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님과 시용님의 두 번째 대화 : 기적과 묵시문학 그리고 사랑 
 
 
 
 



(송희석님의 질문)

시용님께 : 두번째 대화를 신청하며


일단 먼저 죄송하단 말씀부터 시용님께 드리겠습니다. 보통 이러한 큰 질문을 던질때 최소한의 예의나 혹은 최소한의 부가설명을 해야한다는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점에 대해 진심으로 거듭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립니다. 일단 시용님께서 제가 성경 무오설과 유오설을 물어본것에 대해 의문이 충분히 생겼을거라 판단합니다. 저번 두글을 읽었을때 시용님께서는 몇 번이나 ‘성경을 읽어보라!’라는 말을 강조하셨고, 저는 그 글을 보고 시용님이 성경무오설에 입각하는 기독교인이라 판단을 혼자 지은것입니다. 허나 제가 남긴글의 답글을 보니 제 판단이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시용님의 신앙의 원점을 흔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신앙과 성경사이에서 신앙보다 성경이 우선되는것을 너무나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제가 쓴 졸작 ‘기적에 관하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적이 있어서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있기에 신앙이 있다는것도 저는 올바른 신앙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나 시용님의 최근 답글을 읽어보니 신앙이 절실한 분이라 생각을 하고 더 이상 그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시용님이 철저히 오해하신 ‘성경의 해체’를 집고넘어가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해체’는 자끄 데리다라는 철학자를 필두로 하는 포스트 구조주의 학파에 이론중 하나입니다. 제가 여기서 성경의 ‘해체’의미를 길게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고, 일단 간단하게 그 의미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그전의 해체적 읽기를 설명해 봅시다. 해체적 읽기란 문자에 고정된 이미지 혹은 문자화된 진리의 대한 편견에 도전하면서 문자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경전화된 텍스트와 이를 통해 진리의 역할을 하는 관념들을 비판함으로써 기존의 진리체계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재구성일것입니다. 즉, 의심과 해체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과 재구성을 위해 새로운 의미 체계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롭게 찾아진 의미가 전적으로 주관성에 매몰되지 않는 해석학적 반성이 필수적입니다. 해석자에게 부여되는 의미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해석자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그 신뢰성은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체적 읽기입니다. 이미 롤랑바르트가 언급을 했으며,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이것을 기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제 ‘해체’라는 말에 대해 길게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이정도면 오해는 풀렸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또하나의 오해인 시용님이 말씀하신 ‘겉으로 들어나 진리행세를 거두는’이란 말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전후문맥을 잘 살펴보고 하셔야 합니다. 성경 겉으로 들어나 있는 텍스트 위주의 해석으로만 진리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거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성경텍스트 환원주의 시각에 빠지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글을 쓸 당시 시용님을 이미 오해한 상태에서 그렇게 쓴 글이므로, 이미 오해가 풀린 이상황에서는 제가 더 이상 드릴말씀은 없을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오해인 ‘노템전’이라는 말에 대해 풀어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그것을 쓴것은 당시 용준님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상황에 대한 서로간의 비밀용어인데, 솔직히 비밀용어라기 보다는, 우리가 보통 이렇게 큰 이야기를 할 경우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갖고있는 자료는 오로지 성경밖에 없으며, 그저 머릿속에 남아있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대화는 결국 노템전이라 명칭하게 된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전쟁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주시면 안됩니다. 아무런 자료도 없이 서로가 머릿속에 있는 자료들을 더듬으며 논쟁을 하는것이 굉장히 어렵지만, 서로 얼마만큼 순수지식을 교환할수 있는 것인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일단 제가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오해를 낳게 한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오해가 없도록 제가 주의해서 글을 남기겠습니다.

자 저는 시용님과 오해를 풀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시용님이 오로지 성경에 국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 굉장한 착각을 한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을 한것에 대해 먼저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고 이제 저는 비기독교인으로써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들을 질문하겠습니다. 이것을 풀수만 있다면 아마 수많은 기독교를 떠나간 사람들도 다시 돌아올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질문 - 천국, 요한계시록, 묵시론 -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독교 강박관념

이제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로 넘어왔습니다. 1999년이 지나 2000년이 온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어설픈 종교들은 첫 번째 천년이 끝날 즈음에 인류는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서기 1천년에 관한 전설, 다시는 밝아 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며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광경을 표현하는 문서들이 상당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종말관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기독교 교리안에 있던 것입니다.

