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에릭과 어느 소년의 만남 
 
 
 
 
 



      오페라의 유령  에릭과 어느 소년의 만남


  예전에 언젠가 책마을에 기괴한 수사를 곁들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기억하실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크적 우아함. 초현실주의적 전개. 탐미주의와 유미주의에 기반한 고딕 미학'어쩌고 하는 13점짜리 책을 당직근무 중에 읽게 되었다고. 당시의 정확한 표현은 시인부락에 대한 공지사항이 포함되어 있기에 지워버렸으니 이제 알 길이 없지만. 그리고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오페라의 유령'

  세상에는 적지 않은 수의 명작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명작은 독자들을 어찌 할 수 없는 감정에 빠뜨리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명작 중에는 이러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내가 왜 이것을 지금에야 읽었을까'. 나는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대학교 1학년 때에야 읽게 되었지만, 그르니에를 2학년인가 3학년때 처음으로 읽었지만 그런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4'를 작년에야 읽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왜일까. 아마 '너무 유명한 책'을 멀리하곤 했던 독서-외적인 나의 실수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단지 '좀 더 빨리 읽었어야 했는데' 라는 독서-내적인 그런 느낌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왜 이것을 지금에야 읽었을까' 하는 그 느낌이 중요한 것일 테니까.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은 내게, 바로 그런 책이었다. 왜 지금에야 이것을 읽게 되었을까. 후회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읽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나의 실수에 대해서도 보다 잘 알게 되었고 다음 출타 때는-기약은 없다. 생의 사소한 문제들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종류의 핵심적인 문제는 그녀에게 달린 일이다-범우사 고전을 지를 생각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나는 오페라의 유령을 읽었다. 두 달 전 즈음에.

  그리고 한 달 전 즈음에, 어느 측면에서 봐도 유쾌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어떤 '찌질한' 한국 소설을 보게 되었다. 졸렬한 문체. 절제되지 못한 수사. 딸기우유와 마티니 베르무트를 섞은 듯한 이질적 요소들의 배합. 제멋대로의 구성. 소설적 미학이라곤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런 '특정한 한국 소설'의 전형을 갖춘(심지어 그것은 리얼리즘에 치대기까지 한다).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수많은 우연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제법 운명적인 척 하는 사건에 대해서만 '우연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 나는 우연히 어떤 소설을 읽었다. 지금도 읽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의 독서 후기는, 보급창으로 이사 온 지 두 번째로 쓰는 독서 후기(결산은 많이 했다만)는 우연히 읽게 된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후기가 될 것이다.

  1. 주인공. 오페라의 유령 '에릭' vs 소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인데다 타 장르로의 접합도 많이 이루어진 작품이기에 '오페라의 유령'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때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유령'의 주인공 '에릭'은 작품 자체 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추악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때문에 사회에서는 물론 부모에게도 버림받는다. 어린 시절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유랑도 하는 등 거친 삶을 살며 세계에 대한 무감각과 증오를 키우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에 들어가게 되고, 특유의 무감각과 증오를 통해 익힌 여러 가지 살인 기술과 책략으로 왕실의 총애를 입어 굉장히 높은 지위에까지 이른다. 올가미를 이용한 살인술. 인간에 대한 특유의 무감각과 무자비함에 기인한 최면술적 심리학. 악마적인 성격. 그런 그는 음악과 건축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까지 소유하고 있다. 후에 페르시아에서 버림받은 그는 프랑스로 숨어들어와 자신의 성채인 '오페라 극장'을 건설하고 그곳의 지하에서 홀로 살아간다. 책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그런 에릭의 이야기.

