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한국문화를 감상하고 향유하고 편애해야한다. 
 
 
 
 


봉준호 사단의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등이 출연한 <괴물>이 칸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서 개봉하기도 전에 해외 평단의 극찬을 얻어냈다. 이로써 봉준호 감독은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등에 이어 세계에서 주목받는 한국 감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괴물>의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 대만 등의 해외 시장에 판권을 팔아 아직 한국 개봉은 하지도 않은 시점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했다는 놀라운 소식도 전해진다. 

이정도로 호평이 자자하다면 조금 거만해지고 어깨를 들먹거려도 될 텐데 봉준호 감독은 유달리 겸손하다. 그는 많은 한국 관객들이 <괴물>을 봐줬으면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해외 평단에서 찬사를 받고 세계 여러나라에 판권을 팔았어도 <괴물>은 여전히 한국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외국 관객들이 <괴물>을 보며 많이 웃었지만, 이 영화에 녹아든 한국적 상황을 100% 이해할수는 없었을 거라고. 또, 한국의 개봉날, 관객들이 영화의 요소요소를 보고 함께 느끼길 기대한다. 

보편적 세계 정서를 얻을수 있는 한국영화지만 한국영화는 여전히 한국적 토양에서 자라난 한국감독이 한국배우를 주연으로 쓰고 한국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영화라는 말을, 봉준호 감독은 '한국적 상황의 100% 이해'라는 말로써 완곡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한국인이 아닌 타국인이 <괴물>을 100% 이해할수 없는건 당연하다. 

외국인들중 어느 누가 초등학교때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탔겠으며, 누가 열대야가 유독 심했던 더운 여름날 한강 고수부지에서 고기를 구워먹었겠으며, 그 누가 추운 겨울날 한강 벤치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이별을 통보받았느냐 말이다. 한강이라는 국민적 정서를 대변하는 민족의 물줄기를 대상화하고, 그곳에 나타난 괴물, 그리고 그에 얽힌 국내의 정치적이고, 관습적인 문제들에 대항하는 소시민들.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1920년대(?)의 뉴욕을 그려낸 <갱스 오브 뉴욕>을,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는 언론인을 다룬 <굿나잇 앤 굿럭>같은 영화를 100% 이해할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유독 한국문화를 소비하는걸 좋아한다.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해외 아티스트의 음반들이 있지만 그래도 익숙한 한국인의 정서에 호소하는 가요를 좋아하고, 문화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대중성, 전문성을 두 갖춘 외국작가들의 번역 작품보다 박민규나 김영하같은 한국 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더 챙겨 읽는다. 해외 헐리웃이나 유럽 영화보다 한국 충무로 영화를 더 많이 보고, 탄탄한 드라마적 요소를 갖춘 외화보다 쓰레기라고 욕먹고 매일 같은 레퍼토리로 진행되는 한국 드라마를 차라리 더 좋아한다.

이런 나를 국수주의자라고, 민족주의적 사상에 찌든 지독한 보수우파라고 손가락질 하는건 절대 옳지 않다. 국수주의자들이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는건 순전히 '우리문화'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 안에서 독보적으로 발전해온 닫힌 문화가 세계화라는 시장의 개방에 더 우월하다고 설파하는 미국을 위시한 거대자본주의 국가들의 문화앞에서 힘을 잃고 사장되어가는 자기 민족의 우수성이 잊혀지고,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꼴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자국문화 우월주의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기득권이 되면 제 2의 미국이 되어 약소국에게 우리 문화를 강요하게 되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만다.

나의 한국문화 감상과 편애주의는 국수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소통의 문제'일뿐이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한국감독이 한국관객을 대상으로 만든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영화는 아무리 외국관객에게 찬사를 받아도 그건 진정한 찬사가 아닌 것이다. 한국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고 영화에 녹아있는 한국적 정서를 100% 공감하고 감독과 소통하고, 영화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감독의 보람이요, 한국영화의 목적인 것이다.

