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앞으로의 삶. - 항해의 시작. 
 
 
 
 


서승환 교수님의 미시경제학 3판에서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보다.





영화 <아마게돈>을 참 좋아했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양키 센스 덕분에 진저리가 쳐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에어로스미스의 주제가가 좋았고 '외인구단' 형식의 주인공들이 유쾌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미(大尾). 리브 테일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브루스 윌리스는 딸의 애인을 지구로 돌려보내고 혹성에 홀로 남아 지구에 떨어지려는 그 돌덩어리을 직접 폭파시키며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죽기 바로 직전, 그러니깐 폭파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지금까지의 인생과 앞으로 딸과 - 방금 지구로 태워 딸에게 보낸 자기 부하인 - 딸의 남자친구가 살아갈 미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스쳐지나간다. 
오늘 오전, 무조건 C만 줘서 씨승환이라는 별명을 얻은 서승환 교수님의 미시경제학을 야간경계근무 후 마셔삼키는 보급용 육개장처럼 후루룩~ 넘겨보다가 나 또한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 15년 쯤 뒤의 내 모습이었을까, 그 어렴풋하지만 강렬한 인상은?

혹시라도 이 책이 있는 분들을 위해 참고 페이지. 제 19장 후생경제학 챕터, 그 중에서도 535p.

내가 그토록 경애하는 크루그먼의 사부님 되시는,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애로우(K. A. Arrow)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 부분에서 무언가 강력한,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거칠게 요약한 불가능성의 정리는,  바람직한 사회가 갖추어야 할 요소 네 가지 - 무제한적 정의역, 비독제성, 만장일치, 타당하지 않은 대안으로부터의 독립성 - 를 모두 만족시키는 사회후생함수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 후생경제학의 최고의 성과물이다. 그러니깐 좀 더 험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개인도 사회 선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결정집단이 될 수 없다는 모순 때문에 '개인들의 선호관계에 기초한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방법에 의하여 사회선호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게 무슨 말이냐면, "경제학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는 뜻이다. 고로, 경제학적 이상(理想)의 거세(去勢).

당연한 말이라고? 그게 그렇지가 않다. 완벽한 이상을 향해 뛰어가다가 그 도상에서 현실적인 불완전성이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원천적으로' 완벽한 이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틀리다.   원천봉쇄란 말이다.



물론 위의 사실은 전부터 암기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왈라스 균형부터 후생 경제학의 제 1,2정리를 습득하고 그 한계성을 지적하는 수순은 모든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정해진 코스다. 그 당시 이름만 들어본 애로우가 나타나자 수업중이었던 나는 포뮬러 경기의 중량 오버를 도장을 벗겨내는 기발한 방법으로 해결한 메르세데스-벤츠의 은빛 화살(silver arrow)이라는 별명을 떠올리며 수업을 듣긴 했지만, - 그래서 당당하게 C0를 받았지만 - 그 당시 이후 충분히 반복해서 외웠고  분명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왜? 왜 저 사실이 지금 이토록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신비스런 경험까지 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내가 지금까지 머리로만 공부했던 지식들을 내 인생의 길 위로 하나 둘씩 내려놓기 시작한 까닭으로 연유한 것이리라. 말로만 나불거렸던 한국 사회의 비판을 넘어서  이제는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잠정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재주껏 골몰하기 시작한 뒤로, 그 동안의 상상 속 경제학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큰일났다. 아내가 결혼한 것만큼 충격적이다. 내가 계획했던 경제학적 이상이 애초부터 글러먹은 진리였다니.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경제학적 처방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나를 관찰하고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에라이. 결국 안되는 거였잖아.' 라는 패배주의가 아닌, '시니컬한 내가 경제학적 이상을 짓밟아주는 거였는데, 애로우씨가 한 발 앞섰군.' 같은 냉소주의도 아닌. "애초부터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써서 이상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 현실적인 해답을 몸으로 뛰어 찾아야 겠군." 이라는 덤덤함이 찾아왔다.



난 경제 문제를 의학적 모델로 해결하고 싶었다. 건강한 신체를 규정한 뒤에, 그것에서부터 벗어난 이상 상태를 파악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의료 행위를, 현실적 거시경제학자가 되어 세상을 치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부터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대체 뭐가 건강한 경제냐?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건강한 경제, 제대로된 정책을 갖고 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질문이 나의 가슴을 꽉 틀어막은 것이다. 제대로된 경제 상태를 알아야 그에 맞춰 처방을 하든, 수술을 하든 할 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그런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단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거래(trade-off)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의 경제는 '조율'이었다.