  다른 한국 소설의 주인공은 조금 한심하다. 아직 끝까지 읽지 않아서 그가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이런 류의 소설이 그렇듯, 대개 주인공의 전모에 대해서는 끝 부분에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다만 그 역시 여러 가지 평범한 이유로 유소년기에 사회에 의해 고통당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절대적으로 추악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 역시 인간에 대해 대체로 무감각해지고, 세계에 대한 증오를 키워간다. 철이 들자 그는 나이프를 수집하고, 화학에 기반한 파괴적인 기술들을 습득하며, 스너프를 보며 희희덕거리곤 하는 '그런 종류의 소년들'이 가지는 취향들을 가지게 된다. 황산 몇 병과 청산가리 약간이 그의 방 한켠에 모셔져 있던 시절도 있었다. 펑, 하는 소리를 내는 불장난들을 즐기며. 핵심적으로 오페라의 유령은 픽션성을 보다 중시하고, 한국 소설은 한국 소설답게 리얼리즘에 보다 방점을 찍기에 주인공 '소년'은 에릭만큼 그렇게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에릭이 자신의 재능으로 실재하는 자신의 성채를 만들 동안 소년은 자신을 관념적인 성채 속에 가두고 살아간다.

  2. 여주인공. '크리스티앙 다에' vs 소녀

  자신의 성채에서 살아가던-그 장소는 고딕적 미학이 가진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에릭은 어느 날 그곳에서 첫 공연을 가지게 된 햇병아리 여가수 '크리스티앙 다에'를 만난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 그리고 음악적 재능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아마 그가 인생에서 느꼈던 미칠 듯한 고독감 때문에 에릭은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녀에게 재능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음악을 가르치고, 그녀의 경쟁자들과 자신의 적들을 평생 다져온 특유의 능력으로 제거한다(이 부분이 표현의 측면에서 정말 압권이라는 생각이다. 현실과 비현실, 논리와 허구가 '기계 장치'나 '심리학' 등의 현실적인 틀 안에서 묘하게 융합된다. 일련의 사건은 전반적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두 번 서술된다. 첫 번째는 그 사건을 당한 보통 사람의 측면에서  이것은 그에게 다만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체험일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 보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것들은 충분히-물론 대강 건너뛰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논리적인 틀 안에서 설명된다). 그는 스스로를 '음악의 신'으로 속이며, 복화술과 음향 기술, 그리고 '신의 경지에 다른 목소리'를 통하여(이 부분도 '제거'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표현 방식이 등장한다)그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며 그녀를 장악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관념적인 성채에서 살아가던-그 장소는 미학적이진 않지만 그저 고딕적인 곳으로 그려진다-소년의 세계에 어느 날 소녀가 난입한다. 아름다움. 그리고 재능. 다에와 다른 점은 리얼리즘에 기반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가 다에보다 아름답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능의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 아닌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에릭과 다에가 '음악'이라는 예술로 이어진 관계라면 소년과 소녀는 '글'이라는 예술로 이어지는 그러한 관계가 된다. 에릭과 소년은 어둡고 비생산적인 자신의 과거로부터 '음악' 혹은 '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자신의 生을 전향한다. 다만 에릭은 다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소녀는 소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3. 제 3자. '샤니' vs '그'

  그렇게 차근차근 다에의 마음을 장악해 가던 에릭은 기어코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 아아, 세상은 결국 잘생긴 자의 편이었던 것이다. '샤니'라는 이름을 쓰는 남작인지 후작인지 하는 개뼈다귀 같은 딜레탕트 예술애호가가 '오페라 극장'에 찾아오게 되고, 다에의 공연을 보게 되고, 그녀에게 빠져버리게 된다(다에 양의 매력은, 이것도 표현의 문제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문제인 것 같은데,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려는 시도로 그려낸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에서의 아름다움'을 그리려는 시도로 그려낸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에릭이 가진 신적인 예술혼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랬거나, 내가 잘못 읽었거나, 번역이 나쁜 것이리라. 아무튼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그려짐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다에에게 반한 샤니는 온갖 젊은이스런 짓으로 다에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애쓴다. 그렇게 결국 샤니는 다에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고, '에릭'은 음악의 신이 아니라 정념을 가진 인간, 그것도 굉장히 추한 그런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마찬가지로 소년도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아무리 허접한 소설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사건이 없으면 소설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 '그'-소년을 지칭하는 3인칭 대명사 그, 가 아니라 고유명사격의 '그'-가 등장한다. 일반적인 부분에서는 대충 샤니와 비슷한 상황을 가지리라고 소년은 생각한다. 리얼리즘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작품답게, 단지 소설 서술의 방법론에서만 '리얼리즘'이 아니라 시점 자체도 '3인칭'이나 '전지적'인 시점이 아닌, 특정한 인간들의 시점에서만 서술되는 그런 작품이기에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그'가 등장하고. 소년은 소녀와 헤어진다. 그들의 첫 만남 이후로 5년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4. 공통적인 사건들.