과거 우리 민족의 분단을 다룬 <공동경비구역JSA>가 그랬고,<실미도>,<태극기휘날리며>,<웰컴투동막골>도 그랬다. <왕의남자> 또한 과거 우리의 놀이판을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국내 관객들과 소통하길 원했고,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통해 내민 손에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화답하여 한국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일궈냈다.

<너는 내운명>의 티켓다방, <말아톤>의 초코파이, <그때그사람들>의 박통. 모든 영화적 디테일한 요소들은 한국 관객들의 정서에 포착되기 위해 대기중인 것들이었다. 한국인이 아니면 100%이해할수 없는 그런 요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총체적 위기는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자들과 한국문화를 향유하는 대중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콘텐츠 생산자들은 적극적으로 국내 대중들과 소통하길 원해야하고, 친히 그들의 일상에 눈높이를 맞추며 다가가야 한다. 물론 세계문화들과 경쟁하기위해서 문화를 위한 문화를 추구하는 태도는 여전히 유지해야 하지만 그 고지식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태도는 대중에게 숨겨져야하고, 오직 드러나는 것은 친근감과 한국적 일상 등에 촛점이 맞춰져야 할것이다.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 역시 한국 문화를 너그러운 태도로 향유해야한다. 콘텐츠 생산자들이 친히 대중의 눈에 맞춘 문화들을 생산해 낸다면 대중들은 그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그 문화를 통해 소통하고, 서로 공생할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야 할것이다. 그 문화들은 대중들의 눈에 포착되기를 기다리고있고, 대중은 그것들이 원하는 한국적 정서를 100%이해하며 -타국인들은 절대 느낄수 없다는 우월감 또한 함께- 한국문화를 향유해야 할것이다.

외국 작품은 외국어로 되었다. 스포츠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화들이 그렇다. -스포츠 또한 경기 규칙등에도 외국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작품의 원작 느낌을 그대로 얻으려면 우리는 외국어에 숙달되어야한다. T.S.엘리엇의 시가 그렇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그렇다. 원작을 읽고 받는 원작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려면 영어를 익혀야하고, 그 단어가 내포한 속뜻까지도 줄줄이 꿰어야한다. 애니메이션 <슈렉>이나, 에미넴의 랩,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보고 들으면서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려면 영어의 느낌과, 스페인어의 운율에까지도 익숙해져야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아즈망가 대왕>의 말장난을 이해하고 웃으려면 일본어를 알아야한다.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는 언어의 덫에 걸려있다.

언어의 벽을 넘었어도 우리는 외국작품이 내포한 그 나라 특유의 정서를 이해하는데에도 투자를 해야한다. 작가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은 자라온 환경, 즉 국가에 귀속되고,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이 표현해내는 것은 그 나라의 보편적인 정서에 소구하는 것들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유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유전자 GENE이 있다면 민족의 기본적인 유전적 특성을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민족의 유전자 MEME이 있다고 어느 문화학자가 이야기한다. 

인간이 진화해오면서 인간 지금의 외양을 유지할수 있도록 인간의 기본적 유전자들을 후세에 유전했다면, 민족 또한 생태학적 관점으로 봤을때 인간과 마찬가지로 진화하고 민족적 특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유기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민족인것 처럼, 일본인들은 와(和)를 중시하는 민족이고,(Thanks to 익준) 북유럽 민족은 호전적이고, 미국인들은 개척정신이 강하고 등등... -반론이 달릴걸 방지하는김에 추가 보론을 하도록 하지요. 인간이 하나의 잣대로 획일화 될수는 없다는거.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일렬로의 나열은 폭력이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민족의 보편적인 특성 같은것. 민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 그건 거부할수 없는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필요악 적인 부분이기도 하구요.- 각각 민족 고유의 특성이 각 민족들 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민족들이 겪은 식민지사나, 9.11 테러같은 것들은 그 나라 민족이 아니면 완전히 이해할수 없는 말 그대로 '딴 나라 이야기' 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9.11 테러에 관한 <플라이트 93>이라는 영화를 봐도 영화에 내포된 테러의 공포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고, 서구의 신화와 민담을 뒤섞은 <반지의 제왕>을 읽어도 골룸이나, 작품의 스펙터클함을 기억할뿐이지, 서구사람들이 신화,민담의 재해석에 열광적으로 호응했던 것처럼 호응하기는 힘든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사와 광복이라는 팩트를, 픽션으로 통째로 뒤엎은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같은 영화를 외국관객에게 보여줘도 관객들은 이동국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의 디테일한 부분에 분노할수없다는 소리다.

