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사랑의 본질을 토론하다 
 
 
 
 



화장실에서 사랑의 본질을 토론하다 


안개 낀 마을로 기차가 들어오듯이 아련한 전철소리가 화장실로 울렸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나는 뭔가 변화 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지하철 화장실을 들어와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며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거울을 보며 이런 저런 표정도 지어보았다.(혼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뭐 그다지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할 지라도, 시간이라는 놈이 나를 원만히 그대로 놔두었을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내 스스로도 발전적이기 위해 (이를테면 운동이라던가) 노력했으니까,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거울 보기를 그만 두고 수도꼭지를 촤아 틀었다. 

"흐흑" 

분명히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소리는 나오되, 100%순수 물소리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 또한 설마 수도꼭지가 울부짖었다고 예상하는 것을 아니었기에, 고개를 뒤로 돌려 대변칸 쪽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용중'이라는 램프를 사용하는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 비해, 어쩌면 열악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여기 이 신도림 화장실 대변칸 문짝들은 밋밋한 몸뚱이를 뽐내며 전부다 굳게 닫혀있었다.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채 스스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며 왼쪽 대변 칸에서부터 맨 끝 쪽까지 눈동자를 돌렸는데, 도무지 어디에 누가 있는 건지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남 대변보는데 문틈 사이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할 까닭도 사실은 없었다. 
각자들 자기 인생 살기에 바쁜 이 세상이란 화장실에서 울부짖는 소리 한번 들었다고 누가 우나 걱정해 줄 시대적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발 맞추고 있는 나일 터였다.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혀 아가리 닫은 문짝들을 쳐다보다가 나는 다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물을 향해 손을 뻗어 CF처럼 물을 담아 간단히 손을 씻었다. 그리고 마무리로 여기저기 물때가 묻은 거울에 나를 비춰보며 오른손으로 머리를 살짝살짝 때려 손질을 해주었다. 
다리를 한번 털고 뚜벅 뚜벅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저기요" 

주둥이를 닫은 대변칸 중 하나가 분명 나를 불렀겠다? 이는 필시 좀전 내가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울부짖었던 사람이리라. 왜냐하면, '저기요' 하는 그 아무 의미없으나 무궁무진한 의미가 담겨있는 대사에 물기가 분명 촉촉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틀었던 수도꼭지 마냥 터뜨리고 싶은 울음을 참아내며 간신히 외친게 틀림없다. 
나는 어쨌거나 그 부름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고, 빡빡한 이 세상에 '저기요' 라는 단순한 부름만으로 이 내가 가던 길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었으나, 그 대상이 나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멈추고 보는게 예의이자 습관이었던 것이다. 
칸막이를 구렁이 담넘듯이 타고 넘어와 들리는 '저기요' 소리가 과연, 나를 향해 하는 부름이 확실한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잠시 일단 대답을 보류하고 멈춰 섰다. 행여 "예? 저요?" 하고 대답했다가 대변칸안에서 휴지를 움켜쥐고 10리 밖의 사람과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에게 무안을 주고, 무안을 받으면 어쩔 것인가? 이미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기 싫었기에, 조심스런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저기요, 밖에 누.. 누구.. 계시죠?" 

목소리의 성량이나 어투로 보아 분명 대변기에서 통화를 하는 무뢰한은 아님이 밝혀졌다. 사실 그러한 명제는, 내가 이제 부름에 응할 차례라는 것도 말해주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내가 대답하기에 앞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한가지 의아한 점이있었는데. 내가 분명히 남자화장실에 있는 것인가? 나는 뜨금한 맛에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아 소변기가 있음을 확인했다. 구둣발을 오므리고 섰는 아이처럼 순백으로 다소곳이 언제라도 오줌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 소변기가 무려 5대나 비치된 것을 보아하니 남자화장실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그런데, 방금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로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인가? 
스스로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으며 솔직한 마음으로, 귀찮음도 있었던 나는 잠시 처참히 저 말을 무시해버리고 그냥 갈까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울먹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화장실 대변칸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이 꽤나 흥미롭고 재밌어서 일단은 대답을 한 뒤에 상황을 지켜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귀찮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손 치더라도, 대변칸에 문을 잠그고 앉아있는 사람이, 내가 도망간다 한들 어쩔 것이며, 그러하므로 선택권은 항상 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 왜그러시죠?" 

조심스레 대답하며, 새삼 누가 보지 않는데도 대변칸에 누가 있었는지 차마 몰랐었다는 표정을 했다.(내가 보기에도 나의 몸짓은 '어라? 거기 누구 있는거에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굳이 그런 연극을 해야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여자가 남자화장실 대변칸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내 혼자 예측하건데, 이것은 남녀 역평등이 낳은 남자들의 피해의식에서 비롯 되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아무 잘못 없으면서도 왠지 죄스러웠다. 