  그녀들을, 이성을 잃은 에릭과 소년은 미치고 만다. 지나치게 유사할 정도의 양태로 그들은 자신의 광기를 표출한다. 다에와 소녀를 만나기 전, 그들은 세상과 인간 전체에 대한 증오를 몸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던 인간들이었으니까. 그들은 그녀들 앞에서 울부짖고, 바닥을 기어다니고, 때로 자신의 재능-에릭의 경우엔 신적이고, 소년의 경우엔 별 거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한 번도 그녀들 앞에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들은 때로 과격한 언사를 쏟아붙기도, 냉소를 집어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대답은 묵묵부답.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그저 연민어린, 불쌍한 듯한 시선.

  그들은 알고 있다. 그녀들이 그들과 함께 할 때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의 삶과 신적인 예술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에는 에릭 덕분에 자신의 가능성을 많은 부분 끌어올렸지만 아직은 여전히 부족한, 인간적인 수준이다(위에서 다에의 아름다움에 대해 내가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나의 오해 혹은 번역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에릭에게는 신의 재능이 존재한다. 소년은 신적 재능은커녕, 소녀의 재능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그런 조잡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년은 뻔뻔하게도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떠오른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고, 소녀와 함께 할 수 있을 때 그들 모두가 무엇인가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맑스엥겔스처럼. 들뢰즈가타리처럼. 네그리하트처럼(원래 이런 어처구니없음이 리얼리즘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게 아니면 레논요코도 좋고 사르트르보부아르도 좋다.

  그들은 똑같이 '그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왜. 도대체 왜. 그녀들은 '그들'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물론 그녀들은 부분적으로 신적이며 부분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의 눈에 그녀들의 인간성이 잘 보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릇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샤니는 그저 음악에 대한 딜레탕트적 애호가일 뿐. 이러한 상황은 '그'에 와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래서 그들은 절망하고 만다. 절망 속에서 협박, 기도, 애원, 모든 것들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에릭은 오페라 극장 지하 저장고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화약을 터뜨린다고 협박한다. 그렇게 파리 시가지를 지하로 묻어버리겠다고. 소년도 비슷한 종류의 협박을 한다. 소녀의 덕분에 얻게 된 몇 가지 '사회적교통학적' 지식과 증오의 시기에 소년이 접하게 된 기술을 최대한 이용하여 서울을 극단적인 혼란에 빠뜨려 버리겠다고. 불쌍한 그들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을 내비치지도, 그녀들에 대한 좌절과 절망을 내비치지도 못한다. 그저 그들의 과거를 휘감고 있던 커다란 증오에 그렇게 몸을 맡겨버린다.

