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억의 단편 - 친구 A를 만나다. 
 
 
 
 
1.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15시 39분에 우리역을 출발하는 용산발 여수행 무궁화호 열차, 타는곳 4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안전선 바깥으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전철에서 나오는 자동 방송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겨움을 한짐 짊어진 한 중년 역무원의 안내방송이 끝나자, 기적소리와 시끄러운 디젤엔진 소리를 내면서 무궁화호 1479호가 평택역으로 들어섰다.

나는 다시한번 승차권을 확인했다. 평택에서 여수로 가는 1479호 열차는 16시 42분에 서대전역이 도착한다. 그리고 17시 15분에, 서대전역을 출발하는 KTX 221호 열차를 타고 끝까지 가다보면, 19시 23분에 목포역에 도착할수 있을것이다.
끼익 거리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1479호 열차가 평택역 4번 플랫폼에 멈춰서기 시작했다. 역시나 비인기 편성이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객차는 신형 무궁화호 객차로 이루어져 있고,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도 않았다.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울에서 온 사람 몇명이 내린뒤, 난 승차권을 다시 확인하며 무궁화호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고, CDP의 Play버튼을 누르려고 할 즈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난생 처음보는 번호랄까. 일단 ARS나 아르바이트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기에, 밑져야 본전식으로 받아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용준아, 나 A야. 지금 어디야?"
"MSN에 쪽지보낸대로, 지금 막 무궁화 탔어. 너 핸드폰 잊어먹었다면서, 어떻게 전화건거야?"
"아, 기숙사 후배 핸드폰 빌려쓰고 있지. 목포 오기 한 1시간전쯤에 다시한번 전화해."
"알았어. 나 목포 가서 노숙하게나 만들지 말어."
"하하, 설마 널 버리고 어딜 가겠냐?"
"저번에 한번 나 전철에 내버리고 갔잖아."

사실 A란 놈이 고의는 아니더래도 예전에 나한테 저지른 만행이 하나 있었다. 이번 3월에 D라는 친구가 늦깍이로 군대에 입대를 했는데, 때마침 2월에 유유히 바깥세상으로 걸어나온 내가, D 군대가기전에 마지막으로 환영해줘야 한답시고, 그 일당들을 모조리 신촌의 한 병맥주집으로 집합(?)시킨적이 있었다. 1차로 병맥주에, 2차로 오뎅바에서 국화주 마신거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내가 시계를 잘못보는 바람에 집으로 가는 막차를 멋있게 놓쳐버린것이었다.

결국 다음날도 일요일이겠다, 모인사람들은 다들 방학이나 휴가다보니 의리 좀 있다는 친구 A놈과, 군대라는곳에 진작 말뚝박은 L형, 그리고 사실상 장교로 가기로 마음 먹은 친구 T와 이 모임의 어거지 희생양 D군이 신촌에서 꽤 컴퓨터 빠방한 PC방에서 밤을 새기로 했다. 하지만 L형은 휴가때 집에서 잠좀 자라는 부모님의 호출로 새벽 3시쯤에 나가야했고, T는 아르바이트때문에 수면을 취해야 해서,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5시쯤이 되자 나가버렸다. 결국 아침 7시까지 밤을 새워버린건 나와 A군, 그리고 D군 이렇게 세명이었다.

D군은 집이 화정동이었기 때문에, 신촌에서 곧장 가는 버스를 탔고, 나는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A군의 집은 잠실이었기 때문에, 일단 D군과는 헤어지고, A군과 같이 2호선에 몸을 맏겼다.
때마침 A군은 원양실습을 나갔다 오면서 모은돈으로 PSP를 구입했고, PSP에 집어넣은 동영상을 같이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왕십리역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피곤해보이니까, 잠실쪽에 있는 찜질방에서 한숨 자고 가자는 A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나. 하지만 잠실 도착 직전에 난 의식을 잃어버리고, 역시나 비몽사몽간이었던 A군은 아무생각없이 잠실역에서 내리고, 뒤늦게 내가 안내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유리문을 두들기면서 날 깨울때는, 이미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한 때였다.

결국 나는 그 유리 두들기는 소리에 뒤늦게 잠을 깨서, 다음역에서 반대방향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그 사이를 못참고 다시 자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때는 어느새 신림역. 신림역에서 문자를 보냈을, A군은 이미 집에서 잠들어버린 뒤였다. 결국은 신림동의 한 찜질방을 찾아서 거기에서 눈 붙인 다음, 오후 3시쯤에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이, 그건 내 잘못도 있지만, 계속 자버린 네 잘못도 있지."
"하여튼 내버린건 내버린거지."
"걱정마. 시간 맞춰서 목포역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내 얼굴이나 잘 찾어."
"알았어. 좀이따보자!"

