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series 
 
 
 
 

이 글은 2006년 6월 28일부터 29일까지 양일간 책마을에서 진행된 토론을 정리한 것으로 글을 게재하신 분들의 동의를 얻어 글과 그에 따른 댓글을 빠뜨리지 않고 리장이 편집 하였으며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series'라는 제목으로 책가지 게시판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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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어떤 초등학교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교사들은 일제히 교권 추락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었습니다. 저는 교사들에 대한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행위 자체는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입니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교권 추락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 있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교사가 학생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을 빙자한 인권유린이자 아동 학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짓을 한 교사라면 학부모들 뿐에게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니 교사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덮어놓고 교권 추락 어쩌고 하며 항의만 하는 교사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 의식 있는 교사들의 반응은 달랐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어떤 초등학교 1학년 교사가 학생들 뺨을 때리는 등의 구타를 하는 동영상이 방송되었습니다. 저는 의식 있는 교사들이 앞장서서 체벌 금지를 결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유치원에 진학한 뒤로부터 교육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교육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폭력에 의한 교육 효과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설령 교육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이용하여 교육을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교육은 폭력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을 가르쳐야 마땅합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체벌 금지는 물론이거니와 두발복장 자율화도 시급히 공론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 기르고 사복 입으면 공부 못 한다 아무런 설득력도 없습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그것이 도대체 누구의 기준입니까 학생들의 외모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규정지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는 학생들도 돈이 많은 학생들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와 대학 입시의 과열을 막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미친바람 속에서 교육마저도 상품이 되는 것을 막아내고, 비인간적인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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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민경국 (20060628 121652)

교육은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죠. 
그런 만큼 다양한 사회 영역들이 교육영역에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체벌, 두발복장, 교육의 상품화 등 말씀하신 문제들 이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죠. 
하나씩 잡고 들어가려고 하면 결국 다른 문제들에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대전제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거의 유일한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투적인 멘트들 몇개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안되겠죠. 
예전에 대학에서 교육학 관련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대안적 교육 이론에 입각한, 교육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기본 입장에서 시작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때 공감을 많이 했었는데, 당장 제가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아쉽네요. 
나중에 그때 수업 들었던 자료들을 챙겨봐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장 주영준 (20060628 122812)

참고로 육이은 (예)병장은 어쩌면, 아주 어쩌면 저와 함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를 넘어. 를 공저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사병회관의 라면사발 앞에서 맺은 학문적실천적 약속.   


병장 고계영 (20060628 124430)

영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제가 '교육'하면 생각하는 것이지만 선생님-교조-학생학부모 그리고 사학등과 교육부까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두발을 안 한다고 체벌을 안한다고 진정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은 학생은 선생님을 대학가는데 필요한 존재로, 선생님은 학생을 대학으로 보내야 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긴다면 절대 서로간의 신뢰는 없을 것이며 언제나 헛도는 이 교육계의 현실도 바뀌지 않을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학부모님들의 생각과 다른 여러기관들의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헛 도는 교육계를 볼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교육'의 정의가 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희가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뭔가요   


병장 김동환 (20060628 133501)

폭력의 부당함에 동감하기에 앞서. 
그 교사가 학생들에게 행한 '차마 할 수 없는 가혹행위'가 도대체 뭐였는지 궁금하네요.   


병장 김태경 (20060628 134104)

전 과연 체벌이 전혀 없는 교육이 그렇게 이상적일까 싶어요. 유치원 이후로는 체벌의 의미가 없다는건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한거 아닐까요 자신에게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강요가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 많거든요. Ego-OK gram에서 N자가 나오는 전형적인 유교적인 한국 교육의 피해자인 제 생각이예요. 
하인라인이 스타쉽 트루퍼스에서 주장한것 처럼 태형을 부활시키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하게 되네요. 참 우습겠죠   


병장 유승현 (20060628 140144)

교사의 폭력은 저도 당연히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폭력(신체적인것은 아닐지라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하지만 잘 못하는 것과 아예 안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있고 끝없이 교사의 정신을 학대하는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교사가 마지막으로 선택들 강요받을수 밖에 없었던 체벌 이라는 것은 단순한 이드의 표출일지 몰라도 그 가해자이자 최종적인 피해자들은 단지 사회적 약자 라는 탈을 썼다는 이유로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숨어있으니까요   


병장 엄보운 (20060628 141201)

거시적으로 세계화의 미친바람에 맞서 한국 교육의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만, 미시적으로 기본적인 가정 교육부터 무너져 깔려있는 지금의 학생들에 대한 '태도'의 재정립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아닐까 합니다. 교사에 대한 자질만큼이나 학생의 태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공유되야 한다 생각합니다. 똑똑한 '학생'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교사들에 대한 무한 책임론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반쪽짜리 해결책에 지나지 않을런지요. 

