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페미니즘 1부-사회에 대한 발화의 예의에 대하여 
 
 
 
 
이거 읽으면 오늘 밤에 자다가 키 10cm 커진다.


대학 2학년 초의 일이다. 본인이 속했던 교지편집위원회의 수습편집위원-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새내기 기자-3명이 기획을 하겠다고 나섰다. 추후에 김동박 트리오로 문명文名을 날리게 될 그들 03학번 '여학우'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기획글을 쓰고 싶어했다. 이것저것 기획의 방향을 잡고, 편집실 출신이자 총여학생회 멤버이자 모 사회학과 교수 아래서 대학원 준비를 시작한 사회학과 00학번 모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결정적으로 그는 남자였다). "선배. 페미니즘 기획을 하려고 하는데,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 말고 무언가 좀 획기적인 그런 기획 어디 없을까요"

00학번 선배는 즉석에서 후배들에게 뭐라고 몇 마디 강하게 쏘아붙이고 편집위원회 인터넷 까페에 들어와 굉장히 격한 어조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편집실 수준이 왜 이렇게 되었냐. 아직 여성학 책 한권 제대로 안 읽고 제대로 활동도 안 해본 새내기들이 어디서 겉멋만 들어가지고 획기적인 기획이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하는데. 평범한 페미니즘에 대해서 쥐뿔이라고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최소한의 고민과 그에 맞는 실천과 공부만 했어도 내게 그런 식으로 생각 없는 무례한 헛소리를 내지르지는 않았을 텐데. 니네들 뭐하는 거냐. 이런 식으로 살 꺼면 책이고 공부고 다 때려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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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을 토해내는 기세로 사람들은 양성평등을 이야기한다. 가끔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은 페미니스트로 넘쳐나는 것 같다. 정말 의식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양성은 평등해야 한단다(삼청교육대라는 언더밴드는 이런 지점에서 소신이 넘쳐난다. 밴드명에서 풍겨나오는 아우라처럼 그들은 위대한 남성성과 강자를 찬양한다). 여자라도 얼마든지 담배를 피울 수 있다(그리고 꼭 토를 다는 것은 현대인의 필수다. 그래도 임신을 하니까 건강을 생각해서 여자는 안 피워야 한단다. 혹은 다 피워도 내 여자친구는 피우면 안된다 하는 식으로). 여자도 군인이 될 수 있고, 남자도 간호사가 될 수 있다(그리고 보통은 간호학과 남자들을 비웃는다). 집에서 설거지와 집안일도 때때로 하고(한번, 과 때때로 간극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기본적인 산수와 국어에 무뇌력한 친구들이 가끔 있다), 이 대한민국의 양성평등을 위해서 살아가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그들은 자주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이제 한물 간 이야기라고. 이제 더 이상 '여권'을 위해 투쟁할 건 없다고. 페미니즘 이야기가 한번 나오면 너도 나도 한마디 거든다. 무슨 월드컵때 축구 이야기하는 것 같이. 심지어 진짜 페미니즘 타령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대단하다. 나도 나름대로 페미니즘 이론 공부도 하고 실천 언저리도 돌아다니고 했는데도 아직 섯불리 이것이 진짜 페미니즘이고 하는 이야기는 못 하겠는데 말이다. 역시 나는 학습지진아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은 꼭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여권/여권신장'이라는 용어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은 아직도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한국 페미니즘 내부의 핵심 조류로 파악하는 것일까. 물론 아직 호주제 문제나 미혼 여성의 제도적 위상의 문제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여권'이라는 용어와 관련된-는 유의미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글쎄. 아니면 그들은 국제주의자들인가? 그렇기에 아직도 여성의 법적/제도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제3세계 여성들을 위한 투쟁의 결의를 보여주는 방식으로써 여권이라는 용어를 운운하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고민과 공부의 부족에서 내뱉게 된 용어가 아닐까 그건.

물론 모든 인간이 사회과학을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다(나야 뭐 '업'인 것이니까 나름대로 고민하고 공부하겠지만.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한 문제니까. 사회과학에 무지한 작가는 제대로 된 작가이기 힘들다). 그리고 사회과학을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에 대해서 말을 하면 안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지적 우월주의를 경멸한다. 우리는 모두 사회 속의 존재이고, 그러한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저마다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의는 중요한 문제다. 일테면 나는 한 화학공학과 학생에게 '공학수학 그거 내가 다 아는데 그거 인생 사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니가 화학공학 공부하는데도 전혀 쓸모 없다. 거기다가 그거 다 틀린 헛소리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게 공학수학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공학수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나의 예의다. 공학수학이 아무리 유행한다고 해서, 아무 관심과 고민 없이 공학수학도인 척 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무례하다. 20년 넘게 밥 굶어가면서 공학수학과 투쟁하고 있는, 당신들이 별 관심 없을 지 모를 그런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 한국 땅에서 말이다. 자기 삶의 핵심 모순으로 공학수학을 상정하고 그것을 몇십 년째 분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그거 별 거 아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앞에서 '가난 그거 별 거 아냐 에이'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일기장에 그런 비난을 끄적거린다거나 혼자 지하실 내려가서 그런 비난을 중얼거리는 것이라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야기를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상호간 소통을 위한 행위다. 타인의 소중한 시간을 소모하는 것과 관계된 그러한.