  5.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읽은 한국 소설이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메타텍스트적이라거나 패러디적인 소설이 아닌 한 두 소설은 똑같지 않다(설령 메타텍스트나 패러디라 해도 당연히 다르겠지만). 두 소설 간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여러 가지 차이들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혼란의 상황에서 자신을 헌정하는 곳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릭은 다에를 사랑하고 있을 동안, 그리고 그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있을 동안 끊임없이 작곡을 하고, 결국 그 곡을 완성한다. '위풍당당 동쥬안' 그리고 에릭은 샤니를 선택한 다에의 앞에서 그 곡을 연주한다. 신의 영역에 다다른, 자신의 일대기를, 삶 전체를 단 한 곡의 음악으로 승화시킨 그런 작품을. 그는 그럴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 만한 예술혼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나 같으면 재능이 있어도 그러지 않으리라. 그리고 찌질한 한국 소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것을 택한다. 소년의 글을 그의 소녀에게 오롯이 바치는 것을 택한다. 작중의 소년은 소녀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내가 에릭이었다면, 내게 그 만큼의 재능이 있었더라면 나는 나의 음악 '위풍당당 동쥬안'을 작곡하는 대신 그 재능과 예술로 너를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할꺼야.' 다에는 '위풍당당 동쥬안'이 가진 무한에 가까운 예술에 전율하지만, 결국 에릭을 선택하지 않는다. 신적인 예술에 대한 평범한 인간의 범접할 수 없음, 그리고 외경을 표현하려 한 것일까(나는 소설 '오페라의 유령'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로, 탐미주의와 유미주의를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가 건조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착한 에릭은 결국 그런저런 사건들 이후 마지막에, 결국 샤니에게 다에를 양보한다. 그것이 그녀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그리고 그는 쓸쓸함 속에서, 자신의 성채 지하에서 그렇게 죽는다. 파리를 빠져나간 샤니와 다에의 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들은, 아마 적어도 한동안은 즐거울 수 있었을테지. 결국,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세계란 원래 그런 것이라면, 자살은 절대적인 당위가 된다.

  예술. 혹은 문학. 제임스 조이스는 '네가 문학을 선택한다면 너는 너의 가족과, 조국과, 사랑과, 친구와, 사상을 모두 잃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너는 문학을 선택하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고 기형도에 대한 추억을 끄적거린 성석제 씨의 소설에서 얼핏 보았다. '유령'은 분명히 명작이며 장편 소설이기에 단일한 주제로 그것을 해석할 수 없지만-그것은 연애 소설이며, 추리 소설이며, 액자식 소설이다-나는 그것이 가진 탐미주의 미학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에릭으로 상징되는 낭만주의적-악마적이며 천재적이고 광기에 차 있으며 내적인 미학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인 예술혼. 샤니로 상징되는 일상의 즐거움. 그리고 두 가지를 고루 갖춘 다에. 화려하고 넓은 파리 시내와 좁으나 깊은-지하로도 5층인가 되고 지상으로도 꽤 높았던 기억이다-유령의 극장. 그리고 많은 대비들. 물론 그것은 예술과 일상의 대비가 아닌, '절대적인 권세를 지닌 죽음'과 '生'의 대비로도 파악해 볼 수 있겠지만. 죽은 것이 예술이고 살아있는 즐거움이 生이다, 는 지껄임을 해 보아도 괜찮을 듯 하지만.

  한국 소설의 경우에, 나는 아직 그것을 다 읽지 않아서 결말을 알지 못한다. 아마 어떤 결말이 존재할 것이고, 그 결말 뒤에는 에필로그 식으로 소년의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서술도 나올 것 같다. 역시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작품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많은 부분 '유령'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기에(그러나 보르헤스가 '피에르 메냐르인지 하는 녀석의 동키호테'에서 증명했듯이, 차피 오리지널리티란 없는 것이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끌여붙여도 상관 없다. 둘 다 내가 이야기하고픈 핵심은 아니니까). 그 작품에서 소년은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단지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페이지를 찾을 수 없는 재능을 쥐어짜면서 그녀를 위한 글을 끄적거리면서. 아직 더 읽지는 않았다. 시간이란 삶의 페이지를 그리 쉽게 넘겨주지는 않는다.

  모르겠다. 소년은 에릭이 아니니까. 그는 자괴감과 피해의식으로부터 오만과 자기확신을 이끌어내는, 자기 최면의 힘으로 때로 살아가는 그런 소년이니까. 하고 싶어도 '위풍당당 동쥬안'따위는 창조할 수 없는 그저 그런 인간이니까. 결말은, 오페라의 유령과 매우 다를 것이다. 그래야 한다.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른 책은 없으며 다만 아름다운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있을 뿐. 그리고 나는 짧은 삶 속에서 아름답지 않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잘 참지 못하는 인간이기도 하니까.

