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에 대하여 
 
 
 
 
※ 우리의 영원한 친구 ‘한컴 사전’의 유용함을 이용해 보겠습니다.

인문-학
인간의 정신 활동의 소산인 학문·예술·종교·정치·경제·법 등의 이론적 해명을 목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철학· 신학·심리학·역사학·정치학·경제학 따위》

자연과학 
자연에 속하는 모든 대상을 다루는 학문. ↔ 인문 과학.
과학(科學)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學)과 같은 뜻이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 과학을 일컬음.

--------------------------------------------------------------------------

예전에 『대담』이라는 책을 읽었더랬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한다면, 인문학자와-도정일- 자연과학자-최재천-. 두 사람의 사회, 문화 전반의 주제를 가지고 너무나도 인문학적이고 너무나도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토론을 벌이는 말그대로의 ‘대담’ 형식의 책이었다. 이제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의 중심을 이루는 그곳에서도 과학쪽에 ‘속해버린’ 나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이 글은 『대담』이라는 책의 후기가 아니다. 그저 ‘이제 과 공부 좀 해 볼까~’하고 펼친 책을 보면서 불현듯 생각난 것에 대한 나의 딴지식의  찌끄림 정도이다. 


감정, 심장 그리고 뇌. 

사람의 감정(emotion), 즉 희노애락을 주관하는 중추는 대뇌피질(cerebral cortex)에 있다고 한다. 이들 중추가 흥분되면 심장에 영향을 미쳐 심장을 촉진적 또는 억제적으로 조절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화(anger)를 내든지 흥분(excitement)을 하게 되면 심장이 촉직적으로 작용하여 혈압을 높인다. 따라서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의 박동수도 증가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경험한다. 한편, 슬픔이 아주 심할 때는 심장에 억제적으로 작용하여 혈압을 낮추기 때문에 졸도(fainting)하게 되든지 또는 얼굴이 매우 창백하게 된다. 이상을 종합하건데, 심장은 심장반사 기전과 고위 중추성 기전에 의하여 조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p. 105『 인체생리학 』제6장 심장과 순환생리 中

간단히 말해. 희노애락. -기쁨, 노여움, 슬픔 그리고 즐거움- 사람의 감정을. 심장의 작용을, 뇌가 조절한다는 말이다! 감히 뇌가 감정을 조절하다니. 의학계쪽에 몸담고 있다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 말에. 왜 난. 딴지를 걸고 싶어졌을까?


뇌의 조절에 대한 반문.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 희노애락- 우리는 그저 무심코 넘겨 버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있을까? 산소, 물 등의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 정신적인 측면만을 바라보았을 때. 사람이 인식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감정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데 있어 이 감정이라는 것의 영향은 얼마나 대단 한 것인가, 간단히 우리의 군대 생활을 예를 들어보자. 후임이 실수를 하였을 때에 화났을 때 후임을 대하는 태도와 기분이 좋을 때 후임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아니,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의 행동이나 판단은 불분명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토록 복잡 미묘하고,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사람의 감정을 두뇌가 조절하다니.. 그렇다면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감정들의 뇌의 중추신경과 심장의 반사기전이 담당한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자연과학에서 특히 사람의 생리적인 작용 즉, 먹고 싸고 자고 생활하는 전반을 연구하는 인체 생리학(physiology)에서는 모든 우리의 활동을 기전화(mechanism) 하려고 한다. 기전화란, 모든 활동의 단계를 세세하게 분석하여 그 과정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과정의 변화를 통해서 이유와 결과를 유추할 수 있게된다. 즉,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에는 모두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러한 생각에 와닿자 사람의 감정에 대한 위의 글에 대해 비꼬고 싶어졌던 것이다. 왜? 그렇게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한 번 비틀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자들의 목표는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구체화하는데 있다. 그로인해 위와 같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모든 우리의 행동을 ‘원인과 이유’를 들어가며 법칙과 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간단하지 않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딱딱하게 보이는 과학의 법칙에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나 또한 위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명에 속한다. 
  옛 시대부터 철학과 과학, 종교와 과학의 사이에서는 서로의 끊임없는 비판과 반증이있어 왔다. 그 예를 들자면 지동설과 천동설, 진화론과 창조론 등등 그 끝을 알 수 없을정도이다. 최근의 ‘생명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대립은 더욱더 뜨거워지면 뜨거워 졌지 절대 둘 간의 싸움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이렇듯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려 오는 것만 같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달리는 상행선 하행선 열차처럼.  하지만 정말 인문 과학의 반대말이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감히 바라옵건데, 화해를 해 보자. - 과학자들에게- 

과학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연구를 통한 ‘현상 그대로의 모습’을 법칙화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어떠한 글귀나. 철학의 어떤 사상에 반대하기 위한 연구가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예전에 성경의 글귀에 나온 비과학적인 분야에 대해 분석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노아의 방주를 포함하여, 모세의 기적 등등의 유명한 글에서부터 하나하나의 얘기를 ‘말도 안돼!’식의 표현으로 쓴 글이었는데. 나는 감히 말하건데 이러한 과학적인 비평은 ‘무의미’할뿐이다. 모든 세상의 이치를 과학적인 견해로 바라보는 것이 나쁜 것이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에 있어서 종교와 철학 등의 인문학쪽의 이야기들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그저 그 ‘현상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서의 ‘의미’와 그 속의 ‘참 뜻’을 얻어야 하는데 있다. 인문학에 있어서 노아의 방주란, 세상의 선택된 생물들이 다 들어가려면 얼마의 크기과 되고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가?에 대하여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왜 노아의 방주가 생기는 홍수가 났으며 왜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모두 죽이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화를 그저 생명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생명체들이 나오고 지구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태양의 신’,‘바다의 신’이 나와서 지구를 흔들어 놓는 SF판타지로 해석하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수많은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이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감히 바라옵건데, 화해를 해 보자. - 인문학자들에게- 

