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宰 治,『人間失格 』 
 
 
 
 
나는 여태까지 두꺼운 책만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손에 잡히기도 힘들 정도로 묵직한 책이야말로, 읽다가 어느 순간 시뻘건 토사물을 쏟아낼 마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끝내 다 읽지 못하고 다소곳이 접어 두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토록 짧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만한 줄거리도 마땅찮은, 이런 시시한, 어쩌면 종이걸레 같은 쓰레기 소설 따위에서-그것도 사소설이라는 해괴망측한 장르의- 난데없이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을 일으키게 되다니요. 제길, 솔직한 말로, 별로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안 그래도 요새 책도 안 읽히고, 해서 이번 휴가 기간동안만큼은 좀 집중해서 책 좀 지근히 읽어보아야겠다고 했던 것인데, 하필 그게 이 “인간실격”이라는 무슨 진흙탕 속에서나 건져낸 듯한 책이었다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이게 좋다는데, 나는 이것이 왜 그리 좋은 줄을 잘 모르겠더라 이 말입니다. 이게 뭐가 좋은가. 왜 이게 예술작품이고, 문학작품인가. 어쩌면 그건 자가당착일테지만, -왜냐하면, 저는 솔직함이야말로 필요한 미덕이라고 평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읽는 내내 기분이, 이런 말 써도 된다면, 말이지만, 정말 더럽고 더러웠습니다. 네, 아무렴요. 이렇게 지저분한 책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꼭, 무언가 속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올 것만 같아서, 마치, 바람 통할 창문이라곤 하나 없는 갑갑한 골방 한 구석 갇혀 앉아서 숨만 푸르푹 내쉬고 있는, 그런 어질어질한 기분이라서 참으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나이가 무엇이 멋있고, 왜 ‘나의 사랑 다자이 오사무’라는 해괴망측한 말들이 항간에 떠도는지. 읽기 전엔 도대체가 모르겠었는데, 이제 읽고 나서보니, 그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냄새나는 겉멋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원래 그렇지가 않습니까? 치기어린 젊은이들은 고뇌하는 청춘에게서 이유없이 멋을 느끼는 법이니까요. 제임스 딘도 따지고 보면 그래서 인기를 누린 거고... 또, 하긴 여자들은 그런 걸 좀 좋아하니까. 그런 거에 그만 홀딱 홀려버리고 마니까... 좀 우스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요우조우, 아니 다자이 오사무가 고뇌하는 영혼이라니.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 고뇌라니요? ‘고뇌’라는 엄숙하고 어딘지 숙연한 데까지 있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하고 가져다 붙이기에는 이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그렇고 그런 비루한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마치 유다에게다 예수나 가지고 다닐 법한, 슈즈와 옷과, 그리고 그 휘황찬란한 선구자의 광채를 가져다 준 것과 같이, 그건 어울리지도,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나약한’이라는 형용사를 이 자에게 썼던 것 같은데, 이 용어가 주는 냉담하고, 부정적인 표현까지 다 이 요우조우, 아니 다자이 오사무에게는 제격으로 어울립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그가 말한 것은 정말 솔직한 고백이었었습니다. 애시당초 모든 ‘죄’는 죄다 이 미천한 남자에게 있었으니까요. ‘죄’의 앤터는 무엇인가. 그게 정말 ‘벌’일까요. 이런 걸 찾는 거는 이견이 참 분분하지만, 제 딴에 찾아낸 요우조우는 참 훌륭한 통찰가랄까요. 뭐, 그렇습니다. 구역질날 정도의 예리함이겠지만, 어쨌거나 예리함은 예리함이지요. 요우조우는 ‘죄’를 가지고 있되, ‘벌’을 가진 적은 없으니까요. 그는 ‘죄’ 때문에 힘들어했지, ‘벌’ 때문에 힘들어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힘들어하는 것 자체부터가 ‘벌’이라고 한다면 내사 할 말은 없지만, 세상 거의 모든 죄인이 다 맘 고생이 심한 걸 보면, 그 맘 고생이란 것도 ‘죄’에 애시당초 붙어 있는 거고, ‘벌’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생각해보십시오. 진짜 벌은 그런 게 아닙니다. ‘벌’을 받은 건 죄가 있는 요우조우가 아니라, 그 긴자의 여인, 그리고 요우코인가, 요시코인가 하는 어린 나이에 그 우직한 신뢰감 하나로 겁탈 당해버린 참 성실한 여자, 이런 여자야말로 ‘벌’을 받은 게 아닙니까. 그들은 ‘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여인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우조우가 ‘죄’와 ‘벌’이 엔터라고 했던 것이겠지만...

