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벨라(Novella)와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들어가며.

많은사람들은 고전이라는 책들을 ‘위대한 책’, 혹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이 그럴것이고, 철학서라면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따위가 그런것일 것이다.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안읽히는’소설.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다. 이 책이 왜 그렇게 말들이 많고, 유명한 것이며 왜 또 읽혀지지 않는것일까. 이 책은 단테이후에 쓰여지는 르네상스시대 최대의 소설이고, ‘소설(Novella노벨라)’이라는 장르자체를 탄생시킨 그 자체로서도 혁명적인 소설이다. 


문학,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중세시대에는 소설(Novella)이라는 장르자체가 없었다. 중세의 모든 문학은 곧 시문학이었으며, 음악의 운율과 궁정의 살롱풍에 맞춰서 모든 문학이 재편되었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요넥, 라우스틱, 갱가모르같은 로망스와 파르치팔, 이바인, 어느 기사이야기, 랑발같은 기사도문학이 거대한 서사시로 불려졌다. 
반대로 기다란 이야기형식으로 되어있는 서사작품들은 대개가 우화의 편린들(여우이야기, 파우스트 민담, 인동덩굴 등)이나, 신화 전설의 재생산(니벨룽겐리트, 에다)을 의미했다.
즉, 중세문학의 커다란 특징은 두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로, 로망스-기사도문학이 가지는 모험의 환상성과, 플라토닉한 지고지순의 신념에 대한 종교적 숭배. 둘째는, 민담이 가지는 단순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구조가 최초로 문학적 표현력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민담을 시적으로 재생산한 작품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바인과 파르치발(성배이야기)은 아더왕 전설을 기사도 문학으로, 종교적 교양문학으로 새롭게 재편한것이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켈트신화에 남아있는 여러 전설들(흰손의 이졸데, 트리스트람 전설등)을 로망스로 리메이크 한것이고, 라우스틱이나 요넥, 갱가모르같은 전형적인 중세 로망스는 중세 민간인에게 산재해있던 민담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즉, 이야기의 내용면에서는 민담과 전설, 환상담이 혼재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파르치발의 경우는 영웅신화의 양태와 비슷한 플롯구조를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즉, 민담에 가까운 문학적 형태) 이는 중세문학이 아직 이성과 감성의 두 양태가 분명히 분화되지 않은 정신을 간직한 무정형의 문화로 특징지워진다는 에코의 지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中‘)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돈키호테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 중세의 끝자락이라 불리는 세 작품을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포문을 연 삼부작이라 불리는 단테의 ‘신곡’,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그리고 제프리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세 작품중에서 맨 앞자리는 단연 단테의 ‘신곡’이 차지한다. 왜냐면 신곡은 중세적 종교-민담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한 마지막 중세인이며, 작품 안에서의 단테 자신도 천사의 숭고한 인도(베르길리우스)와 신의 은총이 가득 담긴 숭고한 사랑(천국편:베아트리체)에 이끌린다는 다분히 중세적인 사상으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인도하는 과정은 일종의 ‘계시(Vision)'을 통해서다. 기독교의 특징이 그러했듯이, 중세문학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가 바로 계시에 의한 환상의 현현인데, 단테 역시 신곡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곡은 중세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대작이다.
하지만, 신곡이 르네상스와 중세의 분수령이라 불리는 중요한 이유, 바로 신의 세계 안에서 ‘인간을 인식’하려 했던 시도가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옥편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신앞에 선 존재인가’라는 겸허함, 연옥편에서는 인간의 끊임없는 구도의 표현, 천국에서는 신과 함께하는 은총의 영혼의 인간을 노래하고 있지만.
보카치오의 명작 ‘데카메론’과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여러모로 신곡과 대조적이다. 두 작품 모두 중세적이면서도 지극히 르네상스적이다. 전자의 입장은, 작품의 이야기가 중세의 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며, 후자는 소설의 내용적인 면에서 르네상스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메론과 켄터베리 이야기는 모두 투박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정염과 패설을 기본테마로 삼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것도 많지만) 즉, 신에게로 향하는 중세문학의 특질(신에게로 다가가기위해 끝없이 구도하는 성배이야기나, 신의 은총으로 남녀가 죽음으로 엮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와는 다르게)은 단테를 지나 보카치오와 초서에 이르러 드디어 그 문학적 테마가 무너지기에 이르는 것이다. 
보카치오와 초서의 문학적 테마는 ‘소박한 인간에게로’ 그 초점이 맞춰진다. 신(비단 카톨릭의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중세의 민담에 존재하는 제우스, 아폴론등 여러 신들.)들은 이제 그들의 문학에서 ‘미신으로 업신여겨지는 문화의 한 축’으로 밀려나가 진지한 ‘소재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의 문학적 테마는 오로지 ‘인간’ 그 자체이다. 인간에 대한 탐미적 통찰력. 보카치오와 초서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며, 단테가 마지막 중세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카치오와 초서가 르네상스의 문을 연 작가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일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돈키호테가 쓰여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키호테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모두가 다 아는 그것이다. 만차 지방의 귀족 키호테가 로시난테를 타고 판초와 함께 둘씨네아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말도안되는 설정. 그리고, 그것이 기사소설의 풍자라는 것 정도. 하지만, 문학사적으로 이 작품을 그렇게 만만한 아우라고 받아들이기에 이작품이 가지는 위치는 너무나도 확고하고 높다. 왜냐면, 돈키호테는 소설(Novella노벨라)을 탄생시킨 창조주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노벨라(Novella)의 탄생.