개인적으로는 이은씨가 있었다면, 우리의 헛소리들을 한꺼번에 날려줄 체험 삶의 현장을 들어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28 141443)

책마을에서 하면 욕먹기 딱 좋은 발언이라는 걸 알지만 
저는 대다수 교사들의 악의없는 체벌을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으로 봅니다. 
우선 고등학교때 신나게 맞아본(그러고보니 채 10년도 되지 않았군요) 제 경험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나이 친구들은 성인이 아니니까요.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것에 익숙치 않다는 얘깁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제가 학교다닐때 같았으면 몇대 신나게 맞고 집에서 며칠 쉬면 될일을 요즘 학교에서는 학생을 학교밖으로 떠밀어 버린다고 하더군요. 학생의 인권도 존중되고 교사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고 학교는 모범생만 남고. 참 깔끔한 방법입니다만 과연 그게 진짜 교육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28 142338)

동환님 글이 절대 욕먹을 발언은 아니고, 저는 매우 예외적으로 봅니다. 특히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건데, 14세미만 아동자체는 스스로 행동의 대한 정당성 부여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14세이상되는 청소년시기에 학생들은 정신적인 '노력'이란것으로 어느정도 해결이 되는 입장에서,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학생들 체벌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 예외적 상황이라는것이 이런겁니다. 언어적 폭력이나 신체적 폭력을 교사에게 행하는 학생! 이정도면 될것 같군요. 예외적 상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적어도 저는 체벌보다는 가족상담이라는것으로 해결보는것이 더 좋을것 같네요. 왜 우리가 가장 싫어했던말 있죠 너 내일 부모님 모셔와라!   


상병 박진욱 (20060628 143010)

... 후우.   


일병 김현동 (20060628 152454)

다 떠나서, 전 가정교육이 문제라고 생각.   


병장 김강록 (20060628 153633)

가만 보면 성은씨가 글 올리면서 제목 짓기 하나만큼은 가히 발군이란 말입니다.   


병장 백일선 (20060628 170815)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 라던가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라고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냥 안정적인 직장으로만 보고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 겪게될 상황들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오며 제자식만이 제일 중요한것처럼 생각하는 부모들 
부모에게 배운 사고방식 그대로 남을 이기는것이 제일 중요하고 
선생님에 대한 일관적인 불신을 드러내는 어린아이들 
전부 쉽지않은 상황인것 같습니다.   


병장 마성은 (20060629 044222)

김강록  어찌 제목 짓기뿐이겠습니까. 날카로운 논리와 문학의 향기가 느껴지는 유려한 문체, 
특히 답 글댓글쪽지 생산 등등, 모든 면에서 가히 발군이지요. 

이 댓글이 올라가고 나면 또 댓글쪽지가 쇄도하겠군요.   


상병 안대섭 (20060629 132724)

어째서 인권은 '교보' 앞에서 멈춘다로 보였을까...   


병장 주영준 (20060629 132959)

이 글의 제목은 고교학운판의 바이블 중 하나인 책의 제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은 씨도 희석 씨처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병장 김형진 (20060629 141056)

문학의 향기가 느껴지는 유려한 문체에 올인하고 싶어진다.   


병장 김강록 (20060629 215304)

투철한 자의식까지─성은씨를 뵙게 되면 아마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듬직하고 멋진 청년일 것 같습니다.   


