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이다- 
 
 
 
 
나는 항상 세상의 접점에서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게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에 의한 강제였을 수도 있고 나 스스로의 선택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타의 다른 또래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수 없는 것의 철저한 심의를 거쳐 적절한 식사를 통해 자라 온것과는 달리 자의가 되었든 타의든 되었든 나는 날것을 씹어 삼키며 지내왔다. 싱싱한 날것의 육즙에 익숙해진 덕분에 마치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추파춥스 사탕 속 쪼오콜릿의 달콤한 맛에 익숙한 것과 같이 그 비릿한 내음 역시 잘 알게 되고 익숙할 수 있었다. 비릿함은 단맛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게 없는 ‘맛’일 뿐이였다. 날것의 비릿함이든 목구멍을 살살 간질이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쪼콜릿의 달콤함이든 항상 나와 부딪끼는건 매 한가지였다. 덕분에 나에게는 비릿내를 향한 냉소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눈앞에서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날것의 역겨움을 그저 달콤한 사탕을 보듯이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릴적에 죽음에 대해 생각 하면서 눈물 흘린적이 있다. 언젠가는 나를 떠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배게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었다. 서글펐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망하고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눈물이 계속 해서 흘러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눈물을 흘릴까? 내 주위에 친한 친구가 죽는다고 해서 내가 눈물을 흘릴까? 자신이 없다. 물론 그 상황이 오면 울어 보일 수는 있다. 울 이유가 없어 보였지만 울어 줄 수는 있다. 그것에 예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녀석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나의 냉소적인 태도가 나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다. 나의 눈물이 이미 흘러 내렸기 때문에 그런 것을. 그래서 지금에 와서 더욱 초연할 수 있는 것을. 독한 녀석이 되어 보이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였다. 이런 의식과 위선의 반복은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어릴적 그 눈물은, 지금껏 뜻모를 허망함이나 서글픔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상을 향한 한방울 눈물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든다.(¹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내가 쓴 웃음을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 그 쓴 삶의 무게 만큼 - 아니 그보다 더한 무게 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식에서 나오는 강박관념, 위선으로 인한 역겨움 속에서도 나를 지금껏 꿋꿋하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수 있게 해준 것이 이 삶에 대한 의지이다. 세상에 대한 시니컬함은 나의 의지가 되고 그 시니컬함과 의지는 이 세상에서 나를 기준 지어주는 확고한 중심점이 되고 있다. 나의 알몸을 까발려 보면 살고자 발버둥 치는 그런 냉소적인 시선만이 존재한다.

세상에 대한 냉소. 그런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는 세상에 대한 의지. 이 둘은 분명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각각이 서로의 원인이고 결과도 된다.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앞면이 있기에 뒷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미워하는 이유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넘어서 존재하는 울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 대칭되는 지점에 반드시 그것의 다른면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라도 그 대칭을 깨뜨리게 되면 거기에 대응되는 것 또한 함께 무너진다.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대칭점 주위. 그 어딘가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균형을 맞춰가며 지내 왔었다. 너무 나서지도 말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뒤처지지도 말고. 중심점에 잘 서있는 것이 적절한 삶이라고 배워왔기에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양 끝점을 모르기 때문에 적당히 중심을 잘 잡고 있는 것과 양 끝점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는 것은 겉보기에 바를 바가 없어 보인다. 어차피 가운데 서 있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세상에 대해 더 독하게 보일수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개연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고 이해한 만큼 더욱 잘 준비가 돼있다. 이들은 세상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기에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세상의 이면을 남들보다 더 빨리 봤다는 이유로 거기에 대해서 젠체하며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닌. 대신 누구보다 더욱 또렷이 면상을 바라보는 가운데 묵묵하게 서 있을 수 있다. 입을 앙다문 침묵은 의도와 상관없이 독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침묵은 서글프다. 어릴적에 배게에 대고 흐느꼈던 그 눈물 한방울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다. 제발 이 서글픔을 알아 줬으면 한다. 그냥 보이는대로 지껄여지는대로 내뱉지 말고 알아 줬으면 한다. 역겹고 징그러운 그 면상을 두눈 부릅 뜨고 마주 보면서 어렵사리 맨주먹 불끈 움켜 쥐고 겨우 버티고 있으면. 오롯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자면 세상에 대해 밑지고 있다고 느껴지고 억울함에 본전 생각이 수도 없이 난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잘못도 아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잘못도 아님을 알기에 아무말 없이 그저 닥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저 느끼는 것일 뿐이지 그게 실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실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나에게만은 냉소적이기 못하다. 다른 모든 일에는 묵묵히 바라볼 수 있으면서 나에게 만은 그것이 안된다. 이게 나의 한계이다.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실제하는 것인지 아닌지.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다. 그저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냉소적이지 못한 이 의지는 항상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내가 느끼는 이유가 그것의 존재 때문인지 위선과 의식 때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존재하겠거니 이러고 나면 끝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이 느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냉소적인 시선이 없는 의지가 이래서 나를 비참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에 기반한 침묵은 서글프다.