양면성을 가진 무시무시한 책 ‘요한계시록’, 그리고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외경들을 보면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효과와 열정과 공포와 감정의 소용돌이 측면에서는 꽤 깊이 있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이러한 문서는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도 읽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헌들은 21세기가 도래해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써있는 일곱 나팔이나 우박, 피로 변한바다, 별들의 추락, 끝없이 깊은 지옥구덩이에서 올라온 연기와 그속에 나온 메뚜기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곡과 마곡의 군대 따위는 지금 더 이상 나올수 없는 현실이지만, 통제되지 않는 핵폐기물, 사라져 가는 아마존, 오존층에 생긴 구멍, 집단적으로 생겨나는 기아, 치료가 불가능한 에이즈, 이기적인 사용에서 비롯한 토양의 파괴, 변화하는 기후, 빙하 융해에 따른 지면상승, 복제인간등등 수많은 현대적 종말등이 거론됩니다. 심지어는 인류 때문에 소멸할 위기에 처한 동식물 종들과 인류 때문에 병들고 질식해 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류 스스로 자살이 불가피하다는 극단적인 환경론자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사상은 유대의 묵시사상이라는 모체에서 발흥한 것입니다. 가령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묵시사상의 주제중 하나인 종말론과 관련이 깊은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재난의 징조에 관한 예수의 이야기도 전형적인 묵시사상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가 묵시사상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묵시'라는 말은 헬라어 '아포칼입테인'에서 유래한 단어로, '비밀의 신비를 들어낸다' 또는 '폭로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대게의 묵시론은 공동체의 정체성이 외부의 심각한 폭력에 의해 위기에 직면할 때 생산됩니다. 가령 구한말의 최제우의 동학이 주창한 개벽사상이나, 강증산의 천지공사, 그리고 김일부의 정역 사상은 외세의 침탈과 지배계급의 수탈로 현실적 희망을 잃은 조선 민중의 묵시론이라 할수 있습니다. 현실의 폭력과 박해가 심할때, 이에 대항할 최소한의 물리적 수단조차 없을때, 민중들은 '해방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들의 고난을 합리화 시킵니다. 그들은 상상의 세계속에서 외부의 폭력을 상징적 형태로 격퇴합니다.민중들의 정체성 위기는 이를 통해 현실적으로 해결되기보다는 상징속에서 해결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이 묵시론은 유언비어이자, 저항론인것입니다.특히 묵시론은 악한 세력의 역사지배로 인해 희망과 단절과 절망적 고난에 직면한 공동체에게 현재의 부조리한 역사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묵시론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이들이 처한 현실의 고난과 이에 대처하려는 독특한 역사이해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묵시론은 현재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즉 현재의 역사를 악의 세력이 장악하고 통치하는 시대로 이해하면서 역사의 지평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빛에 속한'무리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나머지부분들을 '어둠의 자식‘ 이라고 규정짓기 때문입니다.또한 묵시론의 역사진행은 발전의 과정이 아닙니다. 미래의 희망은 오직 역사의 종말에 있습니다. 이것의 핵심은 시간적 이원론인데, 그것은 현재의 시대와 앞으로 올 시대로 나누어 집니다. 전자는 악의 시대요 후자는 신이 통치하는 의로운 시대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는 의인이 고난받는 시대고, 미래의 시대는 의를 지키고 사수한 자들만이 참여하는 영광의 시대인것입나다. 즉, 묵시론의 역사이해에서 종말론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묵시론의 관점에 따르면, 새시대는 역사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 완전히 종결됨으로서 도래된다고 한다. 따라서 묵시론의 종말론은 '절대적, 혹은 극단적 종말론'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저는 시용님께 진심으로 묻고싶은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불가피한 것으로 느껴질때마다, 또 희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나님 역사가 도래한다는 종말에 대한 찬양이 들어설때마다, 결국 천년왕국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종교를 선택하는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어떠한 의지적인 행위나 이성적인 성찰의 개입은 다 무시한체 오로지 교리에 따라 기독교를 믿은 자만이, 혹은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천국을 갈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초인 이데올로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같이 공유할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궁극적으로는 없는것입니까? 결국은 기독교인이 우월한 입장에 취하여 비기독교인들을 구원해주지 않는이상은 우리는 모두 지옥이라는곳에 갈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까? 만약 그런 운명이라면 저는 바보상자에 파뭍여 코메디 프로나 보면서 희희낙락거리다 죽는것이 더 좋을것 같습니다. 

저는 미래 - 즉, 죽음 - 에 대한 희망을 신념으로 찾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죽음으로 그것을 기억하게 한 전태일씨를 떠올려보며, 그전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혹은 국가를 위해 죽었던 수많은 민족주의분들을 기억하며, 각종 병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먼 타국땅에서 봉사하는 수많은 봉사활동자들 등등 비록 그들이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라는 기독교신을 믿지 않더라도 저는 그들은 이미 원죄는 없으며 그로인해 죄를 받을일이 전혀 없다고 믿고싶습니다. 아니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이제 전 시용님에 따뜻하면서도 절실한 기독교인의 답변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덧. 여태까지 글을 쓰면서 너무 제가 기독교를 비방하는듯한 느낌이 들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시용님을 마치 죄인심문하듯이 물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세 번째 질문을 포기하고, 시용님이 저한테 질문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써 시용님은 비기독교인들에게 궁금한점이 충분히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저한테 궁금한점이 있을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점에 대해 질문해 주시면 열심히 답변하겠습니다. 그럼 서로가 좋은 대화의 장을 마칠수 있을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럼 이만







(박시용님의 답변)


예..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 두 번째 글도 보니 신약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쌓아오셨던 것 같네요. 그리고 저번의 ‘해체’니 ‘겉으로 드러나 진리 행세를 거두는’등등의 표현. 물론 문맥적으로 다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어는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것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아무런 부가 설명없이 그런 어구를 선택하셨던게 마음이 언짢았던 겁니다.