유독 딴지걸기 좋아하는 사람이 동포2세를 언급하며 딴지를 걸수도 있겠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영어로 꿈도 꾸고, 미국의 역사를 배우며 미국적 정서에도 통달해있지만, 부모님은 한국인이라 한국어도 배우고 피속에 남은 한국인에 대한 민족의 유전자를 가진 동포 2세는 분명히 미국적 정서에 소구하는 문화와 한국적 정서에 소구하는 문화 둘을 100% 이해할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된다면 수준낮은 한국 문화는 자연히 멀리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물론 여러 나라의 문화와 온전히 소통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것이다. 날이 갈수록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지구촌 주민들이 늘어나는 지금 추세로 본다면 그 비율은 점점 늘어날 것이고. 

하지만 같은 문화, 언어권에 속한 사람이라도 작가의 심정에 100%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같은 한국어인데 왜 이리 다르냐며 푸념하는 옛말처럼 우리는 같은 민족임에도 세대간의 장벽, 경제적인 장벽, 지역간의 장벽들로 나가 종족의 '니름'이 아니라면, 완전 소통의 꿈을 꾸기 힘든 현실이다. 65억의 지구인이 있다면 65억개의 고독이, 65억개의 감수성이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와 온전히 소통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나라에서 통용되는 예를들어 한국이면 한국적 정서에서 만큼은 100% 이해할수 있다는 소리인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한국인들에게는 소통의 비대칭성에 호소하며 한국문화를 향유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면 충분히 설득가능하지만, 동포2세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소통이란 현실적인 완전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평등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느것이 소통이 더 잘되고, 안되고의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난 '가능성의 투자'라는 말로 동포2세, 지구촌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우리들의 신(新)문화 역사는 짧기만하다. 세계적인 것들과 경쟁하면 힘에 벅차기만하다. 그러나 우리문화의 가능성은 크기만하다. 얼마든지 관심을 가져주면 세계적인 반열에 이름을 올릴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 영화제에 초청되는 한국 감독들을 보라. 유럽의 평단에서 극찬을 받는 한국작가들을 보라. 세계유명리그에서 활동중인 한국 선수들을 보라. 한류 열풍으로 아시아를 휩쓸고 이제 미주, 유럽을 휩쓸 준비를 하고 있는 한국연예계를 보라. 민족의 냄비근성-장점에의-과 특유의 초단기, 고효율의 가속도로 무장한 우리 문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소수자이자 약자인 달동네 사람들의 삶이 부르주아들과 비교해서 구질구질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기가능성까지 꺾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문화가 세계적 명작들과 비교하여 찌질하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무관심하여 한국문화의 발전가능성까지 꺾어버린다면 우리는 앞으로 세계에서 통하는 독자적인 한국적 문화를 만들어낼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내셔널 스탠다드를 따라가기 급급한 뒤처짐 문화를 양산해내기 바쁘다는 말이다.