뭐, 에둘러 이야기하지 않고,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원래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것인가 본데, 남의 이야기는 흥얼흥얼 잘도 받아넘겨 어떻게 좀 듣는 척 할 수 있어도, 그게 자기 이야기가 되어버리면, 이내 못 참아 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편없는 청년의 이야기는, 꼭 나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책의 처음부터 지독히도 줄이 그어진 자국이, 지렁이가 살살 기어 다니는 것처럼 생생히 보이는 것일테지요. 나는 원래가 나 밖에 몰라서, 표현이 멋지다던가, 아, 이거 참 예술적인 표현이다, 이건 정말 명문장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책에다 줄을 긋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나한테 해당되는 부분이 있다 싶으면, 연필을 찾느라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다 애써서 겨우 찾아내고는, 종이 위에 무슨 자 대고 긋듯이 정성스레 줄을 죽죽 그어 제끼는 겁니다. 제길, 그런데 이번에 애석하게도 그만 삐뚤빼뚤하게 그어져 버렸네요. 이런 건 쓸데없는 이야기고... 하여간 연필로 거의 페인트칠 하듯이 책을 읽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한 절반을 조금 넘어가서는 눈에 띄게 줄 치는 일이 줄어들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굳이 줄을 그을 필요가 없어서?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줄을 긋느니, 차라리 아예 안 그어 버리는 게 낫거든요.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또 아니었습니다. 뭐 뻔한 일입니다만, 부글부글 올라오는 썩다 만 음식물들을 하나하나 의식하고 보니, 줄 긋는 거 하나하나도 정말 메스꺼울 지경이라 싫더라 이 말입니다. 이런, 나는, 이런 나약한 인간이 아닌데...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을 해서야 쓰나... 흐음, 이거 정말 살 맛 안나게 하는, 지독히도 음침한 책이로구나... 그런, 마냥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겁니다. 남이 쓴 내 일기를 본다는 것이 꼭 발가벗겨진 내 몸뚱아리를 읽히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하나 더 있다는 게, 동질감을 느끼기는커녕, 되려 기분이 더 잡쳐져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라이, 이런 악랄한 책이 있는가. 하여, 불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슬펐다는 건 아닙니다. 아, 물론 마지막 그 쿄우바시 바의 여자가 한 말,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요우는 아주 정직하고 영리하고, 술만 그리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눈물을 흘려주고 싶었지만-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라는 말의 울림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그건 그 때 뿐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 말은 요우조우가 한 말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마담이 한 말이고, 또 이걸 출판한 이름모를 남자가 인용한 겁니다. 정작 중요한 요우조우가 직접 쓴 부분은 어디에서도 슬픈 구석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구역질이 일고, 현기증이 인 건 분명한데, 그게 슬픔은 꼭 아니더란 말입니다. 눈물이란건 그런 때 흘리는 게 아니니까요. 이 요우조우라는 형편없는 사내의 수기는, 눈물의 아련함 같은, 그런 게 아니라, 그래요, 언젠가 TV에서 본 일이 있는데, 고양이 이마에다가 엄청나게 긴 못을 갖다 박은 것 같은 그런 섬뜩함, 음침함, 그런 개운치 못한 기분이 차라리 들었던 겁니다.