2.
천안역을 지난 후, 전날 잠을 약간만 잤던 탓에, Led Zeppline의 'House of the Holy'를 들으면서 살짝 잠을 잤다. 때마침 충전기도 가져왔겠다, 집에서 나올때 충전도 잘 안해뒀겠다. 미리 물색해둔 무궁화호의 220V 콘센트에 핸드폰 충전기를 연결시켜놓고, 충전을 시키면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치원. 더이상 자는것도 귀찮고 해서 짐정리를 하기가 무섭게, 옆에 왠 여학생이 앉는게 아닌가. 들고있는 책을 보니 국어교육과인듯 했다. 어느 학교일까? 생각을 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때마침 심심했겠다, '흐음, 한번 말을 걸어볼까?'생각을 했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역시나 두달동안 세상과 따로 있다는건 적응하기 힘든 벽이었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쪽에서 말을 걸어온다.

"저기요."
"네에?"
"저거, 저렇게 해서 충전 되는거 맞아요?"
여학생은 충전중인 핸드폰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네. 똑같은 220V라서 충전 되요."
"아, 그러면 제 핸드폰도 충전시켜 주시면 안될까요?"
"충전되기전에 내릴텐데. 전 서대전에서 내리거든요."
"저도 서대전에서 내려요."

여학생은 냉큼 표를 보여준다. 조치원발 서대전행. 그리고선 나한테도 확인차 표를 보여달라는 눈치다. 어쩔수 없이 표를 보여줬다. 평택발 서대전경유 목포행. 요금만 해도 몇만원이 붙어있다.

"오, 어디 가세요?"
"좀 시간이 나서 친구도 만날겸 이리저리 여행다니는중이에요."
"와. 부럽다. 학교는요?"
"지금 휴학했어요."
"저기... 학번이 몇학번이세요?"
"저 03학번요."
"어어. 제가 04학번인데. 03학번이면 졸업할때 아닌가요?"
"하하. 그렇네요. 그런데 아직 2학년인데."
"어? 그러면 몇년째 휴학하신거에요? 설마 군인이 이러고 다닐리는 없을텐데."
"사실 휴가 나왔어요"

저쪽은 내심 실망하는 눈치다. 뭐야, 지금 작업걸었던거야? 이거 좀 아까운데. 쩝.
어차피 들어가면 말짱 헛일이니, 그냥 좋게 생각하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서대전역에 도착했다.
서로 플랫폼을 나서면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뭐, 언젠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

3.
문득 생각을 해보니, 몇년전 서대전역을 갔을때에는 분명 동전PC방이 있었다. 계속 플랫폼에서 기다리는것도 지루해서, 개찰구에 표를 집어넣고선, 나름대로 폼나게 낚아채고는 동전 PC방으로 들어갔다.
MSN을 접속하니, 역시나 A가 접속해 있었다. 원양실습만 안나가면 완전 폐인 생활이라니까.

- 지금 서대전 도착했다.
- 몇시에 KTX타는데?
- 17시 15분.
- 그래. 빨리와라.

그러고보니, 내가 입대하기 며칠전에 했던 전국일주의 피날레를 장식했던게, 대전을 들린 다음, KTX를 타고 서울로 갔던 내가 지인들과 같이 신촌에서 닭갈비에 소주를 들이킬때, 저 A라는 놈이 의리있게 KTX를 타고 목포에서 용산역까지 단 네번만 멈춘채로 곧장 달려온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 그 돈은 당연히 카드로 긁어야 했고, 워낙 부담을 많이 가진 나는 조용히 내 남은 돈 몇푼을 그녀석이 극구 사양함에도, 조용히 쥐어 주었다. 뭐, 가끔씩 실수로 사람 내팽개치고 가는경우도 있지만.

메일 확인하고, 카페 몇군데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17시 10분이 되었다. 마침 대전의 한 PC방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던 동생 S군이 내가 카페에 남긴 글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금세 KTX의 모터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미안해, S군.

KTX는 확실히 불편했다. 이번에 KTX를 탄게 두번째였다. 전에는 바로 입대하기 전, 눈 딱감고 대전-서울간을 KTX특실로 타본적이 있었다. 좌석이 좀 양호하긴 한데 새마을호 일반석이랑 큰 차이가 없었을뿐더러, 요금은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물론 전용선 구간에서는 엄청 빨랐지만, 아직 호남선은 전용선이 없는 곳이다.

일반석은 예전에 본적이 있었다. 무궁화호보다 작고, 뻑뻑하게 움직이는 의자. 눈 딱감고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의외로 안이 어두워서 잠이 왔지만, 불편해서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의자를 뒤로 미뤄봤지만, 움직이질 않는다. 설마 하고 앞으로 당겨보니, 확 당겨진다. 차라리 예전에 탔던 통일호가 더 편한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중에 만난 J형은 '배부른 소리 하네'라고 하면서 핀잔을 줬지만.