"죄송한데요..." 

"예" 

다음 이어질 말을 유도하는 짧은 대답을 하며 나는 머리 속으로 <휴지 좀 가져다 달라> 라던가, <문이 잠겼어요> 라던가 하는 말들을 상상했다. 아니 이러한 작용은 상상이라기 보다는 반사작용에 가까웠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습과 습관에 의해 과학처럼 진행되어 버리는 그러한 작용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사작용 가운데 나의 복합적인 심상이 들어가고, 어느새 원인과 결과에 의한 다음 행동까지 예측을 하여<젠장, 귀찮게 됐다> 라는 심적 부담감 까지 안게되었다. 

"..." 

말을 이끌어 내는 대답을 해주었건만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됐던 것인이 어쩐 모양인지 대변칸에 앉은 그 사람은 말을 잊질 못했다. 이미 귀찮음 이라는 짐을 충분히 감수하고 대답을 했던 나로서는 그러한 침묵이 무안할 뿐이었다. 짜증의 씨앗을 아낙네들이 삼삼 오여 모여 내 마음 속에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 말 좀 들어주실 수 있어요?" 

예상 못했던 대답이지만, 이거야 말로 재밌는 대답이다. 이미 좀 짜증이 나있었던 나로서는 이 말이 베베꼬여서 심산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미 바쁜사람 붙잡아 놓고 당신의 말을 듣게 끔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닌가.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러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게다. 이제부터 할 말에 귀기울여 달라는 말이겠지. 여기서 또 나의 호기심이 짜증을 덮고 발동하였는데, 말하자면, 남자화장실에 와서 왜 여자가 훌쩍거리며 우는가, 또 낯선이에게 왜 말을 거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문득 이런 황당한 사건에 힘입어 저사람이 정말 여자일까 하는 의문이 다시금 들었다. 정말 여자같은 목소리에 여자같은 어투를 가진 남자가 절대 없을 거라고는 말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괜스레 남자화장실에 여자가 있다는 야릿한 상상이 저 문짝 너머로 분명 울고 있는 여성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한 몫 거들고 있었다. 그것은 자의와는 상관 없는 어떤 본능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희망을 사실로 바꾸어 내는 인간의 능력인 셈이다. 

"예 말씀하세요" 

내가 안심을 주는 듯한 어조를 담아 조심스레 대답해 주었더니 그녀는 또 잠시 말을 잃다가, 점점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이미 충분히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기에 이런 말을 듣고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새삼 이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 대변칸 안의 그녀(이제는 확실하다)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추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정말 몰래카메라에나 나올법한 일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며 이번 사건이 몰래카메라와는 상관없음을 밝혀둔다) 만약 그랬다 하면 나는 여지 없이 당해서 TV앞에 얼굴이 벌게졌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 상황에 닥쳐서는 그저 황당할 뿐 별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쪽으로는 침착해져서 그녀의 대화를 응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일 지 모르겠으나 남자들은 우는 여자에 약하고, 그런 여자들을 달래주고 감싸주고 싶어하는 기사도 정신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파악하면 약한 자를 감싸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야릇한 충동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 부차적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갑작스런 그 말에 응대하려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머리 속 선택지에서 고르기 시작했다. 

“ㅇ” 

그러나 나는 무언가 받아 칠 준비를 하려고 ‘ㅇ’소리를 아주 짧막하게 내면서도,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대변칸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선택지를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아, 유감이네요” 하는 외국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대사라던가. “아.. 네..”라고 말해 상대방의 기분을 허탈하게 만드는 대사라던가. “아이쿠 저런”이라는 어색한 효과음 이라던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도무지 어떤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대답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애초부터 상황이 부적절함에 핑계를 두고 일단은 그중에 가장 무난하다 싶은 “아, 네..” 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하는 것이 어투를 조금만 바꾸게 되면 ‘그러시든지 말든지’ 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 네..” 

나는 최대한 정말 유감이라는 듯한 어조를 담아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울려고..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여자화장실이 꽉 차있고 사람들이 줄까지 서 있는거에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지금 생각해도 그 상황이 서글펐는지 한번 훌쩍였다. 

“할 수 없이..이리로 뛰어 왔죠.. 마음놓고 울고는 싶고... 공간은 없고.. 마침 남자 화장실이 비어있길래..” 

어차피 저렇게 당당한 말투로 사건을 설명할 거면서 자신이 남자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연유를 왜 구구절절 설명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아마도 남자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나를 향한 최소한의 사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요. 잘 오셨어요.” 

얼떨결에 말하긴 했지만 정말 코미디다. 내가 이 화장실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방석을 깔고 손님 차대접이라도 하는 모냥으로 대꾸를 한 셈이다.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건 정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할 만큼 부끄러운 응대였으며 실제로도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할 정도로 내 자신의 실수에 놀라고 있었다. 별 것도 아닌데 사람은 가끔 자신의 그런 부끄러운 실수에 엄청나도록 당황하곤 한다. 