상병 권정민 (20060703 143823)

지금의 어른들이 받았던 교육. 지금의 아이들이 받고 있는 교육. 그리고 그런 교육을 받고 
선생을 하고 있는 그들의 교육. 누가 누구에게 잘 잘못을 따질 수 있을까요. 전 모두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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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은님이 올리신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에 희웅님과, 건룡님이 답글의 형식으로
의견을 개진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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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이희웅
[re]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저도 교사를 꿈구던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구타한다는것은 체벌로는 변명할 수 없는 안동 학대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어린시절...
전교생이 50명가량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말을 안듣고...
정말 잘못을 한 일이 있다면(간혹 서로 주먹질을 한다던지...) 저희 선생님은(담임선생님은 아니였음) 아이들을 끌고 산으로가서 모두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시고는 씨름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성장 발육이 잘된 초등학교 6학년때라도 어른인 선생님을 이길수 는 없는 노릇...
저희는 넘어지고 쓸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너희가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지말아라...
그러시고는 조용히 내려가셨습니다...

체벌 보다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벌을 주시고...
타이르시는것이 진정한 스승의 가름침이요..
더 많은 것을 깨닳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제의 그 동영상을 보고 많은 아픔과 슬픔이 드는군요...
부디 학교만은 학교만은 제대로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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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이건룡 
[re]집단(시스템) 아닌 그교사의 문제 




이런 사례에 있어 지위=역할에 대한 강박에 대해 말하고 싶어 이자리를 빌립니다. 


치욕적인체벌을 경험 못하는 사람들은 막연한 환상으로 밖에 자리 매김할 수밖에 없군요. 여기에 관한 관련 사례를 예전에 신문에 본 것 같은데(그 당시는 치가 떨렸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사례의 '정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여고괴담처럼 혹은 두사부일체의 하일라이트와 같이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이 아닌 폭력적인 행동이나 언사(욕)를 보면 이건 교사-학생간의 위치와 관계는 가르치고 - 배움이라는 입장이라는 보편성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문제는 그렇게 '확대'해석 할 필요가 아닌 사고  사건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더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현 교육의 ‘사례’로써 만으로 존재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직장이나 한자리 맞게 되면 '지위'에 대한 강요=역활 배움 속에서 혹은 과정에서 탈선, 정신병, 신경증과 같은 ‘미지의 유인자’는 배제하지 못함은 이젠 당연합니다. 예외는 이젠 무조건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로 마지막 러브레터라는 연애소설에서 틀여밖힌 일상을 생활을 영위하던 공무원인 주인공의 아버지가 뜬금없이 모든 것(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바다의 거친 파도를 몸으로 체험 하며 예술로 승화 시키려 하는 화가 될 때 우리가 그의 죄가 형법상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버렸기 때문에 유지 판결을 내릴 수 없듯이 말입니다.(비둘기의 주인공을 위한 정신병동의 엠브러스차를 대절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법을 언급하긴 했지만 법과 같은 사회 징서로서의 윤리적인 판결 속에서도 어떻게 보면 탈선은 (영화 명이 그러하듯이) 달콤한 인생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 안엔 개인적인 자책이 있을 뿐입니다.(오히려 프로이드 말처럼 자신의 현실의 윤리의 규범을 강조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으로 영화 달콤한 인생;의 클라이막스 처럼 상상 했다고 자신의 역할(지위)를 처벌 할수 없는 경우 입니다.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고 구소련처럼 총살을 시킬 수 없는 노릇이고 홍위병 떼에 몰매를 맞는 다는 법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불순한 사상의 선동이자 위험한 환상의 자리를 현실로 위치시킬 때입니다. 두 어린 (여)아이를 두 차례에 걸쳐 강간(성폭행)하고 죽이고 암매장한 사건과 같은 일입니다. 평소 조용하게 살았던 그는 같이 살던 주민들에게 이송 당시에 몰매와 돌팔매를 당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마을 주민의 협오감이 폭팔한 그에 대한 비난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선 친분이고 나발이고없고 '죄'만이 그를 대변해줄 뿐이었습니다.)

