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놀이터로는 이제 제법 개미들이 기어다니기 시작했고, 얼어 붙어 있던 시소들도 웬만큼의 몸을 녹여, 수축에서 팽창으로 진화 하고 있었다. 바람은 조금 찼으나 싱그러웠고, 아득하게나마 풀내음을 그 속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봄은 살며시 패티쉬같은 희미한 쾌락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김씨는 죽림아파트 105동의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60가구 정도밖에 살지 않는 작은 아파트 였지만, 그 평수가 큰 관계로 거주민들은 하나같이 부유한 사람들 뿐이었다. 주차장으로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고, 이를 뽐내기라도 하는 듯 주말이면 세차하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중산층에서 조금더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 아직 상위 계층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중간층의 사람들이 사는 곳. 죽림아파트 105동은 그런 아파트였다.
김씨는 그런 105동의 앞길과 주차장을 비질하며 관리하는 일개 수위에 지나지 않으나, 한때 그도 여기 105동의 사람들처럼 제법 잘나가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돈도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자고 남을 만큼 여유있었으며, 여름과 겨울에는 꼭 바캉스를 떠나고, 콘도도 예약할 수 있는 형편의 그였다. 그러나 IMF시절 급격한 불황으로 인해 하청업체가 부도가 나기시작하면서 회사가 흔들렸고, 동업자인 박씨와의 잦은 다툼으로 인해 기어코는 기둥이 뽑혀 버리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들을 다독이며 다 잘 될거라고 안심을 시켰으나, 그나마 조금 남은 재산으로 시작한 주식은 그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뿐이었고, 마침내는 집마저 경매에 팔리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옛날과 같은 추진력이나 재력도 없는 그로서는 사업을 새로 시작할 힘이 없었고,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결국은 경비일에 취직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김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있냐. 그리고, 아파트 주민들 지켜주고, 나도 이래저래 보람찬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취객들 태우고 맨날 싸움질 하는 택시기사보다야 낫지 않겠냐?"

그러나 그렇게 택한 경비의 길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이 철야 근무지, 나이든 그로서는 젊었던 시절 쉽게도 버텨냈던 새벽녁의 이슬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24시간 내내 일을 하고 와 자식들이 출가해 텅빈 집에 돌아올 요량이면, 성당엘 간다고 아내가 나간 집만이 덩그러니 그를 맞이해 줄 뿐이었다.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에 또한, 오랜세월 사무직을 지속해 온 그에게는 이러저러한 잔 작업을 요구하는 경비일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다. 여름에는 풀을 베야했고, 가을에는 낙엽을 치워야 했으며, 겨울에는 눈을 쓸어담아야 했다. 미약하게 나마 디스크를 가진 그에게 있어서는 그런 일들이 수월하지 않았고, 어쩔때는 심한 몸살에 걸려 일을 나가지 못해, 다른 수위로 부터 욕을 먹기도 했었다.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반갑게 인사를 받고, 가끔 명절날이나 좋은날에 식은 떡이나마 대접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그의 꿈들이 아풋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순간들이었다.

그런 김씨가 삶의 활력을 찾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겨울 내내 얼어붙은 지면과 따갑게 때리는 강추위 바람에 못 이겨 나오지 못했던 꼬마들이 105동 앞 놀이터로 나와 놀기 시작하면서 김씨는 함께 활력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손주뻘 되는 꼬마녀석들 노늘꼴을  보자면 보면 귀엽기도 하고,  함께 활기 넘쳐지기도 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위안이 榮 것이다. 장남 녀석이 결혼을 하긴 했지만 3년째 손주 소식이 없어 서운하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텅빈 놀이터를 바라보던 김씨의 눈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나와 그네를 타는 꼬마 여자애가 들어왔다. 분홍색 파카에, 약간 추워보이는 듯한 귀여운 하얀 치마를 입고 있는 꼬마였다. 단발 머리는 새초롬했으며, 약간 마른듯한 몸에 기묘하게 어우러지는 통통하니 귀여운 볼이 여자아이의 깜찍함을 더했다. 그러나 그런 귀여움과는 달리 표정과 분위기는 꼬마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는데, 이것이 김씨의 호기심을 동하게 했다. 왠지 모를 묘한 끌림이 김씨를 이끌게 한 것이다. 김씨는 원래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몇 일이 지나도 혼자 놀이터에 나와 그네를 타는 그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이 그의 머리를 감쌌다.

“꼬마야, 105동 사니?”