결국엔.. 결국엔 예정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이 예정론이란게 이단에 대한 논쟁을 제외하고선 신자와 비신자의 논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시록’ ‘예언서’라는 이름을 가지고 현대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언가 환상’을 심어주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언급도 나왔습니다. 저번 글에서 제가 자세한 내용의 성숙된 답변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분께 질문을 요한다.라는 말씀을 드리기도 했었지만 희석님의 ‘순수한’ 의도라면 단지 ‘절실한 기독교인의 입장’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다시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의도하지는 않지만 결국 글이 길어질것 같네요. (우선 그 전에 꼭! 제가 올린 글인 ‘밑글의 성경내용(네피림, 사람의 딸들)과 성경을 읽는 관점에 대한 긴 답변입니다..’ 와 ‘결국..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선악과'에대한 내용입니다.. ’를 정독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얘기는 이어지지 않습니다.)(도움 : 이애실 저. '어? 성경이 읽어지네!) 


위의 예정론과 요한계시록에대한 설명에 앞서 희석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적이 앞선 신앙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한 언급은 우선 ‘비과학적인 현상’이라는 논쟁거리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국 논쟁의 끝은 ‘그럼 기적이라는 걸 보여봐라!’라는 명령적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자리에서 성경에 나오는 기적인 ‘이적’과 ‘표적’에 대해서 정리해 볼까요?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신대로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이 나옵니다. 많은 이적과 병든사람들을 치유하시며 설교를 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몸소 이루시며 ‘사랑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사망 후 부활후에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결국 하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을 결국 ‘사랑’이라는 두글자에 담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꼭 이적을 행하시면서까지 해야 하셨을까요? 그건 그 시대의 걍팍한 우리들이 안타까우셔서 였습니다. 2000년 전의 우리는 그때까지의 성경인 구약과 그 율법에 얽매여 사는 삶이었습니다. 하늘같이 믿었었습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하던 메시아가 나타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두번다시 없을 천년왕국을 건설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30살까지 목수로만 살아온 한남자가 나타나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자기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랍니다.’ 이런 망발(?)을 해대면서 안식일에도 환자를 고쳐주러 다녔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우리들이 보기엔 미친 정신병자였습니다. 12제자는 물론 예수님과 30년을 살았던 동생들도 믿지 못하여 갈등했습니다. 그들도 그러했는데 일반 민중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산이 옮기우라’하면 옮기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해야 멈춰라’하면 멈추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힘을 가진 분이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속에서도 가만히 계시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창에까지 찔렸습니다. 그 분께서 유일하게 보여주신 이적의 대상은 힘없는 우리들에게였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에게는 죽을때까지 맞아가시면서도 한마디도 안하고 굳게 입다무신 분이 나사로의 죽음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죽음을 이겨내는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배고픈 수천명의 백성들에게는 빵과 물고기를 한정없이 떼어주시면서 혹시 배 곯고 다니지는 않을까 걱정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도 우리들이 이적에 의해서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고 바로 구원받기 원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악하고 죄 많은 이 세대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나 예언자 요나의 증거 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마태복음 12:39, 쉬운성경) ] (이번 글에서는 쉬운성경을 인용할 것입니다. 고어체로 인해 마음깊이 느끼기 어려울 바엔 차라리 쉽게 번역된 표준새번역이나 쉬운성경이라도 읽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적을 보여주는게 목적이 아닌데..하시며

[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이한 것들을 보지 않으면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요한복음 4:48) ]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치는 사역’을 하신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일을 하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 사역은 예수님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병만 고치시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다면 이적의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이적을 행하시며 그 이적 뒤에 의미와 뜻을 펼치셨고, 그 가르치신 내용들은 후에 제자들의 기억속에 정예된 것으로 남아 오늘날 복음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그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메시야적 싸인, 즉 표적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영계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보이신 일입니다. 표적입니다. 그렇게서라도 메시야임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내가 너를 구원하러 죽어가면서까지 직접 내려왔단다.라고 말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 (요한복음 14:11) ]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적을 먼저 행하신것도 결국 메시야적 싸인임을 보여주신 것이지 희석님께서 글에 쓰신대로 ‘기적이 있어서 신앙이 있다’라는 것은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 목적이 되는 그런 종교를 믿는게 아닙니다.


사족이지만 영화장면 하나 예로 들어볼까요? 짐 캐리가 주연한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모건 프리먼이 하나님(여호와)으로 나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선 절대적 능력을 얻고도 그걸 올바르게 쓰지 못해 사고만 치는 브루스에게 찾아가 이런 말씀을 하시죠. ‘자네. 기적이 뭔지 아나? 수프가 반으로 갈라진건 단순한 마술에 불과할 뿐일세. 운석이 떨어지고 달을 잡아당긴것도 단순한 마술이지. 진정한 기적이란 바로 이혼한 미망인이 파출부일로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서 아이의 학교에 찾아가는 바로 그게 기적이야, 젊은 청소년들이 마약에 빠지지 않고 학교에 가는것이 기적이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게 기적이라네. 자네도 그런 멋진 기적을 한번 만들어 보게’(대사가 정확한건 아닙니다. 기억력에 한계네요.)

꼭 기적이란 사람이 공중에 뜨고 눈 앞의 물건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그런것만이 기적이 아니랍니다.