하지만 이러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괴리가 한 쪽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과학자들은 ‘현상 그대로의 모습’을 연구한다. 하지만 인문학자들은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와 참 뜻을 이끌어 내는 것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만약 인문학자들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모두 무시해 버리고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지내왔던 ‘왜곡된 현상’을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숭고하고 운명에 결정된다고 그들이 말한다고 한대도 과학자들이 이미 밝혀놓은 사실을 부정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심장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심장이란 정말 대단한 기관이다. 너무나도 군더더기 없이 24시간 365일을 움직이고 유지하고 성장하고 순환체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기관이다. 우리의 인체의 기관들은 우리가 배운 물리, 화학, 생물 등 과학연구의 집합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장은 포함하여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감각, 운동, 호흡, 소화, 배설 등등에는 우리가 쉽게 상상하기도 힘들고 오묘한 법칙들과 기전(mechanism)이 존재한다. 심장의 박동수를 조절하는 것은 심장의 반사와 뇌의 조절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그대로의 모습’은 모두 인정해야 한다. 감정이 뇌로 인해서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지하는 기관이 뇌인 것이고, 그 반응에 의해 심장이 작용하는 것이다. 과학은 ‘현상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이미 ‘인문학’의 법주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같이 놀아보자는 말씀. 

지금의 시대는 그저 산책을 하며 명상을 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비커만 바라본다고 알 수 있는 세상도 더욱 더 아니다. 정치, 종교, 문화의 흐름이 바뀌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포를 복제하고 사람을 복제하고, 지구밖으로 사람이 나아갈 수 있으며,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과 사색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변화 -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로 인해 이루어 진 결과이다. 결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 둘은 몸과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또한 결코 떨어질 수 도 없는 그런 관계이다. 진정으로 사람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인문과학분야와 자연과학분야의 연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이다. 


------------------------------------------------------------------

사족하나.
이제는 물리치료사를 꿈‘꾸는’, - 과거 기자를 꿈‘꾸었던’ 소년의 이야기.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 내가 찾던 문이 있는 건지, 낭떠러지가 있는 건지도 모른 체 그저 걸어가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물리치료학과’라고 말하는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저 ‘환자’의 몸을 고쳐주고 치료해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아픈 존재에게 희망을 주는 또 다른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현상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신화적인 것인 듯 종교적인 것이든 아픈 존재에게 희망을 주고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들 합니다.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물리치료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저 아픈 부위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장이나 뇌로는 알 수 없는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상처까지도 낫게 해주는 그런 ‘멀티플레이어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습니다. 어릴적 꿈꾸던 꿈을 이렇게 나마 이루고 싶은 저는 욕심쟁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갈림길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길의 끝이 산꼭대기든지 지옥의 불구덩이든지 냅다 달려 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쪽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라볼 때면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이런 글을 써본 것이겠죠.

*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6-08 07:42) 

  
 
 
 
상병 송희석 (2006/06/07 13:41:48)

<가지로!*100> 
여태까지 본 소통관련 글중 최고로 뽑는 바입니다.    
 
 
상병 조주현 (2006/06/07 14:53:49)

<가지로> 
어, 이거 왜 여기다 올렸죠?    
 
 
상병 김현우 (2006/06/07 14:54:35)

<가지로> 
이..이거!    
 
 
일병 변화수 (2006/06/07 15:35:03)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라면 인문학은 논문 하나 내는데도 A4지 수십장이 필요하지만 
자연과학은 A4지 단 두장만으로도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는 차이.    
 
 
 병장 박진우 (2006/06/07 17:07:38)

<가지로!>호호    
 
 
병장 김희곤 (2006/06/07 18:20:19)

<가지로!>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같은 것을 꿈만 꾸었던 제가 한없이 한심해지는군요.    
 
 
 일병 박요한 (2006/06/07 22:24:08)

다치바나 다카시가 "뇌를 단련하다"에서 언급한 책이 생각나는군요. 
C. P. 스노우의 "두 문화" 라는 책입니다.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 두 양 문화의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다뤘다고 하는데, 이 글 보고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병장 고계영 (2006/06/08 06:39:11)

희석님/주현님/현우님/진우님/희곤님/ 뭐라고 표현 할 수없을 정도로 감사의 말씀음 드립니다. 저의 글에 대해서 너무 과찬의 말씀들을 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수님// 그러한 이유는 자연과학에는 서로간의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식'과 '기호'.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기존의 공식'이 학습에 의해 습득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초창기의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도 노트 몇장 분량 정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자연과학에서 '생태 생리학'같은 사회성을 다루는 논문에서는 인문학 못지 않는 논문 분량을 자랑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 각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인문학은 '풀어쓰는 , 틀이없는' 분야라면 자연과학은 '압축하는, 어느정도의 틀이 정해진'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저의 위와 같은 생각이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는 도쿄생들의 교양에 대한 물음에서. 문과학생들에게는 '열역학법칙'에 대해 묻고, 이과학생들에게는 여러세기의 유럽문학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한 부분을 보면서 저또한 너무 한 곳에 치중하지 않았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활에 꿈꾸었던 저의 꿈을 이루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담"이라는 책도 큰 몫을 했습니다. "뇌를 단련하다"가 대학생활과 앞으로의 삶에서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였다면, "대담"은 더욱더 깊고 원론적인 방향으로 두 학문의 관계를 이야기 해줍니다. 
이 외에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장 이은호 (2006/06/15 21:25:36)

늙게 읽었으나, 정말 좋은 느낌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 아픈 존재에게 희망을 주는 또 다른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 이 대목은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