우리의 문화는 가능성이 있고, 저력이 있다. 비록 소수이고 뒤떨어지는 문화이긴해도 문화적 다양성의 관점으로 보고, 한국문화에도 충분한 투자를 해주어야한다. 그런 문화적 토양에서부터 한국문화는 발전하고 국내 대중들과 소통하며 세계 보편적 정서로까지 발돋움할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문화를 감상하고 향유하고 편애해야한다. 아무리 촌스러워도 그것은 우리의 문화다. 세계화되면서 각 나라의 서열화가 이루어졌다. 소설가 박민규의 말처럼 문화의 우루과이 라운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의 문화 논리아래 다른 다양한 문화들은 헤쳐모이며 바벨화 되어간다. 

그러나 그 분류법은 틀렸다. 문화간의 우열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다양해져야 한다. 경제성의 우열법칙은 문화에 대입해서는 안되는 '틀린' 공식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스크린쿼터제를 반동강 낸 경제논리에 적극 반대하고, 아직도 투쟁중인 국내 영화인들을 지지한다.- 유네스코가 작년에 드디어 문화다양성 협약을 인준하였다. 문화는 우열의 법칙으로 재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여전히 우열의 법칙을 대부분 지키고 있다.

한국문화가 한국의 대중과 소통하며 풍부해지고 발전된다면 얼마든지 세계적 반열에 이름을 들이밀때가 나타날 것이다. 문화적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한국인 특유의 빠른 가속도로 인하여 그 시대는 조만간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즐기지 않는 대중탓에 한국문화는 계속 정체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자. 한국 중심으로 생각하며 세계를 살아가보도록 하자.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에, 한국문화의 저력에 한국인만이 누릴수 있는 한국문화와의 소통에 근거를 두며 한국문화를 아낌없이 향유하도록 하자.

그것에서부터 진정한 문화의 세계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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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드디어 지난 주말 써두었던 모든 글을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난 계속 똑같은 얘기를 뭐 이렇게 많이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양화, 다양화, 다양화.

음, 지난 주말 월간 <맥심>을 보던 중. 위치스의 보컬 하양수씨가 했던 인터뷰의 대답이 생각나요. '왜 이 좋은 세상을 반항하며 사나?' 는... 반항하지 않으려고, 체제순응적이 되려고 삶과 일상에 사고까지도 편입시키며 살아봤지만. 변화에 반항은 필요하듯, 변화를 늘 갈망하는 제 삶에서 반항은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나봅니다.

눈에 보이는 구속이 점점 해체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오랫동안 꿔왔던 꿈. 비상을 하기위해 반항은 커녕, 제 날갯짓하기도 바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결국 반항이었고, 그게 결국은 기성사회로의 저항이 되더군요.

그래도 저는 이 행동들을 날갯짓이라고 믿어보렵니다.
무한한 창공으로의 힘찬 날갯짓. 

우리 모두 사회적 엔트로피 증가에 동참해보는건 어떨까... 싶네요.

비오는 오늘 하루도 즐겁기만 합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22 11:06:40)

선리플 후감상. 
근데 좀 겁나는 제목이긴 한데요.(웃음)    
 
 
상병 조주현 (2006/06/22 14:42:46)

정말 괜찮은 좋은 글이었습니다. 

문득, 신나는 판소리를 들으며 외국 보컬들과 비교해가며 창법공부를 하던때가 생각나는군요.    
 
 
병장 권기범 (2006/06/22 14:58:09)

외국인들중 어느 누가 초등학교때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탔겠으며, 누가 열대야가 유독 심했던 더운 여름날 한강 고수부지에서 고기를 구워먹었겠으며, 그 누가 추운 겨울날 한강 벤치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이별을 통보받았느냐 말이다. 
- 아무리 수도권 인구만 1천만이고 대한민국이 서울공화국이라지만, '지방' 사람으로서 왠지 씁쓸한 감정이 듭니다.    
 
 
병장 박준응 (2006/06/22 15:13:02)

문화와 언어라는 측면에서 절대적인 동감. 
언어의 덫, 이미 온몸에 녹아 있는 문화의 옷이 있기에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눈을 높이 두고, 조금 더 많은 세계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것들에서 눈을 떼서도 안 되겠죠.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참 어렵지만요.    
 