4.
어느새 KTX는 송정리를 지나, 목포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몇년전에 개량공사를 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열차에, 슬슬 굳어버린 몸이 풀리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내 몸이 익숙해진건가?

혹시나. 하고 남은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과연 지금 어디에 있으려나
"여보세요."
"저 A친구인데요, A있어요?"
"아, 서울서 친구 내려 온다고 목포 시내 나갔는데요."
"예. 알겠습니다."
"예."

뭐 목포에서 만날수 있겠지. 익숙해진 몸이 잠을 불러왔다. '공의 경계' 하권을 마저 읽으니, 30분 정도가 남는다. Nightwish의 Once 끝부분 두 트랙을 들으면서 눈을 붙이니, 목포역에 도착했다.

"어~ 용준아! 여기야 여기!"
"오호. 오늘은 제대로 나왔네? 평소에는 약속시간 늦는게 다반사고, 저번에는 서울에 버려놓고 집에 가더니만."
"오늘같은날, 서로 늦으면 안되지. 그러고보니 KTX가 좀 늦었네?"

시계를 보니 5분 늦게 도착한 KTX다. 정시에 도착했으면 딱일텐데.

"내가 운전한게 아니니까, 불가항력이다."
"그래, 핑계도 좋다."

햇수로 2년만에 해보는 A와의 어깨동무다. 어깨동무를 한채로, 목포역을 나선다.
이번에 A를 만나면, 한동안 A를 만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올해 말이 되면 A는 의무적으로 3년간 원양근무를 해야하고, 내가 전역한다 하더라도 A를 만나는건 그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번에 본 모습이, 바로 3년간 내 머릿속에 남을 A의 모습이고, 이번에 보여준 내 모습이, 3년간 A의 머릿속에 남을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우울함을 생각해봤자 뭐하랴. 몇달만에 이렇게 기쁘게 만났으니, 만남을 환영하면서 이 시간을 즐기는게 최고다.

"저녁 안먹었지? 뭐 먹을려고? 골라봐!"
"순대골목이나 가자. 낙지 볶음은 오늘 별로 안땡긴다. 야."
"그러면 든든하게 순대국밥에 족발 시켜놓고선 진~하게 소주 한잔 하고, 호프집에 가서 맥주 한잔 하자!"
"그래! 좋아! 오늘 가는거야! 유후!"

- 2006년 6월 2일의 자그마한 추억을 되새기며.

P.s 며칠전, A군과의 전화통화.

A군 : "나 장학금 탔어!"
용준 : "...그런데 너 계절학기 왜듣냐?"
A군 : "알면서 묻냐. 2학년때 구멍돛별 메꿔야 할거 아냐."
용준 : "그래. 잘 메꿔봐. 또 시험전날 술이나 퍼마시지 말고."
A군 : "그나저나, 며칠뒤면 또 나간다면서?"
용준 : "...무슨 며칠뒤야? 오랜만이지. 맨날 나가는거 가지고 트집잡네."
A군 : "나올생각이나 하지말고, 전역할 생각이나 하세요!"
용준 : "쳇." 

  
 
 
 
병장 이은호 (2006/06/22 20:48:31)

재미있는 글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친구가 생각나네요.    
 
 
 병장 노지훈 (2006/06/23 04:29:37)

2. 역시 여자 분들께 인기가 많으신 것 같네요~    
 
 
상병 조주현 (2006/06/23 09:42:44)

2. 묘하게 염장성인데요? 

그나저나, 언제 병장다셨죠?(먼산..)    
 
 
병장 조용준 (2006/06/23 10:47:53)

지훈// 뭐, 막상 보면 인기 진짜 없게 생겼습니다.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외모는 스켈레톤+가죽이라. 

주현// 한 이주일동안 들어온건 딱 한건. 실패는 다섯번입니다.(쿨럭) 
그리고 병장된지는 좀 되었어요. 이제 2호봉 넘었네요. 뭐, 이동네는 병장부터 시작이라는게 문제지만.    
 
 
상병 정준엽 (2006/06/25 17:11:24)

part 2중에. 
"저쪽은 내심 실망하는 눈치다. 뭐야, 지금 작업"... 음... 
우리는 "내심 실망"했고, "뭐야, 지금" 염장을...    
 
 
상병 송희석 (2006/06/25 19:28:02)

이정도 염장가지고 뭘. 흐흐흐. 전 기차에서 50대어르신이 저하고 같이 타면 꼭 이름하고 연락처를 물어봅니다. 왜냐구요? 자기딸 소개시켜준다고! 음하하하! 용준님 부럽죠? 음하하하! 아 저 지금 미쳐가나봅니다.    
 
 
병장 조용준 (2006/06/25 20:30:03)

준엽, 희석// 왠지. 당분간 책마을의 주적으로 제가 올라갈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일병 김지민 (2006/06/26 08:23:21)

후아 재밌게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