돈키호테가 쓰여질 때까지의 서사문학작품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민담과 혼재된 양식으로 직선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중세문학에서와 마찬가지이며, 르네상스로 들어가는 보카치오와 초서,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그리멜스하우젠이나, 그리피우스, 파우스트민중본같은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세르반테스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이야기’는 파괴된다. ‘플롯’, 즉 ‘서사적 내러티브’가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서사적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신곡이나 데카메론의 이야기는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고, 저런 사건이 전개되어 주인공은 어떻게 된다.’라는 이야기(스토리)의 형식을 가진다. 이것은 민담이 구술되는 방식이며, 즉 신화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선적 이야기이다. 신곡에서 역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따라 그저 일어나는 현상들을 주욱 시간의 순차에 따라 f어보며 지나가고 느끼고 본것을 시로 적는다. 데카메론의 이야기 역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남녀상열지사를 가감없이 적는다. 
이점에서는 돈키호테도 마찬가지인것 처럼 보인다.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에 미친뒤, 로시난테와 산초를 데리고 허풍으로 가득한 풍차를, 거인을 만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시간의 순차성을 가지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되는 중요한 사실. 돈키호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은 ‘인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플롯이란 ‘왜?’라는 작품속 질문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대답을 뜻한다. 돈키호테는 만년의 ‘소설탐독’에 의해서 기사를 신봉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마을의 모든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부여하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여행을 한다. 이러한 만행(?)은 이미 예견된 플롯의 미래를 보여준다. 그가 조롱당하고, 어이없는 행동을 취하는 시니컬한 행동하나하나는, 돈키호테의 신념(비록 일그러진 그것일지라고 할지라도)에 대한 결과의 창으로 하나하나를 비춘다. 즉 돈키호테에는 돈키호테와 둘씨네아, 산초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품에 풀롯. 즉, ‘리얼리티’라는것을 부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환상적 소재를 가지고 있는 (중세적 사상의) 주인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리얼리티’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환상문학의 허망함을 날카롭게 잡아내고, 더물어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리얼리티를 부각시킨다는 가장 커다란 매력을 가진다. 현대문학사에서 돈키호테를 ‘문학사의 축복’이라고 칭찬하는 것도 역시, 이것이 고전반열에 올라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도 ‘문학’에 이 리얼리티를 부여했다는 공로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얼리티는 그냥 ‘사실성’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소설에 ‘사실성’을 부여했다는 것으로 돈키호테의 문학적 공로가 인정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포현한것이 리얼리티라면, 중세의 기사와 공주의 ‘지극히 사실적인’ 사랑이야기는 리얼리티가 아니란말인가? 라는 질문이 남아있을수도 있겠다. 물론 필자가 지금 지적하는 리얼리티는 문자그대로의 사실성이 아닌, 문학적 리얼리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세르반테스 문학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숨겨져 있다.


- 돈키호테의 리얼리티. 자아의 인식을 넘어서.