어쩔수 없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필연적으로 세상의 이면을 바라보던 그때의 나로 돌아온다. 이 지루하디 지루한 순환은 계속된다. 끝이 없는 이 되풀이 속에 나를 떠맡기고 있다. 그저 몸을 맡겨 두고 있으면 지루한 반복이 사실은 일탈의 연속이였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이 반복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변형의 연속이다. 지루한 순환 속에서 어느 순간, 양 끝점에 닿고 나서 가운데. 다시 그 중심점 어딘가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돌고 도는. 또 돌고 도는. 이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 어쩌면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게 솔직한 것 일 수도 있다. 악에 받쳐서 힘껏 뛰쳐 나가도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체념하여 그 순환에 순응하면 그제서야 일탈을 맞이하는. 그러면서 결국은 항상 돌고 또 도는. 앞과 뒤가 없고 처음과 끝이 없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반복. 자의도 타의도 아니며 반복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머릿속엔 항상 구슬픈 비가 내린다. 슬프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이건 서글프다. 서러움이 복받쳐 흐르는 슬픔이다. 이 비구름을 걷어내고 싶다. 내 살아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비구름이라도 걷어내고 싶다. 슬픔은 나의 몫이니 어쩔수 없이 내가 감당해야 하지만 서러움만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그저 이것 뿐이다. 내가 너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애정을 쏟듣이 너 또한 바라봐 주기만 하면 된다. 그걸로 너와 나는 서로의 길을 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는 접점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서러움과 슬픔으로 가득찬 나의 이 지루한 반복은 이 접점의 의미를 통해 해방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나를 알아줬으면 한다.



1) 나는 진정 이기주의적이고 세상에 무관심한 그런 사람인가? 사람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작은 고마움에 눈물 흘려 감사할 줄 아는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다. 왜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을까?

죽음을 떠올리면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소소한 일상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동생과의 다툼,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오신 아버지의 푸념들, 어머니와의 대화, 지금 손전등을 들고 일기를 쓰고 있는 나. 긍정적인 모습이든 부정적인 모습이든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있음을 고맙게 해주는 것들이다. 고맙게 해주는 이런 것들이 ‘죽음’을 맞이 했을 때 슬퍼하게 하는 이유이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저 ‘죽음’만을 떠올렸을 때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않는 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저 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죽음이 아니라 존재다. 이건 둘을 분리시켜 놓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과 존재의 상실.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시켜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순간에는 좀더 독해질 수 있다. 그 순간 만큼은!! 단순히 그 순간을 떠나 고마움으로 들어섰을 때, 살아가다 그 고마움이 몸서리 치게 그리워질 때 그때 가서는 무서울 정도로 분노하고 슬퍼한다. 단지 한 순간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 곳곳에서 죽음을 느끼고 고마움에 목말라 한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와는 다른 행동에 적지않은 고민을 해온 나의 변명은 이것이다. 죽음에 대서 가장 연연해 하지 않으면서, 죽음에 대해 가장 절절하게 가슴앓이 하는 존재. 이것이 나이다.

*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6-06 16:45) 

  
 
 
 
병장 김희곤 (2006/06/04 16:26:14)

인간의 존재는 애초에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에 너의 존재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바라보겠습니다. 
술잔에 애정을 듬뿍 담아 나눠 마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가지로~> 추천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04 16:32:37)

<가지로> 
특별히 드릴말이 없네요. 특히 이런글을 보면 말이죠.    
 
 
병장 이재승 (2006/06/04 19:03:19)

죽음이라..... 
대게는 
먼저 태어났기에 일찍 죽고 
늦게 태어났기에 늦게 죽는 
마치 군에 먼저와서 먼저 제대하는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가끔 죽음에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변의 공기가 삭 타버리고 
내 주의가 어슴프레지는걸 종종 느낍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런것이 일체 없는 공간이라는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마지막 수수깨끼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웃음)    
 
 
상병 이재용 (2006/06/05 10:45:24)

죽음이라는 단어가 한 사람에게 놓여질 때는, 대개가 스스로가 찾아서가 아닌 
불현듯 혹은 서서히 찾아오는 외부 요인(그것도 피할 수 없는)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모두가 살려고 노력하니깐요. 
그런데 우리는 남들이 불의의 사고였든지, 질병에 의한 죽음이든지, 타인의 죽음에 슬퍼합니다. 
그렇지만, 슬퍼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라든지, 떠나간 그를 위해서라든지 결코 이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영혼에 슬픔을 담은 술로만 가득히 채우고, 무기력하게 나날을 지내는 것은, 떠나간 그라도 그러한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악착하게 사는 게 낫지요. 

음. 그렇습니다. 보통 죽은 자에 대한 예가 슬퍼하고 울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 반대로 말하겠습니다. 슬픔을 딛고 더 전진한다면 그게 더 멋진 그에 대한 예우라고.. 
전 슬퍼하지 않습니다.    
 
 
 병장 박진우 (2006/06/06 08:43:33)

<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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