위의 사건과 같이 '인권'의 차원에서 용납 못할 체벌은 문제 교사의 대상-욕망의 실현이고 영화로 이를 표현하자면 승범분의 칼럼에 등장하는 ‘0도의 지점’으로 표현 될 장면으로 촬영한 장면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의 모든 영화에서 주관적 시점 다음에는 그것을 객관화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해서 서스팬스를 내면화시켰다. TV 드라마 열전 ① SBS 특별기획 사랑과 야망 -강승범

그의 죄의 결과가 법의 혹은 언론의 도마 앞에 놓여 짐으로써 처벌 받아야 할 것은 그 문제의 교사이지 이안에 염두 해야 할 게 비단 교사의 집단의 윤리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이는 확대 해석의 경우으로 이를 개혁으로서의 학교 - 학생(학부모) 두 집단의 대표자의 대화를 통한 개혁으로 구조 탈바꿈을 말하지만 이런 체벌의 문제는  아닌 소수(죄인)의 처벌이라 위치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과 유사사건이  빈번한 읽혀지는 까닭에 교사집단의 윤리 문제 혹은 학교의 운행 방침등에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부정할 수 없이 여실하기에 근본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원인-결과의 입장으로써 원인을 제공하는 수행자로써 탁월하기에 개혁으로 문제의 유인자를 배제 시키는 것이 해결함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유일무이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정부정책이 좋더라도 잦은 지위 탓에 분열의 국면을 맞이하는 현대인(나름의 타당한 개인사정을 가진)에게는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 중요한 점은 역시나 흔히 군대의 정훈 교육이 요청하는 바처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최선의 노력과 '흔들리는'너도 좋고, 나도 좋은 전우간의 윤리의 강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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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건룡님의 답글에 마성은님이 다시 답글을 게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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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마성은 
[re]현대인의 인생은 아름다워 




  학생에 대한 교사의 구타를 지적하는 것은 단지 현 교육의 ‘사례’를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라 이런 비극적이고 명백한 사고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교사라는 “한자리 맞게 되”었다고 “'지위'에 대한 강요=역활 배움 속에서 혹은 과정에서 탈선, 정신병, 신경증과 같은 ‘미지의 유인자’는 배제하지 못”하니까, 학생을 구타하는 “정신병, 신경증”적 “탈선”을 그저 “예외”로 치부하고 “무조건 죄”라 하지 말자고요  

  “아버지가 뜬금없이 모든 것(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바다의 거친 파도를 몸으로 체험 하며 예술로 승화 시키려 하는” 것이 교사가 학생을 구타하는 것과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교사가 학생을 구타하는 것은 학생으로 하여금 교육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고 교사의 거친 폭력을 몸으로 체험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신병, 신경증”적 파시스트 “예술”가는 학교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법을 언급하긴 했지만 법과 같은 사회 징서로서의 윤리적인 판결 속에서도 어떻게 보면 탈선은 (영화 명이 그러하듯이) 달콤한 인생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 안엔 개인적인 자책이 있을 뿐”이라고요 지금 무슨 “여고괴담”이나 “혹은 두사부일체” 같은 영화 촬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구타당한 학생이 교사의 폭력적인 “탈선”을 통해 “달콤한 인생”을 느낄까요 소름이 끼칩니다. 교사가 “개인적인 자책”을 느끼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나요 참담합니다. 

  “상상 했다고 자신의 역할(지위)를 처벌 할수 없”고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고 구소련처럼 총살을 시킬 수 없는 노릇이고 홍위병 떼에 몰매를 맞는 다는 법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학생을 구타한 교사는 그저 “상상”만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불순한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학생을 구타하는 실제적인 폭력을 “현실로 위치시”킨 것입니다.

  “'인권'의 차원에서 용납 못할 체벌은 문제 교사의 대상-욕망의 실현”일 뿐이라고요 “문제 교사의 대상-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학생이 구타당하는 “인권”유린을 정당화할 수 있나요 “서스펜스의 내면화” 정도로 이해해 주자고요 예술이 파시즘적 시각으로 해석되면 이런 가공할 주장도 나올 수 있군요. 뭐 히틀러도 아우슈비츠에 유태인들을 몰아넣을 때 “욕망의 실현”이라 주장했지요. 참, 바그너의 음악도 들었다더군요. 아, 얼마나 “예술”적입니까! 아, 얼마나 “달콤한 인생”입니까! 그래서 아우슈비츠에 끌려들어갔던 어느 유태인이 이렇게 말한 것이었군요. “인생은 아름다워.”

