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만나다]힘내세요. 응원하고 있으니. 
 
 
 
 


그날은 유독 맑았다. 
쨍 했고
톡 건드리면
팍 하고 푸르른 쪽빛 물이
주르륵 쏟아질듯한 날씨였다.
누가봐도 일상이었다.

전날 새벽에 드디어 온라인 FPS 슈팅 게임에서 진급했다. 지루하도록 더딘 레벨업이었다. 느렸지만 게임은 단순하고 정직했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적을 얼마나 사살했느냐, 팀이 얼마나 승리했느냐. 단지 승적만으로 진급이 결정되었다. 투자한 만큼 성과를 안겨주었다. 온라인 게임은 그래서 좋았다. 음주운전을 해도 구타를해도 진급이 되었고, 주가가 폭락할 일도 없었고, 베팅한 말이 꼴찌를 할 일도 없었다. 이기면 경험치를 줬고, 져도 본전이었다.

한가지만 잘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현실과는 엄연히 달랐지만 그건 이상이었다.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달의 유토피아.

밤새 게임을 하느라 늦잠을 자버렸다. 교양수업은 늘 1교시였다. 복학생 주제에 교양수업을 듣는건 자라나는 새내기를 밟아죽이는 잔인한 학점 킬링의 행위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신입생 녀석의 말이었다. 너도 복학생이 돼봐. 라는 말로 그 녀석의 반론을 일축했다. 모든 논쟁은 개인화되면 흐지부지 되었다. 일상도 개인화였다. 나에겐 일상. 너에겐 이상.

그래. 교양수업은 늘 1교시였다. 복학생이라는 우위를 선점하고 들어가는 새내기들을 위한 교양수업은 좋았지만 1교시라는 시간대는 정말 싫었다. 군대에서 익혔던 짧게 자는 버릇은 한달만에 세상과 타협하며 다시 길게 자는 버릇으로 변질되었다. 군대에 적응하는 것보다 세상에 적응하는게 더 빨랐다. 

그래서 너무 졸렸다. 

한창 자야할 새내기들은 적어도 9시에 일어나야 하는거 아니냐고 궁시렁 거려도 전공수업을 오후에 들으려면 이정도 불평등은 감수해야했다. 제한된 강의실, 제한된 교수에서 더 이득을 봐야하는건 2년이상 꼬박꼬박 등록금을 지불해준 대학교라는 기업의 충성스런 고객. 고학번들이었다.

교양수업 1교시 찬성이다.
나의 질문은 항상 스스로 결론이 났다.

교양수업을 마치고 나니 할게 없었다. 과방에 귀여운 후배들이 기합이 바짝든 이등병같은 모습으로 대기중이었다. 대화 대기중, 점심 대기중, 인생조언 대기중, 술약속 대기중, 시험족보 대기중. 뽑히기만 바라는 새벽인력 시장의 일당잡부들처럼 행동거지에는 일상을 타인에게 맡긴 자라면 예의 가지고 있는 체념을 담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초롱초롱했다. 새내기는 그래서 당당했다.

MT때 주당 대결을 펼친 후배 A와 B에게 당구장 짜장면 내기를 제안했다. 둘은 뽑혔다는 안도감을 면면에 드러내며 날 따라 나섰다. 난 분명히 남자후배 A와 B를 낚았는데, 여자후배 C와 D까지 딸려 걸려들었다. 자기네들끼리 벌써 눈이 맞았나보다. 잠시 벙찐 표정으로 후배들을 바라보니 가진자의 승리감과 교양수업 학점은 뺏겨도 동기만큼은 복학생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포부를 담은 눈으로 내게 맞섰다. 새내기들은 그럴때면 유독 더 당당해졌다. 그래. 니 잘났다.

당구는 참패였다. 덕분에 오인분 짜장면 값이 날아갔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일상이었는데도 졌다는 패배감과 2인분을 더 책임진 것에 대한 쓴맛 때문인지 오기가 생겼다. 수업 끝나고 애들 모아. 술값내기 게임 한판 하자. 어제 새벽, 아니 오늘 새벽까지 지겹도록 했던 게임이었다. 

똑같음이 반복되는, 한걸 또하고, 또하고, 계속하고. 2년을 다녀온 군대와 다를바 없는 일상, 일상, 일상이었다. 유독 하늘이 맑았던 그날은.

간신히 급수면제 전공 교수의 수업 미션을 완료하고 오전과 똑같이 과방을 찾았다. 스팀팩을 맞은 마린처럼 전투적으로 변한 수업시간 후의 신입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나의 한마디에 신입생들은 우르르 날 따라나섰다. 아무리 전투적으로 변했다해도 마린은 마린이었다. 프로게이머의 명령에 움직이는.

