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소리 듣고 싶지 않다. - 제한된 합리성의 이론 (by Herbert Simon) 
 
 
 
 


제한된 합리성의 이론 

사이몬(H. Simon)은 인간이 무한히 합리적일 수 없고 오직 제한된 합리성밖에 갖지 못한다는 현실을 경제이론에 반영하고자 노력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30년대 중반 밀워키市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의 행정에 관한 현지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 시설은 교육청과 시 토목국의 공공관리하에 있었는데, 이 두 기관은 가용자금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가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 두기관 사이의 큰 이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역 다툼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그런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 두 부처는 자금을 시설관리에 우선적으로 배정해야 하느냐 아니면 레크리에이션활동의 지도 업무에 우선적으로 배정해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의견의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 사이몬은 그들이 경제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단순한 해결방법, 즉 두 용도에 사용한 자금의 한계편익이 서로 같아지도록 배정하는 방법1)을 체택하기로 합의를 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고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상황 해석에 따르면, 그들은 두 용도의 한계 편익을 일치시킬 수 있는 지적 기반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의견의 대립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사이몬은 비록 이 문제뿐 아니라 현실의 경제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 기존의 경제이론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인간이 무한히 합리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전통적인 경제학은 의사결정을 하고자 하는 경제주체가 선택가능한 모든 대안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사이몬은 이 가정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찾아 보았자 겨우 일부분의 대안 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인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현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현실의 경제주체는 어떤 수준의 기대(aspiration)를 갖고 대안에 대한 탐색(search)을 시작하고, 만약 이 기대수준에 맞는 대안을 발견하면 그 순간 더 이상의 탐색을 중지하고 그것을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사람들의 기대수준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고 말한다. 만약 주변 여건이 괜찮아서 좋은 대안이 많이 발견될 수 있으면 기대수준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나쁜 주변 여건하에서는 기대수준이 내려가기도 한다는 것이다.2) 이런 방식에 의한 선택에 기초를 두는 만족가설(satisficing hypothesis)이 전통적인 접근법을 완전히 대체하기까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더욱 현실적인 경제이론을 추구해보고자 하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 공적만은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한다.

Herbert Simon, "Rational Decision Making In Business Organiz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1979.


1) 100만원의 집행자금이 있다고 하자. 처음 10만원을 시설 정비에 투자하는 것이 레크리에이션 활동에 투자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경우, 시설 정비에 10만원을 사용한다. 다음 10만원을 추가로 시설 정비에 투자하여 얻어지는 효과와 처음 레크리에이션 활동에 투자하여 얻게되는 효과를 비교하여, 좀 더 효과적인 곳으로 자금을 집행한다. 이렇게 매 10만원마다 10만원이 추가적으로 한 쪽의 지원에 쓰일 경우 얻어질 효과(효용, 편익)을 비교하여 효과가 높은 쪽 사용 부처에 자금을 투자한다.
위의 경우는 10만원씩 열번에 걸쳐 자금의 집행을 결정한다고 가정했는데, 10만원을 1만원으로 또 1원으로 점차 줄여나가, 매 1원마다 1원을 좀 더 효과적인 곳에 추가로 집행한다면, 초기 자금 100만원을 양쪽 집행부에 가장 효과적으로 분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를 경제학적 의미로 표현하자면, 시설과 레크리에이션 양쪽의 한계 편익이 같아지도록 배정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계marginal의 개념은 '추가'의 개념이다. 위의 예에서는 '10만원을 추가로 집행함'이 한계의 개념이 된다. 시설 영역의 한계 편익을 고려한다는 뜻은 10만원을 추가로 시설에 투입했을 경우 얻게되는 편익을 말한다.)