  “그의 죄의 결과가 법의 혹은 언론의 도마 앞에 놓여 짐으로써 처벌 받아야 할 것은 그 문제의 교사이지 이안에 염두 해야 할 게 비단 교사의 집단의 윤리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이는 확대 해석의 경우으로 이를 개혁으로서의 학교 - 학생(학부모) 두 집단의 대표자의 대화를 통한 개혁으로 구조 탈바꿈을 말하지만 이런 체벌의 문제는  아닌 소수(죄인)의 처벌이라 위치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고 생각”하신다고요 

  그럼요. 히틀러가 나쁜 놈이지 어디 파시즘이 나쁜가요 “확대 해석”해서 폭력 자체에 대한 반성을 하자는 주장보다는 히틀러라는 “소수(죄인)의 처벌”이 “더 타당하”겠지요.

  “원인-결과의 입장으로써 원인을 제공하는 수행자로써 탁월하기에 개혁으로 문제의 유인자를 배제 시키는 것이 해결함이 좋”다고요 그렇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문제의 유인자를 배제 시키는 것이” “좋”은 “해결책”일까요 

  “그렇지만 유일무이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정부정책이 좋더라도 잦은 지위 탓에 분열의 국면을 맞이하는 현대인(나름의 타당한 개인사정을 가진)에게는 여력이 없다는 점이”라고요 “잦은 지위 탓에 분열의 국면을 맞이하는 현대인(나름의 타당한 개인사정을 가진)에게는 여력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요 그랬군요. “잦은 지위 탓에 분열의 국면을 맞이하는 현대인”인 교사가 “나름의 타당한 개인사정을 가”지고 학생들 좀 두들겨 팼기로서니 그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현대인”의 특성인 것을요.

  하지만 “현대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더욱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문제의 유인자를 배제 시키는 것”보다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요 아, 물론 제도만 마련해 놓는다고 해서 “잦은 지위 탓에 분열의 국면을 맞이하는 현대인”이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제도만 개선한다고 해서 폭력이 근절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폭력 자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고 인권의식에 대한 재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 개선의 시급함을 간과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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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송희석 (20060629 091354)

이야! 이거 정확한 안티테제적 글이군요! 모든 문장을 이렇게 소화가 가능하다니 아무튼 전 개인적으로 궁금한것이, 폭력의 정당성이거든요 성은님 견해대로 따지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결해야햐죠 제가 다니던 이상한 학교는, 중학생이 임신한 여선생님을 밀어넘어트리고, 고등학생이 50대후반 남선생님을 길가던 골목에서 각목으로 치고....아무튼 이런경우를 말이죠. 이럴때도 선생님들은 체벌이 전혀 불가능한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일병 이건룡 (20060629 101529)

제 두가지 생각을 씁니다. 
우선 제글을 문장이나 단어로써 도마에 올려 놓는 군요, 다행히 이율배반적이라는 문제제기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제도'라는 계획 앞의 성은분의 닭장 속의 닭과 생각에 그리고 다중적 사회의 여러 대안적인 방안들의 몸에 맡기자라는 생각은 자기에겐 확신이 있으니 '봉합'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석 분의 비슷한 의문은 저 또한 들었습니다. (전 당신이 무슨 일을 할것이냐 말입니다.) 

두번째 글은 읽지 않아도 됩니다. 그동안 ....제가 한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엮어서 생각 해 본 글입니다. 돌굴러가는데 멍하게 아버지 돌굴러 가요..라는 답답한 소리 이기도 합니다.   


일병 이건룡 (20060629 134418)

이 조목조목 분석을 보면 성은 분과 제입장은 다르기에 제가 성은 분의 의견을 '소 귀의 경 읽기'마냥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음에 죄송할 따름입니다.(이율배반적인 제 입장을 확실히 말하였으면 고마웠을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부족한 한사람 일수록 꼬리를 많이 잡히지만 감히 해봅니다. (더구나 쌓일데로 쌓인 생각을... 이점에서 죄송합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분석을 상기해 보자.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요소들 (기성제도에 반대하는 포퓰리즘, 자기희생이라는 반 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 인 윤리, 극렬한 국가주의, 경제적 조합주위, 반유태주의)은 또한 비파시즘적인 구조물 속에 통합 될 수도 있다. -진짜 눈물의 공포 47 

이데올로기에 있어 개인의 영향력은 좀더 작을 수도 있습니다.(무조건 아돌프 히틀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궁무진한 힘은 그 정치성에 있으며, 다시말해 이는 네트워크간의 그 연결의 위험성은 이데올로기로 환원 시킬 수 있는 점입니다. 
또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에서 제기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그것이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패존과 더불어 도망하여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의 비밀 경찰에 의해 납치 당하여 1960년 말 정식으로 기소됨으로써 재판을 받게 된것이다. ' 