그래, 그래서 이 책이 끔찍했던 겁니다. 다 익숙한 이야기들이라서요. 그래서 슬픈 게 아니라, 섬뜩했습니다. 차라리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얼리즘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리얼리즘은 문학도, 문예도, 예술도 아니다. 그건 그래 참 두려운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어떤 작품을 두고 -그게 소설이든, 영화이든, 그림이든 간에- 오, 이것 참 리얼하다, 그래서 정말 멋진 작품인 걸,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세상 둘도 없이 무서울 겁니다. 리얼한 건 멋진 것이 아니라 끔찍한 겁니다. ‘리얼리즘’은 비극명사일까요, 희극명사일까요.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둘 다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비극명사이면서도, 희극명사. 그런 게 어디있는가 싶지만, 요우조우도 결국 내 말에는 동감할 테지요. 요우조우는 ‘폐인’이란 말이 코미 인가 보다, 하고 막 웃어댔지만, 찰리 채플린은 또 이런 말을 했으니까요. “클로즈업은 비극이지만, 롱샷은 희극입니다.” 그러니까, 리얼리즘도 폐인도 다, 희극명사이면서 비극명사인 겁니다. 그래서 이 리얼리즘이란 게 참기 힘든 모양입니다. 비극으로만 점철된 에드가 포의 소설도 아니고, 희극으로만 장식된 몰리에르의 극도 아닌, 내 사는 모양마냥 비극과 희극이 제 멋대로 혼재된 것이라, 그래서 구역질이 나버리고 마는 겁니다.

나나, 요우조우나,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연기’가 문제였던 겁니다. 강단이 없었던 탓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비주류’라고 스스로가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대개가 다 “주류의 비주류”들이고, “비주류의 비주류”로서 살아가는 사람은 또, 참 드문데, 것만큼 오장육부를 다 까집고 싶을 정도로 진을 빼는 인생도 따로 없다고 봅니다. 제 아무리 ‘비주류’라도 ‘주류’의 감정을 가지고 사는 개인들-호리키 말입니다-은 볼 때마다 자신감이 넘치고, 열정도 있고, 그래서 저들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팅팅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또 그러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 같은 놈이라고 이타심이 대단해 그 숭고한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똑같이 에고이스트인데, 남들하고 감정 상하는 게 못내 벌벌 떨려서, 다른 사람하고 갑자기 관계가 변해 버리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공포감을 가져다 주어서, 싸구려 연기를 이제나 저제나 어김없이 하는 것일 뿐이거든요. 그래 항상 보면, 나는 호리키 같은 인생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참 멋져 보이거든요. 어딘가 진취적이게도 보이고, 우로 보나 좌로 보나 참 거대한 인물 같기도 합니다.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도 있습니다. 아무리 불만족스러운 사건이 터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툭 털고 일어나 앉아, 남들 위에 서서 이래라저래라 떵떵거리며 호령도 한 번 하고요, 남이사 어떻게 생각하든 저 하나 믿고 휘황하고 멋들어지게 살아가면서 “여자한테 환장한 나라도 이런 싸구려 냄새나는 여자한테는”, 이런 말도 해 보고 말이에요. 그런 멋지고 멋진, 남들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가서, 아, 나는 정말 그래도 멋진 놈이고, 남보다는 다른 특별한 인생이고, 최소한 속물은 아니다, 이렇게 자기 위안도 삼고, 자기는 잘난 놈이라고 가끔 착각도 해보는 그런 “주류의 비주류”들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나나 요우조우마냥,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향방없는 가시덤불이 이리저리 엮인 탓에 별 수 없이 그 모양 그 꼴로 살고, ‘주류’로도 참 살고 싶은데, 그냥 평범하게 여자 하나나 데리고, 남들과 같은 영화도 누려보면서 그렇게도 살고 싶은데, 그런데요, 막상 그러자니, 또 용기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사실 그 여자라는 것도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라서, 게다가 그 영화라는 별천지가 꼭 자기 것이 될 까닭도 없는 탓에, 그런 모냥 어찌저찌해서 별 수 없이 ‘비주류’로 남겨져 버리고 마는, 그런 반푼어치 가치도 없는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연명(延命)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는, 허구헌날 그렇게 ‘연기’나 해대면서, 죽는 날까지 그렇게 남아 버리고 마는 거지요. 그러니까 맨날 인생이 제 자리에서 맴도는 것이고, 그런데도 화가가 된다니요. 위대한 화가. 하, 그것 참 우스운 이야기였습니다. ‘도깨비 그림’이 뭐 그에 대단한 것이라고, 그 엉터리 같은 암시를 덥썩 물어 제끼고 평생 가슴에 앉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세상도 아니고, 개인이 무서운, 약해빠진 이 사람이, 아니 요우조우가 말입니다. 큰 맘 먹은 게 고작해서..............