김씨는 뒷짐을 지고 놀이터로 다가가 꼬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꼬마를 대하는 전형적인 아저씨다운 웃음을 담은 질문이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표정. 오랜 세월은 그런 천연덕스러움을 그에게 길러주었다. 

“네”

꼬마는 여전히 그네를 타며 때 묻지 않은 대답을 건넸다. 휘청거리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네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네를 멈추지 않아도 대답하기에 수월했다. 잠시 김씨를 바라보던 꼬마는 대답을 마친 뒤 이어 땅을 바라보며 발을 굴러 그네를 좀더 높이 뛰었다.

“이 아저씨가 여기 경비를 한지 6개월이 되는데도 너는 처음 보는구나”

사실이었다. 6개월이라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세월동안 경비를 해왔지만, 이 꼬마는 초면이었다. 보통 엘레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마주하다보면, 어디사는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몇인지 까지는 알지 못해도 인사를 주고 받게 마련이었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얼굴도 익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김씨에게 이 꼬마아이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그저 느낌일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짐작하는 김씨였지만, 그저 그런 느낌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특히나 곰살 맞지 못한 어른들이야 매번 보고도 모른체해 생소할 수 있다 쳐도 손녀뻘 되는 이런 꼬마아이를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잊어먹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응. 나 한동안 좀 아팠었어요.”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 꼬마는, 그네를 높이 뛰우기 위해 체중을 앞으로 실어 힘을 주며 그렇게 무거운 말을 가볍게 그네 타듯 답해버렸다. 어린나이에, 어디가 어떻게 아팠길래 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이제서야 내가 처음본단 말인가. 김씨는 의아했지만 곧 객관적인 이성을 찾아 아이에게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만큼의 어조를 담아 질문을 다시 했다.

“어디가 아팠니?”

한동안 김씨와 꼬마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꼬마는 병명을 잘 모르지만 가슴이 막 아팠다고 했다. 기왕이면 병명이나마 정확히 들어 어디가 아픈지 자세히 알고 싶은 김씨였으나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꼬마의 나이가 너무 적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밖에도, 105동 어디에 사는지,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지 등을 물어 꼬마의 신상을 파악했다. 굳이 뒷조사라도 하려는 계획은 아니었으나, 6살 먹은 꼬마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그런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604호에 살고 있었으며, 부모님은 둘 다 직장에 다녀 혼자 쓸쓸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이 아픈 동안 유치원도 그만두게 되어 친구도 별로 없는 듯 했다. 그제서야 김씨는 어느 정도 꼬마가 혼자 그네를 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꼬마의 표정에는 외로움에 대한 불평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 아저씨랑 놀까?”

말 없이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는 그날부터 그 여자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6개월 경비생활 중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끔 꼬마들의 장난을 받아주기도 하고, 쓰다듬어 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친구가 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대를 뛰어넘는 교류의 장이었다.
꼬마는 7살 이었다. 이름은 김세나. 발랄하고 귀여운 이름이었다. 그 날부터 김씨는 매일 세나가 혼자 놀이터에 나와 그네를 탈 때마다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고, 그네를 밀어 태워주기도 하면서 작업 이외의 남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동안 피곤함을 보충하려 낮잠을 자던 시간을 까먹는 행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피곤함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엔돌핀이 솟아나 하루하루가 활기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맞교대를 돌아 105동의 다른 경비 오씨와 교대하고 집에 갈라치면, 그 날은 세나를 못보는 구나 하는 아쉬움에 귀가길에도 105동을 한번 더 돌아보기도 했다. 원래는 업무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다 싶이 집에 가서 혼자 휴식의 시간을 가졌던 김씨였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해 아무도 없는 텅빈 집안에서 부인이 먼저 끓여놓고 간 국을 덥혀 밥을 먹다 보면 스스로 처량해지기도 하고 외로움에 사묻혀 밥숟갈에 힘이 잘 안들어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럴때 마다 김씨는 세나의 웃음이 떠올랐다.