자. 예정론을 위해 언급하셨던 묵시문학에 대해 설명해봅시다.

이 기독교의 성경 중 묵시문학에 해당하는 각권의 책(요한계시론, 다니엘, 에스겔)들이 궁극적 목적이 희석님이 말씀하신대로 ‘종말의 예언’, ‘정체성의 위기에 따른 유언비어’, ‘새 시대를 위한 현재의 역사의 종결’을 의미하는지(전 솔직히 말씀드려 이렇게 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게 신기합니다.) 아니면 그토록 어렵게 쓰인 이 책들의 다른 목적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묵시문학은 성경말고도 여러 가지 경전이나 문학작품에서 쓰이는 광범위한 개념이므로 이하 밑에서의 묵시문학이라 함은 성경내의 세권(요한계시론, 다니엘, 에스겔)에 한합니다.)


묵시문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성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죠? 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구약시대때에는 솔로몬 왕에 와서야 건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멸망때 성전이 붕괴된 이후에도 학개, 스가랴, 느헤미야에 이르러 목숨을 걸고 성건을 재건하려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성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 개인에게 있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날 펼쳐질 하나님 나라에 그 ‘완성된 성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잠깐 모세로 돌아갑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동남쪽 시내산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쪽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는길이나, 수르광야길(가나안 직행길)로 인도하지 않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막을 만들게 하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내산은 전에 모세가 양을 칠때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장소입니다. 툿모세(바로)가문의 정적으로 몰려 미디안으로 쫓겨온 이후 평범한 범부로 살아가는 모세는 그의 일생을 걸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은 당신을 ”여호와, 스스로 있는자“로 소개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스스로 있는자(출애굽기 3:14)’로 번역했지만 영어성경에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말을 ’I will be who I will be"라는 새 be 동사의 미래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문에는 미래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초월신의 개념으로 이해되던 엘로힘, 엘리온, 엘샤다이 등의 하나님 이름으로 계시되었엇는데, 이제 여기서 소개되는 이름은 ‘내재하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면서(샤켄) 시시콜콜 간섭하시며 인도하실(미래형) 하나님을 소개하는 뜻입니다. 언약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이 태도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샤켄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도나이(주, Lord)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전 글에서 우리를 통치하실 하나님만 ‘왕’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왕으로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내 삶에 왕으로 임하셔서 작은 신음에도 반응하시는 하나님으로 거하신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사실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장면이 떨기나무사건입니다. 높이 계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시고 우리와 같이 사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하시려고 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안에 갇혀계실 수 없는 하나님인데 스스로 이 안에 들어와 거하시겠다(말씀이 육신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만들어 봉헌하는 날 ‘쉐키나(샤켄)의 구름’이 성막위에 뜬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에서 묵시문학이라 하면 요한계시록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성경에서의 묵시문학은 요한계시록 이외에도 구약의 에스겔, 다니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에스겔, 다니엘)하면 좀 선입견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에 대한 우리 느낌은 레위기, 신명기에서 느끼는 부담과 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레위기가 좀 지루한 느낌이라면 에스겔, 다니엘, 또 신약의 요한계시록의 부분부분은 한마디로 ‘좀 이상한(?) 책, 무슨 말을 하는지 비몽사몽인 것 같이 느겨지는 책’, 뭐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1. 묵시

그렇습니다. 이 다니엘서라든지, 에스겔, 요한계시록 같은 책을 그래서 독특하게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묵시문학(Apocalyptic)"이라고 불리우는 장르입니다. ‘묵시’란 꿈과 환상의 문학으로 보통 천상의 왕의 권력에 대해 말하며 미래적 구원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왕중의 왕이시며 이방 제국들은 정해진 때에 심판을 받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도 이 거대한 종말의 때에는 새 창조가 이뤄지며 죄악과 고통이 사라지고 죽음마저 정복될 구원의 완성이 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왕국의 궁극적 승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하나님이 왕이심을 드러내는 왕싸움이라고 쉽게 보자고 한 이야기 생각나십니까? 결국 그가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이 땅의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천상 세계 속에서도 왕이시기 때문에 그의 군대와 그의 보좌를 우리 식으로 묘사하려면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쓰신 분들도 이 내용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쓴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 비친 그림을 보듯이 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보기는 봤는데 그 보여진 것들을 나름대로 언어행위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에 그런 장면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당장 내일 초강대국 중 한 나라에서 광합성을 목적으로 한 인공태양을 쏘아 올렸다고 생각해봅시다.(하나님 왕국) 핵에너지를 통해 인공위성 처럼 지구를 돌면서 땅위의 사람에게는 가시적으로 보기에 태양과 같은 크기와 비슷한 밝기로 빛난다고 칩시다. 그 계획을 뉴스나 신문(요한 계시록)으로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스겔,다니엘,요한) 보기엔 어떻게 보일까요? 말그대로 해가 두 개가 떴답니다. 건물안에만 있어 창밖을 내다보지 않은 사람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해가 두 개가 떴다구요. 모두들 듣자마자 하는 소리가 미쳤답니다.)