'흉악한 범죄를 저질 렀지만 그는 흉악 무도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가장 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모범적인 시민이었다.' - 한나 아렌트의 정치 판단 이론 

사유에 있어서 파란을 일으킨 아렌트의 이 문제제기 처럼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유 또한 가능합니다. 성은 분의 아돌프와 같이 특정한 문제인인 그 교사 문제의 위치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에 전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전환' 처럼 집단의 문제이기 이전 이건 교사의 본인 문제의 탓일것이라는 문제입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식으로 현대의 다중적인 사회 문제에서 벗어 날수 없지만 이 문제를 전 개인의 윤리 문제에 입각해서입니다. 인권(사전적 의미에서 몽타주를 그려 낼 법한)유린이라는 불명확한 멍예에 이전입니다. 

보다 제 입장을 명확히 한다면 전 좀더 성은 분과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글이 성은 분의 각오와 확신의 열의 앞에서 무능력한 소시민적인 입장 그리고 심지어 지적하듯이 뉴스나 언론들은 하나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취급해서일 것입니다. 체가 말한 현실의 리얼에 좀 더 가까이 하지 않고 전 단지 이를 '스캔'들 마냥 느끼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그렇다고 해서 전 성은 분의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하에 제 입장을 한 발짝도 물러 설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히 뱃속에 비수를 숨겨 놓고 말하겠습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그 치열한 삶을 살만큼 후회 없을 만큼 심지어 독재정치에 맞서 체게바라 처럼 목숨을 마낄 수 있습니까 5,18당시의 학생들처럼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너무 과한 표현이지만 한 발짝 뒷걸음 쳐 예전의 한비야처럼 아프가니스탄의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 할 의지가 분명합니까 라고 반문 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카리마조프가의 형제 이반의 말처럼 삶 자체가 부도덕하다고 말함에 한 발짝도 반문을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은 분이 언급하신 것처럼 현대처럼 다중적인 사회 속에 이러한 사고는 구시대적인 발상일수도 있지만 제 정치 미학적 입장은 이안에 있고 입장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병장 마성은 (20060629 171048)

송희석  “이상”하다 못해 끔찍한 학교를 다니셨군요. 개인적으로 그런 경우에는 형사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교육하거나 처벌할 정도를 넘어선 것 같군요. 

그러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지른 학생들일지라도 끝까지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복이 목적이라면 체벌을 가할 수 있겠지만, 교육이 목적이라면 우선 그 학생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부터 들어보고 교내에서 처벌의 수준을 결정해야 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체벌을 가한다는 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보복입니다.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생각에서 가해지는 체벌은 저열한 보복일 뿐, 전혀 교육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결코 교사들이 그 학생들과 같은 수준에서 사고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룡  “당신이 무슨 일을 할것이냐”는 질문은 제 글들을 읽고 나올 수 있는 논리적인 질문이 아니기에 굳이 답하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가장 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모범적인 시민이었다”는 이유로 아이히만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처럼,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판단 이론”을 들먹여도 학생에 대한 교사의 구타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지극히 상식적인 “윤리적인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야말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문제의 책임이 잘못을 저지른 “개인의 윤리”에만 있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사고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라면 정말이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전 성은 분의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하에 제 입장을 한 발짝도 물러 설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쓰이는 대로 그냥 써 제끼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제 글에서 도대체 어느 부분이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하”를 하고 있다고 우기시는 것입니까 저는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하”는커녕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언급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건룡 님의 글에 들어있는 영화 제목 몇 개 가져다 쓴 것뿐이지요. 그것이 “비하”입니까 아니면 파시즘적 시각으로 예술을 왜곡하는 것이 “비하”입니까 

위험하니까 “감히 뱃속에 비수를 숨겨 놓”지 마시고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갑자기 무슨 “체게바라”가 “5,18” 때 “한비야처럼 아프가니스탄의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논점에서 비껴나가도 너무 가셨어요. 