“픗”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대답이 웃기기는 했는 모양인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울다가 웃으면..... 털.. 나는데..” 

익명성이야 보장 되겠다, 얼굴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는 셈에 용기를 얻어 나는 내 스스로의 실수를 무마시킬겸, 그리고 오히려 그 실수를 승화시켜 유머로 변질 시키는 한 편, 앞으로의 대화에 있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주지시키기 위해, 초면으로서는 상당히(아주 상당히!) 실례되는 농담임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내게 되었다. 물론, 눈치를 살살 봐가면서 하긴 했지만. 

“하하” 

예상대로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소리 끝에는 조그마한 물기가 젖어, 아직 슬픔을 완전 떨쳐내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이 당황스러운 우리 둘 사이의 대화에 있어서도, 그리고 알 수 없는 얼굴을 가진 그녀의 비극에 있어서도 이 웃음은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엄청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가볍게 웃었으며, 괜스레 볼이 상기되어 누가 보면 주접을 떨고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잡스런 냄새 풀풀 풍기는 화장실 안에서 말이다. 

“왜, 헤어졌어요?” 

길거리에서 “나 헤어졌어요” 라고 등 뒤에 써 붙이고 우는 여자가 있다고 한들, 가서 왜 헤어졌냐고 물어보면 뺨을 맞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 여자는 남자화장실에 들어와 굳이 타인에게 말을 먼저 걸음으로 해서 헤어졌음을 말했기에, 나로서는 먼저 이런 말을 물어봐 주는 것이 예의이자 센스였다. 다시 말하면, 타인이라도 좋으니까, 자기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자신의 억울함을 이해해 줬으면(그것도 당장) 좋겠다는 그녀의 심정을 내가 다 파악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내가 물어보는 것이 좀 예외였는 모양인지 콧소리를 흥 조그맣게 낸 그녀는(아마도 ‘당돌한데?’ 하는 웃음이었을 것이다)이어서 남자친구와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몇 분간은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서 속내 깊이 찌든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꽤나 흥미로웠지만 오히려 이런 장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점이 되어,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바뀌기도 했으며 그러한 감정은 슬슬 부담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런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적 특이함(재밌는 것은 우리가 대화를 시작한 이후로 남자화장실에 이용객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이 가진 알 수 없는 야릇함은, 내게 그런 부담을 둘째 치고라도 쾌락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요소로 충분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남자화장실에서, 생판 모르는, 그것도 여자에게,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좀더 세부적인 분석을 해보자면, 난도질 된 금기라고 비유 할 수 있으려나. 지금 이여자와 나는 세상이 가진 여러 금기들을 마구마구 짓밟고 있었다. 아마 그런 함께 금기를 파괴하는 쾌락도 나와 그녀의 대화 흥미의 한 몫 거들었으리라.(최소한 나에게 있어) 
듣자하니 남자친구얘기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세상이 다 아는,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조회수 가 많은 하트 그림 같았다. 그냥,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 만났고, 어떤 점이 좋았고, 그래서 어떤어떤 일들을 통해 사귀게 되었는데, 사귀는 동안에는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그 남자는 사랑이 식었다며 자신을 차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일반적인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나를 실망시킨 것이 사실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오히려, 더 특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면 이 상황적 특이성이 주는 쾌락이 감소하지 않았을까 싶었기에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거의 끝마칠 때 쯤 해서 깨달은게 있다고 한다면, 초반 그저 위안을 주고 싶었던 ‘착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괜찮은 우연으로, 혹은 운명을 핑계 삼아 여자를 꼬실만한 기회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잃었을 때 그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끊겨 버린 사랑의 에너지를 불출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방금 헤어진 사람들을 잘만 유혹하면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음흉한 생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순수함에 가까운 욕망이었다. 운명을 핑계로 한다고는 해도, 이것이 진짜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운명이랴? 남자화장실에서 처음 만난 연인들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나는 듣도 보도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운명이라면 TV에 나가서 떠들어 댄들 부끄럽지 않다. 

“정말.... 너무 사랑하는데.....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 사람 앞에서, 차마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러자고 거짓말 해버렸어요.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찬성해 버리면, 그 사람이 잡아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점차 나에게 지난 추억들을 말하며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던 그녀는 마침내 헤어지는 순간의 감정들을 다시 마음속에 품는 순간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짐을 지고 신발로 화장실 타일을 콩콩 찍었다. 뭐라고 말하기 무안한 순간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이미 친구들과의 약속은 40분 정도가 늦어있었다. 
나는 괜스레 지난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끝에 울고 마는 그녀에게 짜증이 확 일었다. 그 순간 위로를 해줘야하는 착한 나는 힘이 너무나 약해져 있었고, 오히려 모습을 바꾸어 약자를 품에 안고 그 정복욕을 충족 시키고자 하는 모습의 욕망 가득 찬 내가 점점 발기하듯 강해지고 있었다. 