대화와 글쓰기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것은 그에 합당한 정도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며 별다른 고민 없이 페미니즘에 통달하고 평범한 페미니즘이 닳고 닳은 이야기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로 내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슨 사상적 뉴타입도 아니고. 무엇에 대해 소통하고 싶으면, 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보아야 한다. 공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공부한 사람만이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는 지적 우월주의에 나는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고민 없이 질러댐을 용납하는 것도 아니다. 한쪽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이 몇 마디 쏘아붙이는 건 앨리마인에 비견될 정도의 비매너다. 예의는 중요하다. 고민을 하는 예의 말이다. 그러한 예의를 갖추면 사람들은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드보카트만큼 축구를 잘 해야 아드보카트의 축구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축구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없다면 축구의 기본적 규칙도 모른다면 축구 한 게임 뛰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드보카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예의는 소중하니까. 누구나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누구나 사회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허원영이 '누구나 글쓰기를 할 수 있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단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원래 하나의 칼럼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는데, 2부 부분의 분량이 조금 많아서 2부작으로 진행한다. 이거 읽고 2부 안읽으면 밤에 자다가 키 20cm 줄어든다. 원래 한편짜리 글이라니까. 

  
 
 
 
상병 정멸 (2006/05/03 21:44:35)

크흣,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내용 중 섯불리가 오타가 난 듯 합니다. 
섯불리(X) -> 섣불리(O)    
 
 
상병 정멸 (2006/05/03 21:51:22)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자신만이 옳은 듯한 이야기를 내뱉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 왔고, 저 또한 그런 류의 인간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한 '자의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 자의식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부 읽으러 가봐야겠네요.(웃음)    
 
 
 병장 김동환 (2006/05/04 08:44:24)

00학번 선배에게 한표 보내고 싶군요.(웃음) 
그런 선배가 있다니 부러운데요.    
 
 
병장 이석현 (2006/05/04 08:46:27)

재미있네요. 
우리가 필요한건 respect.    
 
 
병장 주영준 (2006/05/04 10:28:19)

동환 / 그 선배는 심지어 제가 오토바이 산다고 돈 꾸러 다닐때 무려 1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준 그런 착한 선배입니다. 
멸 / 이름이 예쁘네요. 오타는 신의 섭리입니다. 저로써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병장 김강록 (2006/05/04 13:05:15)

저도 그 00학번 선배님 되시는 분께 갈채를 보냅니다.    
 
 
병장 김형진 (2006/05/04 14:38:26)

나도 00인데. 
그리고 중요한 건 당신이 그 10만원을 갚았느냐, 안 갚았느냐, 이거요 바로.    
 
 
병장 주영준 (2006/05/04 14:48:36)

형진 / 당신 99잖아! 어디서 한세기, 아니 밀레니엄을 째려고. 
그리고 10만원은 물론 갚았소.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건가. 좀 타다 몇번 긁어먹고 되팔았기에 나는 곧 갚을 수 있었다오. 돈 많은 9x대 선배들이 일치 단결하여 다들 후배 상나는거 보기 싫다고 있어도 안 빌려주는 판이었기에 그 선배는 참으로 특히 더욱 고마운 분이었소만.    
 
 
 병장 김동환 (2006/05/04 15:07:59)

엇. 새로운 사실. 형진씨 99였구나. 
나한테는 82년생이라 하셔놓고. 흑흑.    
 
 
병장 김형진 (2006/05/04 15:11:20)

엇. 나 81년생 00인데. 
동환씨한테 내가 언제 82라고 했어요. 
날씨 탓인가, 이거. 이 사람들 단체로 더위먹었나!    
 
 
병장 김형진 (2006/05/04 15:12:30)

분명히 선언해두건데 내 알기로 9x는 송희석씨요! 
이 사람들이 정말.    
 
 
상병 송희석 (2006/05/04 15:21:42)

왜 갑자기 날 걸고 넘으셔서 그리고 9X학번은 제가 알기로 
또한분 있습니다. 누구게요? 알아맞춰보세요!    
 
 
병장 박준응 (2006/05/04 15:50:12)

황민우 씨 정도 되겠죠.    
 
 
일병 김동민 (2006/05/04 16:57:28)

앗 좀 늦었지만 저도 00.    
 
 
상병 송희석 (2006/05/04 18:27:44)

준응/ 아니요. 전혀 다른분이죠.    
 
 
병장 주영준 (2006/05/05 14:33:18)

희석 / 지연 씨?    
 
 
상병 송희석 (2006/05/05 16:06:16)

영준/ 어이어이! 그양반은 8X일껄? 힌트 줘야지? 필진은 아니고, 글은 가끔 쓰지만 강력한 내공을 지니고 있고, 의외로 이름이 잘 알려져있는 인물!    
 
 
병장 최정호 (2006/05/07 08:03:28)

왜 이리 학번이 높지?!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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