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예찬 - 조회수 1을 위하여 
 
 
 
 


처음 편지란 걸 썼던 날을 떠올려봅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숙제로 '부모님께 편지쓰기'를 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막막했지요. 글짓기학원에서 편지양식이란 것을 배웠지만, 편지쓰기 실습을 할 때도 그냥 아무렇게나 적어서 한 장을 채우는데 급급했지 어떻게 글을 풀어나가야 하는지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보내는 사람 이름을 쓰고, 인사말을 적고, '하고 싶은 말'을 쓰고, 끝인사를 하고,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쓴다 -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매일 얼굴 보는 엄마 아빠에게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직접 말하거나 전화로 하면 되지, 굳이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낼 필요가 있는 걸까요 게다가, 어째서 끝에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따위의 낯간지러운 말을 적어야 한단 말입니까. 어린 저는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겨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놓았으나, 쓴 글을 읽어보고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찢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 글을 읽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닭살돋는 글을 아침마다 같이 학교로 출근하는 엄마나 저녁마다 TV를 보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 아빠에게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저희 집이 대화가 없는 집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하루에 한 두 시간 이상을 엄마 아빠와 이야기하며 보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종교에 관한 첨예한 사안부터 여자친구 얘기까지 할 수 있는 부모님이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러앉아 밥 먹으면서 그냥 '고마워요 엄마 아빠' 라고 하는 거야 부끄럽지 않은 일인데 그걸 편지로 써서 보내는 것은 도통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일기장을 통해 엄마 아빠와 자연스레 생각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편지라는 건 너무나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기만 했어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면서, 동아리 활동도 하고 동아리의 몇몇 여고생들과도 어울리며 자연스레 편지를 가끔 주고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여고생들이 편지를 쓰는 방식은 제각각이었고, 편지를 하나씩 받아보면서 이런 식으로 이런 내용으로도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생경하고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편지들에는 제가 배웠던 그 딱딱한 양식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수다를 늘어놓듯이 그렇게 술술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고 있었죠. 그리고 읽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직접 말하거나 전화로 하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기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이지만 부끄러울 정도는 아닌, 그런 내밀한 이야기들을 그들은 편지로 써서 마음을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여러 번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러한 만남에서 마음 속에 담은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편지를 통해 저는 그들과 미처 하지 못한 속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편지가 쌓여가면서 마음 속 고민이나 어려운 갈림길에 대한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건넬 수 있었고, 답장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단지 메신저나 메일이나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말' 속에서 알아볼 수 없던 표정이나 기분 같은 것을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었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보이며 '서로에게 다가서는 방법' 중에는 편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편물의 90% 이상이 요금통지서와 광고우편이라는 통계는 식상한 이야기가 된지 오래입니다. 우리 시대의 소통은 편지와 전화를 거쳐 인터넷 미니홈피와 블로그라는 새로운 개인 미디어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기술이 발달하며 수단이 변해갈수록 소통은 점점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소비되는 시대에서 하나의 게시물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슴아픈 기억과 따스한 추억은 더 이상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닌, 온라인에서 초라하기만 한 '나'의 존재를 키우기 위해 조회수를 먹고 자라는, 예쁘게 꾸며놓은 나의 아바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럴 수록, 저는 편지를 씁니다. 비록 편지의 조회수는 1에 불과하지만, 그 조회수는 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더욱 각별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글은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편지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여진 편지글은, 나의 삶마저 파편화하여 게시판에 떠도는 소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온라인 식인걸귀의 포로가 되는 것에 반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미니홈피의 조회수와 인기포인트가 올라갈수록 나는 이야기의 생산자로만 보이고, 나의 치열한 고민과 사유는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이들에게 건네어지지 않은 채 도트로 그려진 캐릭터처럼 가식적인 표정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다가서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보다, 나를 소비할 수 있도록 나의 깊은 속내까지 퍼내고 짜내어 휑하고 흉한 속을 드러내기 급급합니다. 마치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처럼, '나'는 소비하고 나면 없어지는 아이템입니다.

관계맺기의 얕음을 질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채울 수 있는 방책을 고민하지만, 그리고 서투르고 일방적으로 나를 보여주기에만 골몰하지만, 정작 '너'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소통의 방법'과 '소통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직접 말을 건네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 나를 봐주기만 기다리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만 바라는 이기적인 온라인의 아파트숲 속에서, 어쩌면 편지는 지로용지와 광고우편 사이에 끼어 무심히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얀 규격봉투에 담긴 인쇄물더미에서, 예쁜 봉투에 담긴 정성어린 글씨에는 아파트숲의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는 저 이름모를 식물처럼 강한 힘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오랜 옛날,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고 치열하게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쌓아갔던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 가슴떨리고 행복한 조회수 1을 위하여 밤을 지샜고, 훈련소에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주머니에 숨겨둔 편지를 읽으며 웃음과 눈물을 함뿍 지었던 당신도 그때에는 조회수 1에 감사하고 밤잠을 설치며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말'을 다듬고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밤잠을 설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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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에 대한 잡상 - 유승준과, 원빈과, 국가유공자와, 이라크에서 돌아온 녀석의 귀환을 바라보며.]와 

[인연에 대하여 - 일백푸로 군생활에서 나온 엑기스로 쓴 인연론]을 잇는 저의 잡담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앞으로 [잡담주의자]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핫핫.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01 1116) 

  
 
 
 
 병장 김동환 (20060630 085823)

좋은글. 오예 첫감상. 흐흐.    
 