특히 다니엘 마지막 12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환상을 봅니다. 실제로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으면서 해석해야 하는 책입니다. 바벨론이 메대와 파사에게 망하고 이후 알렉산더대왕 그리스에게 왕권이 이양되고, 로마까지 이어지는 ‘거대세력’(창 11장 바벨의 성격)을 꿈꾸는 자들이 있겠으나 결국은 멸망할 것이고 ‘내 나라’만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이 다니엘서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어떻습니까? 다니엘이 12장의 기록을 남긴데 반해 에스겔은 48장을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은 다니엘보다 약 8년 가량 늦게 바벨론으로 잡혀가는데 이렇게 많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물론 다니엘은 다니엘대로 활동했고, 에스겔은 에스겔대로 환상을 보았는데 그들이 결국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여러분, 이 나라 백성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미 백성입니까? 대단한 특권입니다.)

2. 인자(人子)라는 사람

이 묵시문학의 세권에는 인자(人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구약과 신약, 창세기 이전부터 요한계시록의 그날까지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살펴볼까요?

에스겔에서는 아주 독특한 내용과 사상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인자(人子)”라는 사람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도 이 ‘인자’가 나타나는데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시며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인자라는 말은 에스겔서에 93번이나 나타납니다. 여기서 인자는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의 아들’의 의미로 연약한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자’라는 호칭이 다니엘서에 나타날 때는 연약한 ‘사람의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다니엘 7:13, 8:15~19)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자(人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사용하셨던 용어입니다’(이 ‘인자(人子)’를 ‘인자(仁者)’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진사람, 좋은 분이시니까 당신이 그냥 그렇게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셨나 보다 하면 틀린 생각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에스겔, 다니엘이 본 환상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남방 유다는 망해서 다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없어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한 나라에 국한되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요, 사실은 ‘영원한 나라’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 이제부터 등장할 어떤 존재가 있는데 그가 ‘인자’다”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가지는 깊은 뜻이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니엘이 본 그 존재는 하나님 같은 존재인데, 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존재는 결국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람한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사람한테는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니까요. 그런데 다니엘에 나타난 이 사람은 너무너무 하나님 같은데 결국은 인자라고 붙여서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인 셈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자니 그렇고, 또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결국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 고심하는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인자’인데 예수께서 그 용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대단한 얘기 아닙니가? 신약에 와서 조직신학적으로 얘기하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보자’ 이런 개념들은 신약에만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이 새 왕, 이 영원할 하나님 나라의 왕 인자는 만국을 심판하는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계시합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그 주변의 이방나라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며 그 모든 나라들 위에 뛰어난 왕의 좌소가 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의 임함은 심판과 구원으로 이루어지며, 그 왕이 임하는 왕좌를 재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임하면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다스립니다. 그 왕이 새로운 궁궐이 무엇입니까? ‘회복되는 성전 개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은 그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노예로 있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어 제일 처음 데리고 간 곳 시내산에서 성막을 건축했습니다. 시내산에 제일 먼저 백성들을 데리고 가신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겠다는 말입니다. 왕으로 임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가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그와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내재하는 하나님으로 언약관계에 들어가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인 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남편이라고 한 것입니다. 초월신의 개념으로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살이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주, Lord' 가 되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도나이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완성하고 나니까 쉐키나의 구름이 그 위에 머물렀습니다. 히브리말 ’샤켄‘은 ’거한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dwell)'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기적과도 비슷하지요?)가 그 ‘구름기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샤켄하시며 왕으로 임재하시므로 언약백성인것을 표명하신 것입니다. 이 왕의 임재를 유한한 인간에게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지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막,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얘기를 하십시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요한복음이나 요한 1,2,3서 등을 기록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 ‘요한’이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경험과 인생경로 속에서 발견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해석하기도 하고 주석을 붙이기도 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즉 요한이라는 사람을 통과해 나온 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이해하고 깨달아서 쓴 책이 아닙니다. 그냥 쏟아져 내리는 환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보이는 장면들을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을 기록하기는 해야하는데 힘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 중 가장 마지막에 그 위치가 놓여졌습니다. 아마 요한 자신도, 베드로도, 바울도 그들이 기록한 편지나 예수님 사건에 대한 얘기들이 성경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후에 역사가 흘러가면서 이것이 정경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 계시록이 구약 창세기로부터 흘러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는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제 완벽하게 영광 중에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바벨론으로 지칭되어온 이 세상나라들은 결국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뉴에이지 영역에는 수많은 ‘계시 기록자’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닐 도날드 윌쉬라는 사람은 자기 가정이 파탄되고 괴로운 상황속에서 인생의 질문들을 갖고 번민하고 있었는데 새벽 3시만 되면 신이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하며 그 신과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한 것이 책으로 출판되어 우리나라 말로도 “신과 나눈 이야기 1,2,3”으로 번역이 되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단체가 홈페이지에 형성되어 세계적인 조직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탄은 대체적으로 이런 환상이라는 무의식을 이용해서 계시를 주는 것처럼 인간을 속입니다 과거에도 이런 방법으로 이단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기록 방법은 정상적인 한 사람의 생애 속에 경험된 하나님을,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그야말로 환상을 보고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의 에스겔, 다니엘의 일부와, 신약의 요한계시록 등입니다. 인간 저자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보여주시는 환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만일 이 성경이 진정 하나님만이 저자시라면 에스겔이나 다니엘, 요한계시록이 다 일관성있어야 할것입니다. 시대가 달라도 그 내용이 짝을 이뤄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저자시니까.

