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고자 한다. 
 
 
 
 
Nitimur in Vetitum

여름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단체생활을 하기에 좋은 계절은 되지 못한다. 특히 요즘같이 큰 행사로 업무와 작업이 중첩, 과중되는 나날이면 햇발에 녹아나는 몸의 반대급부로 정신은 딱 황량한 겨울 들판을 연상시킬 만큼만 찬바람이 쌩쌩 불어제낀다.
신영복 선생의 말마따나 상대방의존재가 원망스러워 더욱 고통스러운 이런 때에도, 이런 난국들을 일시에 불식시켜 줄 몇 안 되는 해결책 중 하나는 ‘자기 맡은바 임무’를 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군 상병 제법 고참으로써 중요 육직기관의 핵심부서 요원인데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국가간성을 육성하는 중차대한 사안에 없어서는 안 될 부품, 볼트요 너트임을 신앙고백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올곧고 건전한 자아실현 아니겠는가. 가슴이 벅차온다. 
묶여 지낸다는 인식이 있음으로 하여 바깥 생활의 열락에 대한 선망이 워낙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역할극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어 굳이 이렇게까지 믿지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경감시키려 하고, 그리하고 있고, 그러할 수 밖에 없다. (위에서 쭉 나열한 ‘마취제’들의 효능은,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 할 것이다. 특히 타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의 쾌감은 가히 중독적이다.)
내가 상병이건 전입신병이건 이곳 방식으로 지명된 호칭이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호명은 분명 특정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설정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주위 환경과 체제에 의존하는 것이지 나 자신의 ‘진짜’ 속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실제로’ 무의미한 것이다.
바깥이라고 사정이 달라질 것은 없다. 핸드레이크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고 언명했지만 그의 언급은 좀 더 다른 측면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느끼는 ‘나’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덴티티, 누군가의 애인, 무슨 사장, 3선 국회의원, 좀 사는 집안 아드님이니 하는 속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인 것에 대한 진실은 구조내의 관계적인 측면보다 ‘휴가 나온 군바리 부대에서 축구 시합한 얘기하는’ 것에 대한 감수성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필연적으로 일련의 구조화된 관념과 이데올로기라는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실재와 진실은 사회 체제의 필터를 한번 이상 걸친 구성물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우리가 수확하기엔, 귀 기울이기엔 지나치게 치명적이고 위험한 일종의 ‘만드라고라’다.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오류는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진실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리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안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모르는 것은 약이다. 그것은 우리를 평온한 삶으로 되돌려 보낼 파란 알약이다. 


다음은 책마을에 비슷한 시각에 올라온, 서울에서의 생활에 대한 두개의 글에 나온 단어들을 각각 모아놓은 것이다.

구찌, 트루 릴리젼, 돌체 엔 가바나, 비즈바즈, 흰색 샤넬j12, 삼성, 역삼, 스시노미찌, 스타벅스, 크림 프라푸치노 그란떼, 연극, 전시회, 연주회, 세미나, 소개팅, 호텔 뷔페

그리고

고시촌, 고시원, 방직공장 여공, 옥상, 정비소, 폐기물 집적소, 12호 권씨 아저씨, 술 냄새, 빨간통에 든 김치, 9급 공무원 시험, 담배, 급성발작

밑도 끝도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 곧 진실이라 진술한다면 명백한 오류가 되겠지만 일단 조악한 예를 들자. 위 두 개의 집합에서 전자는 후자의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한다. 무심코 지나치는, 거두면 그만인 시선이면 몰라도 상대의 존재가 자신과 같은 계열의 세계에 있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편입시키는 ‘응시’의 순간, 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향유를 이전과 같이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극적인 판본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신화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오이디푸스가 숨겨져 있는, 이미 몇 차례 그 위험성이 암시된 진실을 고집스럽게 탐색해 나선 대가는 존속살인과 근친상간을 범하는 것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진술을 위해 지금까지 필요 이상의 관념과 인용구를 끌어다 썼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다. 최근 몇 주 간의 시간에 걸쳐 내 신념의 일부분이 몰락해 가는걸 느꼈고, 고통스러웠고, 그에 저항하는 내 몸부림에 대한 잦고 순환적인 오해의 죄까지 미리 앞서 통감하는 대신 부끄러웠던 과거까지 소급적으로 내기에 거는 정면 승부를 요청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서서히 걷어지고 있는 장막 뒤에 어떤 고통스러운 것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두 눈을 부릅뜰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알아버린’ 죄에 대하여 자살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그는 두 눈을 잃기 이전에 오히려 눈 먼 상태나 다름없었고, 이후에 진정한 눈을 가졌다. 그는 끝까지 ‘알고자’ 하는 탐색자로 남았다.

나는 알고자 한다.

Nitimur in Vetitum.
우리는 금지된 것을 알고자 한다.



p.s: 중간에 언급된 두 글을 쓰신 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하였음을 사죄드리고, 두 글에 대한 가치판단은 절대 지양한 그냥 예시적인 차원에서의 언급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p.s2: 비싼 돈 주고 산 책 보고 반쯤 베낀 싸구려 같은 글임도 미리 표시합니다.

p.s3: 책마을에 올렸다가, 희석씨랑 형진씨가 열심히 열심히 찔러주시는 광경을 보고 칼럼으로 옮깁니다. 저도 찔러주세요, 하아 하아(...) 

  
 
 
 
상병 박종민 (2006/06/03 13:41:00)

아니아니, 이런 언급이라면 몇 번을 인용하더라도 양해반사! 
오히려 지지를-    
 
 
 병장 김동환 (2006/06/03 14:26:15)

오우. 굳. 좋은 글 고마워요. 
잘읽었습니다.    
 
 
일병 김현동 (2006/06/03 17:12:20)

음. 대섭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응원할게요.    
 
 
상병 송희석 (2006/06/03 17:17:46)

찔러달라고 말하는 대섭님글을 보면서 잠시나마 불온한 생각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잘 읽고 갑니다.    
 
 
상병 조주현 (2006/06/04 09:43:22)

앗. 달려주세요. 쭈욱    
 
 
상병 최요환 (2006/06/05 22:17:42)

nitimur in vetitum, 도덕의 계보 서문에서였던가, 우상의 황혼에서 였나..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오류는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이것도 도덕의 계보였던가? 

아, 쇄말적인 것에 집요하게 천착하는 내가 서지학에 매료된건가, 혹은 독해에마저 좌절해 버린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