건룡 님이 “구시대적인 발상”을 가지시든지 “삶 자체가 부도덕하다”는 “정치 미학적 입장”을 가지시든지 “입장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으시든지 저는 관심 없지만, “삶 자체가 부도덕하다”는 “정치 미학적 입장” 때문에 학생에 대한 교사의 폭력은 “집단이 아닌 그 교사의 문제”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는 그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미학”적이지도 않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29 183917)

성은 제가 조금 부족한 예를 들었군요. 분명히 그러한 행동을 한 학생은 분명한 성숙하지 못한 성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상황이 잘못이라는것을 각인시켜줄수 있는 것중 하나가 체벌이죠. 허나 단순히 이 체벌을 성은님 견해대로 오로지 '보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성은님 말대로 오로지 형사처벌을 해야하나요 그것이 옳은 행동인가요 '체벌'이란것이 꼭 때린다는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종의 기합이라는것도 존재하니 말입니다. 

성은님 말대로 그러한 학생을 오로지 '교육'이란 단어 하나로 해결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선생님이 무릎꿇고 울면서 '내가 너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라.'라는식 말입니다. 조금 비꼬아서 말했다면 죄송하지만, 교육으로 해결한다고 하는 성은님 견해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어떤교육입니까 학생이 선생님을 때리고, 여선생님을 성폭행하고, 심지어 자기 학우들을 향해 폭력과 무자비한 언어를 쓰는 그들에게 어떤 교육을 할수 있는지 그 대안을 진심으로 성은님께 듣고싶네요.   


병장 마성은 (20060629 190050)

송희석  “그러한 상황이 잘못이라는것을 각인시켜줄수 있는 것중 하나가 체벌”이라면, 왜 하필 체벌을 통해 “그러한 상황이 잘못이라는것을 각인시켜” 주어야 합니까 체벌이 단기적인 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진정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앞의 글을 통해서도 말했듯이 진정 그런 학생들이 변화하기를 바라고 교육을 한다면, 우선 그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학생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학생들이 처해 있는 육체적·정신적 환경은 어떠한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심리치료이지 체벌이 아닙니다. 체벌을 가하면 그런 학생들이 “무릎꿇고 울면서” 진정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요 

교육은 단순히 한 명의 학생을 대학으로 보내고 사회로 보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29 192241)

성은 잠시 글을 읽다가 다른사람인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 부분 정말 저도 공감해요. '그런 학생들이 변화하기를 바라고 교육을 한다면, 우선 그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중요'하다는 부분이요. 그게 바로 톨레랑스죠. 분명 필요한것은 심리치료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체벌이 단기적인 효과일수도 있고 말이죠. 허나 현실은 다릅니다. 

좋습니다. 일반화 오류라고 해도 제가 아는 한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한 윤리의식이 투철한 선생님 한분이 있습니다. 그 반 학생들 중 한명이 지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지각한 아이에게 왜 늦었냐고 물어봤지만 그학생은 상관하지 말라며 따집니다. 그래도 그 선생님은 다시한번 이야기를 할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그 자리에서 비키라고 밀쳤고, 밀려난 선생님은 넘어지는 과정에서 의자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이 학생은 충격을 받고 가출하게 되었죠. 당시 지각한 이유를 살펴보니 담배를 피다가 늦은것이였습니다. 자. 이제 전 성은님께 묻겠습니다. 교육이란 한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처벌도 불가능한체, 오로지 심리치료만으로 해결이 가능한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정당성을 가진 체벌을 통해 사람을 만들었던 수많은 과거선생님들은 제대로 하지 못한 '교육'입니까 신사임당 마저 자신의 아들을 '체벌'을 통하여 가르쳤기에 '교육'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성은님에 좋은 답변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병장 마성은 (20060629 195007)

송희석  극단적인 사례들만 나열하는 것은 논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한 사람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불가능한 채, 오로지 심리치료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벌도 교육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벌의 방식에 있어 학생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체벌은 교육적이지 않을뿐더러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불가합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학생에게는 비인간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교육적인 주장도 인간적인 주장도 될 수 없습니다. 체벌 외에도 다양한 처벌 방식이 있으며, 처벌 외에도 다양한 교육 방식이 있습니다. 