구약이 끝날 때도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고, 신약이 끝날 때도 성전을 보이심으로 마감하십니다. 에스겔은 앞으로 새로 세워질 성전을 이상 중에 보고 기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다시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 예언대로 유다지파들은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재건’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왕권의 도래’입니다. 왕이 임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끝도 이제 왕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좌소인 성전 재건으로 끝나더니 신약의 끝도 똑같습니다. 요한은 한 사람의 노예 노동자로 로마제국 아래서 돌을 깨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새 예루살렘성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그 요한의 손을 빌어 마지막 결론을 주시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환상을 볼 때 죽은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7), 예수님과 이 땅에서 같이 사는 동안 그 품에 기대어 살았는데 지금은 그 인자 같은 이 앞에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우주의 왕, 창조주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인자같은 이라고 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이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이 봤던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다니엘은 이 ‘인자’를 보았습니다. 700년 후에 요한은 그 인자를 보았고 그 인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묵시입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 마지막에 정리될 이 하나님의 나라를 최종적으로 영광스럽게 마무리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 방향이 부정적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부터 이루어져 내려오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인류에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잘 모릅니다 인간의 언어와 문장 해석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습니다. 버전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이 위대한 피날레를 평범한 인간이었던 요한에게 그 로마의 뙤약볕 아래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읽어봅시다.
많은 분들이 이 요한계시록이 읽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핑계입니다. 정말 그 내용이 알고 싶으면 주석 갖다 놓고 보면서 읽으면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을러서 힘든 것입니다. 도래하고야 말 영광스러운 그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중에 읽읍시다. 성경은 진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읽기 전에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읽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읽기에는 너무 아까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 궁극적 질문이었던 예정론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 보겠습니다. 글이 많이 길죠? 자. 모두 기지개좀 펴고 한번 읽어봅시다.


그 전에 저번의 제 글들 읽어보시길 바란다고 말씀드렸죠?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제가 분명히 글 중간에 예정론에 대한 내용을 언급했었습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부가 설명은 그 부분을 읽지 않으시면 결국 머릿속엔 똑같은 의문이 다시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내용이 이어지지가 않거든요..

저번 글들에서 성경은 1600여년 동안 약 40여명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책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최초의 창세기부터 끝권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관점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의 대결이라는 유형을 가지고 흘러내려오고 있다는것 기억하시죠? 다시 복습하면 이 둘 사이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유지됩니다.(정말 중요한 내용이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였습니다.)



①. 세상 나라 문화가 하나님 나라 문화를 침투해서 세속화 되는 유형

②. 하나님 나라 문화가 세상 나라 문화를 침투해서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유형



이 유형을 정리해 놓고 다시 성경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의 역사는 한마디로 "왕 싸움"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왕 되심을 거부한 아담의 후손들은 두 계열로 나뉘어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대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 쪽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하나님 쪽에 있게 되는 이 현상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은 "피흘림의 제사", "용서", "화해",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등, 소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구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시는가 그 목적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즉 위에서 한마디로 정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구원"은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②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든 하나님 백성의 무리이든 내적으로는 속사람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또한 외적으로는 반드시 "세상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최종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최초의 인류 일반역사 부분을 다루면서 첫 사람 이후 번져나가기 시작한 사람들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오늘날처럼 수십억이 되기 이전, 처음 소수일때부터 인류는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소수일때는 전체가 다 아는것입니다. 다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셋 계열과 가인계열이 함께 있었습니다. 셋 계열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제물을 통해 제사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를 입은 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복음이 들어온 것이 약 100년이 좀 넘었는데, 그 이전에 전파되지 않아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한가, 그들이 듣지 못해서 구원을 못 받은건데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 때 거론되는 사람들이 세종대왕이라든가, 이순신 장군이라든가 그렇습니다. 우리 그 문제를 여기서 한번 적용해 봅시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분들 앞 세대, 또 앞 세대, 또 앞 세대, 계속해서 올라가 보면 결국 초기 인류역사를 말하고 있는 이 곳 창세기 앞 부분에 살고 있는 조상에게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방법을 제시하셨고 모든 인류는 처음부터 그 '복음'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도 그 끝까지 가 보면 아담에게 다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에서 끊을 일이 아닙니다. 그 앞 세대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도 그 앞 세대는 어떻하구요? 그러니까 사실, 인류 역사가 처음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회 속에서도 다시 회복할 길은 열려져 있었는데,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셋계열의 사람들이 이웃에게, 이웃에게, 계속해서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치 못해서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부류의 공동체가 하나님 없이 나라를 이루고 자꾸 세대가 흘러내려 가다 보니까, 하나님 지식이 아예 없는 것 같이 보인 것 뿐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는 신약에서만 나타나는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구원의 도리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붙들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다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말하지 "내가 최선을 다해, 도를 닦아서, 수행을 쌓아서, 선행으로 구원받았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말하지,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똑같은 얘기를 '론'자를 붙여 '예정론'하면 금새 알러지 반응이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결국 다들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어쨌다는 건데? 그 사람들 지옥에 갔다는 거야, 아니면 하나님 몰랐어도 천국에 갔다는 거야?’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로 넘어갑시다. 그 유명한 사도바울의 로마서를 봅시다. 예전에 분명히 로마서는 ‘성경중의 성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중의 정수라고 했습니다. 마틴루터와 칼빈도 로마서를 읽고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평생 한번쯤은 깊이 연구해야만 할 그리스도를 증거한 논문형식의 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뼛속까지 바리새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을 앞서서 핍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에 감동을 받고, 주님을 직접 영접하고 나서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땅 이스라엘의 히브리인들만의 토착종교가 아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아들의 사랑을 전파하는 ‘이방인을 위한’ 전세계적인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설교와 복음중 예정론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때 당시의 이방인들이라고 왜 안물어봤겠습니까. 궁금하지요. 갑자기 찾아와 다짜고짜 넌 죄인이라고,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데요.