 
병장 고계영 (20060630 090117)

시.리.즈 였군요. 저도 동석님의 정의내리신 [잡담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될듯.    
 
 
상병 조주현 (20060630 090245)

김동석 게시판 하나 만들어야...    
 
 
병장 엄보운 (20060630 092606)

감동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상병 조태희 (20060630 093246)

오... 뭔가 왔습니다~    
 
 
병장 이청열 (20060630 093607)

잘읽었어요!    
 
 
병장 주영준 (20060630 101716)

그러나 나는 그저께 쓴 나의 8페이지짜리 '관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는 제목의 편지가 무겁다는 이유로 20원 미납 반송되었기에 안대습.    
 
 
상병 이병열 (20060630 101842)

잘읽었습니다.. 인연에 대하여 라는 글도 읽어보았는데.. 
저랑 같은 데서 후반기를 받었나보군요.. 
후임이란 분은 저보다 한두기수 정도 차이나겠군요.. 
저도 후반기때 지성을 봤던기억이...(웃음) 
좋은글 기분좋게 읽고 갑니다    
 
 
상병 백경민 (20060630 102212)

제목만 보고 읽었는데 
끝으로 가니 따뜻한 느낌이 드는군요.    
 
 
병장 김형진 (20060630 104953)

오. 이것은 읽으면 읽을 수록 안대습.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 조용준-김동석 커넥션의 탄생을 알리는 듯.    
 
 
병장 조용준 (20060630 111049)

형진씨. 나는 솔로인데 무슨 커넥션이란 말이오. 나는 오늘로써 전역이 229일 남은, 공군 병장 2호봉인데 저런 커넥션이 생겨봐야 좋을거 하나 없다오.    
 
 
상병 성기종 (20060630 112233)

동석씨, 잠깐 감정 흔들리셨구먼.(웃음) 

요즘 양상이 부끄럽구만기래. 
계속 쓰시구려. 핫핫.    
 
 
상병 배지훈 (20060630 113212)

와우! 정말 잘읽었습니다. 
제목이 발군이군요!    
 
 
상병 이희웅 (20060630 113341)

편지 예찬에 올인...    
 
 
상병 이희웅 (20060630 113711)

저도 편지를 좋아라 합니다... 
10년지기 펜팔 친구도 있을정도입니다... 
편지가 오기전까지 그 설레임과 보낸 뒤 받는사람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큰 희열에 중독이 되어버린... 
아~~ 
상병이후 뚝 끊긴 편지... 
내편지는 어디있노    
 
 
병장 박원홍 (20060630 114535)

편지의 매력을 알면서도 귀차니즘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 귀차니즘은 가슴 아프게도 지독한 악필에 기인한답니다. 잡담 시리즈 좋습니다. 좋아.    
 
 
상병 이정호 (20060630 123758)

잘 읽었어요~ 
편지...저도 참 좋아하는데 사실 군대 온 이후로 편지가 좋아진듯.. 
밖에서도 간간히 써봐야겠어요..흠흠흠...    
 
 
상병 한형진 (20060630 125024)

동석님의 글은 정말 잘 읽힙니다. 
모두가 아는 단어로, 모두가 동감하는 내용을, 그러나 모두가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글을 쓰는 동석님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동석님 글에 대한 일방적인 소비자인 입장의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만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상병 옥정훈 (20060630 183250)

오...대단하십니다 
편지에 대한 느낌을 술술 잘 풀어내셨군요    
 
 
병장 김영균 (20060630 184047)

병장 되니 편지가 안옵니다. (하하) 물 흐르듯 이야기 하시는 문장력...부럽군요..    
 
 
병장 이은호 (20060630 185848)

정말 좋습니다. 
저는 어울리지 않게 편지를 참 좋아하는데. 
요즘 주위 사람들은 글쓰기가 답답하고. 
잘 못쓴다는 핑계를 대면서 편지의 존재 조차 귀찮아하더군요. 

그래도 쓰렵니다. 
읽혀지고 또 바로 버려지는 글이라 할 지라도. 
따닥따닥 미니홈피 방명록보다는 편지가 좋네요.    
 
 
 병장 노지훈 (20060701 100124)

가지로!    
 
 
병장 엄보운 (20060701 105219)

가지로!!    
 
 
병장 송희석 (20060701 105314)

가지로!!    
 
 
상병 박철웅 (20060701 184338)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로 돌아가다.    
 
 
 병장 박진우 (20060702 140046)

편지는 기술복제 시대에 유일한 아우라를 지닌 매체로군요. 
음. 새로운 발견.    
 
 
병장 박민수 (20060703 034905)

아. 쓰고픈 편지도 미루고 있는 저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해주시는군요. '조회수 1'의 소중함. 멋져요.    
 
 
상병 김재환 (20060703 140818)

가슴에 와 닿는 글귀.. 멋지군요!    
 
 
일병 강경구 (20060704 094354)

편지란 조회수 1이다. 
조회수란 단어가 인터넷에서가 아니라 편지와 함께 있으니 훨씬 미적인 단어가 되버는 군요. 
눈부신 표현, 눈부신 글귀 잘 읽었습니다.    
 
 
 상병 송영윤 (20060704 161806)

동석님의 글을 읽고 가슴에 짠~ 하는 뭔가가 느껴지네요... 

당장 편지를 쓰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일병 한태광 (20060718 195222)

정말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조회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