2) 신촌과 홍대에서의 맛집을 찾는 나의 합리성은 대단하다. 15년을 넘게 초중고대-학생 시절을 모두 거친 곳이기에 '그 날의 기분, 동행 인원의 숫자와 각 개인의 특성, 집행 자금의 최대치와 최소치, 현재 위치로부터의 인접성, 다음 목적지까지의 거리, 현재 시간 그 음식점의 혼잡도, 주차 용이성, 바로 직전 끼니에 먹은 음식과의 상성, 입고 있는 옷의 소재와 냄새가 배는 정도 등등'을 고려하여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역삼이나 청담에서의 나의 맛집 찾기 합리성을 현저히 떨어진다. 친구 따라 가본 음식점들은 많아야 2번 정도 들렸을 뿐이고, 메뉴판의 가격을 짐작하기 곤란하니 자연스레 마음이 움츠려든다. 음식점에 호기 좋게 들어가놓고 가격에 질려 나와버릴 수도 없는 노릇에다가 VAT가 추가로 붙는 지 여부에, 봉사료가 또 10% 추가되는 지를 따져야 하니 나의 합리성은 바닥을 친다. (별 수 없다. 메뉴판 닷컴이나 그 주변 지인에게 추천받는 수밖에.)
나에게 있어 신촌은 사이먼이 말한 '좋은 여건'이다. 이곳에서 나의 기대치는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을 솜씨 좋게 조율해나가며 수많은 대안들 중에 적절한 음식점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청담은 '나쁜 여건'이다. 기대치가 낮아 금방 타협하고 가능 범위 안에 포착되기만 하면 바로 선택한다. 그 뒤로는 마음을 놓고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이먼은 심리학과 경제학의 접합을 이끌어내어 경제학의 가장 단단한 토대, '합리성'을 공격했다. 인간을 합리적이라 가정하는 전통적인 경제학으로는 인간의 행동, 특히 기업의 이윤 극대화 가설을 효과적으로 설명해낼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정리라 하더라도 그것의 기반이 되는 전제의 현실성이 그 부분에 있어 결여된다면 아무리 세련되고 우아한 정리도 별 소용이 없음을 증명했다.

'경제학적으로 너는 최적 선택을 할 수 있어!'라고 윽박질러 봤자 소용 없다. 경제학의 한계 편익 개념은 분명 최적의 선택 지점을 그래프 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나의 제한된 환경은 거기에 닿을 수 없다. 운이 좋아 대충 찍었는데 비슷하게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쁜 곡선 두 개가 만나 하나의 균형점을 제시하듯, 난 내 점심밥 먹을 곳을 그렇게 선택하지 못한다. 현실의 선택과 노력은 노트 위의 두 선이 만나듯 우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상을 말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모두를 위해 연대하고 약자를 위해 투쟁해 나가자고 말 하는 것 만큼  들뜨고 희열 넘치는 대화도 드물다. 그렇게 재미있는 글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제약을 무시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론을 지껄이는 건, 딱. 거기까지만 유효하다. 아니, 그 정도도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완벽한 논리를 위해, 자신의 공허한 주장을 끝까지 그렇게 펼쳐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이고 글이고 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적수가 없지 않겠는가. '야. 장난하냐? 경제학적 한계 편익 개념으로 이 점이 선택된단 말이다.' 이걸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는 한 깰 수 없는 철옹성의 논리를.

경제학의 토대는 합리성 위에 존재한다. 합리성이 전제되는 한, 적어도 미시경제학 교과서 안의 대다수 내용들은 진리다. 모두가 연대할 수만 있다면 혹은 모두가 깨우치고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분명 세상은 바뀐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 이론의 허구성과 다를바 없다. 깨버릴 수 없는 균형 이론처럼 '옳은 사실'을 전제로 한 일군의 주장은 말로써는 천하무적이지만,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한다.
즉, 거기까지만 유효한 '말의 잔치'인 것이다.

그 이상을 말해보고, 그 다음을 고민해보자. 말로 세상을 말하기는 너무나도 쉽다. 명쾌하게 풀이된다. '요로코롬 저로코롬 하는 게 옳은 거예요'. 크핫- 맞다. 무릎이 절로 쳐진다. 신바람이 나서 어깨가 들썩인다.
그런데 어쩌라고?

비판적인 인기 에세이스트의 칼럼 모음집이나 비슷한 장르의 책들을 얼추 20여권 가량만 읽어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 로 제발 끝나지 말자는 거다. 그런 이야기 질리도록 찾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다음을 이야기하고, 이젠 절대 합리적이지 않은 현실에 뛰어들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유명 논객의 주장을 되풀이 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끔 숨이 막힌다. 너무 뻔해서 그만큼 조악하고 그만큼 논리가 단단한 그 글을 보고 있노라면 숨 쉬기가 거북하다. 뭘 어쩌라고? 그래서 그 다음은?
결국 그것의 귀결은 뻔한 이상론. 뻔한 주장으로 그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해답으로 삼고, 상대방의 말문을 폭력적으로 틀어막는 행위가 횡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견고하고 막강한 화력을 입 위에 세우는 것 따위 너무나도 쉽게 지을 수 있는 가건물에 지나지 않다. 움막을 가리키며 건물이라고 발음하는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그만 듣고 싶다. 
그 정도 알고 있다면 그 다음을 이야기해보자. 몰라서 이상을 접고 현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입바른 소리라면 밤새도록 지겹도록 지껄일 수 있는 사람 대한민국에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진짜 정수리를 내리치는 호된 깨달음을 얻으려면 진짜 그런 책들을 찾아 읽으면 된다. 댓글로 표현된 짧은 논리보다 수백배 아름다운 진짜 글판의 글들을 찾아 읽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또 제대로 된 사고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고를 전하고 싶다면 책을 권해주거나 그런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나 그런 주장의 일부를 내비쳐야 하지 않겠는가.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무기를 들고 공격해대면 짜증 이외의 다른 감정을 쉽사리 불러일으키지 못할 거다, 아마도.