[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동일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주십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이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선포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보냄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10:12~21) ] (성경 전문입니다. 쉬운성경으로 인용해서 그렇습니다. 개역성경으로 비교해 보셔도 좋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들은 모두들 이런 질문을 바울에게 던진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이 대답합니다.

[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끝까지 이르렀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나는 하루 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0:18, 21) ]

여기서 문맥상 '이스라엘‘의 해석은 넓은 의미에서 믿지 않는 이방인과 의심많은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분명히 이방인도 복음을 알고 있을거랍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고 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서 났으니 아주 모르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인 계열에서 전파하는 사명을 다 하지 못하여 망각하고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젠 전혀 관계없을 듣한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등등의 모든 사람들도 다 복음과 하나님을 느끼고 있었을 거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으므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인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그가 만드신 만물을 보고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헛된 것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로마서 1:19~21) ]

그렇습니다. 태어날때부터 모태신앙이나 어렸을 적부터 성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라는 구절을 알고 계셨던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이런 생각 한번쯤은 해보셨을꺼라 생각됩니다. ‘겨울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송이의 정교한 모양,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던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인체의 호르몬 체계, 새카만 흙속에서 자라 노랑, 빨강의 색깔을 뽐내는 꽃들을 보며 한번쯤은 ‘어쩜 이렇게 자연은 위대할까? 이런걸 아주 먼 옛날 내가모르는 누군가가 만든게 아닐까?’라는 생각들 말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만 그래왔던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예전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생각을 바울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인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그가 만드신 만물을 보고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이어진 질긴 핏줄은 모두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준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마치자 모두들(지금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말했습니다. ‘그럼 왜 애써 만든 피조물인 우리를 뭘 잘못했다고 벌주는 겁니까? 자비심도 없으십니까?’ 이에 바울이 대답합니다.

[ 그러면 여러분 중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한단 말입니까? 토기그릇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진흙으로 귀하게 사용할 그릇과 천하게 사용할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분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면서도 멸망받기로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인내로써 참아 주셨다면 어쩌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영광에 들어가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비의 그릇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셨습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을 사랑하겠다“. 그리고 이런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고 그들에게 말한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될것이다.“ (로마서 9:19~26) ]

결국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지금에 와서 복음을 잊어버린 이방인들에게도 사랑을 주시겠다는 말. 바울을 통해 좀더 살펴볼까요?

[ 처음 떼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한 법입니다. 참올리브 나무의 가지 중에서 얼마를 잘라낸 뒤,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인 여러분을 원가지에 접붙이면, 접붙여진 가지는 참올리브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양분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를 향해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랑하더라도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접붙이기 위해 가지들이 잘려 나갔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백 번 지당한 말입니다. 그 가지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잘려 나갔고, 반대로 여러분은 믿었기 때문에 나무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래 나무에 붙어 있던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격하심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인자함을 베푸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여러분도 잘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잘려 나간 가지가 다시 믿게 되면 그들도 다시 접붙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본래 붙어있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여러분이 속한 종자와는 다른, 좋은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좋은 올리브 가지였던 유대인들이 원래 그들이 붙어 있던 좋은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로마서 11:16~24) ] (두세번 곱씹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정말 은혜로운 내용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인 가운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위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생각으로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이나 은이나 돌 같은 우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도행전 17:26~30)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많은 세월이 흐르며 창조주를 있고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되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한없이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자연법칙으로 ‘내가 너를 지은 하나님이란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길 지금의 우리 인류(아담)가 하나님과의 단절이 된 그 시점부터(선악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원죄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된 사람이라도 나중에 가서 부모님을 잊고 또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불효자식이라고 욕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옛날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나? 지옥으로 갔느냐? 억울하지 않느냐?에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아니 답을 내기도 민망합니다. 예수님께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올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결론일까요? 예정론에 대한 궁극적인 결과는 선악과의 원죄로 인한 대가인 '죽음'을 아직 거치지 않은 우리는 당연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었으니, 아니,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으니(아담에게서 난 그들이 생판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요?, 다 가인 계열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수학공식에 대입하듯이 해석하면 그들은 죄인입니다. 그렇게 죄인으로 죽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불구덩이 속으로 갔는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독신자로서 오셔서 사망후 부활하심과 동시에 죄사함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우린 아직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도 그런 '일찍 죽어버린 이방인'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된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나는 하루 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직접 아들을 보내셔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까지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주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 죽어보지도 않아서 모른다는데, 어찌 천국에 가고 영생을 얻을 줄 알고 예수를 믿느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데려와봐라. 한번 물어나 보자."
위의 아까의 '일찍 죽어버린 이방인'에 대한 내용은 아쉽게도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돈, 명예를 얻어 배불리 사는것 보단 어떤것이 진정한 구원인지,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너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것이 율법의 진정한 완성이며, 하나님 너의 창조자 여호와와 함께 천국에 거한다는 '사실')는 명확히, 아주 명.확.히 거론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세상나라로 내려오셔 죽어가면서까지 '직접'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다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여라" 온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라는 계명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인의 평생 사명이며, 그렇게도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파할 때입니다. 과거의 세속적인것에 아직도 왈가왈부할때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교회가 있고, 박해자가 있기까지의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그럼 그들은 억울하게 지옥갔느냐'에 대해서 논쟁하기 보다는 '그럼 우리가 그 은혜로서 구원받는자'가 되어 복음전파에 열심히 할때입니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갈 때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의 그 어머니의 태부터 그 사람을 정하시고 은혜로 모든이들을 부르신 이가(갈 1:15) 평생 이웃을 사랑하며 착하게 살았지만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을 뿐인 이들을 평생동안 타오르는 지옥불에 던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의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누가복음 6:35)
.
.
.
지금까지 모든 긴 글들이 희석님의 저와의 문답을 벗어나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으신 분들, 교회를 다녀보고 싶은데, 자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주님앞에 나가기 망설여졌던 분, 입술로는 주님을 찬양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 죄가 무엇인지 진실되게 고백하지 못해 갈등했던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백명의 사람들이 ‘이건 아니잖느냐’라고 말해와도 단 한명이 ‘덕분에 의문점이 풀리고 다시 교회나갈 맘이 생겼어요’라는 말을 한다면 그에 만족해 또 감사기도 올릴겁니다. 그게 제 사명이니까요. 삶의 기쁨이자 제 목적입니다.