 
 병장 박진우 (2006/06/22 15:30:07)

기범/ 저는 한강에 대한 저의 지독히 주관적인 일화를 꺼냈다는 사실로 저를 변호하고 싶습니다. 지방 사람들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젖줄, 한강에 대한 추억이 설마 없으시겠냐만은... 이건 역시 지역간의 장벽이라면 장벽이랄까요.    
 
 
병장 엄보운 (2006/06/22 17:28:31)

전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준응씨가 이야기 했던 좀 더 보편적인 정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예요. 불라불라불라불라~ 

폭력적 보편의 문화 아래 짓밟힌, 무엇이 우리의 특수한 문화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지금의 우리에 대한 글이라 생각할게요. 동환씨 말대로 좀 무서운 제목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제가 언급한 내용을 진우님께서 모르시리라 생각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환기는 분명 필요하다 생각해요.)    
 
 
병장 이은호 (2006/06/22 20:41:39)

잘읽었습니다. 
세계의 우수한 문화들(영화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모두)을 익히 들어오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것. 남들이 추레하다고 하는 것.들이 당깁니다. 
(실상 접해보면 우리의 것이 더 좋은게 많지요. 기준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데로 새는 느낌이 있지만.. 언어... 

우리는 미국가면 미국말, 일본가면 일본말, 중국가면 중국말. 
이렇게 공부를 하고 가서 그 나라의 언어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방문한 그 나라 사람들은 자기나라 언어로 이야기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방문하면 
외국인들은 여전히 자기나라 언어로 이야기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꼭 그 나라 언어로 이야기해주려 안간힘을 쓰는 걸까요.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한글. 세계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한글에 대한 열등감입니까? 
전 국문학도는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사랑합니다. 
지금은 한글을 완벽하게 알진 못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부분이지요. 

어찌되었든, 한글뿐 아니라 우리말로 된 모든 문화들,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들의 '한국성'을 사랑합니다. 
(조금 흥분된 상태로 쓰는 글이라 앞뒤가 하나도 안맞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양해부탁드립니다.)    
 
 
중위 이정민 (2006/06/26 13:53:03)

한국인은 한국문화를 감상하고 향유하고 편애해야한다? 

과연 그 한국문화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사람이 생산하는 문화면 한국문화라고 하는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이 소비하는 문화면 한국문화라고 하는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이 생산하면서 소비하는 문화를 한국문화라고 하는지? 
아니면 문화의 소재가 한국과 연관되어 있으면 한국문화라고 하는지? 

괴물 이라는 영화와 헐리우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가요, 이효리 음악과 팝 음악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나라 인기 드라마는 한국문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 드라마는 무조건 한국문화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한국문화를 반영하지 않더라도 한국문화가 되는 것일까요? 

그럼, 한국인은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할까요? 
국적이 한국?, 아니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 아니면 한국에서 자란 사람? 
아니면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국적이 한국인 사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면 문화적 소외는 당연한 것인가요?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에서의 문화적 소외는 당연한 것인가요? 
그럼, 해외동포들은 영원히 문화적으로 소외되는 것도 당연한 것인가요? 
프랑스에서의 이민자들의 소요사태는 당연한 현상인가요? 
문화적으로 서로 100%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을 뽑을때 우리지역 출신은 우리를 100% 이해하므로 우리지역 출신을 뽑아야 하나요? 
대통령 역시 우리지역 출신을 뽑아야 우리를 100% 이해해 줄 수 있는 건가요? 

사람을 사귈때는 외국사람보다는 한국사람을 우선적으로 사귀어야 하나요? 
왜냐면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자들은 적극적으로 국내 대중들과 소통해야 하며 .... 
세계문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 한국적 일상등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라는 것은 

같은 논리로 
미국의 콘텐츠 생산자들도 적극적으로 미국내 대중들과 소통해야 하며 
미국적 일상등에 초점을 맞춰져야 할것이라는 것, 즉 지극히 미국적이어야 하다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요? 
또한, 세계문화와 경쟁하는 구도가 맞다면, 헐리웃의 정책이 맞는 것 아닌가요? 