시장의 합리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주장하는 사이먼을 향해 합리적인 시장 이론으로 공격 해대면, 우리 사 교수님은 '당신의 이론은 정말 군더더기 없고 옳은 말입니다.' 하고 수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뻔하디 뻔한 입바른 소리 들으려고, 그런 당연한 결론을 지으려고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난. 지금 우린.











Postscript.
구체적인 방법론을 내어놓기에는 우린 철저하게도 처절하게도 모자르기 때문에,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말들을 되풀이하며 잊지 않도록 서로에게 다시 해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한, 비판한 여기까지가 우리의 최선인지도 모를 일이다.
성급한 해결책을 내어놓으라고 이렇게 버릇없이 멱살을 잡고 흔들어봤자 몇십년 공부한 학자들도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답을 그 누가 말해줄 수 있겠는가?

뻔한 소리도 귀한 이 시대에, 내가 혼자 김빠지는 소리를 하여  소중한 동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난 여기에 누구나 다 아는 생각의 위대성에 대해 덧붙이지 않겠다. 누구보다도 글과 사상의 엄청난 위력을 몸소 느끼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나도.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기에 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겠다.

 

  
 
 
 
상병 조용준 (2006/05/08 16:19:54)

허헉. 일단 선리플 후감상. 기대치 맥시엄.(웃음)    
 
 
병장 박준응 (2006/05/08 16:42:49)

경계하자는 의미겠죠? 물론 그래야 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웃음)    
 
 
상병 송희석 (2006/05/08 16:46:21)

하하! 이거 진짜 멋진 글이네요. 더 솔직히 말하면 여태 보운님 글중에서 최고라고 해야겠군요. 이거 저도 반성하게 만드는 내용도 엄청 많고,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    
 
 
병장 김희곤 (2006/05/08 19:25:19)

생각이 다른 시작점은 위치는 같을지언정 다르겠지요. 생각이 같은 종착지는 시작은 다를지언정 끝은 같겠지요. 잘 읽었어요.    
 
 
 병장 노지훈 (2006/05/08 21:27:32)

정말 멋진 글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5/09 08:05:03)

이런 깔끔한 글을 보고 있노라면 안구에 습기가.(흑.) 
프린트입니다.    
 
 
상병 조주현 (2006/05/09 09:50:01)

정말, 정말로 멋진, 太好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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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김동민 (2006/05/09 11:29:31)

폐부를 깊숙히 찌르는 글입니다. 
저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날카로운 글에 생채기도 난 것 같지만 오히려 감사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겠습니다. 좋은 글 고마워요.    
 
 
병장 김강록 (2006/05/09 11:40:26)

아아, 보운님의 이 빛나는 명문을 향한 제 불나방같은 연모의 정을 받아주시렵니까? 

불나방같은 연모의 정이란 것은, 무한한 동의와 지지 표명인 동시에 다분히 자학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족을 달자면, 보운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시는 류의 인간 유형은 별 고민없이 적당히 주워들은 말로 떼우고선 스스로 흡족해하는 이들, 다시 말해 대학가에 넘쳐나는 이른바 '말로만 의식있는 척 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딜레마에 울타리를 치는 이들'에 해당합니다. 그들에게 한 단계 더 나아간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물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일부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미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면 그들의 인성이나 무지, 혹은 안일함 탓으로만 몰고 갈 게 아니라 그렇게 몰고 간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판적인 인기 에세이스트의 칼럼 모음집이나 비슷한 장르의 책들을 얼추 20여권 가량 읽은" 이들이 비록 결과적으로 성에 안차는 행태를 보일지라도 처음 그들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한장 한장 넘기던 시절의 진정성만큼은 어느정도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성토하되, 그러한 성토는 따뜻한 애정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사랑받고 싶어서요.    
 
 
 병장 박진우 (2006/05/12 08:40:28)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