9판 5선승제라는 애매한 규칙으로 4라운드를 플레이하던 중이었다. 2승으로 우리팀이 이기고 있었고, 4라운드 역시 승리를 확실시하는 중에 있던 게임이었다. 우리팀은 2명씩 조직적으로 팀을 나눠 적을 교란했다. 건물에 숨어서 저격을 하는건 후배 J의 담당이었고, 나는 접근전을 원했다. 군대에서도 특등사수 자리는 늘상 놓치기만 했었다. 게임은 다를줄 알았건만, 게임도 현실에서 존재하는 게임이었다. 현실에서도 좋지않은 사격 실력이 게임에서 나아질리는 없었다. 결국 게임도 현실의 지배를 받는 이상이었다.

기관단총을 들고 적지로 은밀하게 돌격했다. 여차하면 자폭할 심산으로 수류탄 단축키에 올려진 손가락에도 집중했다. 헤드셋을 낀 귀에선 오늘 새벽 갓 진급한 내 캐릭터의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곧 다가올 거대한 일상도 아닌, 이상도 아닌 녀석의 소리를 들을만큼 우리는 고요하지 못했다. 

뒤에! 쏘란 말이야! 거기! 야! 이 병X아! 수류탄! 호오~! 늘 떠들어제꼈고,
펑! 투르르르루! 으악! 콰광! 컴퓨터라는 물건도 떠들어제꼈다.
어떤 컴퓨터는 개성강한 미니홈피 음악으로 떠들어댔고,
어떤 컴퓨터는 카지노에서나 들려올법한 콜, 하프 라는 소리로 떠들어댔고,
어떤 컴퓨터는 마린의 목소리로 떠들어댔고,

지진은 
모든 소란스러움을 삼킬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날의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은 여전히 쨍하니 맑았고, 팍 하니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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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건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을 때였다. 눈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후배 J가 보였다. 혹시 내가 게임속으로 들어온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일상도 아닌, 이상도 아닌 지진은 그만큼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다행히 난 경미한 부상이었다. 재난구호소에서 나왔다는 30대로 보이는 아줌마 간호사였다. 간호사에게 팔에 긁힌 상처를 치료받았다. 상처가 따끔거리긴 했다. 옆에서 다리가 잘려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했다. 아까까지만해도 게임을 했었던 소란스런 PC방은 무너져 있었다. 대기는 다른 소란스러움으로 가득찼다. 

근처의 건물은 대부분 무너지고 있거나 무너져있었다. 불에 타고 있는 건물도 간간히 보였다.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위해 애썼고, 경찰관들은 차량을 통제하기위해 애썼고, 간호사들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다. 멀리서 퍼엉. 하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세워진 경찰차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여기는 본부, 여기는 본부. 장충로 부근 상점에서 가스가 폭발하였음. 근처 대기중인 차량, 근처 대기중인 차량. 즉시 구호 지원할것. 다시 한번 말한다...’

길가에 세운 응급차가 보인다. 들것에 실린 후배 B가 실려간다. 후배 C는 보이지 않는다. 후배A가 그녀를 목놓아 찾는다. 핸드폰을 열어본다. 중계기가 파괴되어 전혀 터지지 않는다. 후배A는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후배J는 죽었다. 후배F는 실종되었다. 우리집은 적색경보가 뜬 위험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더 이상 갈곳도 없었다. 부모님의 행방 역시 알수가 없었다.

달에 처음 도착한 암스트롱은 황폐한 돌무더기로만 이루어진 달을 보았다. 그때 TV를 보던 전 지구인들도 달에 대한 이상을 모두 폐기해야했다. 달에 도착하기만해도 새롭게 유토피아가 열릴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에 의해 밝혀진 달은 모두에게 이상도, 일상도 아닌게 되어버렸다. 도저히 개인화가 되지 않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한때, 지진이라도 만나서 일상의 지루함을 깨부수려 했다. 그리고 일상에 편입될줄 알았던 지진은 일상 자체를 무너뜨렸다. 지진이라는 이상이 일상을 침범했다. 모두에게 이상이 모두의 일상이 되었다. 이상이 현실이 되었고, 일상은 파괴되었다.

항상 스스로 결론이 나던 나의 질문은 더 이상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일상이 무너졌고 삶이 무너졌다. 재기할 여력조차 남지 않은 듯 하다. 항상 내려지던 답은 도저히 나올것 같지 않은 온라인 게임의 레어 아이템처럼 얻으려 발버둥쳐도 나는 얻지 못하지만, 남들은 갖고 있다는 사실처럼 불안해져버린다.