솔직히 말하여 교회다니는 사람, 신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많이 알수 있는 ‘구원, 은혜, 예정론’에 대한 글들보단 세상나라 말들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복음이 스며드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감동을 받고 한발짝 나아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 아닙니다. 집안도 오래전부터 불교를 믿어왔습니다. 다른 신실하신 분들과 비하면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한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왜 저라고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저를 전도한 친구가 다짜고짜 저보고 죄인이라는데요. 저도 생각이 있게 살아왔고, 또 아무런 법에 처벌받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해왔지만 무작정 죄인이라길래 거부감부터 생기고 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예수님이 있는지 모르는지도 잘 모르는 그 상태에서 무작정 우선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도부터 했습니다. 앞에서 기적에 대한 얘기가 있었지요. 그래요. 그 기적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기적은 제 주위의 아픈 사람이 제 덕분에 금방 호전된다던가 제가 기도한 내용이 다 이루어지는 이런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말로 설명할수는 없지만 기도가 마친 후에 무언가 따뜻하게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누군가 나를 보살펴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삶의 하나하나가 다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삶을 이루어 나가는 길이 저 혼자만의 외로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글마따나 제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발자국이 두 개였습니다. 제가 어려웠을땐 발자국은 하나였습니다. 어려웠을때 발자국이 하나였던 이유가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업고 오셨기 때문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이 기적이었습니다. 글쎄요. 비신자분들께서 이 글을 읽고 ‘또 기독교인 오버한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한번쯤은 그런 ‘오버’도 느껴보시는게 어떠냐고 묻고싶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2년의 군대도 왔는데, 다짜고짜 욕만하고 볼게 아니라 교회도 한번 나가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나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시는 한이 있더라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까말씀드린대로 단 한분이라도 그 ‘오버’를 몸소 느끼셔 주님 품으로 돌아오면 그게 이렇게도 입아프게 말했던 성경의 궁.극.적.목.적.인 겁니다. 말 그대로 은혜로운 일인겁니다.

이제 긴글을 마치려 합니다.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건 여기까지입니다. 솔직히 제 한계점을 본것 같습니다. 희석님의 질문을 계기로 ‘좀더 공부해야겠다.’ 라는 맘을 다잡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많은 질문드리고 싶은 내용들이 있지만 우선 제가 더 배우고 기도한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은 군생활 건강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래는 두번째 대화에 달렸던 댓글입니다


일병 변화수 (2006/05/19 11:18:55)

'해체'적 읽기는 옛날 중국에서 훈고학에 반발해서 양명학이 발생한 것과 거의 같군요. 

우리나라 개신교는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개신교인이 제일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개신교의 배타성이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기본이 배타성이기 때문에 기본을 부정하면서 다원주의를 인정하기는 제 생각으로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그외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들도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느냐? 
우리나라 개신교의 입장에서의 답은 yes입니다 


일병 이건룡 (2006/05/19 16:39:33)

그동안 토의를 성경문구에 질색을 표했기에 한번 진지하게 읽지 않았던게 아쉽군요. 잘읽고 갑니다. 차분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많은 생각을 하셨나 보군요, 부끄러울 나름입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병장 박진우 (2006/05/25 15:24:50)

왜...... 

이제서야 말씀하시는건지. 
조금만 더 일찍 이야기해주셨더라면...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6-09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