강유원씨는 철학을 공부하는 태도를 말하면서 수영 연습에 빗대었다. 뭍에서 아무리 팔을 접는 방법과 발로 차는 연습을 많이 해도, 강물로 뛰어들어 직접 몸으로 익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물도 좀 먹고 허우적 거려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익히는 것이 진짜 수영을 배우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진짜 철학도 현실과 유리된 채 학문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히 현실과 접하며서 사유하야 함을 설파했다.

내가 했던 고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땅에서 완벽한 수영 폼을 익혀야 물에서 제대로 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결벽성의 신화'. 첫번째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뒤,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15년 뒤의 난, 웃고 있었다. 그제서야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게된 난.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찰나의 순간. 먼 훗날의 난  희미하고도 아스랗게 떠올랐지만, 분명 웃고 있었고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 청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과거는 이상의 그림자를 좇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자책했던 기억들 뿐이다. 난 천재가 아니니깐, 뛰어난 학자가 되기는 글렀으니깐. 이러한 자괴감은 현실로 뛰어들 용기조차 거두어갔었다. 

이제는 아니다. 지금 내가 웃을 수 있고, 15년 후에도 분명 웃게 되리라는 믿음은  '완벽한 이상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역설적으로 그 근거를 지탱한다. 과거의 고통이 '우리는 현실에서 우리가 거처할 공간을 부단히 부딪혀가며 마련해야 하고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는 사실로 승화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현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충격적 선고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랑의 밀어로 변하는 것이다. 경제학적 절대진리를 발견할 자신은 없지만, 현실의 진리를 향해 다가서는 노력은 내가 해낼 수 있는 몫이다.

현실로 뛰어들어갈 마음의 준비는 이제 다 된 셈이다.



미시경제학 속에서 본 나의 모습이 부디 상상 속의 허상이 아니길 바란다. 세파에 찌들어가기 시작할 나의 40대 초입이 푸른색 싱그러움을 잃지 않길 바란다. 시험은 미친 듯 공부해서 당연히 붙을 거고, 결국 승부는 결국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는 데서 갈릴 것이다. 아니,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날 시험에 합격시켜줄 것이다.

내가 경제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 모두, 나의 삶이 모두, 경제학 속에서 성취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난, 미시와 거시 각각 책 두어 권에 청춘을 바쳐 인생을 시작해보련다.

나의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 첫 기록을 이곳에 남긴다.

adieu.

 

  
 
 
 
병장 김희곤 (2006/04/13 19:21:21)

보운님의 항해의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제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이 되살아나네요. 저는 그곳에서 도피했습니다만(웃음) 

저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실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글을 기억하고 서로 마주보고 웃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드는군요. 제가 보운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만약 제 예감이 맞는다면 이 글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초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p.s D백남 선생님 수업도 개인적으로 괜찮더군요.(웃음) 물론 별명에 맞는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서도(파하하)    
 
 
병장 김대현 (2006/04/13 20:12:42)

보운님이 말씀하신 거기서부터가 진짜 실력이겠죠. 
부디, 휩쓸리지 말고 좋은 항로를 택하시길 기원합니다.    
 
 
상병 박종민 (2006/04/14 04:38:44)

아, 멋저요. 
역시 경제학을 전공하는 저는 당췌 지금까정 뭐하고 살았을까요. 자책. 
어쨌든, "위대한 항로"에 첫 발을 내 디디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보운씨. 현실로 뛰어들때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보운씨 이름 앞의 두 글자가 마찬가지인 저의 가슴을 짓누르네요. 아아. 도망도망[후다닥]    
 
 
상병 엄보운 (2006/04/14 07:29:54)

병장 김희곤/ C승환, D백남. 생각해보면 교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미시'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거 강력히 의문을 제기해봐야 합니다.) 백남봉 선생님은 거시가 좋다고 하던데, 실제로 어떤가요? 

병장 김대현/ 잠정적인 해답을 쓴다고 써봤는데, 아직도 곳곳에 패배주의가 붉어져 나오네요. 그래도 아직 젊으니깐, 분명 해결할 수 있을거라 믿어요. 대현님도 그렇죠? 

상병 박종민/ 이제 2주 뒤면.. 역사발전 4단계론에 입각하여- (형주씨가 말한 그 4단계면 곤란한데)    
 
 
 병장 노지훈 (2006/04/14 08:15:10)

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 경제학의 불가능성 정리. 모두 충격적이지만 어느정도 예감했던 것들.    
 
 
병장 김희곤 (2006/04/14 17:58:20)

보운/ 흐음.. 미시의 결함을 논하기 전에 저희의 대학생활(특히 학업)의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웃음) 뭐 그보다 더 좋은 봄볕과 함께하는 낮술을 얻었으니 후회하지는 않습니다만.. 낮술은 역시 탕수육에 고량주~! (그런데 너무 글 내용과 빗나가는 내용이네요. 웃음)    
 
 
병장 김형진 (2006/04/14 20:27:39)

기대됩니다. 앞으로의 항해가.