  글 대신 삶을 쓰며, 책 대신 삶을 읽으려던 나의 삶은 언제나처럼 소설이나 읽으며 글을 쓰는 것으로 귀결되곤 한다. 좌절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는 객관적인 자연의 사실. 초원의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에게 나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6. 다시, 오페라의 유령

  작품 '오페라의 유령' 자체에 조금만 집중해보자. 본문에서 말한 것 이외의 자잘한 부분들. 개인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창조된 인물은-인물 자체가 아닌, 작품과 인물의 관점에서-샤니의 형이 아닐까 한다. 그의 존재로 인하여, 세간 사람들이 바라보는 '오페라의 유령' 사건과 실제로 존재하는 '오페라의 유령'사건이 다르게 읽힌다(형의 존재와 실종으로, 세간에서는 유령과 관련된 사건을 하나의 치정극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스토리텔러인 '페르시아인'의 이야기로 천천히 베일이 벗겨지는 사건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사건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다. 지하를 돌아다니는 '살해자'에 대해 그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에릭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역시 개략적이며 일견 추정적이다.

  이런 식의 사건 서술은, 본문에서도 언급한 '라이벌 제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자들을 기묘한 혼란에 빠뜨린다. 분명하게 모든 사건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는 수준으로까지 설명되지만 그것을 쉽게 납득하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애매하다. 멀더라도 오지 않는 한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재미있는 서술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장르를 '추리물'이라고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지만.

  대사의 처리나 묘사에서 웅장함과 화려함 느껴진다(아랍인 조르바를 좋아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인물의 등장이나 배치도 굉장히 극적이다(유미리를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데이는 이런 이유도 있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소설. 바로크적인 극도의 형식미와 고딕적 우아함의 극한. 이것은 '오페라 극장의 옥상'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소설이 가진 표현력 자체에 감탄하며 읽은 소설은 제법 오랫만이다.

  그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지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오페라의 유령. 특히나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라면 반드시. 더 늦기 전에 읽으라고.

  7. 결론

  샤니는 호빵이나 만드시지.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11 0751) 

  
 
 
 
상병 허익준 (20060630 091429)

결론 미칠듯이 공감. 아무리 여성적인 얼굴이 어쩌구저쩌구 해봐야 팔자수염 달고 그런소리를 하면 소림축구의 장백지밖에 생각이 안난답니다.(...)    
 
 
일병 김현동 (20060630 092148)

웃,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 책 중 하나였는데. 
나아중에, 빅토르 위고를 다 읽을 즈음에, 한 번 읽어봐야겠는 걸요.    
 
 
 병장 김동환 (20060630 093731)

오페라의 유령은 영화니 뮤지컬이니 한꺼번에 떠들어대는 바람에 
왠지모를 비호감으로 저도 안읽었었는데. 이건 사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상병 조주현 (20060630 095407)

오페라의 유령은 영국에서 봤던 공연(뮤지컬이라고해야할지 오페라라고해야할지)이 최강. 
OST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효과가 백배천배    
 
 
병장 고계영 (20060630 100408)

처음에 '김전일'을 통해서 읽게 되었죠. 읽고 난 후 비교를 할 수 조차 없었지만. 
정말 충격적이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고요. 정말 오페라는 어떨지 가히 궁금해졌습니다. 
역시 영준님의 독서후기는 아우라가 느껴지는군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언제쯤......    
 
 
병장 엄보운 (20060630 100829)

제가 제 인생을 바꾼 5권의 책을 꼽으라 했을 때, 주저없이 '오페라의 유령'을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자세히 나와 있군요. 가장 강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소설입니다. (부들)    
 
 
병장 김태경 (20060630 102117)

하아-. 전 작가주의자라 글은 쓴 사람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영준씨 화이팅. 

오페라의 유령은 저도 영국에서 뮤지컬로만 봤어요.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그것이 영문본. 원서로 읽어봐야지~하면서 샀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불어로 쓰여진 책... 어째서!! 
요즘 헌책방에 몇권씩은 꼭 있더군요. 뮤지컬의 내용이랑 조금씩 다른것 같아서 꼭 읽어보고 싶네요.    
 