“정당성을 가진 체벌”을 언급하셨는데, “정당성을 가진 체벌”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체벌을 당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정당성을 가진 체벌”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수많은 과거선생님들”의 체벌에 정당성은 없을지언정 그들의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교육'”이라거나 “'교육'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폄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인권의식의 틀 안에서 나름대로 참교육을 위해 애썼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과거의 사건을 오늘날의 인식의 틀로만 재단하려드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형태의 교육이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폭력 자체에 대한 반성과 인권의식의 재고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상황과 의식에 부합하는 교육 방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629 200117)

성은 방금 썼던 글이 다 날라가버려서, 다시 써도 곰곰히 생각해보니 더이상 주장할거리는 없을것 같습니다. 우리는 결국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부모가 자식에게 교육적인 목적으로 적당한 '체벌'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이와 비슷한 선생님이 학생에게 주는 '체벌'역시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것 전혀 없이 교육이 된다는것이 바로 참교육일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성은님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은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제가 자라온 환경과 경험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좋은 대화 잘 나눴다는 겁니다.(웃음) 좋은 밤 보내세요!   


일병 이건룡 (20060630 160536)

두번째의 글은 지워 버릴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석에도 불구하고 용납을 못하겠습니다. 왠지 벽에 꽉 막힌 듯 넘으려듯 어쩌하든간에 흥분에 빠져 글을 썼습니다. 허나 비단 책마을 뿐이 아니라 글이란 존재는 어차피 페이지 넘어가면 잊혀질 것입니다. 글의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면 말입니다. 담론적인 속삭임에 염증을 내기에 적었습니다. 재고 중인 제 정치 미학적 입장을 설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용히 굴속에 쳐 박아 놓을 생각입니다. 비열하게 막짝쿵 쳐주기만 기다릴 지언정 성은 분 담론적인 성향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명과 목적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성은 분의 의식 개혁의 메시지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학생에게는 비인간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교육적인 주장도 인간적인 주장도 될 수 없습니다. 체벌 외에도 다양한 처벌 방식이 있으며, 처벌 외에도 다양한 교육 방식이 있습니다. 

제도만 개선한다고 해서 폭력이 근절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폭력 자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고 인권의식에 대한 재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 개선의 시급함을 간과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여고괴담의 폭력장면의 한컷(학생의 빰을 때리는 장명)이 주는 관객의 충격-감상에 비해서 아무런 감흥 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곳 책마을에 더구나 이런 글은 넘치고 넘쳤으니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계속 물귀신 처럼 물고 넘어지는 것은 이번이 정식으로 논쟁에 참여 하게 된 계기이기에 말입니다. (물귀신 같다는 것은 아직 미련을 못버린다는 소리입니다. ) 

다중적인 사회에서 다중적인 해결 방침의 제시, 그 혼돈 속에서 제 환상이 채워준 위상 따위를 제고 하다 보니 제 개인인 적으로 자신의 무능력 마저 느꼈습니다. 심지어 제 일상에 모숨을 연명하는게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최후의 마지막 까지 나무 싶는 행위는 사명에 앞서 고작 자신은 그것밖에 할 수 없었으니깐(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에 비하면 당신은 엘리트이자 정치가입니다. 숭고한 이성과 그에 합당한 분노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무한한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 줄 만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역설적인 면은 제 딴지는 제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건 자신의 능력입니다. 저는 제 행복을 위해 능력을 키울 뿐입니다. 짊어지고 싶지 않는 따윈 잊어 버리고 싶기에 행복하고 술을 마실 뿐입니다. 더이상 할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을 했습니다......이렇게 밖에 쓸수 없으니 ..아직 토론에 임할 자세가 부족하다고 밖에 할수 없군요.  

 

  
 
 
 
상병 김청하 (20060713 124223)

아잉 수고하십니다.   
 
 
상병 이희웅 (20060714 142141)

이런 글 사이에 있는 저의 허접한 글... 
정말 부끄럽습니다...(울음_)    
 
 
병장 마성은 (20060714 172444)

이희웅  천만의 말씀. 인상적인 경험과 함께 교육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상병 이희웅 (20060717 161146)

교육에 관해서 제 교육관과 비슷하게 표현된 영상물은 GTO같은... 
정말 그 드라마를 보고는 이런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변태적인 성향도...(웃음_)    
 
 
병장 김성엽 (20060719 080045)

인권..학교들어가서부터..우리들이 여기서 방출되기 까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인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