돈키호테가 리얼리티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만차지방의 위대한 영주인 키호테 귀족의 환상적인 모험. 그의 시작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자신의 모습(기사의 후예라는)을 찾기위함이다. 비록 환상과 허구의 세상에서일지라도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명예를 되찾는다는 ‘소명’(이점도 기독교적이지만)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이 소설이 지극히 사실적이기 때문에 풍자희극이 되나는 점에서 보여주듯이) 많은 사건들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이상(기사도)과 삶에 대한 회의를 조금씩 품어나가기 시작한다. 거인이라고 믿었던 커다란 형상이 풍차가 되는 순간, 언덕이 되는 순간. 마갑을 입은 뛰어난 준마가 볼폼없는 노새로 ‘드러나는’ 순간에, 돈키호테는 자신이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 시기(15~17세기) 스페인의 사상적 흐름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자아가 무엇인지 묻는 인간의 중대한 질문(철학적 질문)이 문학속으로 흡수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우리는 돈키호테 속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죽음에 임해서,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고향이라는 수긍을 하면서, 모험이 헛된 것임을 시인하면서 지긋이 눈을 감는다. (물론 그러한 모습의 또다른 적자인 산초를 통해서 속 돈키호테가 시작되긴 하지만) 자아의 인식, 실존적 죽음의 수긍. 판타지의 부정과 ‘리얼리티의 인정’. 돈키호테가 뛰어난 점은 바로 이것이며,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작은 스페인의 레콩키스타가 끝나고 통일이 된 뒤의 ‘자아찾기’라는 민족적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양식으로 나타난 ‘노벨레’라는 것이 커다란 금자탑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자아찾기와 예술에의 리얼리티부여는 노벨레와 피카레스크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며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돈키호테의 이런 업적은 메리메의 ‘카르멘’으로, 뒤마부자의 작품들로 넘어가면서 점차 소설의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적어도 E.A 포우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소설이라는 외형적 양식에 커다란 프뉴마(숨결)을 불어넣어준 작품이라고 한다면 단연 돈키호테가 그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것이 분명하다.  


- 돈키호테와 ‘포스트모더니즘’ -

그렇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문학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작품이다. 한 문예사조나 예술사조에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충분히 그런 작위를 수여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와 더불어 근대문학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소설이 시작되었다. (원래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다) 중세의 환상성을 타파하고 현실을 ‘인식’한다는 말 그대로의 ‘돈키호테적 혁명’.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위대하고 수백년간 회자되는 이유이며, 왜 돈키호테가 고전문학에 빠지지 않는 작품인지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라도 알아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현대의 ‘돈키호테적 혁명’이라고까지 불렸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무엇인가. 직선적이고 민담 환상적인 르네상스를 깨부수고 ‘리얼리티’라는 축복(?)을 주었던 선구자 돈키호테의 혁명적인 횃불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시 돈키호테의 혁명을 ‘돈키호테적 혁명’으로 타파하려하며 리얼리티로부터 소설을 멀찌감치 떨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리얼리티’를 깨부수는 입장에 서 있다. 마르케스와 톨킨이 그러하며, 보르헤스와 카를로스 푸엔테스, 로아 바스토스,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심지어 요시모토 바나나나 박민규같은 주위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티를 깨부수고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려고 분투중이다.

새천년이 대두된지 벌써 여섯해가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역시 꾸준히 돈키호테가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티비에서 돈키호테가 등장하고, 강단에서도 돈키호테가 회자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돈키호테가 문학에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횃불인 ‘리얼리티’와 근대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리얼리티를 '해체'하고 환상과 무정형의 문화로 들어가야한다는게 지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인듯 하다. 이제 문학은 어디로 흘러갈 갈것인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조차 사그라드는 이 시점에서, 논쟁의 횃불을 처음으로 밝혀주었던 돈키호테를 읽는 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으리라.

역시 이렇게 본다면 문학도 역사와 비슷한 나선형 발전구조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상병 박종민 (2006/05/20 13:31:47)

끄덕끄덕. 여러모로 유익한 내용입니다. 역시 압도적인 민우님의 칼럼.    
 
 
 병장 노지훈 (2006/05/20 15:19:42)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돈키호테, 술술 읽히는데 재미는 없었어요(땀)    
 
 
병장 주영준 (2006/05/20 16:17:53)

감사히 읽었어요.    
 
 
 병장 김동환 (2006/05/22 08:00:00)

옹. 그렇군요. 잘읽었습니다.    
 
 
병장 김태경 (2006/05/23 14:20:31)

혹시 뉴욕 3부작 읽어보셨나요? 돈키호테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있거든요. 소설을 누가 기획하고 관찰자는 누구며 누가 쓰고 누가 번역했는지에 대한. 

세르반테스는 별다른 의미 없이 단순히 자신이 작가가되면 사회적으로 위험해질지 몰라서 아랍어로 된 원본을 구했다고 책에 밝히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방식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허구에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사용되지요. 사실적 환상주의의 대가인 보르헤스 또한 돈키호테를 소재로한 단편을 썼구요. 

책보다 오히려 책의 외부적인 요소에서 더 많은 재미를 느낄수 있는 책인것 같아요. 그래서 제 관물함 안의 돈키호테는 단 한페이지도 못 읽힌채로 방치되고 있는거겠죠. 암. 그렇고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