문화의 우열은 없다고 하면서, 왜 세계문화의 반열에 올라야 하고? 왜 세계문화와 경쟁해야 하는 거지요? 
글에서 한국이라는 단어 대신에 미국으로 치환한다면, 서로 무엇이 다른 건가요? 

왜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은 “한국문화“를 너그러운 태도로 향유해야 하나요? 

한국사람이라서 김치를 먹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면, 
미국사람들이 김치 안먹고 햄버거를 먹는게 당연하고 
중국사람도 김치 안먹고 탕수육 먹는게 당연한건가요? 

미국음악을 베껴낸 음악을, 그것이 한국문화인지 정체불명의 문화인지 알 수도 없는데, 
타국인들은 절대 느낄 수 없다는 우월감으로 향유해야 하나요? 

피자는 한국음식인가요? 외국음식인가요? 
짜장면은 한국음식이라서 피자보다는 짜장면을 더 많이 시켜먹어야 하나요? 
예전 절대적 인기를 차지했던 짜장면이 지금은 피자의 위상에 미치지 못하는 데,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것 짜장면을 시켜먹으면서 우월감을 향유해야 한다는 건가요? 
알고보니 짜장면도 우리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제부터는 돼지족발을 시켜 먹어야 하나요? 

어느 나라 음식인지 따지지 않고 핏자, 짜장면, 카레, 만두, 초밥, 탕수육, 비빔밥, 돼지족발등 
다양하게 먹으면 안되나요? 어느나라 음식이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닌가요? 

학교에서 점심때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을때, 
내가 싸온 도시락 반찬은 우리집에서 싸온것이라 내 입맛에 제일 잘 맞으니까, 
딴집 도시락 반찬보다 내가 싸온 도시락 반찬을 먹는 게 맞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싸온 도시락 반찬을 골고루 맛보는 게 맞는 건가요? 

우리는 신데렐라와 콩쥐팥쥐를 따로 이해하나요? 
콩쥐팥쥐는 한국것이라서 소통이 가능한데, 신데렐라는 서양것이라서 소통할 수 없나요? 

70년대를 살지 않은 사람은 70년대 문화를 제대로 향유할 수 없는 건가요? 

우리는 중국사람이 아니라서 삼국지와 소통하지 못하고, 로마인이 아니라서 로마시대와 소통하지 못하나요? 
만약 나는 중국사람이 아니라서 삼국지와 소통하지 못하고, 로마인이 아니라서 로마시대와 소통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문화인이 아니라서 그런건 아닌가요? 

자기중심적인 생각, 자국 문화 중심적인 생각, 자국 문화 우월주의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를 진정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국가, 인종, 역사, 시대를 초월하여 설사 그 과정이 힘들고 쉽지 않더라도 그 과정까지도 즐길 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인종, 민족, 국가, 
언어, 음악 
음식 
문화 
라는 것 단일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퓨전... 
우리가 우리만이 아니고, 우리것이 우리것만이 아닙니다.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해 보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죠. " 
거기서 새로운 레파토리가 시작되니까...    
 
 
상병 민경국 (2006/06/28 14:32:38)

벤야민은 언어 간의 '번역 가능성'에서 진리를 발견할 여지를 보고, 
번역 과정에서 나타나는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차이'를 
진리의 파편으로 이야기하죠. 
언어를 문화와 사회의 기표로 본다면(좀 과격한 단순화일지도 모르지만) 
문화의 다양성은 당연히 담보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은 결국 자신의 모어를 통해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고, 
언어라는 기표를 넘어선 지점에 도달하려면 모어를 통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어를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뛰어넘기는 불가능하고 
그런 깊은 이해는 모어에 대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는 태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