죽기를 잘한 겁니다. 아무렴요. 그렇게 사는 거는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거니까요. 언제 그 무서운 소의 꼬리가 날아 들어올지 모르는, 그런 불안함 속에 사느니 차라리 잘 선택한 겁니다. 진작, 긴자 여인과 같이 죽어버렸더면, 자기 창문에 비친 짐승같은 두 몸뚱아리에 몸서리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신뢰는 죄인가요, 순진한 신뢰는 죄의 원천인가요,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 하는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질문도 안 했을 것일테고, 요리키의 그 천진한 미소에 넘어가는 수치스러운 일 따위도 없었을 테지요. 결국 또 굽은 등이 거대한 소의 꼬리에 후려갈겨진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아, 아, 요우조우는 죽지 않았던가요. 죄송합니다. 저는 다자이 오사무를 말하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결국 요우조우도 죽은 거지요.

넋두리 같이 하는 말이지만, 웃는다는 거, 그거 참 의미심장한 겁니다. 맨날 그렇게 웃다가, 어느 날 정말로 웃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우스워서 우흐흐흐 하고 웃어버리는 순간 만큼 피하고 싶은 때도 없었습니다. 손에 힘이나 주고 웃는 게 아니라, 진짜로 푸악하고, 웃어버리는 일 말입니다. 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아니, 웃는 도리 밖에 없어서 웃는 거 말입니다. 결국 요우조우는, 아니 다자이 오사무는 그 지경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난,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됐습니다.

바보같이, 애시당초 인간도 아니었으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결국 트래가 코미이고, 코미가 트래가 되고 만 겁니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5-08 15:59) 

  
 
 
 
상병 조주현 (2006/04/22 02:25:09)

어디서 울어야 할 지 모르는 책이랬죠. 주민 누군가.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그러면서도 우울한 책이었습니다. 
깊게 공감했던 탓일까요. 삽시간에 다 읽은 뒤, 다시 펴보기 두려웠습니다. 저에겐    
 
 
일병 김의수 (2006/04/22 11:13:46)

아, 잊지못할 책...    
 
 
병장 김대현 (2006/04/22 12:37:15)

이 책에 대한 글을 여러번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 
고등학교때는 읽으면 안되는 소설 같고, 고등학교 시절 이후에는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은 아무래도 나랑은 인연이 없겠구나 싶어, 아직까지 안 읽고 버티고 있습니다.    
 
 
병장 이재성 (2006/04/22 22:52:35)

다시 한번.. 꼭 읽을 생각입니다.. 

책은 집에~    
 
 
 병장 노지훈 (2006/04/25 06:22:19)

저도 성훈님의 감상과 비슷했습니다. 끔찍한 책이었어요. 
왠지 성훈님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네요    
 
 
병장 정치훈 (2006/05/09 03:42:56)

언젠가 읽어봐야되는데...    
 
 
병장 김태경 (2006/05/09 14:45:43)

저 한문이 약해서 한문으로 나와있으면 읽어볼 생각도 안하기 때문에 이 글이 <다자이 오사무 작 인간실격>이라는 정직한 제목을 하고 있었음에도 한문 한번 일어볼 생각도 안하고 넘겨버렸나봐요. 
성훈님의 감상을 읽은 것 뿐인데, 어쩐지 인간실격을 다시 읽은듯한 기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