“힘내야죠!” 

이런 징징짜는 분위기 일 수록 갑작스런 결단력을 통해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도 큰 몫을 하고 우울한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 시킬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외침에는 그다지 진심이 담겨있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사실 진심을 알아채는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아무튼 이런 방법론에 의거하여 나는 화이팅을 국어로 외치었고, 그녀는 예상대로 꽤나 감동 받은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이 다음이다. 괜히 구구절절 왜 힘내야 하는가, 왜 당신이 소중한 사람인가를 설명해 주면, 나는 그저 착한 사람으로만 남아, 여기 화장실에서 그녀를 도와준 자랑스런 시민이 될 뿐일 게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부분에서 슬슬 떠나야 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아쉬움을 남겨주고, “힘내야죠!”의 의미를 더욱 크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우울한 사람은 하나의 단어에 더욱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나의 그 말을 몇 번이나 재해석 할 테고 그 순간순간 나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남는 것으로 족하랴. 이것 또한 안 될 말이었다. 나는 좀더 실질적이어야 했다. 그것도 욕망이라는 이름하에,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최대한 급하게, 그러나 성의있게 글자를 하나하나 써서 “힘이 되어드릴게요. 언제든 연락하세요.” 라는 말을 적어 놓았으며, 그 밑에는 그 글자보다 크고 또박또박하게 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았다. 

“전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말을 중얼 거리며 동시에 써놓은 쪽지를 대변칸 문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바스락, 종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종이 집는 소리가 찰바득 하고 들려왔다. 이 순간 “꼭 연락하세요” 라고 말하면 흑심이 빤히 보이는 짓이기에. 나는 “그럼, 기운내세요” 라는 대사를 선택하고는 재빨리 뛰어 나갔다. 여기서 그녀의 감사의 말을 제대로 듣게 되면, 다시 만날 이유 중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느닷없이 떠나 버리는 것이 나의 신비성을 부각시키며, 그녀로 하여금 산뜻한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효과를 내게 될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나는 금세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착한 내가 다시 살아나, 뿌듯함을 느끼며 자기만족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온 표정으로 드러났으며, 가슴은 벅차올랐다. ‘많은 힘이 되었을거야’ 하고 자기 위안을 하며, 나는 스스로 대단해 진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윽고 한숨을 푹 쉬며 웃은 나는 이미 약속 시간이 많이 늦어버린 모임장소 주최측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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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다음에 한번 뵐 수 있을까요] 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은 게 사실이며,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건데, 나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쓰는 동안 한 글자 한 글자에는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연정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며, 아직도 사랑하는데 하는 중얼거림 또한 서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왠지 나는 연락이 된 것이 기쁘기도 하고, 찝질하기도 했다. 비단 그것은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친구들과 술을 진탕 퍼마시며, 몇 차례나 화장실을 들락거려 웩웩 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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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셨다면 패스. 

  
 
 
 
상병 안대섭 (2006/06/02 18:05:35)

글을 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빼먹으셨네요.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를 쓰셔야죠! (버럭)    
 
 
일병 김지민 (2006/06/02 18:52:54)

그게 왜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는 잘 모르겠는걸요 (웃음)    
 
 
병장 권기범 (2006/06/02 20:20:42)

'맘잡고 문열었는데 안에 아무도 없더라'식의 납량특선 괴담을 기대한 저는 비정상일까요.(딸꾹. 스티븐 킹 소설을 읽다보니 그만 이런 생각이.)    
 
 
병장 조상욱 (2006/06/02 23:08:13)

안대섭// 시리즈겠지요. 

김지민// bookc.net 에서도 볼수있기를 기대합니다.(웃음)    
 
 
상병 이재영 (2006/06/03 10:11:10)

정말 그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병장 정치훈 (2006/06/03 15:58:04)

그 뒤를 안쓰시면 독자에 대한 기만이겠지만.. 안쓰시는 이유가 살짝 짐작이 되려고 하므로 PASS~    
 
 
상병 조주현 (2006/06/04 09:40:41)

아 그거 진짜 재미있겠다. 
여기다가 한편쓰고 
뒷이야기를 Bookc에 쓰는거.    
 
 
일병 김지민 (2006/06/04 15:50:07)

응? 
뒷이야기는 별로 중심을 안두었는데 (훌쩍)    
 
 
병장 이재승 (2006/06/04 19:19:05)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웃음!)    
 
 
상병 정세원 (2006/06/07 09:41:42)

뒷 이야기 정말 궁금..    
 
 
병장 김건도 (2006/06/14 16:26:27)

뒷 이야기.....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