이게 옳았을까? 또 우리는 누구에게 저주를 퍼부어야할까? 절대자 하느님? 기상이변을 가져온 선조들? 선진국들? 혹은 지진 그 자체? 또 앞으로 어디부터 무너진 일상의 탑을 다시 쌓아야할까? 또, 후배C를 잃은 후배A는 어떻게 될까? 또, 우리 집에 숨겨두었던 침대밑 포르노 잡지는 무사히 잘 있을까? 또, 진급한지 얼마 안된 나의 온라인 게임 캐릭터는 지워졌을까? 또, 그날 먹기로 했던 술약속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또, 이번 학기 내 학점은 잘 나올까? 또..? 또... 또.

=   *   =   *   =   *   =   *   =   *   =   *   =   *   =   *   =   *   =   *   =   *   =   *   

인도네시아가 지진피해를 입었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일으킨 자연 재해임에도 월드컵 열기 탓에 뉴스는 작게 다뤄졌고, 피해가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더 이상 대단한 뉴스거리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선거의 후폭풍까지 겹쳐 국민들은 정치, 월드컵 두가지 뉴스밖에 보지 못한다. 과거 2002년을 떠올려보라. 당시 일어났던 서해교전이 월드컵에 묻혀 사회적으로 방기되어졌고, 아직도 그렇다는 것을. 

교전에서 얻은 죽음의 절망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얻은 또 다른 절망.

그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자연재해에서 얻은 절망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얻고있는 절망.

위에서 끄적인 픽션처럼 나의 이야기라면 이렇게까지 무관심했을까?
내 일상을 철저하게 부숴버린 지진이었더라면...?

작은 나의 투표가 소중했던 것처럼 작은 나의 모금이 그들에게 소중하게 쓰일 것은 뻔하고 당연하다. 지금 사회에 있었더라면 당장에 인도네시아로 달려가서 피해복구의 한 손이 되어 그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럴수 없기에 작은 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난 교회의 성금 헌금 봉투에 꼬깃해진 몇천원을 넣는다.

힘내세요. 응원하고 있으니. 

  
 
 
 
상병 송희석 (2006/06/05 15:54:28)

이사람 드디어! 드디어! 시작하는군요! 이미 시작한줄 알았더니, 그것은 예행연습이였을 뿐이군요!    
 
 
 병장 김동환 (2006/06/05 17:05:46)

좋군요. 저도 잊고있었네요.    
 
 
병장 김희곤 (2006/06/05 18:05:02)

저도 열심히 응원할께요. 이거 진우님도 사랑하게 될지 모르겠는걸요.(웃음)    
 
 
상병 조주현 (2006/06/05 21:48:33)

최고입니다 최고.    
 
 
병장 이재승 (2006/06/05 22:20:0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웃음)    
 
 
상병 김동민 (2006/06/06 08:50:09)

후루룩 읽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병장 박민수 (2006/06/06 16:23:07)

멋집니다.    
 
 
병장 한상원 (2006/06/06 22:19:07)

짝짝짝. 월드컵이 싫어지는군요.    
 
 
상병 정세원 (2006/06/07 09:16:18)

어찌그리 고운맘씨로 글을 잘쓰시는지.. 잘읽었습니다.    
 
 
병장 박시용 (2006/06/07 10:07:40)

가진자의 승리감과 교양수업 학점은 뺏겨도 동기만큼은 복학생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포부를 담은 눈으로 내게 맞섰다. 
. 
. 
전 왜 이 문구가 마음에 담기는 걸까요!!(웃음)    
 
 
병장 이청열 (2006/06/07 12:09:09)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병장 고계영 (2006/06/07 14:39:57)

글을 읽는 내내 박민규님의 소설이 생각나는 것은 저뿐인가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만이 아니라 이러한 글로써 표현하시는 실력에 감탄.감탄!! 
反월드컵 운동도 벌어진다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그저 '쑈'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병장 박진우 (2006/06/07 17:11:31)

드디어 붉은 악마가 상업성에서 탈피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과거 소수의 서포터즈 형태로 전환한다고 6/5자로 발표했다고 합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공식 응원단체도 아니고, 상업주의로 물들어가는 응원정신을 되찾고자 라고 하던데... 

자. 그렇다면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으핫.    
 
 
상병 허익준 (2006/06/07 19:12:53)

그러면 지금까지 나왔던 "붉은악마 공식 주제가"며 "붉은악마 공식 티셔츠"며 그따위게 전부 무효가 되어버리는건가요. 이히. 희소식이군요.    
 
 
 병장 박진우 (2006/06/08 08:40:03)

아뇨. 현재까지 체결한 계약이 만료되는 즉시. 입니다. 
중도파기는 위약금을 물어야하기때문일지도... 
붉은악마는 당일 선언문에서 영구적으로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병장 노지훈 (2006/06/11 11:32:10)

좋은 소식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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