 
병장 김형진 (20060630 105549)

좋은 글이군요. 결론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요즘 글들은 한 줄 요약해주는 친절함이 부족한 것 같아서,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더욱 와 닿네요.    
 
 
상병 민경국 (20060630 121645)

음. 연극과 공연에 미래를 걸고자 하는 입장에서, 
공연으로 이름을 떨친 작품은 공연으로 먼저 느껴보아야 한다는 
근거없는 나름의 다짐 때문에 아직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그저 핑계인가)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지 말지 고민을 한번 더 해야겠군요.    
 
 
상병 송희석 (20060630 141627)

역시 맘에 안들어요. 찌질한 한국소설이라 표현한것도 그렇고, 그것을 오페라의 유령과 변증법적 사고로 바라본점도 맘에 안들고, 그렇게 하면 조금 달라지나 에라이! 당신은 필히 나하고 술한잔 해야돼! 그럼 황민우씨와 정 반대되는 사람과의 대화가 어떤것인지 알수 있을텐데.    
 
 
상병 이훈재 (20060701 170237)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책의 흐름에 맞추어 줄거리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저는 늘 굳이 책과 관련짓지 않아도 되는, 내글내생각 같은 독서후기를 쓰고 말거든요. 

에릭은 프로답게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회(개소리)를 만드는 출발 드림팀의 일원인가요. 
그래봤자 다에를 차지하는 건 딜레탕트 그러니까 쉬운 말로 아마추어인 호빵제조업자., 그림이 나오네요. 

그런데 오페라유령의 세계가 아닌 리얼세계는 워낙 엉망이라서요. 세상을 증오하는 우리의 소년도 사실 위대한 예술가를 꿈꾸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길 원할텐데, 신적 예술은 무슨! 소년을 글쓰기로 이끌어준 구원자이자 소년을 그나마 온전히 이해하는(소년 생각에) 소녀마저 그를 버리니, 저 같아도 때려치우겠어요. 본업으로 돌아가 홧김에 생화학무기를 만들어 테러를 감행하는 것도... 

에릭에 비해 여러모로 후달리는 소년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나요. 만일 그에게도 신적인 재능이 있다면, 아님 유명한 인기 작가라도 됐으면, 그럼에도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게 폼이 좀 날텐데요. 그게 아니니 남들에게는 찌질하게 깨졌다고 빌빌대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고, 소년 본인은 내심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글을 안 쓰는 게 자신에게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걸 소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아주길 바라게 되지요. 흐음.    
 
 
병장 송희석 (20060701 193125)

훈재 이런 날카로운 분석을, 차마 그렇게까지 저는 표현을 못하겠던데 말이죠. 다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봐요. 그 소년이 신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그것이 바로 글이고. 그러나 그것을 이끌어준 타자가 사라지니, 절필이라는 생각따위를 했지만, 다른 타자를 찾지 않고 잃어버린 타자를 기다림으로 인해 결국 아직까지도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제한적으로 말이죠. 

전 색다른 결말을 원래요. 오페라의 유령결말과 조금 다른 식으로 에릭이 차라리 샤니를 죽이면 어떨까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그 소년도 3인칭 대명사 그를 죽임으로써, 혹은 죽음과 가까운 생을 보여줌으로 인해 소녀를 다시 차지하든지, 확실히 잃어버리든지 하는 결말 말이죠. 그냥 그런 결말을 전 보고싶군요. 

그냥 아주 평범한 결말인, 그 소녀를 잃어버리고 다른 비스무리한 소녀를 찾아서 결혼 혹은 평생 같이 친구로 살아간다는 그저그런 그 소설은 아무도 안살것 같아요.    
 
 
병장 주영준 (20060703 201152)

희석씨와 훈재씨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찌질한 한국 소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술을 사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군요. 아. 그리고 OST는 정말 여러 사람들이 추천해주고 있습니다. 꼭 들어봐야겠어요 언젠가. 

형진 씨가 빠져도 책마을의 코멘트주의는 영원히 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