2주 정도가 지나는 기간동안 김씨는 세나와 무척 가까워졌다. 세나도 원체 어린 나이에 가면없이 그를 대했기는 했으나, 이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고, 김씨 또한 주책맞지만서도 그의 이야기를 세나에게 최대한 알기쉽게 풀어 해주기도 했다. 그에게 세나는 위안처였고, 외로움을 달래는 안식처였다. 세나는 재미가 있건 없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특유의 어린 호기심을 발동해 이런 저러한 것들을 물어오기도 했다. 김씨는 그러한 대화의 매력에 끌려 꼬마에게 할말 못할 말을 차츰 가리지 못하고 하기 시작했다. 자식새)끼 길러나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삶에 대한 푸념과 사랑에 대한 회의까지. 온갖 세월의 찌든 때가 묻은 이야기를 알기쉬운 이야기로 풀어 세나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었다. 이러한 만족은 그의 욕구의 만족과도 연결 되었다. 서로의 욕구가 일치하는 관계. 듣고 들어주는 관계. 그리고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관계. 김씨는 조심스레 그의 집 화장실에서 세나가 큰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삶에 대한 푸념은 하면 할수록 침체되는 삶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지만, 담배처럼 한숨처럼 그 순간만큼의 행복은 충족되기 마련이었다. 가끔은 김씨 스스로도 어린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한심스럽게도 느껴졌지만, 그리고 죄의식도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아이에게 성숙미를 길러줄 수도 있다는 미명하에 자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은 그런 양심 문제를 떠나서 세나가 너무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그의 이성의 눈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이미 너무나 많은 강을 건너가 버린 탓이었다.

문제는 3월이 되면서였다. 생일이 빨랐던 세나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세나와 부딪히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보통 봄방학 시즌이라 말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나가 어김없는 시간에 어김없는 자리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으나, 이제는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김씨는 서글픔이 앞서기는 했으나 아침 등교를 하는, 그리고 하교길에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인사를 하는 세나가 새롭기도 하였다. 색다른 즐거움이자 쾌락이었으나, 그전과는 다른 관계라는 의식이 그의 외로운 기둥을 다시 흔들어 댔다. 다시금 철야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무거운 공기 속에서 잠자는 날이 많아졌다. 이제는 세나의 웃음을 생각하는 것도 외로움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고 만 것이었다.
더욱이, 세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김씨만의 소유물 같던, 혼자만이 가진 안식처였던 세나가 이제는 다른사람들의 공유물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 처음 세나에게 다가갈 때에 친구들이 없는 모양이 측은해서 다가갔던 초심과는 달리, 이제 김씨의 눈에서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에 질투의 불똥이 튀고 있었다. 추잡한 소유욕으로 변질 되고 있음을, 김씨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이제 예전처럼 다가가서 ‘세나야’ 하고 불러도 건성건성으로 대답하며 제 친구들과 꺄르르 거리며 노니는 모습이 그의 가슴을 찢어 놓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그는 이불 속에 누워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고있는 세나를 발견한 김씨는, 예전처럼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안그래도 어젯밤 부인 이씨와 한바탕 싸움을 치른 뒤였다. 스트레스가 겹쳐 외로움과 범벅이 된 그의 몸뚱이 에서는 왠지 모를 불길한 내음마저 풍기고 있었다. 세나에게 말을 걸려는 그의 모습에서는 어떤 간절한 소망이라기보다는, 강간범의 욕구에 가까운 기운이 맴돌았다.

“세나야”

김씨는 애써 웃어보이며 세나를 불렀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얼음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세나를 보니 술레를 맞는 모양이었다.

“세나야”

김씨는 다시 한번 세나를 불렀다. 세나가 귀여운,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응?” 이라고 대답을 하면, 웃으며 세나를 데리고 와 경비실에서 맛있는 것도 먹여주며 이야기를 할 셈이었다. 어제 그는 아이들이 좋아라 한다는 과자를 편의점에서 사와 경비실 구석진 곳에 처넣은 뒤였다. 돈계산을 하는 동안 편의점 점원의 얼굴에서 맛있어 하며 웃는 세나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었다. 이제는 그러한 꿈이 현실이 될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나는 김씨의 부름에 들은척 만척 대답도 하지 않고 뛰어다니기만 했다. 그저 천진난만한 웃음만이 뒤따를 뿐이었다.
김씨는 왠지 모를 화가 부글부글 끌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세나에게 줄려고 과자를 살 때 세나를 생각하던 마음이 허물어지는 듯한 공허함을 느끼며, 자신이 세나를 생각하는 시간들의 붕괴를 실감하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이성이 탁 하고 고무줄 튕기듯 튕겨나가버린 이후였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세나야!!!”

그는 소리를 질렀다. 놀이터로 공터의 바람이 불어 그 외침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다. 한동안 공기의 파동은 쩌렁쩌렁 울렸다. 그 파동은 아이들의 놀이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저 큰소리뿐만이 아닌 악에 받친 기운까지 서린 고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아이들은 무서운 표정으로 김씨를 바라보았다. 세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욱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그러냐는 억울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순간 김씨에게는 미안함과 회한이 찾아 들었다. 꼬마에게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소리질러서 미안하다. 세나야...... 아저씨랑 놀지 않을래?”

