편의 심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적 특성의 최정점에는 룸펜이 있다. 완전한 실내 생활의 산물인 룸펜은, 모든 룸펜들은 죽고 싶어 한다.

그 모든 다이내믹한 기상 현상이 TV 속 기상 캐스터가 언술하는 무덤덤한 관념론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 인류에게는 어떤 활력도 긍정도 의지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철저히 무기력하다. 관념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육체의 오감은,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소유한 신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 수가 완전히 틀려버린 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비를 맞으면, 눈을 맞으면, 바람과 햇살을 맞으면. 오감을 열어 세계를 느끼면 다시 옛 기억을 되살릴 수가 있다. 세계와 우리는 이토록 육감적이고 진실된 관계였다는 것을. 세계도, 우리도 결코 각자 서로에게 유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 속의 존재였다는 것을. 우리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온전한 주체였다는 것을. 다시 떠올릴 수가 있다.

우리를 속인 건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는 무지하고 어리석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몰랐다. 정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에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2006. 7. 19. 水,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ps. 이 글을 박형주와 인류에게, 그리고 이 시대와 미래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상병 이영준 (20060721 074507)

정말 요새 계속 비가 오니까 괜히 우울해 지는거 같아요. 
이젠 정말 비 그만 왔으면 좋겠네요.    
 
 
병장 권기범 (20060721 080801)

여기는 비 적당히 오니까 시원하고 안 더워서 좋다...고 하면 염장이겠죠(사실 거짓말에요.) 
그냥 적당히만 오면 좋은데.    
 
 
상병 조주현 (20060721 092225)

김훈의 향기가 느껴지는걸요. 묘하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건 인류에게 줄만한 글입니다. 
최소한 저에게만큼은 장마같은    
 
 
 병장 노지훈 (20060721 190235)

근 100일만의 칼럼이군요. 
결국 답은 화창한 날씨에 공원에서 라디오 체조 그거라면 저도 뼈저리게 동감하오만.    
 
 
병장 송희석 (20060721 193433)

강록님이 정모에 나오고 꼭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는데, 갑자기 이런글을 올리면 물어볼 말이 점점 사라지잖아요! 정말 잘 읽고 갑니다. 단, 내용은 쉽게 동의하긴 어렵네요.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것 같아 개인적으로 점점 기쁩니다.    
 
 
병장 엄보운 (20060721 205555)

...하지만 어떤 냉소도 그 이면으로 얼마간의 자학을 품고 있다면, 나는 매번 약간의 향락을 선사하는 미봉책으로 내 인생을 좀먹어 들어가는 셈이다. .. 

...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라는 식의 표현을 나는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온갖 냉소적인 폼은 다 잡으면서도 결국 글씨와 종이라고 하는 것의 권위에 굴복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 

강록씨가 강록씨로 돌아온 것 같은 친숙함.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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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글에서 정말 트락타투스가 느껴져요. 신기한 노릇이에요. 강록의 서 라고 칭해야 할까봐요    
 
 
병장 김강록 (20060722 185919)

지훈  그러기엔 제가 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저는 그동안 날씨 좋은 날 나들이 가고 싶다, 는 류의 발상이 종종 주변에서 준동해도 결코 휩쓸려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디 놀러다닐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놀고 싶어서 그만. 음화화화화화. 

희석  저 때문에 점점 기뻐지신다니 갑자기 하기 싫은 숙제 억지로 해서 선생님한테 칭찬 받은 느낌이 들어 혈압이 오릅니다. 

보운  감사합니다. 제가 제 글에 대해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이 있다면─좋은 말 듣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고─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김강록다운 글이다입니다.    
 
 
병장 송희석 (20060722 192259)

강록 혈압은 내리면 되요. 핫.    
 
 
병장 박형주 (20060722 211106)

이런 것이었군요. 기대 이상입니다.    
 
 
병장 김강록 (20060724 121525)

희석  글쎄, 혈압을 내리려면 혈압 상승 요인부터 제거하는 게 근본적인 대책일텐데.    
 
 
일병 김지민 (20060724 183521)

역시 강록님. 후아    
 
 
병장 송희석 (20060724 194929)

강록 그럼 절 제거하세요. 언제나 전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기달리고 있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724 195407)

희석  거절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지는 싸움입니다.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신의 허영의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당신의 승리가 될 것이며, 그리고 제 시간이 낭비된다는 점에서 저의 패배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압니다.    
 
 
병장 송희석 (20060724 201513)

강록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제거할까봐 걱정했는데. 그럼 추후에 서로가 '웃는'얼굴로 볼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724 201951)

희석  이걸 어쩌나. 여기서부터는 희석씨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순전히 저의 문제인데, 제가 좀 은원을 가리는 편이라. 이런 성격을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은 이제껏 안해봤지만, 아마 제 생각엔 노력한다고 잘 고쳐지지도 않을 겁니다.    
 
 
병장 송희석 (20060724 202212)

강록 별수없죠. 원래 저란녀석이 상대방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편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저라도 '웃는'얼굴로 대할수밖에요. 왜 속담 하나 있잖아요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윽. 왠지 이 속담을 괜히 말한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병장 김강록 (20060724 202912)

희석  왠지 그 속담 저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군요……이건 농담입니다. 제가 또 항상 철저히 진지하지만은 못한 성격이라 그만. 하지만 이런 성격은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고 노력하면 꼭 고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병장 송희석 (20060724 204940)

강록 늘 진심이지만. 아무래도 강조하는게 좋을것 같아서. 강록님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첫만남때 '악수'를 청하는 바이니, 꼭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상병 정성훈 (20060726 004231)

엇! 강록선배.. 저 03학번 성훈입니다. 이름이 같아서 긴가민가 했더니 
마지막에 김프로를 보니 확실해졌네요. 여기 계셨군요. (웃음)    
 
 
병장 김강록 (20060726 155646)

성훈  쪽지 보내드렸습니다 성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