이 민망한 분위기를 깨뜨리려 김씨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최대한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세나를 다독였다. 그러나 이미 세나는 겁을 충분히 먹고 있었기에 그의 인자한 미소도 악마의 미소처럼 무서워보이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 싫어요”

꼬마들은 솔직하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나이를 좀 먹었더라면, 김씨의 눈치를 살펴서라도 시늉이라도 해서 얼를 수 있었을 테지만, 세나에게 그런 고차원 적인 대응법은 두자리수 곱하기와도 같은 이야기었다. 그저 솔직한 대답뿐이 최선이었다.
때때로 정직이 최고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거짓이다. 사람들은 거짓부렁 속에 뒤섞여 스스로가 거짓을 하고 있음을, 그리고 타인이 거짓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러한 룰에 깔려 살아가고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지금 이런 김씨의 마음이 폭파 직전에 와있는 상태에서의 세나 당사자의 솔직함은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김씨는 그대로 얼굴을 굳히고 뚜벅뚜벅 걸어가 세나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어깨너머로 들어 올렸다. 세나가 꺅꺅 거리며 울음을 토해냈으나 김씨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이 꼬마아이를 내동댕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세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세대를 넘는 교류의 장을 열고 싶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곳이 필요했다. 지금 잃어 버리면 영영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이제 어떻게 한다. 하고 입술을 잘근 깨무는 김씨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었다. 이미 정상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있음을 동공이 확실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세나는 여전히 바둥바둥 거리며 김씨의 어깨위에서 꺅꺅 소리를 질렀고, 세나의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세나와 맞물려 징징대고 쓰러져 우는 녀석도 있었다.
김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재빨리 105동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주택과는 20분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등짝을 때리는 세나를 무시하고 그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를 제법 멀리 벗어났을 무렵, 아파트에서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김씨는 무시했다. 아마도 김씨의 행동을 지켜보는 주민들의 시선일 것이다. 상관 없었다. 김씨는 세나가 필요했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대화가.
필요했다.

5시간도 채 되지 않아 김씨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세나가 뭔가를 잘못해서 혼나는가보다 하고 지켜보던 주민들이 아무래도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꼴이 수상쩍어 신고한 끝에 나은 결말이었다. 다행히 세나는 성폭행을 당하지도, 어떠한 가혹행위를 당하지도 않았었지만, 이미 세나는 온통 얼굴이 눈물로 젖어 퉁퉁 불어 있었다. 이제는 우는것도 지쳐, 파출소 의자 한구석에서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파출소 안에서는 고함소리가 빽빽대고 터져나왔다. 세나의 아버지가 소식을 듣고와 김씨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때려 죽일것만 같은 기세였으나 경찰들의 만류로 두 팔을 붙잡혀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하는 중이었다. 경찰들은 세나의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파출소 앞으로는 105도 주민들이 제법 모여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세나의 아버지는 여러 번 욕을 하고 여러 번 만류를 당하며 그 같은 일을 반복하였으나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욕지거리를 계속 해 대었다.

“뭐야 이 미친새)끼야! 니가 뭔데 우리딸을 집으로 데려가! 이런 변태새)끼야!”

김씨의 등 뒤로 거침없는 욕이 쏟아 졌다. 일단 수갑을 차고 경찰을 맞대고 취조 당하는 김씨는 맥이 다 풀린 듯 온몸에 힘을 쭉 빼고 앉아있었다. 몇 번이나 욕을 먹고나서야 김씨는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예전엔.. 당신 같았지”

김씨는 기묘하게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파묻었다. 세나가 잠자고, 세나의 아버지가 욕하고, 김씨가 얼굴을 파묻은 가운데, 파출소로 봄바람이 불었다. 따스했으나 면도날을 간직한, 봄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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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옛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래야 뭔가 정리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앞으로도 종종, 옛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이미 보셨다면, 패스ㅡ
 

  
 
 
 
 병장 김동환 (2006/05/26 16:59:25)

음..전 처음봤어요.    
 
 
 병장 노지훈 (2006/05/30 20:42:52)

이건 꽤 인상 깊게 봤던...    
 
 
병장 이은호 (2006/06/19 18:52:11)

처음 봅니다. 
저는 이래서 집착을 증오합니다. 
'혹시'의 가능성도 두지않으려고요.    
 
 
병장 이동일 (2006/06/20 00:41:19)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